[으랏차차 '88세 청년'] 12. 다시 정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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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맨 오른쪽)과 악수하는 필자(맨 왼쪽). 박 대통령 옆은 당시 민주공화당 실세였던 김종필씨.

나는 5.16이 일어난 사실을 그날 오전 6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알았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올 것이 왔구나'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혹은 놀라고 혹은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니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탄식하는 이도 있었다. 군인들이 방송국을 점령해 '혁명공약'을 거듭 방송했다.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는 5.16이 일어나기 닷새 전, 61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에 '구국방략(救國方略)과 국회자폭(國會自暴)'이라는 제목의 시론을 썼다. 장면 정권의 무위무능한 정치를 통렬히 비난하는 글이었다. 나는 여기서 "뭉개는 듯한 정치를 이 이상 왕왕(往往)하다가는 국내정세로 보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우려되니 차라리 국민의 신임을 저버린 정치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정부나 국회에 대수술을 가하되 먼저 제5대 국회를 자폭해 버리고 단원제로 환원, 국회의원 수를 100명 미만으로 감축하자"는 등의 주장을 폈다.

이 글 때문인지 5.16이 나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와 5.16 주도세력이 연계됐거나 모종의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나는 이때까지 박정희라는 군인을 몰랐다. 사실은 이 글이 발표될 무렵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은 거사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장면 정부에는 박 소장 주도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가 계속 보고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장면 정부의 대응은 '무책'뿐이었다. 내 글은 이 쿠데타 세력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오해할 만도 했다.

내가 박정희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만난 때는 62년, 모교인 교토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유학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5.16 주체들이 국회를 해산하는 바람에 의원직을 잃은 나는 정치를 단념하고 학문의 길로 들어설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 의장이 나를 보자고 불렀다. 당시 박 의장은 서울 중구 장충동 외무장관 공관을 의장 공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박 의장은 국민의 고통을 주는 부패한 자유당 정권과 노선 투쟁을 벌이느라 국민을 외면한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새 정치를 위해 자신을 도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나의 심적 갈등은 컸다. 새 정치를 외면한 채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자멸해 버린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정치를 다시 할 수 있을 것인지 확신조차 없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정치 일선으로의 복귀를 결심했다. 비록 쿠데타라는 잘못된 방식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지만 오로지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으니 도와 달라는 박 의장의 말을 믿기로 했다. 박 의장은 민주공화당 창당과 대통령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63년 11월 26일 실시된 제6대 총선에서 나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구에 출마해 다시 한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정치인으로서 나의 삶은 5.16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5.16 이전의 정치인 민관식은 야당 의원이었거나, 여당 속에서 야당 역할을 해낸 반골이었다. 그러나 5.16 이후, 정확히 말해 63년 11월 선거에서 승리해 4선 의원이 되면서 나는 권력의 중심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할 기회를 얻었다. 이 변신의 과정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 나는 박 대통령을 한마디로 '새 역사를 창조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으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기름진 토양을 마련하고 떠났다. 나는 단언한다. 박정희 없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고.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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