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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JP와 군부|개혁주도세력 JP행적에 불만|63년 군정과정서 한때 거사세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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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80년 서울의 봄이 안개정국에 맴돌다 만 것은 집권세력이 구심점을 만들어내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권한은 넘겨받았지만 권력기반이 없었다. 바람직한 일은 집권권력의 구심점이 될 사람이 전면에 나서는 일이었다. 집권세력이 김종필을 공화당총재로 내세웠다면 그에게 과도정부를 맡기거나 아니면 최소한 공화당이 과도기간의 정치를 이끄는 실질적인 주체가 되어야했으나 그것이 어렵게 되어있었다.
유신체제의 7년 간 실질적인 권력은 행정부로 옮겨져 있었다. 공화당은 행정부에 이끌리는 유신체제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행정부의 상층부 사람들은 김종필과는 먼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다. 물론 그때도 공화당이나 정부는 같은 배를 타고있다는 동질성은 있었다. 그러나 JP와 행정부와의 거리 탓에 온전한 여당이 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박대통령을 잃은 행정부 역시 무력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때 권력을 받쳐주던 힘은 계엄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다. 대통령 보궐선거를 유신헌법에 따라 실시하기로 정부방침이 정해진 뒤 정 사령관은 군사령부를 순회하면서 특별훈시를 통해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다고 했다. 그러나 과도기간 중 군이 질서를 지켜 가는 힘의 실체였던 사실은 그도 인정했다.

<"부 출마 압력 없었다">
『권력의 중심이 무력해지니까 정부의 각 부처에서 계엄사령부의 눈치를 보는데 자기들 고유업무 까지도 이쪽의 눈치를 물어 처리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방장관에게 행정부가 과거의 타성을 버리고 소신대로 업무를 처리하도록 최 대행에게 건의해 달라고 했읍니다.』이렇듯 계엄당국은 행정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여당권의 중심이 된 김종필 총재는 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불출마를 결심한 배경에는 군부의 입김이 있었다는 말이 널리 떠돌았다.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씨는 이를 부인했다.
『나는 김종필 총재가 대통령 보궐선거에 나오는 것을 반대한 것은 그를 기피하거나 거부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때 시국대책 회의나 국무회의가 김 총재의 과도기 대통령추대를 결정했다면 거기에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각이 최 대행을 대통령 보선에 내세우기로 한데는 여러 가지 상황배려가 있었겠지요. 노 장관으로부터 이 같은 국무회의 결정을 통보 받고 나도 찬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11월15일 아침 시국대책 회의에 나갔더니 신현확 부총리·패자춘 내무·김치열 법무장관 등이 낭패한 얼굴로 얘기를 하고 있어요.
공화당에서 김 총재를 대통령 보궐선거에 내세우기로 결의한 것 때문이지요. 저도 김 총재보다는 최 대행이 과도장부를 맡는 것이 무난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뭏든 정부와 당이 대립하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사무실에 돌아와 평소부터 잘 아는 길전직 전 사무총장한테 전화를 해 물어봤지요. 길 의원은 의원총회는 그런 결의를 하고 김 총재는 16일 아침에 대통령 불출마를 발표할 것이라고 해요. 아마도 일종의 정치적 쇼로 김 총재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불출마공약을 해놓고 당의 결의를 내세워 후보등록을 하면 큰일나요. 라고 했더니 길 의원은 그 점 안심하라고 하더군요. 압력이라면 이 정도의 일 뿐이 었읍니다.』
김 총재가 군의 입김때문에 과도기 대통령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 총재가 여당권을 통합해 나가는데 있어 힘의 실체였던 군부와의 거리가 장애가 된 것은 사실이다. 김 총재는 5·16주체로 군사통치의 길을 열었음에도 군과는 멀어져갔다.
김 총재 측근은 정 계엄사령관이 「군의 정치 불간여」라는 확약이 있었고 김씨는 상당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전혀 예측치 못한 세력에 의해 지지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일 따름이라고 풀이한다. 이들은 군 출신인 김씨에게 군내지지기반이 없다는 말은 얘기도 안 된다고도 하고있다.
그러나 이런 추론은 한낱 상식적인 가정일 뿐이다. 10· 26 이후12·12사태를 거치며 사태를 장악한 것은 5·16주체로서 당대를 주름잡던 김종필씨의 행적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당시 청년장교들, 즉 오늘의 개혁주도 인사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위 63년의 「거사세」 이 어떤 것인지는 앞으로 좀더 확실해질 것이지만 5공화국주역들의 김씨에 대한 강한 거부의지의 배경을 알기에는 충분한 듯싶다.
1963년7월5일 밤-.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을 수행하고 경남수해지역을 시찰 중이던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은 서울본부로부터 극비긴급연락을 받았다.
육사 생 일부와 중앙정보부 및 방첩대 일부요원이 합세, 공화당과 자민당의 합작을 반대하는 최고위원과 공화당요인 4O여 명을 제거하려한다는 것. D데이 H아워는 7월6일 새벽2시라고 했다.

<4대 의혹 등에 비판적>
급보에 접한 김 부장은 이 같은 사실을 진해대통령별장에 투숙중인 박 의장에게 보고한 뒤 급거 상경했다.
곧이어 유사한 정보를 패자춘 치안국정보과장·정우식 서울시정국장으로부터 보고 받은 박 의장도 각처에 병력단속을 하달한 뒤 상경했다.
귀경 도중의 김 부장은 바로 『그것이었구나』고 알아챌 수 있었다. 지피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김종필씨의 4대의혹사건과 공화당문제를 들고 와 두 차례나 「문제해결」을 역설하던 젊은 장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냥 돌아가 보라고 했었는데….
육사5기생 대표로 5·16에 참여했던 김 부장은 8기의 리더인 김종필과는 늘 상 대립해왔고 특히 민정이양의 단계에서는 김종필의 공화당을 반대하며 자민당창당을 주선했다.
물론 공화·자민 양당 모두 박 의장의 승인아래 출발됐었다. 공화당이 김종필의 독주라는 최고위원들의 반발 속에 사전조직 등으로 물의가 일자 박 의장은 병여권을 망라한 김 부장의 자민당에 큰 관심을 갖기도 했었으나 이즈음 박 의장은 공화당을 업기로 결심한바 있었다.
또 방첩부대장경 군·검·경합동 수사본부장으로서 김종필의 중앙정보 부와 반복했던 김재춘은 김종필의 후임 정보부장으로 재직하고있었다.
두 김씨의 대립은 이체 어쩔 수 없이 표면화 된 것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박 의장은 이 사건을 중시, 김 부장에게 조사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일면 당사자라 할 수 있는 김재춘 부장의 중앙정보 부는 수사주체가 될 수 없다는 김희덕 최고회의재경위원장의 건의에 따라 정승화 방첩대장에게 방첩부대가 나서 수사를 하도록 변경했다.
정승화 준장은 김재춘 부장과는 육사5기 동기생으로서 김 부장 후임 방첩부 대장이였다.
김재춘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정 장군을 즉시 찾아갔지요. 정 장군에게 젊은 장교들의 불만에 일리가 있다. 그렇잖아도 4대 의혹사건으로 뒤숭숭한데 이것을 건드려 무슨 이득이 있는가. 얘기가 커져봐야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잘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강조했읍니다. 젊은 장교 대표들이 이집트의 「나기브」-「낫셀」얘기도 했읍니다만 두어 차례 다독거려 돌려보낸 적이 있으니까요. 당시 11기생 동기회장은 내가 방첩부대장으로 있을 때 방첩부대에 근무한 적이 있어 잘 알지요.』
이 사건과 관련됐다고 당시 수사자료가 밝히고 있는 한 당사자는 『사실은 별게 아닌데 전달과정에서 확대됐을 뿐』이라고 하고 있지만 김씨는 『상당히 심각한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김씨는 당시 세칭 4대의혹사건 등으로 민심이 동요되던 시기에▲박림항 (당시건설부장관·육군중장)등14명▲김동하(최고위원·예비역해병소장) 박창암 (혁검부장) 등 6명▲이종환 (공군중령) 등 5명이 포함된 「군일부 쿠데타음모사건」이 발생하기도 하는 등 간단한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했다.
어쨌든 정승화 방첩대장은 3일간의 조사 끝에 「거사설에 대한진상」이라는 보고서를 작성, 박 의장에게 직보했다.
당시의 수사보고서를 중심으로 사건전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초 입수된 정보내용은▲육사생 일부와 CIA (정보부)·CIC (방첩대) 일부인원이 합세하여 공화당과 자민당의 합작을 반대하는 최고위원 및 공화당 요인 4O여명을 제거하며▲63년 7월6일 거사한다는 것으로 이 같은 사실을 농협기획관이었던 김용건대령이 입수, 중앙정보 부 감찰 실장 전재덕 대령에게 제보했으나 정보부 측에서 반응이 없는 채 D데이H아워가 임박해지자 김대령은 최고회의에 다시 제보하였다는 것.

<"시국성토에 그쳤다.">
수사자료는 C모 대위도 알고있었으며 전 정보부장 비서였던 K모 대위가 발설한 것을 6월29일 김용건 대령이 전해들은 것으로 밝히고 있다.
김 대령은 이를 전 감찰실장에게 7월1일 제보했다가 7월5일 길재호 최고위원 (후일 공화당사무총장)에게 알렸다.
같은 내용의 정보는 공화당의 김우경씨 (후일 공화당의원)도 입수해 농협감독관으로 나와있던 김기봉 대령에게 7월5일 알렸다.
김우경은 이 같은 내용을 김룡태(후일 공화당원내총무) 와 윤영엽으로부터 입수했는데 윤은 김룡태 외에 김우경에게도 알렸었다.
김룡태가 7월4일 밤9시 김우경에게 밝힌 내용은 ▲육사11,12기생 주동 하에 정부파견군인과 공화당간부를 제거한다 ▲D데이 H아워는 63년7월6일 새벽2시이며 ▲제거대상은 4O명이니▲오늘부터 피신하라는 것.
김룡태가 김우경을 방문했을 때 김동환 (후일 공화당사무총장) 신윤창(후일 공화당의원) 오학진 (동) 정치갑 (5·16주체)등이 있었다고 했다.
윤영엽이 4일밤11시 김우경에게 말한 내용은▲육사출신장교들의 동향을 3일전에 알고 있었으나 이틀간 고민했었고▲대부분의 공기가 반대여서 성사가 어려우며▲결사적으로 막을 것이지만 주동자는 확실치 않다는 것 등.
윤은 7월2일의 동기회에 참석했었으며 63년3월 김룡태,62년12월 김우경의 집을 각각 방문하는 등 이미 두 김씨와 연결이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수사자료는 전 정보부장비서 K대위가 앞서의 언동을 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김우경은 3일간 접촉을 못해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한편 보고서는 「육사출신 장교동향」에서 7월2일 서울예식장에서1백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를 열어▲3군 사관생도 체육대회 급식비 보조건과▲육사출신 장교진급을 위한 참모연구서 작성 건을 토의했으며 이어 7월3일 같은 장소에서 모인 12명의 운영위원들은 급식비 보조건과 임원회 활동보고 및 감사 ▲육사 내 기념탑 보수 건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표면활동 외에 2일 밤10시부터 10시 40분까지 11기 동기 회장 집에 모인 대위 4명은 ▲정부 파견군인 일부의 부패 ▲육사출신 장교진급의 불공정 ▲증권파동판결 ▲정부 식량정책 실패 등을 논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불만토론과 행동의 구체화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것으로 매듭짓고 있는데 그 반증으로 그 당사자들이 ▲시국이 불안하니 경거망동은 하자말자 ▲동창회의 명의로 건의는 불가하며 개별적으로 S소령을 통해 건의토록 하자고 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규 육사 선두인 11기생들의 진급은 일시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20만 명이 1차로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됐다. 당시 동기회장 이였던 차씨는 『동기회장인 자신이 1차에서 누락돼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다행스러웠다.』는 요지의 말을 후에 한바 있다.)
이처럼 유야뮤야로 끝난 「거사설」에 대해 현재 정계중진이 된 차씨는 그 후 별일 아느라고 했는데 11기 출신 한 고관도 『사실 별게 아니었다. 당시 당국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이를 성토하느라 열을 올린 것은 맞는 얘기자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려던 것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5·16금가니 덮어두자>
그는 세칭 윤필진 사건 때도 이러니 저러니 하며 말들이 많았지만 계획이라 할 아무것도 없었으며 영문도 모른 채 전임되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윤 장군 개인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아는 게 없으며 말하는 게 한입건너 전해지다 보면 이상하게 와전되는 것 아니냐며 반문했다.
당사자들의 이런 설명과는 달리 또 다른 당사자라 할 김재춘 당시 정보부장은 이 사건이 매우 심각했노라고 주장한다.
『사흘만에 방첩대의 수사보고서를 받은 박 의장이 나를 부르시더군요. 그래서 장군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하면서 그들의 불만에 일리가 있고 문제를 확산시키면 5·16자체에 금이 가니 없던 일로 묻어두자고 했죠. 그들을 구속하거나 하면 재판정에서 가만히 있겠느냐고도 했습니다. 김재덕 최고회의 재경위원장 같은 이는 벌써 진언을 해놓았나 봅니다만-.
내가 「절대」를 되풀이하며 고집을 부리니 관련장교 10명을 가리키며 그러면 이들을 예편시키라고 지시하더군요. 그래 정 그러시다면 나를 면직시킨 다음 하십시오. 안됩니다 라고 했지요. 그 직후 정보부장 사표를 내던지고 안가로 돌아와 드러누웠습니다.
정에 증권파동이 논의되던 바로 그 장소인데 사흘 후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합디다. 갔더니 정부부장 후임에 장동진(후일 국회부의장)이 어떠냐고 물으세요.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다시 부르시더니 아무래도 김우경이 적임일 것 같다고 해요. 그래 「안됩니다. 후회하실 겁니다.」라며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도 그대로 되더군요.』
김씨는 10·26사건이 일어난 뒤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동기생이던 정승화 대장에게 군의 인맥·성향 등을 알려주기 위해 몇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안됐노라고 했다.
김씨는 청년장교시절의 이들 동행으로 미뤄 이들이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것임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며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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