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3만 일본서 휴가” 이 말에 ‘워커힐’ 밀어붙인 JP (35)

  • 카드 발행 일시2023.10.04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를 내 관심에도 추가해드렸어요.

내가 초대 중앙정보부장(1961년 5월 20일~63년 1월 7일)으로 공화당 창당 작업을 진행하던 시기에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 불거졌다. 워커힐 호텔과 증권 파동, 새나라자동차, 빠찡꼬 등 네 가지 문제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거액의 돈을 챙겼다는 주장이다. 이들 의혹은 비밀 창당 작업을 둘러싸고 번지는 루머들 때문에 실체 이상으로 증폭됐다. 특히 최고회의 내부에 이 문제를 모두 내 책임으로 뒤집어씌워 나를 쫓아내려는 세력들이 의혹을 부채질했다. 겉은 권력비리 사건처럼 포장됐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반(反)JP 권력투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워커힐 호텔은 내가 직접 지휘한 국가적 작품으로 지금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증권 파동과 새나라자동차는 정보부 요원이 간여했다. 증권 파동에선 정치자금 문제가 발생했으나 새나라자동차에선 그런 문제가 없었다. 빠찡꼬는 5·16 이전 민주당 정권에서 발생한 일로 처음부터 나나 중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헛소문이었다. 육사 5기 출신인 김재춘 3대 중정부장(63년 2월 21일~7월 11일)은 취임과 동시에 4대 의혹사건을 집중 수사해 정보부 요원 등 15명을 구속했으나 이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워커힐 사건 의혹은 호텔 건설 과정에서 건축자재를 면세(免稅)로 들여와 수십억원을 빼내 정당을 만드는 데 썼다는 주장이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워커힐은 62년 3월 초 착공, 총 공사비 220만 달러를 투입해 10개월 만인 12월에 완공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차산 기슭 19만 평 터에 26개 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지금은 지상 15층 높이의 호텔 등이 들어섰지만 당시엔 가장 높은 건물이 4층이었다.

비용과 공기(工期)를 줄이기 위해 나는 육군 공병대와 군 형무소에 있는 죄수들을 동원하고,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트럭도 지원받았다. 이 과정에서 적절한 행정 절차를 밟지 못한 부분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돈을 빼 썼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시 서울공대 교수와 외국 건축 전문가들은 워커힐 공사 비용을 800만~1000만 달러로 계산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통상 들어가는 비용의 5분의 1 정도만 쓴 것이다.

6·25전쟁 때 미 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왼쪽) 예비역 대장이 1962년 7월 14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 공사 현장을 둘러본 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나란히 앉아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당시 미국 실업인단 대표로 방한, 워커힐 호텔 시설 중 자신의 이름을 딴 제임스 하우스 건설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진 워커힐 30년사

6·25전쟁 때 미 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왼쪽) 예비역 대장이 1962년 7월 14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 공사 현장을 둘러본 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나란히 앉아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당시 미국 실업인단 대표로 방한, 워커힐 호텔 시설 중 자신의 이름을 딴 제임스 하우스 건설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진 워커힐 30년사

내가 워커힐 건설에 직접 나서 심혈을 기울인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