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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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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필 기자

유해를 옮겨오지 못한 가족 5명의 넋을 모신 ‘오충비’

“덕수 이씨 중 친일했다는 사람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어요.” 취재에 동행한 종중인 이종흔(73·자연보호중앙연맹 명예총재,서울대 명예교수)씨는 어려서부터 조부·부친 등으로부터 “왜적에게서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 장군이 너의 조상”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고 한다. 그는 “친일파가 드물고 항일운동가가 많은 게 그 덕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규풍씨 가족은 4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나섰다. 규풍을 중심으로 어머니와 그의 부인, 남동생과 제수, 아들과 손자 등 집안 전체가 맹렬한 항일전사였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만주 및 러시아에서 항일운동 중 순국했다. 규풍의 손자, 즉 이민호의 아들 3형제(은영·하영·순영)는 러시아·중국에서 독립운동 중 실종됐다. 한 집안이 항일운동 중 말 그대로 풍비박산난 것이다.

규풍·규갑 형제는 당초 아산 인주면 공세리에 살았으나 19세기 말 탕정면 매주리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세리와 맞닿은 영인면 월선리2구. 테마관광농원 ‘피나클랜드’옆에 덕수 이씨 선산이 있다. 그곳에 이규갑 부부와 그의 부친 이도희(한말 군수 역임)씨 묘가 있다. 그리고 이규갑씨가 생전에 세운 오충비(五忠碑,1968년)가 서 있다. 해외에 묻혔거나 묘소를 찾을 수 없는 형 이규풍 부부, 어머니 박안라, 부인 이애라(앨라), 조카 이민호를 기리기 위함이다.

이종흔씨는 “독립운동이 나라와 가문엔 큰 영광을 돌렸지만 일가에는 참혹한 기억”이라고 회고했다.

이규풍(1877~1931) ※생몰년도 ‘충국순의비’ 기록 근거

1963년 김좌진 장군 추모식에서 이규갑(왼쪽 둘째)씨가 김두한(왼쪽)과 기념촬영했다. 김두한의 일등참모였던 김영태(오른쪽) 모습이 보인다. [중앙포토]

항일운동 초기 안중근(1879~1910) 의사와 가깝게 지냈다. 1908년 안 의사(당시 대한의군 참모중장)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블라디보스톡)에서 국내의 회령과 경원 등지로 침투해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듬해 안 의사와 함께 손가락을 자르며 항일의지를 다짐한 단지(斷指)동맹을 결성했다. 안 의사는 그해 10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규풍은 17세 때 갑술과에 급제, 궁성 내직에 근무했다. 1905년 을사조약후 고종의 밀명으로 러시아로 넘어가 항일의병을 일으킨다. 당시 고종은 그에게 ‘창의대장’을 제수한다. ‘이규풍 장군’으로 불리게 된 연유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동지들과 최초로 합방반대선언서를 발표하고 항일결사대를 조직했다. 러시아 당국에 적발돼 이르쿠츠크로 유배 가기도 했다.

3·1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 관련해 국내로 들어온다.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됐다. 그후 임정 내분이 일자 26년부터 고려혁명당에 가입해 만주에서 좌우합작 유일당운동에 참여한다. 고려혁명당은 정의부의 양기탁, 천도교혁신파·형평사(신분평등 주장)가 주축이었다. 그후 다시 연해주로 돌아가 죽음을 맞는다.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의 부인 오세라(1875~1939)는 경기도 안성 태생으로 22년 아들 민호와 함께 연해주로 넘어가 남편 규풍의 독립운동을 돕는다. 10년 후 남편이 숨지자 베이징으로 옮겨 항일운동을 계속한다.

어머니 박안라(1853~1922)는 1907년 정미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토적(討敵)상소를 올리고 규풍·규갑 형제로 하여금 의병에 참여케 한다. 3년 후 큰 아들 이규풍이 부모 봉양을 위해 고향에 돌아오자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도 국내외서 구국운동을 펴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사망한다.

이규갑(1888~1970)

11세 터울의 형 규풍을 따라 독립운동전선에 나선다. 어머니 박안라의 지시로 1907년(19세) 인근 홍성에서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가해 식량운반일을 맡았다. 한일합방후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도 한다. 3·1운동 후 국내 잠입한 형과 함께 31세에 평정관에 선출된다. 임정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상해한인청년단 서무부장 등을 역임한다. 이후 형이 있는 만주·러시아 국경지역으로 가 가족들과 함께 항일활동을 한다. 27년 국내에 들어와 민족유일당 운동일환으로 조직된 신간회에서 안재홍(경기 평택 출생)·조병옥(천안 병천)·홍명희(충북 괴산)등과 교우한다. 2년 후 신간회 경동지회 집행위원장을 맡는다. 신간회 해체후 은둔하다 일제 말기 최초 여성변호사인 이태영 등과 함께 일본기독교 반대 운동을 전개한다.

해방 후 여운형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다 좌우갈등이 심해지자 고향으로 내려온다. 50년(62세) 아산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청산리대첩 영웅 김좌진(1889~1930) 장군과는 친구 사이로 그의 아들 김두한과도 가까웠다. 이종흔씨는 “공산주의자 친구가 있던 김두한을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만든 건 이규갑씨였다”고 말했다. 63년 박정희 정권 때 민주공화당 고문을 맡기도 했다. 현재 월선리 가족 묘역은 그가 64년부터 몇년에 걸쳐 조성한 곳이다.

그의 부인 이애라(1894~1922)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교사 재직중 결혼한다. 공주 영명학교에서 근무하다 평양 정의여학교로 전근가 근무 중 3·1운동을 맞는다. 서울에서 남편의 임정수립 준비 활동을 도왔다. 그때 어린 자녀를 업고 다녔는데 경찰의 검문에 달아나면서 아기를 떨어뜨렸는데 화가 난 일본 경찰이 아기를 내동이쳐 숨졌다고 한다. 애국부인회에 참가해 임정지원 모금활동을 폈다. 22년 임정 밀서를 갖고 국내로 잠입하다 체포돼 고문 끝 순국한다. 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이민호(1895~1944)

이규풍의 아들로 경성의전을 졸업한 의사다. 3·1운동때(24세) 충청·전라도를 돌며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3년 옥고를 치렀다. 출소후 어머니(오세라), 부인(권마리아, 1893~1981), 아들 등 가족을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한다. 25, 26년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있던 신민부에서 활동한다. 부친 사망 후 베이징으로 옮겨가 지하활동을 한다. 49세때 체포돼 고문을 받던 중 치료차 가석방됐으나 병원에서 순국한다. 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아들 운영·하영·순영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실종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길영(1928~2007) ※대전국립묘지 안장

이민호씨와 정수정씨 소생(권마리아 비문 참조)으로 부친 사망 후 17세 때인 45년 3월 한국광복군에 입대,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 제1구 대원으로 훈련을 받았다. 미군과의 연합할동을 위해 통역병으로 동남아로 출동을 준비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해방후 부산에서 거주. 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그외 덕수 이씨 독립운동가

이준영(1879~1907)

탕정면 용두리 출신. 대한제국군 육군보병학교 졸업하고 1901년 참위로 진위대 배속돼 강화도 근무. 1907년 4월 시위보병으로 전속돼 근무한던 중 같은 해 8월 1일 일제 강압에 의한 군대해산령을 접함. 이에 분개한 박승환 1대대장의 자결로 이날 해산 반대 봉기에 가담. 첫날 전투에서 28세 나이로 순국. 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그의 부친 이민학은 아들 순국 소식에 동지를 규합해 예산 지역에서 의병 활동, 1909년 체포돼 총살 당함.

이일영(1899~1950)

독립운동 당시‘붕해’란 이름 사용. 신창면 황산리 출신. 3·1운동 참가 후 천안에서 체포됐다 탈출,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7기생으로 졸업. 20년 청산리 전투 참전. 러시아 자유시로 갔다가 러시아군인에 독립군이 몰살 당하는 21년 자유시사변을 겪고 만주로 돌아옴. 낙양군관학교 졸업. 23년 이범석 등과 고려혁명군 참여. 25년 김좌진 장군의 신민부에서 경비대장. 부정부주의연맹이 신민부와 합작해 만든 재만한족총연합회 군사위원장 역임. 30년 김좌진이 피살되자 임시치안대 조직해 배후자인 김봉환 처단. 44년 한국광복군 참모장. 해방 후 귀국 백범 주도의 한국독립당 감찰위원회 사찰부장. 정부수립후 제주도 병사구사령관 지내고 방위군옹진지단 고문단장 재직 중 6·25 터져 전사. 68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이민화(1898~1923)

염치읍 방현리 출신. 17년 간도 망명, 대종교 입교 후 무장투쟁단체인 서로군정서 가입. 19년 김좌진 등 도와 북로군정서 조직 참여. 중대장으로 청산리전투 참전. 자유시참변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 러·중 국경에서 전사. 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참조=『아산인물록』(온양문화원, 2009년)

충국순의비(忠國殉義碑)

영인면 월선리2구 이규갑씨 가족 묘역 입구에 서 있다. 1964년 이규갑씨가 건비위원회를 만들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건비위원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이갑성(공화당 창당위원·전 광복회장), 윤치영(전 공화당 의장), 임영신(전 공화당 총재고문) 등이 포함됐다. 시인 월탄 박종화가 글이 지었다.

비문 3개 면에 걸쳐 박안라, ‘이규풍 장군’(비문 표현), 오세라, 이애라, 이민호 등에 5인의 항일활약상이 적혀있다. 비문 말미에 “우리는 애국투사 리규갑씨의 가족이 이같이 겨레와 국가를 위하여 그 목숨과 넋을 초개처럼 바친 5위의 거룩한 얼을 보았다. 이 거룩한 얼은 우리의 천만대 자손에게 길이 길이 전하리라”라고 적었다.

이종흔씨에 따르면 이 비는 원래 월선리 입구 큰 길가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과 함께 이 곳으로 옮겼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비가 큰 길가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데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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