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 약속 때마다 약해진 JP|"유신 때도 소아에 집착" 혹평도|17면에서 계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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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김 부장은 청구동 수사도 차 실장이 부추겼다고 JP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김씨의 증언.
『내가 풀러나고 엿새후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김 부장이 코냑 한 병을 들고 청구동엘 찾아왔어요. 김 의장한테 미안하기도 하니까 일부러 온 거죠.
김 부장은「사실 이번 일은 정보부가 하려고 해서 한게 아니다. 근혜양과 가까운 최모라는 목사가 JP가 78년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차 실장한테 여러 차례 했고 차 실장도 이를 그대로 박 대통령한테 보고한거다. 우리는 박 대통령이 지시해 수사한 것 뿐」이라고 해명하더라고요. 김 부장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몰라도 그때 청와대주변의 분위기로 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예요.』
JP는 이 일을 겪으면서 분노와 허탈감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김씨가 풀려나기 전날 밤 JP는 직접 중정에 전화를 걸어 김씨에게『당하진 않았어. 몸은 괜찮아』라고 묻고는『이놈의 ××들』이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JP는 다음날 자정을 넘어서까지 부인과 함께 자지 않고 기다리다가 풀려 나온 김씨를 얼싸안고『내가 당할걸 당신이 대신 당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김씨는『JP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며『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김 의장 내외가 그렇게 처량해 김씨는 62년 28세 때 공화당 창당을 계기로 JP와 인연을 맺은 이래 지금까지 JP의「친동생 같은 보좌역」으로 지내왔다. 김씨는 79년3월 9대 유정회 임기가 끝난 후『정치에 염증을 느낀다』며 대학으로 돌아와 89년 명지대 부총장을 지내고 지금 정보산업대학원장으로 있다. 지나간 역사에 대한 증언요청에 JP는『아직 말할 시기가 아니다』며 입을 닫고있지만 김씨는『김 의장(JP)이 하고싶은 말을 내가 대신 해보겠다』며 증언에 응했다.『내가 그를 모셨다고 해서 그를 미화하지는 않겠다』는 전제를 달면서….
JP사람들은 JP의 수난과 핍박만을 힘주어 말하고 있으나 JP의 계산을 나무라는 시선도 만만치 않다.『3선 개헌 때 JP는 동지들을 버렸다』는 대목도 그렇지만『유신 때도 소아에 집착해 대의명분에 눈감아 버렸다』는 혹평도 그것이다.
다선의 중진 K씨는『지금 JP는 유신이 시대의 불가피한 결단이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때도 그런 생각이었는지 묻고 싶다』며 이렇게 증언했다.
『JP가 총리를 지낸 71년6월부터 75년1월까지 4년 6개월 중 유신이후 3년여의 세월에 대해 JP는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3선 개헌 초기 장기집권에 반대했던 명분이라면72년10월 유신 때 사표를 던지고 나왔어야 했지요. 물론 세월이 흘러 박 대통령이 내세우는 명분에 마음이 젖어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변화에 대한 설명이 어쩐지 미지근해요.
JP가 왜 그랬을까요. 나는 그가 대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믿어요. 한번 봅시다.
68∼69년 정계은퇴 때도 그래요. 박 대통령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칼을 뽑았으면 뚝심 있게 버텨야지요.「다음은 임자차례야」라는 말 한마디에 돌아서지 않았습니까. JP는 박 대통령과의 의리도 중요했다고 하지만 정치 세계에서 의리는 명분이 있어야지요.』
K씨는 후계를 향한 JP의 욕구를 여러 대목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71년6월 총리가 될 때도 JP는 박 대통령한테 후계자 언질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물먹고 유신이 벌어지는 지도 모르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 자리를 지킨 것 은 이 꿈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국회의장 물거품>
JP 사연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다는 또 다른 K씨도 후계약속 앞에 한없이 약했던 JP를 기억하고 있다.
『78년7월께에도 JP는「신물나서 정치 않겠다」며 서산목장에 내려가 있었어요. 그 해 12월에 예정된 10대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겠다면서요.
그 이야기를 들은 박 대통령이「종필이는 도대체 어디 가서 뭘 하고 있어」라고 역정을 냈다는 거예요. 그래서 길전식 공화당사무총장이 JP를 찾아「각하가 화 나셨다」며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다죠.
JP를 불러다놓고 박대통령은「임자 왜 그만두겠다는 거야. 다른 말 말고 서울이든 부여나 서산이든 임자 좋은 데로 출마해. 그것도 싫으면 유정회 시켜줄께」라고 달랬다는 거죠.
박 대통령은 그러면서 JP에게 선거 끝나고 국회의장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JP는 또 한번 박 대통령한테 지고 말았죠. 웬걸 막상 국회의장은 누가 됐습니까. 차 실장이 밀어서 백두진씨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들이 눈치채지 못한 더 깊숙한 사연이 JP 가슴속에 숨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더군다나 그는 지금 모든 것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않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의 궤적을 보면 그는 결단·투쟁보다 적응·순치 쪽을 선택했던 것이 분명한 듯 하다. 특히 JP는 핍박받는 라이벌보다 국무총리라는「화려한 문선」을 즐겼다는 냄새도 짙다.『초대 중정부장 빼놓고는 총리시절이 JP의 전성기였다』는 세평도 같은 줄거리의 이야기다.
JP총리를 지켜보았던 Q씨의 평가.

<총리에 안주 비판>
『사실 화려했다고 봐야죠. 혁명지도자였던 처삼촌이 대통령이고 혁명 브레인이었던 조카사위가 재상이었으니…. 이른바 P-K라인이 구축된 셈이었죠.
곁으로 내비친 박 대통령의 신임도 꽤 괜찮았어요. 박 대통령은 가까운 측근들에게「종필이 그 친구 일 잘해. 능력 있어」라는 칭찬을 종종 하곤 했어요. 대통령을 대신해 외국 국가 원수를 만나는 특사도 JP가 도맡다시피 했지 않습니까.
JP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요. 지난날의 설움은 잊고 나름대로 힘을 키워보려고 애썼고….
내가 알기론 JP는 정중동의 작전을 구사했던 것 같아요. 대통령이 신경 안 쓰도록 군이나 정보부·경찰 같은 곳엔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서 국회 쪽으로 열심히 움직였죠.』
노골적인 비판론가들은 Q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JP는 대권 전 단계인 총리직에 푹 빠져 있었다』는 일계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JP가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는 자기 몸을 부딪쳐 싸워나가는 야당체질이 아니에요. 타협하고 순응하는 여당체질이지요. 그러니 84년에도 민추협을 외면하고 미국으로 갔지요. 여권인사에게 왜 야당체질을 요구하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혁명했던 JP는 무엇입니까. 구질서를 깨뜨리고 신질서를 만들어 보겠다고 한 것 아닙니까.
JP가 만약 유신을 거부하고 박 대통령의 유신에서 뛰쳐나왔더라면 10·26이후 그의 목소리는 훨씬 클 수 있었을 겁니다. 모든게 가설이지만 말입니다.』
86년 정치무대에 컴백한 JP가 유신비판에 대해 보여준 반응은『나는 유신과 관련이 있으며 유신은 국가발전을 위해 불가피했던 것』이라는 내용이다.『유신 잔당이 왜 또 나서느냐』는 혹독한 공세에도 JP는『나는 잔당이 아니라 유신본당』이라고 정면으로 맞서고있다.
김진봉씨는 이 대목을 놓고『책임을 고인(박대통령)에게 미루지 않고 자신이 떠맡은 JP의 용기』라고 그를 옹호하고 있다. 그는『세상에는 투사가 할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할 일도 있는 것』이라고 압축해 말했다. <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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