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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운 곳 긁어주는 금융? 명동 가서 물어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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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 20면

을지로 명동 입구의 한국외환은행 본점. 과거 일제시대 때 이 자리에는 동양척식 주식회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1908년 일제가 자본금 1000만원으로 설립했던 이 회사는 식민지 조선 경제를 수탈하는 첨병 노릇을 했다. 명동 메트로호텔 맞은편 SC제일은행 지점이 입점해 있는 명동 아르누보센텀 빌딩은 옛 증권거래소 자리에 서 있다. 일제 때인 22년 경성주식현물시장으로 건립됐던 명동 거래소 건물은 해방 후 56년 ‘대한증권거래소’로 새 간판을 내걸었다. 79년 거래소가 여의도로 이전할 때까지 명동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월스트리트’였다. 아쉽게도 현재 옛 거래소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상가 건물 한 귀퉁이에 옛 증권거래소 자리임을 알리는 자그마한 표지만 쓸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돈이 흐르고 사채에서 증시,은행까지

식민지 주식왕은 조선인
일제시대 증시에서 거래된 주식은 대부분 일본 주식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큰 부를 쌓은 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었다. 구한말 갑부의 아들인 조준호가 주인공이다. 그는 34년 동아증권을 세워 명치정(明治町·지금의 명동)에 점포를 냈다. 증시 거래금액 전체의 10% 이상이 동아증권 창구를 통해 오갈 정도로 사업 수완이 좋았다. ‘조선의 주식왕’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는 해방 직전까지 매매 규모 1위를 달리며 300만원(현재가치 3000억원) 이상을 벌어들였다. 36년 당시 논 한 마지기(200평·661㎡) 평균 가격은 50원이었다. 조준호는 증시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한국인 자본으로는 최초로 호텔(사보이호텔)도 세웠다.

이처럼 명동은 일제시대 이래 한국 금융의 중심지였다. 명동에서 사채업을 오랫동안 해온 ㈜인터빌 최용근 회장은 “명동은 조선시대 말부터 교통이 사통팔달(四通八達)해 돈과 사람이 모여들던 곳”이라며 “사람이 몰리면 사고파는 상품도 많아져 자연스레 금융도 발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한증권거래소 주변에는 증권사들이 바글댔다. 아직도 명동에 증권사 지점들이 입주한 증권빌딩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정부 수립 이후 첫 증시 개장일은 56년 3월 3일이었다. 이날 조흥은행·저축은행·한국상업은행·경성방직 등 16개 주식과 건국국채 세 종목이 거래됐다. 명동 거래소 시절엔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들이 발생하곤 했다. 중앙정보부가 공화당 창당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가 띄우기에 나섰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62년 5월 증권파동 때는 과열 투기로 결제일에 주식거래 대금을 결제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그 후유증으로 증시는 무려 1년간이나 휴장해야 했다.

동양척식 주식회사(사진 위)와 대한증권거래소의 옛 모습.

70년대 공모주 열풍으로 들썩
요즘은 창업해 자리를 잡으면 증시에 상장(IPO)하는 게 기업인의 꿈이지만 70년대 초반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정부는 우량기업을 상장시켜 증시를 키우고 싶었지만 오너들은 상장을 꺼렸다. 기업 지배권이 약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부 경영지표를 공개해야 하는 것도 불편했다. 기업 공개를 소유권의 박탈로 여기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급기야 정부는 72년 말 ‘기업공개 촉진법’을 제정했다. 정부가 공개 대상 기업을 선정해 기업 공개를 명령하고 이를 거부하는 기업엔 세제상 불이익을 주고 금융지원을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기업의 팔을 비트는 밀어붙이기식 기업 공개 정책 덕분에 상장 기업은 크게 늘었다.

기업 공개가 늘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공모주 열풍이 불었다. 명동도 덩달아 후끈 달아올랐다. 웃지 못할 풍경이 연출됐다. 76년 청약 경쟁률이 뛰면서 선착순으로 청약 물량을 배정하다 보니 새벽 2시부터 증권회사 정문에 수백 명의 투자자가 장사진을 쳤다. 경찰이 통행금지 위반으로 단속하자 투자자들은 아예 증권사 근처에 숨어 있다가 통행이 해제되는 오전 4시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증시 주변은 수라장이었다. 그해 3월 한국비료 공모에는 무려 6만2000명의 청약자가 몰렸다. 증권사 직원들은 며칠 밤을 새우며 주주명부 작성과 주권 인쇄에 매달려야 했다. 이런 주식 광풍은 78년 건설주 파동으로 주가가 폭락할 때까지 이어졌다.

건설주는 75년부터 78년 상반기까지 무려 5258%나 폭등했다. 한국 증시 사상 가장 상승폭이 컸다. 중동 진출로 건설사들이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면서 생긴 현상이다. 심지어 건설업과 아무 상관없는 건설증권이나 건설화학 같은 종목까지 주문이 몰렸다. 77년 입사한 한국거래소 코스닥공시총괄팀 정원구 부장은 신입사원 시절 명동 거래소에서 건설주 파동을 지켜봤다. “치솟던 건설주는 78년 8월부터 연일 하한가로 곤두박질쳤다. 가격 폭락에 자살하는 투자자가 나왔다. 거래소 주변에선 증시 안정책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한국은행 주변에 몰린 은행 본점들
명동은 대표적인 은행가였다.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시중은행들이 명동과 그 주변에 포진했다. 지금도 외환은행·우리은행·기업은행·하나은행 등의 본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시 국민은행 본점에서 일했던 정연근 KB데이타시스템 사장은 한국은행 근처에 시중은행 본점이 많았던 것은 그만큼 업무 관련성이 컸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가까이 있으면 한국은행에서 열리는 회의 참석이나 현금 수송에도 유리했다”고 했다.

명동 금융권의 상징은 옛 상업은행 명동지점이었다. 90∼2003년 공시지가 기준으로 한국에서 가장 비싼 땅으로 꼽혔다. 한빛은행을 거쳐 우리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은 은행·보험·증권·종금 등의 금융 상품을 총망라해 판매하는 금융 백화점인 ‘우리금융프라자’로 변신했다.

시중은행 명동지점은 당시 돈이 가장 많이 몰리는 은행의 대표 영업점이었다. 명동 지점장은 임원으로 승진하는 코스로 꼽혔고 행원들이 근무지로 가장 선호하는 곳이기도 했다.

명동 사채의 뿌리는 암달러상
명동 사채의 뿌리는 한국전쟁 이후 남대문시장과 명동·회현동·소공동 등에서 활약했던 이북 출신 암달러상이었다. 이들은 급전(달러빚)이나 건국국채 같은 채권 매입으로 억척스레 돈을 모았다. 사채업자들은 시중은행의 본점이 밀집해 있는 명동으로 모여들었다. 제도권 안에서 돈을 구하지 못하면 자연스레 사채업자에게 발길을 돌리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은행가였던 명동은 사채업에도 안성맞춤이었다. 72년 사채동결 조치 이후 생겨난 단자회사나 종합금융회사들이 명동을 영업 장소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명동 사채시장은 예전에 비해 많이 위축됐다. 명동은 이젠 더 이상 유일한 금융 중심지는 아니다. 증권은 여의도로, 소비자금융은 강남으로 중심축이 바뀌었다. 지금도 명동 사채는 여전히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에도 72년 8·3 사채동결 조치, 82년 장영자 사건, 93년 금융실명제를 거치면서 부침을 거듭했지만 변신하고 살아남았다. 익명을 요청한 명동의 한 사채업자는 “제도권 금융기관은 아직도 ‘전당포’ 수준”이라고 했다. 여전히 담보대출을 중시하는 은행의 영업방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사채를 원하는 수요는 계속 이어질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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