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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박정희시대]27.한·일 국교정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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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일회담은 밀실회담이었기에 권력 변화에 민감했다.

일본은 박정희 (朴正熙) 라는 새 권력자를 협상의 최고 파트너로 판단, 군정 (軍政) 기간중 회담을 타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 총리가 '金 (JP) - 오히라 메모' 를 추인한 날부터 한국의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62년 12월18일 자신이 내놓은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찬성률 80%라는 압도적 지지로 통과되자 연말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출마선언을 해버렸다.

"군복을 벗고 민간인 자격으로 국민에게 신임을 물어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혁명공약 (원대복귀) 을 보다 충실히 이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미국이었다.

63년 2월10일 미국측은 원조 중단을 통보했다.

군사정권에는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밀가루가 없으면 절대식량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밀가루를 팔아 충당하던 돈이 정부재정의 35%나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육사 5기를 중심으로 한 '혁명주체' 내부의 반발은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독주하던 2인자 JP에게로 집중됐다.

공화당 창당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진 '4대 의혹사건' 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결국 박정희는 63년 2월18일 이런 내우외환을 정리하기 위해 '민정 불참 선언' 을 했다.

JP의 실권은 당연한 순서였다.

JP는 자신이 만든 공화당의 창당 하루 전인 2월25일 첫번째 외유를 떠났다.

JP의 외유에 대한 취재 열기는 일본에서 더 뜨거웠다.

한국에서는 외유였지만 일본 언론은 '망명' 으로 보도했다.

JP가 하네다 (羽田) 공항에 도착하자 취재진이 몰려 몸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JP에게 공들여온 오노 반보쿠 (大野伴睦) 자민당 부총재등 정계의 거물들이 오쿠라 호텔로 JP를 초청했다.

JP를 위로하는 모임이었다.

이 자리에서 JP는 자신의 구상과 심경을 상당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군인으로 혁명에 성공했지만 이제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혁명주체중 공화당에 참여하지 못하는 일부가 불만을 가지고 저를 비난했고, 그것이 확대돼 야당에서까지 정치공세를 펴 잠시 피하고자 합니다.

" 오노등 원로들은 JP를 위로했다.

"우리도 金선생 같은 어려움을 많이 겪어 온 사람들입니다.

이런 기회에 식견을 넓히고 인내하면 더 좋은 기회가 오고 앞으로 한국의 지도자가 될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유럽에 갔다 돌아올 때 우리가 다시 환영하겠습니다. " 이렇게 JP는 일본에서 '미래의 지도자' 운운하는 대단한 환송을 받았다.

JP의 구상대로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여했으며, 63년 10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자마자 JP를 불러들였다.

JP는 그해 11월 총선이 끝나자마자 공화당 의장으로 2인자 자리에 올랐다.

돌아온 JP는 다시 한.일 국교정상화에 뛰어들어 그간 진전이 없던 협상의 마무리를 짓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반대의 목소리가 침묵해야만 했던 그런 군정시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JP 자신도 상처 투성이였다.

JP가 없던 사이 그를 견제했던 김재춘 (金在春.72.육사 5기) 정보부장이 파헤쳐 놓은 4대 의혹의 책임문제, 밀실에서 만들어진 '金 - 오히라 메모' 에 대한 의혹과 일본의 정치자금 제공설까지 겹쳐 있었다.

JP가 64년 3월21일 정면돌파를 위해 일본으로 향하자 3월24일 서울에선 '매국노 김종필 소환' 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대규모 군중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는 확대일로, 25일엔 청와대 입구인 효자동 골목에 2만 인파가 모였다.

흥분한 일부 시위대는 시내 호텔로 찾아가 "일본인 숙박객 명단을 내놓으라" 며 호통치기도 했다.

당시 정보부장 김형욱 (金炯旭.79년 실종) 은 회고록에서 "4.19 이래 최대의 시위였고 나의 간담마저 서늘해질 정도였다" 고 기술했다.

결국 朴대통령은 3월27일 JP를 불러들였다.

다음날 JP의 귀국을 맞는 시위대의 구호는 '그대를 기다렸노라' .당시만 해도 혈기왕성했던 JP는 일본에서 귀국하기 전 "김포공항에 마이크와 앰뷸런스를 준비해 두라" 고 지시했다.

공항에 도착한 그는 시위대를 향해 "앞으로 젊은 그대들과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하고 싶다" 며 짧은 연설을 한 뒤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시위는 가라앉지 않았다.

급기야 6월3일 시위대가 청와대 입구까지 몰려와 연좌시위를 벌였다.

6.3사태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계엄령이 선포됐다.

결국 JP는 한.일회담에 좌초, 두번째 외유를 떠나야 했다.

첫번째 외유 같은 환송연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없었다.

이번에는 아예 부인까지 동반하고 기약 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일본에서도 '한.일회담은 긴 방학을 맞았다' 는 반응이었다.

비공식 채널에 의한 밀실협상의 문제점을 절감한 朴대통령은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공식 채널에 의한 협상을 모색했다.

욕먹고 시달려야 할 자리이기에 배짱 있는 인물이어야 했고, 뒷거래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정치인은 피해야 했다.

파격적으로 30대의 이동원 (李東元.71.국민회의 의원) 태국대사를 추천한 것은 이후락 (李厚洛.73.세칭 HR) 비서실장이었다.

HR는 최고회의 공보실장 당시 박정희 대통령권한대행의 비서실장이었던 이동원씨와 손발을 맞춘 사이며, 李실장이 물러나면서 추천한 비서실장이 HR였다.

64년 7월 李대사는 전문을 받고 급거 귀국, 청와대로 올라갔다.

朴대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李실장 (박정희는 이렇게 불렀다) 을 부른 건 내 요즘 고민이 있어서요. 알다시피 조국 근대화를 위해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해야 하는데 국민들의 저항이 너무 완강하오. 그렇다고 안할 수도 없고. " 李대사는 이미 대통령의 마음을 읽고 정리해온 내용을 얘기했다.

"우리 국민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쓸개 빠진 국민이지요. 중요한 것은 각하의 태도입니다.

" 李대사는 '국민은 성난 호랑이' 라는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말을 끌어와 당시 상황을 기호지세 (騎虎之勢.호랑이 등에 올라 타 중간에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비유했다.

이날 李대사는 외무장관 면접시험에 최연소 (38세) 로 합격했다.

李장관의 배짱외교가 시작됐다.

李장관은 취임 얼마뒤 朴대통령에게 아이디어를 하나 내놓았다.

"각하, 제 생각엔 국민들이 한.일회담에 그토록 반대하는 것은 회담 그 자체보다 정부의 태도가 굴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굽히는 모습을 보이면 국민들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일본 외상을 불러 서울에서 회담할 작정입니다.

일본으로부터 사과도 받고요. " 朴대통령은 갑자기 담배를 피워 물곤 비오는 창가로 갔다.

박정희로선 내키지 않는 아이디어였다.

그는 이미 61년 일본을 찾았을 때 "과거의 이롭지 못한 역사를 들추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는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너무 명분만 따지다 일이 안되면 어쩌지. " 그날 李장관은 "무조건 맡겨달라" 며 OK 사인을 받았다.

6.3사태를 겪으면서 朴대통령 역시 싫은 일도 할줄 아는 정치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 李장관이 속죄사절로 처음 염두에 뒀던 인물은 요시다 시게루 (吉田茂) 전수상이었다.

전후 일본의 기반을 잡은 요시다는 당시 일본 정계의 원로이자 최대 거물이었다.

당연히 요시다안 (案) 은 성사될 수 없었다.

李장관은 차선책으로 시나 에쓰사부로 (椎名悅三郎) 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시나외상을 불러들이기 위해 李장관은 일본내 친한파 인맥만 아니라 미국에까지 압력을 요청했다.

李장관은 "시운 (時運) 도 잘 맞았다" 고 말한다.

일본의 외교라인이 지한파 (知韓派) 거물인 기시 노부스케 (岸信介) 전수상 인맥이었다.

시나외상은 기시가 만주국에 근무할 당시 부하직원이었고 총리 사토 에이사쿠 (佐藤榮作) 는 기시의 친동생이었다.

어쨌든 "우리가 잘못한게 뭐 있다고 사과하느냐" 고 말리는 대다수 주변 인물들에게 시나는 "사과는 진정 큰 사람만이 하는 것이오. 이제 일본도 대국이란 걸 세계에 알려야지요" 라며 65년 2월17일 일본 각료로는 처음으로 방한했다.

"양국간 오랜 역사중 불행한 시간이 있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서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

" 한.일관계는 확실히 감성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방한했던 시나외상은 李장관과 함께 청운동 요정에서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기본조약에 합의했으며, 다시 4개월이 지난 6월22일 한.일 국교정상화의 조인식이 이뤄졌다.

물론 반대는 계속됐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국회에서 비준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12월18일 비준서를 일본과 교환함으로써 국교정상화의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그해가 저물던 12월31일 JP가 귀국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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