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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남산34년>1.권력의 모태-초기 중앙정보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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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국가안전기획부(舊중앙정보부)가 34년에 걸친 남산.이문동시대를 마감하고 강남 대모산.구룡산자락(내곡동)으로 둥지를 옮겼다.61년 5.16혁명 직후 창설된 정보부는 4개 공화국을 거쳐김영삼(金泳三)대통령 정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 든 한국인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오랜 세월 「남산」은 인간성이 파괴되는 공포지대로 여겨졌다.시국.필화사건 뿐 아니라 비밀속에묻혀버린 무수한 연행.고문속에서 여야 정치인.언론인.학생을 막론하고 정권에의 도전자.반대자들은 그 음습하고 살벌한 지하실로끌려가 발가벗겨진채 매질을 당했다.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 공포의 시절이었다.정보부는 두개의 얼굴을 가진 국가기관이었다.
국내정치는 그러했지만 밖으로는 많은 공을 쌓기도 했다.북한 테러부대가 청와대를 습 격하는 상황에서 동베를린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했고 KAL기 폭파범을 전광석화처럼 잡아내는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일부 대통령과 권력자들은 정보부를 개인과 정권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그러나 안기부직원의 대부분은『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部訓)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국익을 위해 묵묵히 일해왔다.안기부.정보부의 왜곡된 지난 세월은 문민정부 출발 이후 청사이전과 함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남산 34년의 교훈과 사연을 정리해본다.
『63년 7월6일 새벽2시.JP(김종필)를 포함한 육사8기 핵심과 공화당사전조직요인 40여명을 체포하라.』 이것이 비밀스런 「63년 육사11기 7.6거사계획사건」의 핵심지령이다.5기출신인 3대 정보부장 김재춘(金在春)은 11기 하나회멤버를 동원해 초대부장인 JP(당시 공화당창당준비위원장)그룹을 치려했다.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손영길(孫永吉).권익현(權翊鉉)등 최고회의.정보부.방첩대에 포진한 11기 하나회 핵심들은 김재춘부장과 비선(비線)으로 연결돼 JP와 부패혐의인물 40여명을 정보부로 연행하려 했던 것이다.이 거사는 결국 실패했다. 모의자들을 수사했던 이도 공교롭게도 12.12의 희생자 정승화(鄭昇和)방첩부대장이다.이 7.6사건이 상징하듯 초기정보부는 권력의 서부개척시대였다.5기와 8기등 5.16군사혁명세력이 서로 쌍권총을 차고 맞섰다.그 주변에는 장차 12 .12를일으킬 11기 핵심주자들이 카우보이 모자를 만지며 석양에 비껴서 있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5.16직후인 6월10일 창설됐다.지극히한국적인 기연(奇緣)이지만 권력자들은 정보부를 모태로 얽히고 설켰다.모태는 김형욱(金炯旭)같은 사생아를,이후락(李厚洛)같은모사(謀士)를,김재규(金載圭)같은 반역자를,장 세동(張世東)같은 행동대장을 생산해냈다.초기정보부의 구조를 들여다보자.
정보부의 최고통수는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설자이며 초대부장은 김종필 現자민련총재다.전두환 前대통령은 61년 최고회의민원비서관을 거쳐 63년 중정인사과장을 지냈다.
노태우 前대통령은 정보부와 가까운 방첩대의 대장( 정승화)보좌관이었다.
같은 11기 하나회인 권익현 舊민정당대표위원은 감찰실 정보과장으로 있었다.김복동(金復東)자민련부총재는 본부 학원팀 소속이었다.아이로니컬하게 최규하(崔圭夏)前대통령도 2국판단관(외교담당)으로 차출돼 있었다.
중정이 탄생하기 전까지 한국에는 정보기관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장면(張勉)정권아래 이후락 예비역소장이 지휘하는 중앙정보위원회가 있었지만 단순한 정보수집팀이었다.그곳은 李씨의 군번을 따 「79호실」이라 불렸다.5.16후 이틀 만인 5월18일 JP는 같은 8기생인 육본전략정보과의 이영근(李永根).서정순(徐廷淳)중령을 불렀다.『정보부를 만든다.법을 만들라』는 얘기였다.법은 신속하게 6월20일 공포된다.李씨(정보부차장.유정회총무 역임)의 증언.
『이화여고앞 정동호텔에서 작업을 시작했지요.미국 중앙정보국(CIA).연방수사국(FBI),일본의 내각조사실같은 선진국의 정보.수사기관을 모델로 했습니다.79호실도 참작하고요.법보다는 사람 구하는 게 힘들었어요.육.해.공군의 수사기관 ,경찰등에서베테랑 대간첩수사관 30여명을 차출하고 공채로 3백명을 뽑아 정보부를 구성했습니다.』 ***수사관 30명 차출 초기기획자들은 정보부가 대공수사등 국가안보의 중추기관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보부가 합법적으로 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법을 구성했다.정보부는 각 부처의 정보수사활동과 직원을 조정.감독하고,全국가기관으로부터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법은 명시했던 것이다.
정보부는 이렇게 탄생때부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보유하게 됐다.
정보부의 파워는 그러나 더 큰 곳에서 나왔다.그것은 朴대통령의 혁명통치였다.35세의 초대부장 JP는 韓日협정교섭의 밀사였고 62년 5월부터는 「공화당사전조직」이라는 천기(天機)의 작업을 수행할 정도였다.
장도영(張都暎)육참총장,5기생등 집권의 장애세력을 反혁명세력으로 몰아 제거하는 것도 정보부의 일이었다.
격동기의 강자 JP에게도 위기는 여러번 찾아왔다.그는 63년1월 공화당사전조직의 책임을 지고 정보부장직을 물러났다.45일간 재임한 2대 김용순(金容珣)부장의 뒤를 이어 김재춘부장이 권력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도 5개월만에 물러나고 4대부장 「남산멧돼지」 김형욱이 남산을 지배하게 된다.
〈金 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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