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부재의 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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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신문에 실린 현장 사건은 마치 격전장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찌그러진 자동차들이 되는대로 나뒹굴고 있다. 사망 1명, 부상자 30여명, 차량 파손 22대. 17일 밤 평택∼오산간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사고이다.
사고가 일어난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길은 눈이 녹아 얼어붙은 빙판이었으며 길은 안개로 시계를 분간할 수 없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속도는 가히 짐작된다. 이때 앞장선 자동차가 돌연 브레이크를 밟을 때 연쇄 충돌은 불가피하다. 속도와 사고의 규모는 정비례한다. 자연 사고는 커질 수밖에 없다.
바로 그 때문에 고속도로는 어느 것이나 「스페어」도로를 하나 따로 옆에 끼고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차선이 여기에 해당한다. 속도에 자신이 있는 차는 2차선을 달리면서 추월을 할 생각이면 1차선으로 꺾으면 된다. 따라서 동일 선상에선 속도를 가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빙판일 때이다. 삐꺽 「커브」를 돌다가는 차체가 360도 맴을 돌기 쉽다. 그 보다도 관성을 견디지 못해 차는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명실공히 「근대화」의 「심벌」이다. 그러나 실상은 「근대」와 「전근대」의 공존을 면치 못하고 있다. 고속도로가 제 구실을 하려면 응당 그만한 부대 시설이 갖추어져야 한다. 우선 밤이면 불야성을 이룰 수은등이 휘황하게 켜져, 길을 밝혀주어야 할 것이다. 눈이 오면 자동차들은「스노·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달리는 것이 옳다. 그에 앞서 염화「칼슘」이라도 듬뿍 뿌려서 눈이 빙판을 이룰 사이도 없이 씻어내야 할 것이다. 곳곳엔「체크·포스트」가 있어서 차량의 고장이나 도로의 상황을 제때제때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가령 서울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곳곳에 육교가 세워지고, 상가도로가 여기저기 뻗어 있다. 그러나 눈만 오면, 이들은 모두 마비되고 만다. 지하도나 육교의 층계는 미끄럼틀로 변하며, 고가도로의 초입도 역시 그렇다. 어느 경우나 그 경사만이라도 완만했던들 마비 현상은 좀 덜 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근대화는 물질 우선의 그것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불과 강설 몇㎜에 우리는 인간 부재의 도로·인간 부재 도시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공허한 시설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근대화의 그리고 사회 발전의 궁극 목적은 인간의 회복에 있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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