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처럼 금 매매 … "활성화 쉽지 않을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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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뉴시스]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금거래소 설립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체의 절반 이상이 세금 없이 거래되는 금 유통질서를 바로잡아 부족한 세수를 확보한다는 취지에서다.

지하경제 끌어내 세수 확대 목적

 정부와 새누리당은 18일 당정협의를 하고 이런 내용을 담은 ‘금 현물시장 개설을 통한 금 거래 양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내년 1분기 중에 한국거래소(KRX) 내에 주식처럼 공개적으로 금을 사고파는 금거래소가 설립된다. 이를 위해 연말까지 모의시장을 만들기로 했다.

여기에는 귀금속 제조·수입·판매·세공업자와 골드바(Gold Bar·막대 모양 금괴)를 파는 금융회사 등 금 관련 사업자가 모두 공급자로 참여한다. 이들로부터 금을 사는 투자자는 실제 금덩어리는 한국예탁결제원에 맡겨두는 대신 고유 계좌에 금 매입량과 매입 당시 가격이 기록된다. 서태종 금융위원회 자본시장국장은 “금 사업자에게는 법인세 공제 혜택을 주고 투자자에게는 거래수수료를 면제해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금 유통시장을 정조준한 이유는 오랜 기간 탈세가 당연시돼 온 대표적인 분야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금·은을 거래할 땐 거래액의 10%를 사는 사람이 부가가치세로 내야 한다. 하지만 세금을 내지 않는 무자료 거래가 횡행하는 게 현실이다.

금 음성거래로 연 3300억 탈루

정부에 따르면 밀수 금을 제외한 국내 금 유통 규모는 연간 100~110t가량이다. 이 중 절반 이상인 55~70t이 음성 거래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동네 금은방이나 전당포에서 부가세를 깎아주는 조건으로 영수증 없이 현금 거래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금융소득종합과세 회피나 편법 증여 등 재산을 숨길 목적으로 골드바와 같은 금괴를 사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중고 금반지 등을 녹여 만드는 정련금 유통·판매업자들만 금거래소로 끌어들여 부가가치세를 매겨도 연간 2200억~3300억원의 세수를 확보할 것으로 분석됐다”고 말했다.

참여땐 세제 혜택, 안하면 세무조사

 정부는 귀금속 업자의 금거래소 참여를 위해 당근과 채찍을 모두 내놓고 있다. 금거래소에 적극 참여하는 업자에게는 법인세 공제 혜택을 주고, 과거에 영수증 없이 한 거래에 대해서도 과세하지 않을 방침이다. 반면에 참여하지 않는 업체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한 귀금속업체 대표는 “벌써부터 서울 종로귀금속시장에 세무서 직원이 수시로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투자자에게도 혜택이 있다. 귀금속상이나 은행에서 금을 사고 팔 때 물리는 3~5%가량의 거래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또 금에 투자했다가 현금을 되찾으면 원금은 물론 금값 상승에 따른 차익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 다만 예탁결제원에서 실물을 찾아가려면 1kg짜리 골드바(개당 약 5500만원)로만 가져갈 수 있다. 10%의 부가가치세도 내야 한다. 금 실물이 거래소에서 빠져나갈 때는 철저하게 세금을 물리겠다는 취지다.

"거래내역 드러나 이용 꺼릴 것”

 하지만 정부 기대대로 금거래소가 활성화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무엇보다 금을 사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거래내역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다. 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는 “금 수요의 상당수는 세금 없이 자녀에게 증여·상속하려는 거액 자산가들”이라며 “이들이 거래 내역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래소를 이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의 투자 속성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금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이나 전쟁·재해 등에 대비하는 개인의 비상용 투자수단인데 이를 정부에 맡겨두려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공급자들도 매출 내역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데 대한 부담이 크다. 수수료 명목으로 금값에 붙여 받던 3~5%의 판매수익을 못 받게 되리라는 우려도 있다. 귀금속업계 관계자는 “1~2년 단기 투자하는 사람에겐 메리트가 있겠지만 보유 목적으로 금을 사는 사람에겐 금거래소가 제공하는 당근은 별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금거래소 설립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석유 전자상거래 시장, 돈육 선물거래시장 등과 함께 논의가 시작됐다. 이명박정부 들어 2010년까지 여러 차례 설립이 추진됐지만 금융위와 산업부의 소관부처 다툼, 금을 비롯한 상품거래소 유치를 놓고 벌어진 부산과 광주의 지역적 충돌 등으로 번번이 논의가 중단됐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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