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최고활자 문화재 지정, 뒷짐 진 문화재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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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경희
문화부문 기자

‘증도가자’(證道歌字)가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추가됐다. 고려 청동 주전자·대야의 흙 앙금에 활자가 묻힌 상태로 공개된 것이다.

<중앙일보 17일자 1, 10면

 이들 유물이 아니어도 증도가자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라고 판단하는 건 어렵지 않다. 2010년 첫 공개 이래 4~5회 가량의 국내·국제 학술회의, 논문 등으로 연구 성과가 축적됐기 때문이다. 금속활자에 묻은 먹의 탄소연대측정도 총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고, 그 결과 모두 13세기 초로 수렴했다. 경북대 남권희 교수 등이 서지학적 분석으로 제시한 시대와 일치한다

고려 금속활자 ‘증도가자’. 현재까지 112점이 공개됐다. [중앙포토]

 그럼에도 언론들은 그간 확실한 고려활자라고 보도하지 못했다. 가짜일 가능성 있다고 언론에 흘리는 몇몇 전문가들 때문이다. 허나 이들이 연구나 글로써 ‘가짜’ 소견을 밝힌 사례는 찾기 어렵다. 원로 서지학자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1월 출간한 『한국 금속활자 인쇄사』에서 “활자의 출처를 추적한 것과 관련한 방송 프로그램이 있어 시청하게 됐다”며 MBC ‘PD수첩’ 등의 방송에 기대 위품일 가능성을 제기한 게 전부다. 남 교수는 천 교수의 견해를 반박한 논문 ‘한국 금속활자 연구의 제문제’를 그 해 6월 국내전문학술지 ‘서지학연구’에 게재했다. 아직까지 천 교수의 재반박 글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화재청에선 “진품 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연구자들”을 들어 증도가자의 진실 규명이나 문화재 지정 등에 소극적이다. 한 문화재위원은 인터뷰를 꺼리며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엇갈릴 수 있다”고 말했다.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해 여러 자료를 분석해 입증하는 게 학자들의 몫 아닌가.

 그는 또 “개성에서 나온 북한 유물이 여기 있으면 뭐가 되나. 게다가 소장자가 고미술상이다. 장사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게 아무리 좋다 해도 (문화재 지정으로) 값이 뛰면 누가 책임지느냐”고도 했다. 출토지가 북한이라서 한국사·세계사적 의미가 큰 걸 외면해야 할까. 게다가 소장자는 부차적인 문제다.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는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박병선(1929~2011) 박사가 집요하게 파고들어 우리의 빛나는 유산임이 알려진 경우다.

 증도가자 소장자는 “독일 대사가 몇 번이나 찾아와 ‘(돈을)준다는 대로 줘도 안 파느냐?’고 물어봤다”고 말했다. 고미술 거래상의 허풍이라 쳐도 인쇄술의 혁명을 일으킨 독일이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1455)보다 200년 이상 앞선 활자 실물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해 보인다. 국보는커녕 지방문화재도 아닌 이상 ‘장사하는 사람’이 외국에 팔아도 막을 방법이 없다. 문화재청이 적극 나서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이경희 문화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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