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수교 백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미국은 1846년에 「멕시코」로 부터 「캘리포니아」지방을 사들임으로써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이후 우리 극동삼국과 관계를 맺게되었다. 이에 조금 앞서 영국이 아편전쟁의 결과로 1842년에 청국과 더불어 남경조약을 맺고 그 문호를 개방하게 되니 미국은 청국과 더불어 1844년에 통상조약을 맺었으나 일본과의 그것은 1858년에야 맺게되었다.

<통천표착사건으로 시작>
이리하여 미국상선이 일본과 청국에 왕래하게되니 이 두나라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나라와도 같은 조약을 맺고자함이 미국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나라는 청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그밖의 나라와는 관계를 맺지않는 쇄국정책을 쓰고 있었으므로 1855년6월 강원도 통천해안에 표착한 미국인 4명을 청국으로 보내여 처리하게 하였다. 이 통천표착 사건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14년 동안에 걸쳐 미국과 우리나라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있어서의 한미관계사를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나누어 그 성격을 샅펴보고자 한다.

<미국함대와 전쟁하기도>
첫째는 통천사건이후 1882년까지에 이르는 27년동안에 걸친 간접적 관계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가 완고한 쇄국정책을 쓰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맺음을 거절하였다. 그 결과 1866년5월 평안도 철산에 표착한 미국선박「서프라이스」호의 선원들을 청국으로 보내 처리하게 하고, 그해7월에는 통상의 길을 트기위하여 대동강올 타고 평양에까지 올라온 미국상선셔먼」호를 불살라버렸다. 1871년 3월에도 「셔먼」호의 행방과 통상의 길을 찾기위해 강화도 앞바다까지 들어왔던 미국함대를 격퇴시키는 한편 전국의 요소마다 서양인과의 화친을 물리치는 이른바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일 강압으로 통상조약도>
둘째는 l882년부터 1905년까지에 이르는 23년동안에 걸친 직접수교 시기였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는 일본의 강압에 못이기어 1876년에 그와 더불어 통상조약을 맺게되니 청국은 일본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l882년에 우리나라로 하여금 미국과도 같은 조약을 맺게 하고 척화비를 없애게 하였다.
미국은 이후 우리나라에 대하여 많은 동정과 관심을 가지고 여러모로 우리나라를 도와주려고하다가 청국및 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편에 가담하여 일본이 우리나라를 보호국으로 삼음을 인정하고 마침내 서울주재 공사관을 없애게 하였다.
세째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에 이르는 40년동안에 걸친 간접관계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미국이 일본의 우리나라 침략을 인정하여 줌으로써, 이후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대륙과 태평양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게 하다가 도리어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이와 싸우던 끝에 우리민족올 해방시켜 주었다.

<건국·호국에 피흘려주고>
네째는 1945년부터 오늘까지에 이르는 20여년동안에 걸친 국제적 수교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미국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위해 우리나라를 38선으로 양단시켜 놓고「유엔」의 결정에 따라 우리나라에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꾀하다가 공산측의 불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38선이남의 지역에 한하여 합법적인 대한민국을 세우게 한 후 공산군의 침략을 격퇴하는 한편 「유엔」의 이름아래 우리나라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도와 줌으로써 자립자주국가의 길을 닦게하였다. 이 자립자주국가의 길이 앞으로 순조릅게 성취되도록 원조를 계속하여 줌이 세계평화를 위한 미국의 정책이어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