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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 방지보다 세수 확보?기업들 “이럴 바엔 차라리 법인세 올려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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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호 04면

지난 4월 11일 서울 수송동 국세청에서 열린 전국 세무관서장 회의 모습. 김덕중 국세청장은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시대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1 대기업 계열 A사 재무팀 직원들은 지난 5월부터 초비상이다. 세무조사 때문이다. 국세청 직원 7명이 회사에 상주하는 탓에 밤 9시 전에 퇴근하는 재무팀 직원은 한 명도 없다. 수시로 오는 자료 요청에 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요구받은 자료만도 A4용지로 2만 페이지가 넘는다. 세무조사 분위기도 예전과 달라졌다. 재무팀 김모 차장은 “5년 전쯤 정기조사를 받을 땐 국세청 직원들과 가벼운 농담도 했는데 이번엔 ‘뭔가 찾고야 만다’는 비장한 의지가 느껴져 말 붙이기도 어렵다”고 했다. 이 회사 CEO(최고경영자)도 국세청의 요구 자료를 비롯한 세무조사 상황을 실시간으로 챙긴다. 회사 차원의 대응 논리를 개발하기 위해서다.

세무조사는 ‘전가의 보도’인가

#2 한국동(銅)스크랩유통업협동조합은 지난달 ‘국세청의 무리한 세무조사와 부당과세를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구리전선, 동파이프 같은 동스크랩을 모아 사고파는 과정에서 실제로 부가세를 떼어먹은 업체들은 따로 있는데, 국세청이 이들 업체로부터 세금을 거두기 어렵게 되자 해당 업체와 거래한 상당수 회원사를 ‘허위·가공 거래’로 몰아 세금을 부과한다고 주장했다. 협회 전민철 전무는 5일 “세금을 부과받은 업체가 89개 회원사 가운데 50여 개에 달하고 내야 할 세금만도 업체당 적게는 5억원에서 많게는 100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당과세를 철회하지 않으면 이달 중 국세청을 항의 방문하고 민·형사상 강력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가 지금 세무조사 바람 앞에서 떨고 있다. 크고 작은 많은 기업이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세무조사는 특성상 기업 이름이 잘 공개되지 않지만 최근엔 알려진 대기업만 20곳가량 된다. LG상사는 지난 4월부터 서울지방국세청 조사국 요원들이 투입된 가운데 120일간의 일정으로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SK네트웍스, 신한은행, 스탠다드차타드은행, KB국민은행, GS칼텍스, E1, 효성, 한화생명 등도 세무조사를 받는다. 이외 중소ㆍ중견기업 상당수가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조사 강도는 세졌다. 조사인원은 많아졌고 기간도 예년보다 늘었다. 세무조사는 통상 2~3개월 걸리지만 최근엔 반년 넘게 받는 기업도 상당수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은 “예년보다 세무조사가 늘거나 강도가 세진 것은 없다. 법과 원칙에 따라 할 뿐”이라는 입장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경기가 어렵고 세수가 부족하다고 하니 세무조사로 세금을 더 걷지 않겠느냐고 보는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세무조사 대상은 전체 기업의 1% 수준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오히려 적다는 것이다. 동스크랩조합의 부당 세무조사 주장에 대해서도 “업계에 어려움이 있는 건 인정하나 상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국세청, 인력 400명과 팀 70개 보강
하지만 재계 주변에서는 박근혜정부가 복지비용을 비롯해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세무조사라는 칼을 휘두른다는 인식이 강하다. 국세청은 최근 올해 4월 말까지의 세금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조7000억원 덜 걷혔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기업들이 엄살을 피운다는 주장도 있다. 기업은 원래 세무조사에 거부감을 표시하기 마련인데, 조사가 강화되자 “너무 강도가 세다”며 목소리를 높이면서 칼날을 피하기 위한 예방주사를 놓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엄살로만 보기 어려운 건 무엇보다 정부가 스스로 세무조사 강화 방침을 밝혔다는 점이다. 국세청은 4월 ‘세무조사 인력 400여 명을 증원하고 조사팀 70여 개를 보강했다’고 발표했다. 조사국 직원 1400여 명을 대상으로 금융조사ㆍ역외탈세 등과 같은 지하경제 추적을 위한 첨단 조사기법에 대해 집중 교육도 했다. 관세청도 ‘숨은 세수를 발굴하고 부족한 재정수요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올해 정기 세무조사를 대폭 강화한다’고 밝혔다. 관세청은 올해 정기 세무조사 대상 업체를 지난해 80개 업체에서 130개 업체로 확대한다. 한 여당 의원은 “세무조사로 힘들다는 원성들이 많아 국세청장에게 ‘세무조사가 얼마나 늘었느냐’고 물었더니, ‘예년과 달라진 게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기업들 반응을 들어보면 체감 강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세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탈세는 나쁜 행위여서 세무조사를 한다는 데 할 말은 없다. 국세청은 원칙대로 한다는데, 원칙만큼 무서운 게 없다. 그게 세게 한다는 거 아니냐. 경제민주화다, 동반성장이다, 상생 분위기다 하는 데다 세무조사까지 겹치니 기업들이 더 힘들다.”

“초우량 고객 구매기록 삭제 요청”
세무조사의 파장은 곳곳에 미치고 있다. 대형 유통회사인 C사는 최근 VVIP(초우량) 고객들로부터 구매 기록을 삭제해 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혹시라도 고가의 제품을 구매했던 흔적으로 세무조사를 받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고객이 늘어서다. 신용카드로 명품을 구입했던 소비자들이 직접 현금을 들고 찾아와 신용카드 구매 기록을 삭제한 뒤 이를 현금으로 다시 치르는 경우도 늘었다. 신용카드 사용 기록이 남으면 언제든 추적이 가능하지만, 현금은 출처를 찾아내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이 회사의 올 상반기 현금구매 고객 비율은 전년보다 2%포인트가량 늘어난 14.5%가 됐다.
아예 돈 쓰기를 꺼리는 소비자가 늘면서 유통업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해 온 ‘상위 20% 소비자’의 구매액 신장률은 뒷걸음질치고 있다. 2011년엔 전년 대비 17.9%의 매출 증가를 보였지만 올 2분기에는 전년 동기보다 구매액이 0.5% 줄어들었다.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대기업 D사는 올 하반기 계획돼 있던 신규 인수합병(M&A)이나 해외점포 출점 계획을 전면 중단한 상태다. M&A나 신규 출점은 대규모 자금이 동원되는데 계획이 중단된 건 자금난 탓은 아니다. 자금 조달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하지만 새로운 사업을 하면 대규모 자금이 들어가는 게 당연한데 괜히 이 돈의 출처에 국세청이 주목할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해외 협력사에선 빨리 사업을 진행하자고 요청해 오고 있지만 국내 상황을 최대한 설명하며 양해를 구하고 있다”며 “해외 파트너를 잃을 수도 있겠지만, 괜히 국세청 등에 빌미를 주는 것보단 낫다는 판단”이라고 했다.

세무사 업계는 희색이다. 요즘이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란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세무조사가 강화됐다는 소문이 돌면서 돈 좀 있다 싶은 개인과 기업들이 앞다퉈 세무조사 대응 상담을 해오고 있어서다. 한 세무 전문가는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했을 때 올해 상반기 상담 의뢰건수가 1.5배는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컨설팅의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과거엔 세무조사가 임박한 시점에 대응방안을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요즘은 당장 세무조사를 받지 않더라도 상시적으로 대비하려는 기업이나 개인이 늘고 있다.

“세무조사 대비해 국세청 출신 채용”
중견기업 B사는 헤드헌터를 통해 국세청 공무원 출신을 두 명 정도 채용할 계획이다. 세무조사를 직접 받는 건 아니지만 최근 세무조사 바람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다. 채용 인력에 대한 상세한 조건도 내걸었다. ‘서울지방국세청이나 중부지방국세청 조사국 출신이면서 40대 초반’이다. ‘국장급’을 영입할 경우 혹여 구설에 오를 수도 있어 가급적 사무관급 이하면서 경력이 10년 이상 된 인물을 원한다. 채용되면 이사 정도의 직급을 줄 계획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사내에 대관 담당자가 있기는 하지만 국세청 내부 분위기를 알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특별히 어떤 액션을 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최근 분위기 속에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C사의 고위 관계자는 “재무ㆍ회계 담당자들이 ‘지금 같은 분위기에선 뭐라도 안 걸릴 수 없다. 탈세로 걸려 경력에 오점을 남기거나 범법자가 되느니 차라리 법인세를 올려 세금을 많이 내게 하는게 낫지 않겠느냐’며 불만을 표시한다”고 말했다.
국세청이 마른 수건 쥐어짜기 식으로 세금을 더 걷기 위해 자영업자들에게도 소득신고를 다시 하라는 공문을 예년보다 많이 보낸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납세자연맹 김선택 회장은 “소득신고를 다시 하라는 공문을 받고 힘들어하는 자영업자들의 불만이 최근 연맹에 많이 접수되고 있다”며 “장사가 잘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데 근처에 있는 다른 업체보다 매출이 적거나 신용카드 비중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다시 신고하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공문은 업종과 규모를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보내지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국세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수정신고 발송은 예년과 비슷하다. 수정신고할 것이 없으면 관련 자료를 내 소명하면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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