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계좌' 통해 송금의혹 1억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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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과 현대전자의 해외 법인들을 복잡하게 오가다 결국 '증발'된 1억달러의 실체에 관한 베일이 점차 벗겨지고 있다. 특히 현대 측이 그간 진실을 가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뿐 아니라 회사 장부까지 엉터리로 꾸민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이 돈이 북한으로 갔다는 의혹이 짙어지는 상황이다.

◇현대 측의 필사적인 감추기=지난해 가을 한나라당이 '현대상선의 대북비밀 송금 의혹'을 폭로한 직후 현대전자가 영국 스코틀랜드 공장을 판 돈도 증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현대전자(현 하이닉스) 측은 "공장 매각 대금 1억6천만달러 중 1억달러를 현대건설의 중동 현지법인인 현대 알카파지에 빌려줬다"며 "알카파지가 갚지 않아 결국 이 돈은 장부상 손실 처리했다"고 해명했다.

하이닉스 측은 외국 투자자들에게 회사 내용을 알리는 영문판 사업보고서에도 이렇게 기록했다. 계열사에 빌려줬다 떼이게 된 것이지, 북한에 송금한 게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현대 알카파지는 사실상 페이퍼 컴퍼니라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그러나 현대 측 내부 관계자들에 의해 이런 설명은 거짓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선 1억달러는 중동의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있는 현대 알카파지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단지 현대 알카파지 명의로 개설된 영국 현지은행의 가공 계좌로 입금됐을 뿐이다. 두바이 현지에 근무하던 현대 알카파지의 당시 대표조차 모르게 이뤄졌다.

따라서 알카파지가 이 돈을 떼어먹지도 않았고, 갚을 필요도 없다는 게 관계자의 증언이다.

돈의 성격도 다르다. 하이닉스 측은 영국 공장 매각 대금이라고 했으나, 이 돈이 런던은행 계좌에 입금된 시기는 남북 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6월 9일이었다.

그런데 영국 공장 매각 대금을 현대전자가 손에 쥔 것은 그로부터 40여일 뒤인 2000년 7월 20일이었다. 아직 받지도 못한 돈을 입금할 수는 없는 것이다.

추적 취재한 결과 실제로는 ▶현대전자가 미국.일본 현지법인들에서 1억달러를 급히 조달해 이를 런던은행 계좌로 입금했고▶나중에 영국 공장 매각 대금으로 미.일 현지법인들에 갚은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문제의 1억달러는 영국 공장 매각 대금이 아니다.

◇그룹 최고위층이 주도=현대 측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진상을 감추려 했을까. 그 이유의 일단을 현대건설 고위 관계자의 증언에서 엿볼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그는 11일 "런던은행 계좌로의 입금 지시는 김재수 당시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김재수 본부장은 정몽헌 당시 그룹 회장의 측근 중 측근이다.

11일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도 "2000년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의 지시로 김재수 위원장이 급전을 조달했다"고 폭로했다. 이익치 회장은 鄭회장, 金본부장과 함께 현대의 대북사업을 주도했던 인사다. 이 폭로가 사실이라면 대북 지원 관련 자금 마련 및 송금 과정에 그룹의 최고위층이 직접 간여했음을 시사한다.

현대건설이 2000년 6월 현대전자가 줬다는 1억달러에 대해 돈을 쓴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심헌영 현대건설 사장은 11일 "현대전자에서 1억달러를 받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손광영 상무보는 "이것이 현대건설의 공식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하이닉스가 최근 현대건설을 상대로 낸 소장에서도 현대그룹 최고 경영층이 지목되고 있다. 하이닉스는 당시 '현대건설과 현대그룹 최고 경영층'에서 긴급히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해 돈을 보내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알카파지=현대건설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알카파지는 1998년 12월 두바이에 설립됐다.

이 회사는 당초 알려진 대로 껍데기뿐인 유령회사가 아니라 실제 활동을 했던 회사다. 현지 직원은 10명 안팎이었다는 게 현대건설 측 설명이다.

특히 현대건설은 2001년 사업보고서에서 49% 지분을 보유한 중동 현지법인이 2001년 말 현재 약 26만5천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현대전자 등에서 대여금을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이 회사는 그러나 대북 송금 의혹이 불거진 뒤인 지난해 말 뚜렷한 이유없이 법적으로 청산됐다.

특별취재팀=김시래.박원갑.허귀식 기자 <sr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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