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세가 안 걷힌다 … 작년보다 3조8000억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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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강남과 경기도 분당에 각각 아파트를 갖고 있던 100억원대 자산가 김모(55·대기업 부사장)씨는 최근 분당 아파트를 대학생 아들에게 증여했다. 100㎡대의 분당 아파트는 한때 시가가 9억원을 넘었지만 요즘은 6억원대다. 김씨는 “아파트값이 떨어져 있을 때 자녀에게 증여하면 세금을 덜 낼 것 같아 증여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씨가 아파트값이 9억원을 넘을 때 증여했다면 증여세를 2억원 가까이 내야 했지만 이번에 낸 세금은 1억원 남짓이었다. 김씨와 달리 재산이 15억원 정도인 박모(60)씨는 같은 고민을 하다 생각을 접었다. “경기도 좋지 않은데 재산을 분산했다가 나중에 재정적 어려움이 닥치면 대비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황재규 신한은행 세무사는 “상속은 사망과 관련돼 있어서 예측이 어렵지만 증여는 경기가 좋지 않을 때 감소하는 흐름을 보인다”고 말했다. 황 세무사는 그러나 “경기가 나쁠 때 부동산이나 주식 가격이 떨어져 있어 초고액 자산가는 일반인과 달리 이 기회에 증여를 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소득 안 줄었는데도 소비 줄여

 #2. 가정주부 권모(38)씨는 요즘 장을 볼 때 신용카드를 꺼내는 일이 부쩍 줄었다. 생활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전통시장을 찾기 시작했는데, 현금을 내면 물건값을 깎아주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권씨는 “가게 주인이 세금을 안 내려 한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생활비를 줄일 수 있어서 자주 이용한다”며 “신용카드를 쓰더라도 불필요한 지출은 줄이고, 할인·포인트 적립 등의 혜택이 큰 곳만 찾아 다닌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권씨 가정의 소득이 지난해보다 줄어든 건 아니다. 씀씀이를 줄인 이유는 왠지 ‘불안해서’다.

신용카드 승인액 증가율 최저

이처럼 개인의 허리띠 졸라매기의 여파로 지난달 신용카드 승인액 증가율이 통계작성(2012년 1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신용카드 승인금액은 38조6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4%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인터넷 상거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3.7% 줄었고, 백화점도 6.1% 감소했다. 반면 대형할인점(4.8%), 수퍼마켓(10.3%), 편의점(29.3%) 등에서는 사용금액이 늘었다. 경기의 영향을 덜 받는 ‘생활밀착업종’에서의 씀씀이는 늘었지만, 당분간 소비를 줄여도 지장 없는 품목에서는 돈을 쓰지 않았다는 의미다.

 국세청은 1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현안보고를 했다. 국세청은 이 자리에서 4월까지 세수실적이 70조5000억원으로 지난해보다 8조7000억원이 덜 걷혔다고 밝혔다. 국세청의 올해 목표 세수(199조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진도율)은 35.4%에 불과하다. 지난해 같은 기간(41.2%)보다 5.8%포인트나 낮다. 그만큼 세금을 거둬들이는 속도가 더딘 셈이다. 국세청은 이례적으로 “올해 세입 확보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100대 기업 중 69곳 이익 줄어

 이런 세수 실적은 국내 경기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다. 기업 이익이 급감하고 가계 소비도 크게 줄어드는 추세다. 상속·증여조차 주춤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업이 내는 법인세가 크게 줄었다. 국세청이 올 4월까지 거둬들인 법인세는 16조5000억원으로 진도율이 36%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세수(20조3000억원)와 진도율(44.2%)에 크게 못 미친다. 기업 이익이 크게 줄어들며 전체 세수 실적을 끌어내렸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은 갈수록 악화할 전망이다. 법인세는 한 해 전 기업 실적을 토대로 매겨지기 때문이다. 한국거래소와 상장회사협의회가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625개사의 1분기 실적(별도·개별 실적 기준)을 집계한 결과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 감소한 286조4214억원, 순이익은 9.7% 줄어든 14조4965억원으로 나타났다. 특히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 가운데 69개사가 영업이익이 줄었거나 적자를 기록했다.

부가세도 지난해보다 -1조6000억

 기업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개인이 소득이 많이 감소하지 않았는데도 씀씀이를 줄였기 때문이다. 물건과 서비스 등을 소비할 때 붙는 세금인 부가가치세는 4월까지 25조4000억원이 걷혔다. 올해 목표액은 지난해보다 1조원가량 늘어났지만 실제 세수는 오히려 1조6000억원 정도 덜 걷혔다. 이런 움직임은 개인 소비의 풍향계인 신용카드 소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버는 소득에 대해 부과되는 소득세는 13조원이 걷혀 지난해와 비슷했다.

 상속·증여와 관련해선 움직임이 엇갈린다. 재산 10억~20억원대 중간 자산가 이하의 개인이 증여에 머뭇거린 반면 대재산가는 적극적이었다. 이 때문에 상속·증여세 세수는 1조2000억원으로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이에 대해 국세청 관계자는 “상속·증여세는 100명 중 2~3명 정도만 납부한다”며 “대재산가의 사망 등에 영향을 크게 받으므로 일관된 흐름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창규·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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