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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쓸모 있는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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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를 예견치 못한 것은 그래도 작은 죄다. 더 큰 죄는 2010년 이후 재정긴축으로 돌아서 경제불황을 장기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격주간지 ‘뉴욕서평(The New York Review of Books)’의 6월 6일자 판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교수가 어윈(Irwin)이 쓴 『연금술사들』 등 세 권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하고 있는 말이다. 케인스 이론을 비롯해 대공황 이후 축적된 경제학 지식이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금융위기로 경제가 심각한 불황에 진입했을 때 당연히 재정팽창 정책을 지속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 이후 미국, 유럽에서 긴축(fiscal austerity)으로 선회한 것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며 그가 한 주장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묻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의 주장을 좀 더 따라가 보자.

 첫째로 실증적 분석에 기초한 경제학 이론이 제시하는 바와 달리 경제정책의 선택에 있어 사람들은 도덕적 판단에 기댄다는 것이다. 즉 위기는 과거에 빚을 내 흥청망청 써댄 결과며, 따라서 이제 허리띠를 졸라매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도덕적 잣대가 이런 정책을 지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화당, 영국에서 보수당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보수적 도덕관념이 재정정책을 지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보다는 사회엘리트층이 ‘자기이익 보호’를 위해 긴축정책으로 여론과 정책을 몰고갔다는 것이다. 크루그먼은 실제로 이 주장에 방점을 찍고 있다. 돈을 빌려주는 금융가는 재정팽창이 인플레를 유발해 채권의 실질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국채를 보유한 자산가들은 재정건전성이 유지돼야 국채의 리스크가 커지지 않기 때문에 팽창보다 긴축을 선호하게 된다. 실업이 늘고 불황이 지속되더라도 이들은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실제로 금융위기 이후 지난 4년간 미국의 상위 10%는 전체 소득증가의 154%를 가져가 나머지 90%가 소득감소로 불황의 고통을 짊어져 오고 있다.

 2010년 라인하트와 로고프 교수가 발표한 ‘부채시대의 성장’이라는 논문은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90%를 넘게 되면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분석을 내놓았는데 이 논문은 계량분석 방법에 오류가 발견돼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과거 미국과 영국의 국가부채 규모와 경제성장의 관계를 분석해 보면 이들이 주장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학자의 견해다. 그러나 이 논문의 주장이 사회엘리트층이 자기이익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긴축정책 방향과 일치함으로써 의회, 언론 등에서 실제 가치에 비해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크루그먼은 말한다. “지식이 세상의 긍정적 변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많은 이에게 이러한 현실은 깊은 우려를 자아낸다.”

 최근 재정정책과 관련해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치열한 논쟁에서 진보적, 케인스적 주장의 핵심에 서 있는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리고 아쉽게도 경제학적 지식은 자연과학처럼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회과학 지식에도 취약성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서평이 필자에게 와닿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경제 활력을 살리고 역동성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제구조의 근본적 혁신과 체질 개선이다. 그리고 경제 각 분야에 치열한 경쟁을 도입하는 것이다. 경쟁 없이 경쟁력은 생기지 않는다. 극히 적은 소유지분으로도 순환출자에 의해 전 계열 기업에 대한 경영지배권을 장악해 그룹 내에 일감을 몰아주고, 대다수 소액주주보다 총수 일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오늘날 우리의 기업경영 행태는 경제정의는 고사하고 시장경제 원리와도, 자본주의 원칙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공정한 경쟁원칙은 노동시장에도, 자본시장에도, 경영자 시장에도 도입돼야 하는 것이다. 제한 없는 순환출자에 따른 경영권 승계에 대한 지나친 보호는 우리 경제의 미래에 너무나 중요한 대기업들이 최고의 전문경영인들에 의해, 시장원리에 의해 경영될 기회를 제한하고 있다.

 이런 단순한 미시경제학이 제시하는 기본 원리도 실제 우리의 제도 개선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여러 개혁과제 중 이는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개혁과제들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 늘 나오는 주장이 투자 위축이며 성장 저해다. 어떤 계량적 분석에도 기초하지 않은 주장이 힘을 얻고 언론과 여론의 지지를 몰아 결국 국회와 정부를 무력화시키는 과정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며 필자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은 과연 쓸모 있는 것인가?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