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종가촌|경북영덕 무안 박씨 일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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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워데 다른 성씨를 못 들어오게 하는 깁니꺼? 안 들어오는 기제』-종가마을사람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경북영덕군축산면도곡1동 번개(번포)마을은 무안박씨들만이 사는 마을. 동리에서 올망졸망 뛰어 놀던 코흘리개들도 서로 「무슨 할베」「무슨 아제」로 불렀다. 타성받이가 한집도 없다. 영덕에서 북으로 30리 남짓, 동해안의 축산항과 울진길이 갈라지는 세거리북쪽에 이 마을은 자리하고 있다. 면사무소가 있고 지서가 있는 도곡1동엔 행정구획상으로는 1백13가구 5백76명이 산다.
그 중 박씨 문중이 5백49명이다. 나머지는 거의가 인사발령 한 장으로 옮겨다녀야 하는 공무원 가족. 그렇다고 공무원 가족이 번개마을에 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마을건너 한길가에 모여 산다.
마을이 번듯했다. 마을앞 4만여평의 논은 인근 백리 안에선 보기 드물게 경지정리가 되어 반듯반듯하게 펼쳐져 있고 4점5조식 최신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농촌으로선 그 또한 드물게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구습에 젖은 씨족취락에서 물씬 풍기는 듯한 봉건적·배타적 냄새가 거의 없다. 박동수(33)씨 「문중마을이 아주 폐쇄적일 것으로 생각들 하겠지만 이 마을은 다릅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농지정리도 전기도 그리고 도내모범동리가 된 것도 『문중마을이기 때문에 쉽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을은 작지만 대학 졸업자가 12명, 대학생이 5명, 중고교생은 숱했고 살림정도도 비교적 고른 듯했다. 사람들은 다른 성이 발을 붙이지 못한 것은 단지 대성밑에 한 두 집 들어와야 집터나 논밭을 사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곳에서도 땅값이 형성되긴 하지만 팔릴 땅이 있으면 문중에서 사게 되어 사러 오려는 사람도 없거니와 살 수도 없다는 것이다. 박씨들이 이곳에 정착하긴 임긴왜란 직후. 당시 명마사를 지낸 박의장(박의장)이 이웃 영해(영해)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자리잡은 때부터이다. 그전에도 한 두 채 다른 성의 민가가 있었으나 밀려나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로부터 4백년 지금 이 마을엔 14대손이 살아 마을은 7대28손 한집안만이 산다.
마을의 종가는 박동복(박동복·26)씨 집. 3백년 가까이 되었다는 종갓집은 오랫동안 풍상에 씻겨 퇴락했으나 그 옛날의 50여년간 대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집 동헌 높은 마루엔 마을 노인들이 모여 농사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찾아왔다니까 박의장의 패검과 교지(교지)를 꺼내오고 마을자랑 집안자랑을 한바탕했다. 이 종가마을에서도 그전엔 집안노인들이 의논해서 마을일을 했다. 그러나 4년 전부터 일은 30대의 손으로 넘겨졌고 노인들은 문중재산의 관리, 절차만 맡아보게 되었다.
그 때부터 영농제도도 바뀌었다. 농사철이면 아침 8시에 「사이렌」을 울린다. 남녀노소 노동력 있는 사람이 다 모이면 농지전부를 동서로 2등분, 양끝에서 일해 들어간다. 모내기며, 김매기며 타작도. 그리고 나서 품앗이의 일손, 농지의 크고 작은데 따라 배분하고 셈을 하고 결산하게 된다.
『불평이 없읍니까』-『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문중 일이니까요.』 대답이 간단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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