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디서 오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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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호 30면

연일 뒤숭숭한 날씨와 정세 때문에 봄이 힘겹게 오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변덕스러운 날씨 얘기나 종잡을 수 없는 북한 얘기를 건너뛰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분과 비슷한 인사말을 주고받다가 “봄이 오긴 오는 걸까요?”라는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이건 질문이 아니다. 봄이 오지 않을까 봐 걱정해서도 아니고 혹시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더더욱 아닐 테니, 그냥 봄을 지치도록 기다리는 마음의 고백 정도로 이해하고 말 대신 웃음으로 답해야 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 같다. 다른 계절도 이렇게 기다렸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딱히 봄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이번 봄은 유난히 더디게 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봄의 따스함으로 단단하게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봄은 새로운 시작이고 아름다운 변화다. 하지만 모든 시작과 변화에는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가 따르게 마련이다. 봄은 다른 어느 계절보다도 급격한 변화를 감지하게 해서 신체 리듬의 균형을 잃거나 부적응적인 우울감에 빠져들기도 쉽다. 그래서 봄이라는 단어 앞에 ‘잔인한’이라는 수식이 잘 붙는 것 같기도 하다. 봄은 유독 불안을 자극하는 계절인 것이다.

 올봄이 더디게 오는 데는 남북한의 위기 정국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노란 햇빛에 속아 무거운 외투를 두고 나갔다가 매서운 바람에 된통 얻어맞는 기분이 드는 것처럼 예측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안팎으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 할지, 재빨리 발을 빼고 도망가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 극에 달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국민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현실적 대응방법에 있어 어떠한 구체적인 판단도 하기 힘들다. 위협 요소가 눈앞에 있어도 짐짓 태연하게 제 할 일을 계속하는 것 말곤 방도가 없으니 막연한 무력감이 쌓여만 가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거장 요제프 쿠델카(Josef Koudelka, 1938~)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기록한 사진을 발표한 후 추방되어 조국 체코를 떠나 오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실패한 민주화 혁명이 소비에트 정권의 해체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복원되기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추방될 당시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던 쿠델카는 유랑을 계속하며 집시와 같은 소수민족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아갔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시작된 길 위에서의 삶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후에도 그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퍼(street photographer) 생활을 멈추지 않았으며, 지금도 어디에선가 카메라를 들고 세계를 응시하고 있다.

 그를 두고 사람들은 ‘영원한 아웃사이더’라고 말한다. 평생을 낯선 불안과 맞서 싸워야 했던 그의 삶이 특별해 보여서일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역할을 지켜온 작가의 삶에는 무슨 비결이 있었을까? 그의 고백은 이러하다.

 “모두들 나를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항상 남자로서나 사진가로서 어딘가에 속한 내부자이고자 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의 일부인 것이다.”

 쿠델카는 관찰자나 목격자의 시선으로 사진을 찍는 대신, 다양한 삶을 꾸려 나가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 발견한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왔던 것이다. 작고 안락한 울타리를 넘어서 드넓고 거친 세상 속에서 긍정의 눈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리라.

 포근하고 아름다운 봄이 오기도 전에 제풀에 지치지만 않는다면, 봄은 반드시 온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매서운 바람이 가시고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대도 우리 스스로가 변화를 수용하고 불안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봄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쿠델카의 생이 우리에게 증언해 주듯이, 언제 어디에 있든 세상과 소통하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깨어 있는 눈과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변화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동경이다.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내 안에서 샘솟는 생명의 기운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어쩌면 봄은 이미 충분히 우리 곁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이 그걸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신수진 연세대 인지과학연구소와 한진그룹 일우재단에서 일한다. 수용자 중심의 예술비평을 바탕으로 전시·출판·교육 등 시각적 소통 작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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