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와 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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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채플린」의 「유머」는 「휴머니즘」에 넘친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을 매몰시키는 현대문명에 도전했다. 이런 장면도 인상에 남는다. 두 배우가 어쩌다가 말다툼을 하게 된다. 그들은 사흘동안이나 지치지 않고 다툰다. 결투 아닌 방법으로는 어떻게 승부를 가릴 수 없게 된다. 언쟁은 그 정도로 초점을 잃어버린 것이다. 두 청년은 한사람씩의 증인을 대동하고 후원으로 간다. 웃옷을 벗어 던진다. 「보디·체크」를 받고 흉기가 없음을 서로 확인한다. 칼을 잡는다. 긴장.
이때 관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진다. 두 검사의 몸집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홀쭉이와 뚱뚱이의 대결이니 말이다. 「홀쭉이」는 잠깐 작전 「타임」을 요구한다. 그리고는 증인으로부터 만년필을 빈다. 성큼성큼 그는 적에게로 걸어간다. 만년필로 그의 가슴에 원을 그린다. 자기 가슴에도 그와 똑같은 크기의 원을 그린다. 공격목표를 그 원에 한정하자고 제한한다. 기회균등의 결투정신이다. 「채플린」의 이런 「유머」는 서구의 신사도적 관용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영국의 선거사를 펼쳐보면 실로 놀란다. 「국민헌장」을 의회에 제출했던 「T·S·단콤브」 의원은 1820년대의 선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선거전이라 함은 마음이 약한 사람이나 돈을 갖지 못한 사람의 할 일은 아니다.』 이 무렵의 후보는 호별방문이 아니라 주점방문을 해야 했다. 유권자들은 음식점에만 모여 있었다. 선거와 전통적인 신사관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직도 우리는 검객이 칼을 놓쳤을 때 그에게 칼을 집어주는 관용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화면 속에서나 이루어지는 일이다. 우리의 현실은 딴판으로 건조하고 무생물적이다.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를 물어뜯는 현실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페어·플레이」는 인간정신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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