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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기다려 30초 진료…200명씩 보는 의사도 불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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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달 27일 오전 서울의 한 대학병원 산부인과 진료실 앞에서 만난 최모(38·여·서울 영등포구)씨는 영 언짢은 표정이었다. “진료 잘 받았어요”라고 기자가 묻자 “정말 황당하다” “무시당한 기분”이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최씨는 2주 전 이 병원에서 ‘자궁암 의심’ 진단이 나와 각종 검사를 하고 이날 결과를 보러 왔다. 예약시간 한 시간 뒤에야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20초 정도 지났을까. 의사는 이런저런 혼잣말을 하다가 “암 아니네”라고 말했다. 최씨한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질문을 하려고 하니 의사가 손으로 제지했다. 그래도 용기를 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의사가 간호사에게 눈짓을 했고, 최씨는 간호사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최씨는 “다음에 또 와야 할지도 몰라 아무 말도 못했다”고 말했다.

 최씨를 진료한 의사는 이날 오전 9시~오후 3시30분 152명의 환자를 봤다. 짧은 시간에 환자를 소화하려고 두 개의 방(진료실)을 하루 종일 왔다갔다 했다. 방 사이 칸막이에 문을 만들어 그 안에서 왕복했다. 간호사가 모니터에 미리 환자 자료를 띄워 놓으면 그걸 살펴 진료한다. 짧게 진료하고 옆방으로 옮긴다. 거기에도 자료와 환자가 준비돼 있다. 모니터만 보면 된다.

 요즘 대학병원 진료실의 한 단면이다. 환부를 만지거나(촉진·觸診), 살피거나(시진·視診), 청진기(聽診器)를 대거나 두드리는(타진·打診) 등의 정상적인 진찰법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두세 개 방을 짧게 오가는 진료 방식이어서 ‘모니터 진료’ ‘컨베이어벨트식 진료’로 불린다. 한두 달 기다리다 갔는데 대개 30초~3분 진료받는 게 고작이다. 연세대 유승흠 명예교수(한국의료지원재단 이사장)는 “환자와 의사의 교감이 매우 중요한데 그게 사라진 지 오래다. 요즘 진료실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본지 조사 결과 전국 주요 대학병원들은 지난 1일 3000~8500명의 외래환자를 진료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병원이나 유명 의사 쏠림 현상이 심화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어떤 교수는 하루에 200명 가까이 진료하기도 한다. 요즘 의료가 컴퓨터단층촬영(CT)·자기공명영상촬영(MRI) 등의 첨단검사장비나 유전자 검사 등 각종 검사 의존도가 높아진 것도 모니터 진료를 부추긴다.

 의사나 병원도 불만이 많다. 한 대학병원 정형외과 전문의는 “30초 진료하나 30분 진료하나 진찰료가 같다. 굳이 길게 환자를 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다른 병원 암 전문의는 “누군들 10~20분 진료하면서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은 줄 아느냐”며 “교과서대로 하면 병원이 망한다”고 말했다.

 의사가 보는 환자 수를 줄이고 진료 시간을 늘리면 대기 시간이 길어져 환자 불만이 커질 수도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신영석 부원장은 “대형병원-지방·중소병원 네트워크를 강화해 대형병원 환자를 줄여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의대 윤석준(예방의학) 교수는 “적정 진료 환자 수를 정하고 이를 넘으면 진료수가를 깎되 입원 수가를 올리자”고 제안했다.

 신성식 선임기자, 배지영·장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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