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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3곳 뛰는 ‘메뚜기 진찰’의사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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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과거에는 의업(醫業)이 고도의 전문직으로 간주돼 의사 진료는 불가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양질의 의료를 받는 것이 국민의 권리임을 주장하게 됐다.’ 1994년 발간된 『의료총론』(연세대 의대 유승흠·양재모 지음)은 의료의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6년 뒤 이런 권리가 보건의료기본법에 담겼다. 이 법 제12조는 “국민은 의료인으로부터 질병 치료방법 등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 동의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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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같은 의료 교과서와 법대로 환자의 권리가 보장되고 있을까. 본지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 암 전문의의 양해를 구해 그의 하루 진료 전 과정을 취재했다. 2일 오전 9시50분 진료가 시작됐다. 간호사가 오전 101명, 오후 52명을 진료해야 한다고 알렸다. 교수는 “뭐? 나를 죽여라 죽여, 153명을 어떻게 다 보라고. 30초 진료하라고?”라고 말했다. 기자를 의식해서인지 처음에는 환자의 목을 짚거나, 환자·보호자와 모니터를 같이 보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보호자에게도 “걱정 마세요”라고 안심시켰다. 1~3번 방(진료실) 사이 문을 반복해서 오갔다. 환자당 4~5분 정도 걸렸다. 하지만 환자가 밀리자 1분 내외로 줄었다. 환자 얼굴도 안 보고 인사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어떤 환자는 질문하려다 교수가 일어서려니까 말문을 닫았다. 오후 5시30분까지 환자를 다 보려면 기자의 시선을 의식할 틈이 없었다. 이 교수는 이날 점심을 김밥으로 때웠다.

 본지 취재 결과 환자의 권리도, 의사의 정상적인 진료권도 온데간데없고 ‘모니터 진료’만 남아있었다. 어떤 병원은 진료실에 환자 3명이 동시에 들어오게 한다. 자궁질환 환자 김모(29·충남 천안시)씨는 “다른 환자 앞에서 의사가 ‘성관계를 얼마나 했느냐’고 물어 너무 민망했다”고 말했다. 의사도 하루에 150~200명을 보고 나면 목이 붓고 녹초가 된다. 설명 못해준 게 아쉬워 블로그에서 질문을 받기도 한다.

 이런 컨베이어벨트식 진료가 벌어지는 이유는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 때문이다. 서울아산·삼성서울·서울대·세브란스(신촌)·서울성모병원 등 ‘빅5 병원’의 진료비가 2007년 전체의 32.8%에서 2011년 36.7%로 증가했다. 환자들이 큰 병원을 선호하고 외래 방문 횟수가 많은 탓도 있고, 병원들이 외래환자를 많이 끌어들인 이유도 있다. 외래환자는 이런저런 검사를 하기 때문에 수익률이 입원환자보다 높다. 반면 입원 수가는 낮다. 병원경영연구원 이용균 실장은 “유럽연합(EU)의 경우 건강보험 지출의 60~70%가 입원환자이고 외래환자 비중은 낮은 데 비해 한국은 반대”라고 말했다.

 큰 병원 쏠림을 막기 위해 외래환자를 많이 보면 진찰료를 깎는 방안이 있다. 동네의원은 의사 한 명이 하루에 76명 이상 보면 진찰료를 10~50% 깎는데, 정부가 큰 병원에도 이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오래 진료할수록 진찰료를 올리자는 의견도 있다. 연세대 의대 김소윤(의료법윤리학) 교수는 “정신과의 경우 30분 이상 보면 진료비가 올라가는데 다른 데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증 외래환자가 큰 병원을 찾지 않게 하는 방안도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경증환자가 큰 병원에 오지 않도록 진료비를 높이고 전문병원이나 지역거점병원으로 가면 환자 부담을 줄이는 방안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의대 윤석준(예방의학) 교수는 “의사의 실력을 잘 모르니까 환자들이 큰 병원 의사는 무조건 실력이 있는 걸로 믿고 몰린다”면서 “의사별 진료의 질을 평가해 공개하고 진료비를 가감(加減)하면 환자를 분산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신성식 선임기자, 배지영·장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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