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은 전쟁 협박하는데 … 탈북자는 NLL 뚫고 월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탈북자가 어선을 몰래 훔쳐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유유히 넘어간 사건은 우리의 서해 최북단 안보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음을 보여준다. 북한의 전쟁 위협이 고조된 시점에 국방부와 군이 철통경계를 강조해 오던 와중에 터진 일이어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노크 귀순’에 이어 또 경계에 실패했다.

 꽃게잡이 어선인 진흥3호(9.7t)를 훔쳐 월북한 탈북자 이혁철(28)씨가 출항이 금지된 야간에 어선을 몰고 나간 것부터가 납득하기 어렵다. 군 관계자는 “어선이 항구에 들어오면 어선통제소에 선박 엔진 열쇠를 맡겨야 하는데 최근 선장이 관리하도록 규정이 바뀌었고 어제는 배에 열쇠가 꽂혀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1일부터 꽃게잡이 성수기에 돌입하면서 생계문제를 앞세우는 어민들의 민원이 거세다는 이유로 어업지도선·해양경찰·해군 등의 NLL 주변 관리가 허술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선박 감시 레이더에도 사각지대가 드러났다. 연평도에 설치된 해병대 레이더 2대는 NLL이 있는 북방을 향해서만 탐지하도록 설치돼 있다. 따라서 연평도 남방에 있던 어선이 야간에 월북할 경우 NLL에 근접한 지점에 이르러야만 이를 탐지할 수 있는 허점이 노출됐다. 군이 이를 파악하고 출동했을 땐 이미 손을 쓰기에 늦을 수밖에 없다.

 이씨가 진흥3호를 훔쳐 연평도 당섬 선착장을 출발한 것은 3일 오후 10시33분 무렵으로 추정됐다. 이씨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연평도 동남쪽 연안을 따라 북상했다. 선착장에서 NLL까지는 약 3.4NM(해상마일, 6.12㎞)로 지척이었다. 진흥3호는 시속 13노트의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해안 초병들이 육안으로 목격했지만 해경선인지 어업관리선인지 분간이 어려웠다고 한다.

 오후 10시49분 진흥3호가 NLL을 넘은 시점에 선장이 이씨에게 휴대전화를 걸었다. 당시 이씨는 “나는 장군님(김정은 지칭) 품으로 간다”고 말했다고 군 소식통이 전했다. 이에 대해 선장이 “지금이라도 돌아오라”며 설득했지만 이씨는 “XX야,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지”라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연평도 레이더가 진흥3호를 탐지한 시간은 이날 오후 10시46분쯤. 진흥3호가 NLL 남방 0.6NM(1.08㎞) 지점까지 근접해 있던 시점이었다. 민간 어선의 NLL 월북이 임박한 긴급 상황임을 뒤늦게 파악한 서북도서방어사령부는 오후 10시51분 연평도 남쪽 당섬 기지에 계류 중이던 해군 고속정 참수리호에 출항을 지시했다. 이미 진흥3호가 NLL을 넘은 지 2분 뒤였다. 오후 10시54분 참수리호가 출항했을 때 진흥3호는 이미 NLL 북방에서 유유히 북쪽 해안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씨가 연평도 선착장을 출발한 시점부터 NLL을 넘을 때까지 약 16분의 시간이 있었지만 진흥3호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월북한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2010년 11월 북한의 포격도발이 벌어진 민감한 서해 최북단 섬에서 탈북자가 버젓이 취업을 이유로 들어간 것부터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씨는 네 번 탈북한 뒤 이번을 포함해 네 번 월북한 수상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한 대북 소식통은 “탈북 전력에서 보듯 충분히 위장탈북 냄새가 나는 인물이었다”고 토로했지만 아무런 특별 관리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새터민(탈북자) 지원 시설인 하나원에서 적응교육을 마친 이씨는 2007년 이후 경북 포항 일대에서 선원으로 일 해오다 지난달 21일께 연평도에 들어간 것으로 우리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이 전쟁 협박을 쏟아내던 시점이어서 이혁철이 서울을 오가며 기밀 수집 활동을 했는지 조사가 필요한 대목”이라고 전했다.

 국방부 당국자는 “탈북자가 민감한 서해 북방 도서지역에서 어선을 절취해 월북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방어에 취약점이 노출된 만큼 종합적·구조적인 보완 대책이 절실하다”고 털어놨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관계기사]

'탈북·재입북 4번' 이씨, 포항서 선원 취업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