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37) 치산녹화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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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72년 11월 1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경남과 경북 경계에 걸쳐 있는 동대본산의 사방사업 현장을 찾았다. 박 대통령이 가운데 의자에 앉아 공사 현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구자춘 경상북도 도지사다. [고건 전 총리 제공]

1972년 동대본산 사방사업 경과 보고서를 올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김현옥 내무부 장관이 나를 불렀다.

 “대통령 주재 경제동향보고회에서 그 내용을 직접 보고해요. 청와대 지시야.”

 깜짝 놀랐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월례 경제동향보고회가 있었다. 경제상황을 정리해 매달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경제장관급 회의였다. 이 회의에 동대본산 녹화사업을 보고 안건으로 택할 만큼 산림녹화에 대한 박 대통령의 집념은 컸다. 또 경제 각료에게 국토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공부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며칠 후 떨리는 마음을 안고 슬라이드와 설명 자료를 챙겨 서울 광화문에 있는 경제기획원으로 향했다. 대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는 오전 10시에 시작했다. 내가 보고할 차례가 되자 회의장의 불이 꺼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프로젝터로 슬라이드를 바꿔가며 공사 전후 산의 모습을 비교해 설명했다. 프로젝터가 말썽을 부려 떨리는 손으로 슬라이드를 허둥지둥 갈아끼웠던 기억도 난다.

 발표를 시작한 지 10분쯤 흘렀을까. 얼마나 긴장했던지 그제야 4~5m쯤 앞 회의장 가운데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앉아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의 첫 대면이었다. 20~30분간의 보고가 끝났다. 발표를 주의 깊게 듣고 있는 박 대통령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살았다’. 발언대에서 내려오며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후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막중한 업무가 내게 맡겨졌다. 나에게 A4용지 반만 한 크기의 작은 종이 한 장이 전달됐다.

 ‘내무부 장관 귀하.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 보고할 것’.

 종이 위쪽에 그려져 있는 봉황 무늬가 눈에 확 들어왔다. 대통령의 친필 지시 메모였다.

 1~2개월 전국의 여러 산을 찾아다니며 성공·실패 사례를 연구했다. 산림청 범택균 육림과장과 김인표 조림과장은 산림 전문가로서 많은 조언을 해줬다. 특히 손수익 산림청장으로부터 두 차례 자문을 받았다. 손 청장은 내무부 지방국장을 거쳐 경기도지사로 일하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산림청장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추진력과 기획력이 뛰어났다.

  국토조림녹화 계획안을 마무리해서 김현옥 내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김현옥 장관은 바로 청와대에 보고하러 갔다. 그날 오후 4시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날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열리는 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해 국토조림녹화 계획안을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그때는 커다란 갱지 전지에 손으로 직접 써서 차트를 만들었다. 70~80장에 달하는 차트를 써야 했다. 정신 없이 보고 준비를 시작했다. 저녁 시간이 되자 김현옥 내무부 장관이 식사를 같이 하자고 불렀다. 장관실 옆에 소접견실이 있었다. 그곳에 김현옥 장관, 정상천 차관, 새마을담당관인 나를 비롯해 기획관리실장, 지방국장, 치안국장, 행정담당관, 재정담당관 등 7~8명이 모였다. 보통 메뉴는 추어탕인데 김현옥 장관의 기분이 좋았는지 생선회가 차려져 있었다. 김 장관은 즐겁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보고는 고 담당관이 맡도록 해.”

 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특수사방 사업의 결과를 보고하기는 했지만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안을 설명하는 것은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다른 차원이었다. 범부처 차원의 중장기 계획을 부이사관급이 보고한 전례가 없었다. 직속상관인 김수학 지방국장이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김수학 지방국장님이 맡아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야. 그건 계획을 작성한 사람이 직접 보고해야지.”

 다시 사양했다. “그래도, 제가 하는 건 아무래도 아닌….”

 장관 지시에 세 번이나 토를 달았다. 내 잘못이었다. 갑자기 김현옥 장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갑자기 내 귀 옆으로 뭐가 ‘휙’ 하니 지나간 뒤 벽에 부딪쳤다.

 “쨍!”

 유리 재떨이였다. 내일 보고를 해야 하니 얼굴을 정면으로 맞추진 않았나 보다. 그래도 내 쪽을 겨냥하고 던진 건 분명했다. 보고는 결국 내 몫으로 돌아왔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김현옥

김현옥(1926~97)=군인 출신 행정가. 육사 3기로 육군 수송학교 교장, 항만사령관을 지낸 그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1962년 부산시장으로 발탁했다. 부산시장으로 일하면서 ‘불도저’란 별명을 얻었다. 한번 결심하면 빠른 속도로 밀어붙이는 추진력 때문이었다. 66년 서울시장에 임명됐다. 청계고가도로, 남산 1·2호 터널, 광화문·명동 지하보도 등 수많은 공사를 추진했다. 속도전은 부실공사로 이어졌다. 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이 발생해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났다. 71~73년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81년 교육자로 변신했다. 부산 장안중·제일고 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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