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밀양의 석화 동인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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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젊은 예술인은 해야 할 많은 일거리를 그들 고향에 산적해 두고, 이미 도회로 이주하고말았다. 그들은 도회의 석유냄새 나는 하류 잡지나 어두운 다방에 파묻혀 고향을 잊어가고 있다.』 밀양의 「석화」 동인들은 「고향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벌써 58년에 동인회로 결집했다. 동인지는 지금 5집째 편집 중이다.【밀양=최종율 기자】
이운성씨(39·밀양 교육청 문화부장)·박재호(40·밀양 문화원) 류종관(45·밀양 삼문동) 예종숙(32·대구 대륜고로 전근)씨 등 단출한 4명의 동인. 이들은 『절실한 향토애』에서 뜻이 맞았다. 다시 이렇게 계속되는 예종숙씨의 글. 『농부의 아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관리나사원이 된다. 그들은 땅의 질서에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의 일손을 기다리고 있던 농지는 황량한 들판이 되어가고 윤 나는 쇠고랑은 점차 녹슬어 간다. <「코사크」의 땅은 「코사크」에게>라는 절규 속에서 우리는 농부의 아들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석화」 동인들은 저 마다 10년이 훨씬 넘게 고향에 「묻혀」시작생활을 해 왔다.

<10년넘는 기성인들>
류종관씨의 경우는 30년이 넘는 작역이다. 이운성씨도 박재호씨도 20년씩은 시작을 해왔다. 예종숙씨는 12년간. 이들은 중앙문예지의 추천 과정을 밟은 이른바 「기성」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향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문명을 얻으면 도회지로 이삿짐을 「정례」에 스스로 반발이라도 하는 것 같다.
중앙문예지의 지면은 1넌에 한번 얻을까 말까. 그나마도 기고 형식으로.
「팜플릿」형으로 밀양에서 일그러진 평판 인쇄로나마 찍어내는 동인지에 보람을 찾는다. 때때로 그들이 주최하는 「문학의 밤」이니, 「백일장」 혹은 「시화전」에는 여간한 열성들이 아니다. 『시민의 문화 의식을 높이기 위해』 이런 「문학행사」를 갖는다고 말한다. 다방에서 열리는 「문학의 밤」에는 70여명의 동호인이 모인다. 문예교사, 문학 지망생들.
자정이 가깝도록 문학 토론이 계속되는 때가 많다.
『왜 시를 쓰는가…』하는 질문에는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입니다.』(예종숙씨)는 결론이 반복된다. 「시의 격식」이 엄격하게 비평된 적도 있었다. 중앙문단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작품의 격식도 「중앙적」인 것을 따르려는 신인(지방의)들의 경향이 따끔한 비판을 받은 것이다. 『지방 문학의 개성을 발굴하고 보존할 수는 없을까?』 그 논쟁은 이런 문제로 확대되었다.
이운성씨는 말한다. 『아름다운 토속어를 일깨워야 한다. 그 재발견 작업은 재구성으로 까지 발전되어야 한다. 토속어는 너무 가혹하게 매몰되고 있다. 기능에만 위주된 현대의 언어는 살벌한 의식만을 과장하는 것 같다. 이런 결과는 문인이 더구나 우리가 책임질 일이다.』향토적인 정서를 시로 승화시키는 문제가 절실해 졌다.
『촉촉한 흙을 손에 담아 본다. 담지 못해 볼에다 비벼도 본다. 오랜 역사가 홍수로 하여 날라다 준 보전의 옥토. 흙내가 난다. 조상들의 피땀어린 흙 내음. 오! 나의 흙, 나의 땅이여.』
류종관씨의 작품엔 그런 향기나 배어있다.

<출판은 주머니 털어>
동인지를 내자면 42「페이지」의 부피로도 2만여원이 든다. 각자 5천원부담.
그러나 힘에 겨워 5집을 3년째나 끌어왔다. 찬조를 하는 사람도 몇 명 있긴 하지만….
『힘겨운 「포킷머니」를 털어 만든 이 책을 소일 저명인에게만 앞앞이 발송해야 할까?』하는 「옹색함」이 이 후기에도 엿보인다. 그러나 가난을 이기는 문학에의 열애는 이들을 의욕으로 이끈다. 『하나의 멋진 시를 쓰고 싶다. 다만 이것 때문에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에 불경죄를 진대도 각오한다.』 예종숙씨는 계속해 말한다. 『그러나 시로써, 인생으로써 실패를 예기하면서도 하나의 시를 알게 될 때까지 계속할 것을 생각하면 퍽으나 다행이다.』고-.
밀양을 휭 감고 흐르는 남천강, 그것을 굽어보는 영남루엔 봄볕이 따가왔다. 그곳의 돌 무늬를 따서 「석화」가 된 이 동인들은 자주 여기를 산책하며 문학을 얘기한다. 그들은 언젠가 이 강변에 「문화센터」를 건립하는 것을 꿈으로 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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