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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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
정치외교학과

정전협정 60년.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공포에 시달린다. 북은 “서울과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정전협정과 불가침합의를 백지화한다고 선언했다. 우리 군도 북측이 도발을 감행할 경우 “도발 원점과 지원세력은 물론 그 지휘세력까지 강력하고 단호하게 응징할 것”이라고 대응했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긴장이 한반도를 관통하고 있다.

 북한은 왜 이렇듯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3차 핵실험을 했으니 유엔의 추가제재는 당연한 것이고, 한·미 합동군사훈련 또한 연례행사로 이미 북측에 통보된 바 있지 않은가. 3월 12일자 노동신문은 이를 가늠할 수 있는 단초다. 자신들은 ‘당당한 핵보유국’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미국이 “핵 선제 타격정책,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중앙통신도 같은 날 “‘조선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불순한 목적에 둔 미국의 야망은 실현될 수 없다”며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청산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제 미국과의 평화협정 없이 비핵화는 불가하다는 북의 입장을 분명히 해주는 대목이다.

 물론 미국의 입장은 다르다. 3월 13일 미국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그동안의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북한의 침몰(sink)’을 목적으로 깔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과시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최소한의 요구조건으로 걸고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고 책임 있는 행동을 보였을 때 대화를 재개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그의 말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북한이 지난 20년 동안 ‘식량원조나 다른 양보’를 얻기 위해 “숟가락을 식탁에 내던지고” 판을 깨왔으므로, 이런 나쁜 행동에는 더 이상 보상이 있을 수 없다는 부분이다.

 중국의 행보에 대한 워싱턴의 희망 섞인 해석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은 그동안 북한 정권의 붕괴가 자국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 북한의 잘못된 행동을 참아왔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발언만 해도 그렇다. 워싱턴의 ‘아시아로의 회귀’라는 대중 견제전략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과연 중국이 그런 협조를 해줄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소극적으로 이행하는 일이야 가능하겠지만 ‘북한의 침몰’이라는 큰 틀의 구상에 동참할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다.

 누구도 양보의 기색이 없는 형국. 이제 북핵 문제는 고르디우스의 매듭만큼이나 단단히 엉켜 있다. 미국이 알렉산더 대왕처럼 단칼에 이 매듭을 잘라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게 그리 녹록지가 않다. 전쟁이라는 최악의 재앙을 염두에 둬야 하는 까닭이다. 북한도 중국도 이 난제를 풀어낼 인내심이나 지혜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현시점에서 이 매듭을 차근차근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박근혜 정부뿐이다. 상황이 꼬여갈수록 잃을 게 가장 많은 건 다름 아닌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먼저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연계하는 담대하고도 포괄적인 전략적 로드맵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점진적 접근보다는 동시행동 원칙에 따른 일괄타결 방안이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5월 방미 전에 북한과 접촉해 추가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잠정 중단, 이란 등에 대한 핵확산 방지 확약 등을 받아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금강산 사업의 재개나 5·24조치의 부분적인 완화 같은 카드도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놔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을 감안하면 ‘통 큰 딜’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본다.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북·미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북핵 문제 해결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를 오바마 대통령에게 설득해야 한다. 그의 굳어진 인식 틀로는 현재 상황을 반전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이명박 정부의 정책과 어떻게 다른지를 부각하면 설득이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북·미·중 4개국 정상회담 개최를 통해 종전선언을 채택하고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오바마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모두가 전쟁을 말하는 지금, 지나치게 이상적인 접근법으로 들리는가. 그러나 사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와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한반도 위기가 고조된 지금이야말로 매듭을 풀기 시작할 절호의 기회다. 문제 해결의 진정한 장애물은 대립과 갈등, 그 자체보다는 ‘억지와 제재’의 타성과 피로감이기 때문이다. 가장 어두워진 순간, 가장 창조적인 발상을 통해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평화의 새 판을 만들어낼 대담한 사고가 절실하다. 그야말로 ‘평화 대통령’으로서의 담대함 말이다.

문 정 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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