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파워 조직화된다

중앙일보

입력

3년 전까지 서울 상명중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했던 최두석 (64) 씨.

그는 얼마전 서울 용산도서관에서 중고등학생의 상담 교사로 변신했다. 보수가 없는 자원봉사다. 하지만 최씨는 은퇴 후에도 자신의 노하우를 살려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하루 하루가 즐겁다.

"할 일을 찾을 수 없어서 무료하게 지냈던 지난 3년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동사무소에 가서 자원봉사 일거리를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죠. 하지만 미국에 사는 아들 집에서 1년간 지내면서 미국 정년 퇴직자들의 활발한 사회활동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

최씨는 귀국 후 적극적으로 할 일을 찾은 끝에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 (인추협)에서 학생 지도를 시작했다.

서울 용산의 인추협에는 최씨와 같은 이유로 모여든 은퇴자들이 1백명이 넘는다. 이들이 하는 일은 학생 상담과 체험학습 지도, 행정 자료정리 등이다.

인추협의 고진광 사무국장은 "이곳을 찾은 은퇴자들은 자신의 노하우와 인생 경륜을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며 즐겁게 일을 한다" 며 "이들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국가적인 시스템을 개발해야 할 시점" 이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현업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시간의 흐름에서 뒤쳐진 사람들,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보내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은퇴후에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2년전 한국퇴직교원협회가 만들어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퇴직후 내 능력이 사장돼 버리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데도 집에서 놀고 있는 동료들의 힘을 모아보려고 했죠. "

퇴직교원회 이규삼 (66) 씨는 그날 이후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근처 노원복지관을 찾아 상명여대 부속 중학교 아이들의 상담교사, 한자와 붓글씨 교사로 활동해 왔다. 또 탈북자 자녀들의 한국 적응을 돕는 상담역도 맡았다. 현재 퇴직교원회의 회원수는 약 3천여명에 달한다.

스스로 권익을 찾자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이를 위한 정당까지 만들어 졌다. 노년권익보호당 (노권당) 은 지난해 11월 발기인 대회를 열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창당준비위원회 등록까지 마쳤다.

노권당 준비위원장 박계승씨는 "빠른 속도로 노령 사회에 진입하고 있는 현실에 비해 우리의 노인복지정책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며 "정부의 선심성 정책에 기대는 대신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권리와 복지를 주장하기 위해 당을 만들었다" 고 말한다.

이들이 밝히는 정책 목표는 일단 유명무실한 경로연금의 액수를 2배이상으로 늘리는 것. 또 전체 예산의 0.32%에 불과한 노인 복지 예산을 1.5%로 확대하고 노인을 위한 치매병원 중풍병원 등을 10배이상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지난 15일 창립대회를 개최한 대한은퇴자협회는 새로운 장년 문화 정착을 주장하고 나섰다.

한국노인문제연구소.전국농업기술자협회.자원봉사단체협의회.한국씨니어연합.참여연대 등 34여개의 단체가 참가한 이날 행사에는 4백여명의 장년층 인사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전체 미국 50세 이상 노인의 52%를 회원으로 갖고 있으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미국은퇴자협회가 그 모델이다.

"은퇴에 대한 개념을 바꾸겠습니다. 은퇴를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제2의 인생이 펼쳐지는 새로운 시작으로 봐야 합니다" .

대한은퇴자협회의 주노명 회장은 창업이나 자원봉사 활동을 주선하고 장노년층의 여행.구매.의료 정보를 제공하는 작업을 해나갈 예정.

한국사회복지협의회 문태준 회장은 "우리나라의 한 전임 고위공직자가 공항 출국카드의 직업란에 '은퇴자' 라고 쓰자 공항직원이 그런 말은 없다며 '무직' 으로 고쳐쓰라고 해서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라는 에피소드를 전하며 "은퇴자들도 당당하게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 이라고 강조했다.

박혜민 기자 <acirf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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