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중엽-말엽 인물중심 -유홍렬|지도학의 최고봉 고산자 김정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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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그러나 고산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조직적인 두뇌를 갖추어 어려움을 무릅쓰고 공부에 힘썼으며 자람에 미쳐서는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있어서 정확한 지도와 지지가 필요함을 깨닫고 서울로 옮겨와 한편으로는 이 방면의 관계업적을 두루 섭렵하여 깊이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전국 각지를- 아마 끼니와 잠자리를 구걸하는 과객의 신세로- 힘껏 몸소 살피어 1834년에는 드디어 지도와 지지를 겸한 청구도 2권을 완성하였다. 큰 업적을 대성하였지만 그는 더욱 완전하고 보다나은 업적을 이룩하기 위해 고달픈 연구생활과 실지답사를 이후 근30년 동안 꾸준히 계속하여 1862년(철종12)에는 대동여지도 22첩1질을 완성하여 손수 판각하고 다시 1864년에는 대동지지 32권을 엮어냄과 아울러 대동여지도의 재각본을 인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도는 적 부순다 작전상 필요 느껴>
고산자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지도와 지지의 편찬이 있었고 특히 농포 정상 기(1678∼1752)는 백리축척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원형에 가까운 동국지도를 만들었으며 영·정 무렵에는 정철조·황엽·윤영 등이 방안을 이용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었다. 고산자는 윤영 등의 업적을 참고한 위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근대과학사상의 영향을 받고 또 피나는 고투로써 상기한 업적들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거의 근대적인 정확한 지도를 남겼는바 이러한 결실은 실로 그 자신이 항시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였던 『지도와 지지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는 적을 쳐부수고 난포한 무리들을 진압하는데 도움이 되며, 평화시에는 정치를 수행하고 사회의 모든 일을 다스리며 경제정책을 시행 조처하는데 이용될 것이다』라는 신념에서 우러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업적을 대략 살펴보면 청구도 혹은 청구선표도, 청구요람)는 상하 2책으로 서로 맞추면 연락되도록 되어있다.

<간단한 설명 붙여 지도와 지표까지>
먼저 최한기가 쓴 청구도제, 그리고 그 자신이 쓴 범례(9항)와 지도식이 보이고 이어 ①본조팔도주현도총목 ②도성전도 ③주현도와 부록으로 신라구주도현총목 외 2점이 수록되었다. 그는 이 청구도의 지도식에서 이미 지도제작법에 관하여 기하학의 동심원적 방법의 준례를 들었고 기하학원본에 의거하여 방안에 의한 지도의 확대 또는 축소법을 밝히었다.
하지만 지도와 지지는 각기 생명을 갖고있으며 특히 지지를 완전히 지도에 나타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지지의 필요를 절감하여 만들어진 것이 대동지지이다. 그는 이미 청구도의 범례에서 각 주현 중심의 읍지편찬을 위한 요목형식(건치연혁성곽 장시 토산 등 39항)을 제시하고 『지는 도의 미진한 곳을 밝히고저 함이니 국가에서 제읍으로 하여금 제시요목에 의거하여 읍지를 만들게 하고 이를 중앙에서 종합·정리하여 지와 도가 출행 되도록 해야한다』고하였다.

<분첩으로 만들고 10리 방안 넣어 예시>
끝으로 대동여지도 또한 청구도와 같이 방안의 이용을 지도제작의 기본으로 삼았으나 청구도와는 달리 분첩절첩식으로 만들어 이용에 매우 간편케 하였다. 즉 전국을 횡으로 22층으로 나누어 각기 지도를 그렸지만 이를 순차적으로 연첩하면 그대로 전국의 총도가 되도록 하였다. 제1첩의 맨 먼저에 그 제첨이 있고 이어 그가 이용한 방안(정간)을 예시하고 다음 읍치 성지 창고 등의 부호를 나타낸 지도표, 그리고 총설 및 서문격인 지도유설과 경조(서울) 5부방리도도 실려있다. 특히 이 지도에서는 도로선표에 10리 간격으로 점을 찍어 자체의 이정은 물론, 그 주위와의 거리 및 이수를 짐작하게 한 점과, 서로 복잡하게 얽힌 도로망과 아울러 꾸불꾸불한 산천의 본지를 한층 분명히 그려낸 점 등은 주목된다.
이상과 같은 고산자의 공헌이 얼마나 훌륭하였는가는 청일전쟁(1894·5) 당시에 일본군이 대동여지도를 작전지도로 이용하였다는 사실로써 넉넉히 짐작할 수 있거니와 오늘날에도 그의 업적을 통하여 옛 주현의 분리와 병합이라든지 성벽의 이동 등을 살필 수 있고 다시 산천과 역참(참) 방읍(면리) 등의 원명(고명)을 찾아 고어의 잔영을 찾아낼 수 있는 터이니 그 학술연구사상의 비중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문박·대구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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