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박정희' 전문가가 본 취임연설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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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첫 업무를 보고 있다. 왼쪽부터 곽상도 민정·조원동 경제·이정현 정무·주철기 외교안보 수석, 허태열 비서실장, 박 대통령, 박흥렬 경호실장, 이남기 홍보·유민봉 국정기획·최성재 고용복지·최순홍 미래전략·모철민 교육문화 수석.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해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의 유세는 가급적 미사여구를 배제하면서 핵심 메시지를 간단 명료하게 전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25일 그의 대통령 취임식 연설도 전형적인 ‘박근혜 스타일’을 보였다는 평가다. 중앙일보가 25일 역대 대통령들의 취임사 분석 연구를 해온 김광웅 명지전문대 총장(서울대 명예교수)과 임동욱 한국교통대 행정학과 교수에게 의뢰해 박 대통령의 취임사를 분석해봤다.

 우선 두드러진 특징은 “미국 대통령들의 취임 연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무미건조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박 대통령의 메시지는 분명하게 드러났다”(임 교수)는 점이다.

 취임사의 핵심 메시지는 집권 5년 동안 창조경제를 신성장동력으로 삼아 경제부흥을 일으켜 국민행복 시대를 이끌겠다는 것이다. 그는 ‘국민행복’의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희망·꿈·사람·안전·잠재력 등과 같은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임 교수는 “ ‘경쟁에만 매달려 있으면 우리의 미래도 얼어붙을 것입니다’란 대목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법이 정의로운 방패가 되어 주는 사회’란 표현은 인상적인 레토릭(rhetoric)이었다”고 말했다. 5년 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교육현장에 경쟁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박 대통령은 정반대의 지향점을 보여준 것이다. 김 총장은 “박 대통령이 여러 차례 융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21세기의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짚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코드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경제부흥’ 같은 용어가 대표적이다. 김 총장은 “경제부흥이란 말은 박정희 정권 때 즐겨 쓰던 말인데, 굳이 박 대통령이 경제성장이나 경제도약 같은 말을 안 쓰고 이 말을 고른 것은 다분히 아버지의 영향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독일 광산’이나 ‘한강의 기적’ 같은 표현도 그렇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직후 경제개발을 위해 독일에 광부·간호사들을 파견하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차관을 빌렸는데 1964년 독일의 탄광을 방문해 파독 광부들 앞에서 연설을 하다가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임 교수는 “미국 대통령의 취임사엔 반드시 공동체가 소중히 여기는 과거의 기억을 미래의 지표로 삼는 대목이 들어간다”며 “박 대통령도 경제부흥을 위해 60~70년대 흘렸던 피와 땀을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총장도 “취임사뿐만 아니라 취임식 행사 전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성을 부각하기 위해 많이 애쓴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역대 대통령들이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했던 데 비해 박 대통령은 경제성장률 목표를 제시하지 않은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중앙일보 유민라운지에서 박근혜 대통령 취임사와 관련해 대담을 하고 있는 김광웅(왼쪽) 명지전문대 총장과 임동욱 한국교통대 교수. [김성룡 기자]

  북핵에 대한 메시지는 단호했다는 평가다. 임 교수는 “5년 전 이 전 대통령은 북한을 비핵·개방으로 이끌어 1인당 소득 3000달러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애초부터 가능성이 적어 보이는 얘기였다”며 “박 대통령은 군더더기 없이 북핵실험의 최대 피해자는 북한 자신이 될 것임과 그럼에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기회는 열려 있다는 두 가지 포인트를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했다”고 분석했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김 총장은 “대통령 취임사는 제의(祭儀·Epideictic)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단순한 메시지 전달 이상의 의미를 담아야 하는데 박 대통령의 취임사는 예전의 대선 유세의 연장선상이었다”고 말했다. 메시지만 중시하다 보니 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김 총장은 “연설 뒤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구가 몇 개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며 “박 대통령이 별도의 취임사준비위를 구성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은 별도의 준비팀 없이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연설문을 직접 작성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연설문 초안은 유민봉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내정자와 강석훈 새누리당 의원이 골격을 잡아 박 대통령에게 전달됐지만 박 대통령이 새로 쓰면서 초안은 사실상 거의 없던 게 됐다”고 말했다. 취임사 작성은 지난 주말 이전에 끝났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연설 도중 “새 정부의 미래창조과학부가 창조경제를 선도적으로 이끌 것”이라며 정부 부처로는 유일하게 미래부를 거론했다. 미래부는 현재 방송 분야 업무 이관 문제를 놓고 민주통합당과 갈등을 빚고 있는 부처다. 임 교수는 “미래부에 대한 박 대통령의 애착은 이해가 되지만, 야당은 정부조직법을 빨리 통과시켜달라는 압박으로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김정하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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