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와 교수·대학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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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귀국않는 박사들>
국회도서관장이 미국에 갔던 기회에 조사했다는 미국유학간 우리 한국인의 박사학위명단이 얼마전 신문지상에 나타난 것을 보고 누구나 기쁨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작년 현재로 총수가 6백 30명인데 특히 주모되는 사실을 최근 6년동안에 박사학위를 받은 수효가 4백 63명이라는 것이다. 해방후 6·25전쟁직전 직후에 미국에 건너갔었으리라고 생각되는 1950∼59년간의 박사가 겨우 백20명인데 비하여 6·25의 전쟁중 갖은고생을 겪고나서 미국에 건너가 일하며 공부하며 성적을 올려서 피땀이 얽힌 십년의공을 쌓아 박사의 지위에 올랐다는 그수고와 명예에 우리는 높은 찬사를 보내지 않을수 없다.
지금 미국유학생이 대략 5천명이고 그중 박사과정에서 연구생활을하고 있는 학생이 상당한 수효라는점을 생각할 때 앞으로 2·3년이면 다시 박사학위를 따게될 우리학도가 지금의 배는될 것 아니냐하는 관측도있다. 이는 우리의 장래를 약속하는 나라와 민족의 영광이라고 할 것이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해서 얼마나 그들을 이땅에 받아들이게 될것이냐하는 것 뿐일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미국가서 공부한다고 조국을 찾아 돌아올 생각을 아니하니 웬일이냐고도 한다.
그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당장 돌아와도 일할자리가 없으니 어쩌랴. 또 좋은 조건밑에서 마음껏 연구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아쉽다고도 할것이고 되도록 더 열심히 공부하여 한국사람의 명성을 세계에 드날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생각 더욱 간절한바 없지 않은 것이다.

<범람하는 명예박사>
그런데 근년에 우리나라에서는 웬일인가. 명예박사의 수여가 유행하고 있다.
학자로서 촉망되는바 크면서도 연구사업에 몰두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대학행정에 골몰했다든가 또는 공익상업에 공로있고 덕망이 높은 인사라면 그 노령을 위로하는 뜻에서 국가의 표창외에 대학의 이름으로써 박사의 칭호를 드릴수도 있을 것이다.
또 대학의 독실한 선생으로 학위라는 칭에 구애되지않고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다가 정년으로 물러나는 분에게 그 야말로 명예로운 칭호로써 박사의 학위를 드리는일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도 알수 없는 일은 정년이전의 현직대학교수에 대하여 수여하는 명예박사의 학위란 확실히 명예로운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고 때로는 또 무슨 아첨을 위한 것인지 권세와 직위가 그럴듯하다는 분에게 명예박사를 바치는 것도있다. 명예박사학위란 사실 논문을 써서 내놓고 받는 학위보다도 더 명예로운 것이어야 함을 생각할 때 겨우 40세가 갓 넘었을 젊은 분에게까지 명예학위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박사학위의 수여란 대학의 특권이요, 박사를 길러내는이는 대학교수임은 더설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박사는 어떤 박사를 길러내느냐 하는데서 대학과 교수의 권위에 크게 관계됨은 물론이다. 그런 때문에 박사라는 칭호보다는 대학의 「교수」라는 칭호가 더 높고, 더 명예롭게 여김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문 잡지에 보면 전임강사도 조교수도 부교수도 그저 「교수」라고 적히는 일이 많다. 이렇게 구별의 감각이 없다면 그만큼 「교수」의 명예와 권위가 홀가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뿐 아니고 전임강사 몇해면 조교수가 되고, 조교수 몇해지나면 부교수에, 다시 부교수 몇해에 「교수」가 된다니 대학교수의 명예와 권위란것도 다시 검토되어야 할것이다.
외국의 예를 보면 대학교직에서 한계단씩 올라가자면 그본인의 평소의 학문적 업적외에 관계교수들 앞에서 강문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제도가 필요치 않을까.

<경쟁아닌 「전쟁」>
새대의 변천은 학문의 발달에 있고 학문의 발달은 교육내용에 있다. 특히 대학교육의 내용이 어떤것이냐하는 것은 그나라의 내일을 점치는 가장큰 요건이되고 있다. 공산세계와의 격렬한 냉전(냉전)은 학문의 경쟁이라고도 한다. 지금 대학교육이며 연구시설, 그업적의 경쟁은 그 국가의 명예를 걸고 있다.
미국대학의 경우란 학문의 경쟁이 아니고 전쟁이라고 할수있을만큼 고등하교 대학의 교육내용으로부터 학자전문가의 양성이며 연구사업의 확충이란 해마다 말할수없이 급속한 발달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늘의 대하교육은 내용도 높거니와 학생들의 공부하는 태도나 또 사회에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표준도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았다면 대학원의 학사과정을 밟아야 겨우 한숨쉴 정도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박사과정을 필한 사람을 옛날 학사과정을 필한 정도로 여길만큼 그수효도 많고 사회의 요구도 커진 것이다. 이런 것은 하필 미국뿐이 아니고 소위 선진국가의 어느곳에서나 볼수 있는 대학교육의 새로운 표준이 되고있음을 생각할 때 무엇이 박사요. 무엇이 교수요. 무엇이 대학교육이냐? 하는 것을 다시 깊이 생각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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