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같은 삶? 삶 같은 연극! 윤소정이니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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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호 24면

사진 명동예술극장

옛것의 가치가 급격히 쇠락하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 가던 20세기 말. 여기 추락하는 여자와 비상하는 남자가 있다. 하필 장모와 사위다. 애증으로 얽힌 고부갈등보다 더 첨예한 대립을 품고 있는 위험한 관계다.

이 커플(?)은 도무지 공감대가 없다. 평생 고상한 연극배우로 상류사회에 속해 살다 투자 실패로 바닥 없는 늪에 빠지게 되는 장모와 고아 출신이지만 대중에 영합하는 비상한 재능을 내세워 영화 감독으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는 사위. 두 사람의 15년간 대립된 삶의 궤적을 좇아가는 우리는 둘 사이에 낀 딸의 입장이 되어 상반된 가치의 공존 가능성을 점친다. ‘장모’라는 과거와 ‘사위’라는 미래는 과연 선택의 문제일까?

연극 ‘에이미(Amy’s View)’가 던지는 이 질문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사이에 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에이미’는 영국의 3대 희곡작가로 꼽히는 데이비드 해어의 1997년작으로 2010년 국내 초연 당시 ‘2010 한국연극 베스트7’에 선정되며 ‘연극의 정석’이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은 명품연극이다.

‘정치를 연극화하는 사회적 논평자’로 불리는 작가답게 연극과 현실의 문제를 조합해 내는 기술이 남다르다. 장모와 사위가 갈등하고 딸이 화해를 시도하는 일견 한 가족의 사사로운 역사처럼 보이지만 인물들이 무심히 내뱉는 대사 속에는 시대의 변화에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해 가는 사회의 모습이 함축돼 있다. 초연을 통해 히서연극상과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을 수상한 윤소정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리얼리즘 연기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연극배우 장모와 영화감독 사위의 갈등
고상한 예술인이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여배우 에스메 앞에 어느 날 딸 에이미의 남자친구 도미닉이 나타난다. 순수 예술을 추구하는 에스메에게 대중지상주의 영화감독 지망생 도미닉은 껄끄러운 존재지만 딸과의 결혼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세월이 흘러 무대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에스메는 여배우들이 할 만한 배역이 없다고 불평하고, 잘나가는 방송인이 된 도미닉은 그녀가 평생 지켜온 연극무대가 이미 유효기간이 끝난 ‘자폐적 예술행위’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늘 두 사람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던 에이미는 미디어재벌이 된 도미닉이 여배우와 바람을 피우고 어설픈 투자로 파산한 에스메가 여전히 허영심만 채우자 결국 폭발하고 만다.

영상매체를 혐오하는 에스메와 ‘연극의 종말’을 외치는 도미닉의 갈등은 무대와 미디어, 예술과 상업, 구세대와 신세대, 보수와 진보, 나아가 과거와 미래의 대립 자체를 대변한다. 두 가치관을 모두 인정했던 만큼 도미닉의 외도와 에스메의 파산이라는 양자의 궤도이탈에 가장 괴로운 것은 에이미다. 도미닉의 일탈을 용납할 수 없지만 도미닉과의 결혼이 잘못된 선택이라던 에스메의 판단도 인정하기 싫다는 에이미는 결국 공을 각자에게 넘긴 채 무대에서 사라진다.

에이미의 부재는 곧 선택의 주체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에이미가 사라진 뒤 에스메가 다시 무대로 돌아가 진정성 있는 연기로 존재감을 인정받고, 성공한 영화감독으로 꿈을 이룬 도미닉이 처음으로 에스메의 무대를 찾아 그녀의 예술세계를 인정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고집 센 과거와 불안한 미래, 옛것과 새것,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기 위해 서로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포용하기 위해 스스로의 그릇을 키운다면 상반된 가치관도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선택은 없고, 연극은 계속된다. 연극의 종말을 논하는 것은 연극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역설이다. 이 무대는 극도로 사실적인 세트 위에서 철저한 텍스트 중심의 리얼리즘 연기로 삶과 예술의 문제를 직설한다. 이미 더없이 화려하고 다양해진 연출기법에 익숙한 21세기 관객 입장에서 도미닉의 지적대로라면 이 무대는 지루하고 진정 ‘유효기간이 끝나’ 보인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이 연극이 보여주는 힘이란 뭘까. 그건 오직 배우다. 감정과잉 전혀 없이 실제인지 허구인지 헷갈릴 만큼 일상적으로 보이는 윤소정의 ‘내면연기’가 우리를 ‘불현듯 몰입’시키는 것은 거기에 그녀의 진짜 삶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엔딩 직전 다시 시작을 읊조리며 외로운 한 줄기 조명 아래 두 팔을 내뻗는 노배우의 진솔한 움직임은 연극이 여전히 건재함을 웅변하는 듯하다. 느리고 별 볼일 없는 아날로그지만 ‘진짜 삶’의 모습들을 담고 있는 한 무대는 영원할 것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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