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송에 한시름 덜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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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하늘은 하루하루 비켜서고, 먼 산들은 한 걸음 한 걸음 눈앞에 다가선다. 대낮 볕 살은 어딘가 여릿하고 아침저녁 바람결에서 은밀히 어른거리기만 하는 계절의 새 발치.
지금 시골에서는 세벌 김매기가 끝나고 추수까지의 한동안 일손이 뜸할 때이다. 비에 바람에 가슴 죄며 풍등을 빌던 농사의 마지막 고비에서 농군은 한숨 돌리고 벼는 노염에 여물어 간다.
저기 가는 저 구름 어떤 신선타고 가노.
응천하고 천자봉에 놀던 신선타고 가네
풍악에, 농주에, 호미씻이는 끝났어도 들에 하나 가득 누릿누릿 물결치는 벼 이랑의 바다를 누빈 논두렁길을 거니노라면 지게목발 장단에 절로 흥겨운 것도 요즘의 농촌이다.
고추잠자리는 단풍보다 진한 붉음을 한산세모보다 더 고운 나래에 싣고 철을 한발·앞당겨 푸르다 못해 쪽빛 하늘을 무리 지어 날아다닌다. 그리고 보니 연자 새끼도 어미와 같이 먼길 채비를 차려 살이 쩠다.
고목된 대추나무엔 토실토실한 대추가 제물에 불그레하고 사래 긴 밭의 수수는 묵직한 이삭을 드리웠다.
산에서 오는 초동은 아직도 머루와 다래가 풋풋하더라고 일른다.
저녁 어스름, 초집 추며 끝에 모깃불을 지피고, 모난 명석에 3대가 두런히 돌아앉아 보리밥에 된장 찌개. 마굿간에서는 여물을 삭이는 느직한 풍경 소리. 그래서 저녁상 머리에는 허전한 시장기와 포만감이 함께 있다.
밤이면 밤마다 은하수가 손에 잡힐 듯 내려앉아 걸리는 두메마을. 할머니는 어린 손자들에게 저것이 짚신 할애비 저것이 수숫대 할멈하고 손가락질하면서 칠석을 지난 까막까치의 이마가 벗겨진 사연을 풀이하고, 어린것들은 저마다 끄덕이다가 잠에 든다.
귀뚜라미, 쓰르라미 하여 벌레 울음이 한바탕 비오듯한다. 벌레 울음이 그치면 멀리 가까이 개구리 울음. 함초름히 이슬에 젖어 울음소리에 깃들이는 수심.
싸리나무 울타리에 둥글둥글 메주만치나 자란 박도 밤마다의 이야기와 울음에 점두하면서 어설피 제물에 익어가는 계절.
처서-노염이 직신대기는 하나 더워도 한고비. 선들한 아침저녁 바람결은 살며시 살갗에 와 닿는 가을의 속삭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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