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이 직접 평가도 한다, 경북대 사대부초의 실험

    학생이 직접 평가도 한다, 경북대 사대부초의 실험 유료 전용

    hello! Parents가 만난 교육 전문가 9명은 “시험이 바뀌어야 교육이 달라진다”고 입을 모았다. 보기 중에 정답을 고르는 시험으로 평가하는 한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험이 바뀌면 학교는 정말 달라질까?    hello! Parents는 객관식 시험의 대안으로 주목받는 국제 바칼로레아(International Baccalaureate)를 적용한 학교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2018년 IB를 도입한 대구교육청 산하 경북대학교 사범대 부설초등학교는 2년 전 국내 국공립 초등학교로는 최초로 IB 인증학교가 됐다. IB 교육은 학교를 정말로 바꿨을까? 경북대 사대부초에서 IB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이선미 부장을 만나 물었다. 박정민 디자이너   우리 학교에선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생도, 교사도 모두가 배우죠. 학생은 스스로 평가도 합니다.   이선미 부장은 IB 도입 후 5년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배운다는 것이다. 이 부장은 2019년부터 교사 대상 IB 교육 연수 강의, 교수·평가법 프로그램 개발 등에 참여하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는 IB 교육을 선망하면서도 두려워한다. 교육과정이 우수하고, 평가 역시 엄정하고, 공정한 건 인정하지만 한국에서 실현 가능하겠냐는 거다. 당장 교사 연수도 해야 하고, 수업뿐 아니라 평가 방식까지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5년간 IB 교육을 주도해 온 이선미 부장은 “IB는 교육 설계 구조만 제공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교육과정은 우리 실정에 맞게 꾸릴 수 있다”며 “한국의 학제 아래서 한국의 교과서를 갖고도 충분히 새로운 수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부장은 “IB 도입 후 세 가지가 달라졌다”고 했다.   국제 바칼로레아(IB)를 도입한 경북대 사대부초 IB운영기획부장 이선미 교사. 이 교사는 IB 프로그램 도입 후 생긴 가장 큰 변화로 ″학생과 교사 모두가 함께 학습하는 문화″라고 말했다.  ━  변화① 교과서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부장은 “교사 입장에서 하루하루가 도전인 건 사실”이라고 했다. 교과서에 적힌 지식을 그대로 전달하는 수업을 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교과 간 융합 수업이 대표적이다. 여느 학교처럼 교과 내용을 다루지만 과목과 과목을 통합해 가르친다. 그래서 수업 준비에 과거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효과는 뚜렷하다.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공부하기 때문이다.   과목과 과목을 통합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과목이 아닌 주제 중심으로 수업 시간표를 구성하는 겁니다. 보통은 수학·국어 등 과목별로 수업을 짜지만, IB 과정에선 통합 주제 중심으로 수업을 계획해요.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갖고 1~3교시 탐구 수업Ⅰ, 4~5교시 탐구 수업Ⅱ라는 식이죠. 수업시간에는 주제와 연결된 과목을 통합해 다룹니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는 국어의 문학 작품으로 다룰 수도 있고, 생물의 과학에서도 다룰 수 있어요. 이처럼 IB 교육에서는 교과를 망라한 주제를 갖고 수업을 구성하는데요. 이걸 초학문적 주제라고 합니다.   초학문적 주제요?   학문을 뛰어넘는 주제를 말해요. 초등학교에서는 한 학기에 3개씩, 1년에 6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속한 공간과 시간,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 우리 자신을 조작하는 방법, 우리 모두의 지구 등 6가지 주제를 갖고 각 학년의 탐구 주제를 정합니다. 일종의 소주제예요. 예를 들어 6학년은 ‘우리는 누구인가’란 초학문 주제를 가지고 ‘민주 시민’이라는 탐구 주제를 정합니다. 이 주제를 배우기 위해 사회·국어·미술 교과를 통합하고요. 각 학년마다 이런 방식으로 수업 체계를 만듭니다. 통합 주제로 접근하면 배운 걸 일상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적용하면서 배우다 보니 시험 보면 잊어버리는 지식이 아니죠. 이때 중요한 건 내용을 이해하는 관점입니다. 지식의 정의 하나만 외우는 게 아니라 입체적으로 지식을 이해해야 해요.   어떻게요? 지식을 개념을 기반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IB에서는 이걸 ‘개념 기반 탐구학습’이라고 부릅니다. 탐구 주제를 ‘형태, 기능, 관점, 책임, 연결, 변화, 원인, 성찰’ 8가지 개념으로 이해하는 건데요. 이 개념들은 다시 세부 개념으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갖고 6학년은 ‘민주사회’ 탐구 주제를, ‘원인·기능·책임’이란 개념으로 들여다봅니다. 이걸 다시 ‘가치관·공정·조직’ 등 세부 개념으로 파고들고요.   구체적으로 수업 시간에는 어떤 활동을 하나요?   수업은 학생참여형으로 진행합니다. 초학문적 주제 하나로 한 달간 모둠 단위로 탐구 활동을 하는데요. 주제와 관련된 문제를 만들어 해결하고, 그 결과를 공유하는 일종의 프로젝트 수업입니다. 탐구의 시작은 학생들의 질문입니다. 학생들은 주제와 관련해 각자 궁금한 걸 질문으로 만듭니다. 이 중 답이 정해져 있는 닫힌 질문은 책이나 인터넷으로 곧장 찾아봅니다. 답이 없는 열린 질문은 비슷한 질문끼리 모으고 조합해 탐구 주제로 발전시키고요. 이후 모둠마다 주어진 주제에 맞는 활동을 합니다. 자료를 찾고, 분류해 공유하는 건데요. 이때 자료 수집은 8가지 개념을 토대로 합니다. ‘동물 지킴이’라는 주제를 ‘형태, 변화, 책임’을 개념과 ‘동물의 생김새, 생활방식, 환경 문제’ 등 세부 개념을 기준으로 정리하는 거예요.    초등학교는 한글이나 연산 등 기초 지식을 습득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기초 학력이 저하되는 건 아닐까요? 국어·수학·영어·과학·체육·음악 같은 과목은 ‘단일 교과’로 분류해 강의식 수업을 합니다. 이 과목들은 읽기, 쓰기, 셈하기와 같은 기초 기능을 먼저 배우는 도구 교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배정됩니다. 다만 기초 지식이라도 외우거나 계산만 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아닌 과정, 원리로 배우는데요. ‘분수의 통분’을 예로 들어보죠. 교과서에서는 1/2과 4/8를 통분할 때 ‘분모·분자에 똑같이 곱하기 4를 한다’로 끝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8가지 개념 중 형태·변화로 접근해 1이 4로 변하고 2가 8로 변하는 과정에 적용되는 수학적 규칙을 배웁니다. 이렇게 배우면 사물에도 수학적 규칙을 적용하는 눈이 생깁니다.    경북대 사대부초의 수업은 대부분 탐구 활동으로 진행된다. 이선미 교사는 "수업의 과정을 평가하는 IB에서는 아이들이 수업을 주도한다"며 "아이들은 실생활과 관계 맺어 지식을 탐구해 간다"고 설명했다. 송봉근 기자    ━  변화② 학생이 평가도 한다   IB의 수업은 언뜻 보면 일반 학교 수업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토론 수업, 문제해결식 수업 등 학생 참여형 수업은 이미 많은 학교에서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부장은 “IB 수업은 다르다”고 말한다. 무엇이 다를까? 그는 ‘평가 체계’에 방점을 찍었다.    초등학교에선 평가를 하지 않잖아요?   공식적인 시험이 없을 뿐이지, 평가는 수시로 합니다. 학생의 성취 수준을 확인하는 중요한 지표거든요. 특히 IB는 평가를 학생들의 배움을 관찰, 기록, 측정해 알리는 일련의 과정으로 봅니다. 수업 자체가 거대한 평가인 셈이죠. 평가를 잘 받으려면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배움의 과정을 기록해야 해요. IB에서 탐구형 수업을 하는 이유죠. 특이한 점은 학생이 평가도 한다는 겁니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평가하면 학습이 보여주기 식으로 변질되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교사와 학생이 협의해 평가 계획을 세우도록 합니다.     학생도 평가한다고요? 내가 아는 걸 증명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겁니다. 평가가 거창한 게 아니에요. 수업을 통해 쌓은 실력과 알게 된 것을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지금까지는 그걸 객관식 시험이라는 하나로만 측정했지만, IB 학교에서는 다양한 평가 방식이 등장합니다. 아이들에게 ‘탐구 활동을 통해 내가 배운 걸 어떻게 보여주면 좋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발표·UCC·신문·연극까지 기발한 방법이 나옵니다. 이 가운데 탐구 주제와 개념, 길러야 할 역량 등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을 학생이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평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탐구 활동을 이어가죠. 예를 들어 최종 결과물을 연극으로 보여주겠다 하면 시나리오를 공부하고, 직접 써보는 활동을 합니다. 중요한 건 이 과정을 모두 학생이 한다는 거예요. 탐구 주제도 평가 계획도 학생이 세우니, 학습 방법도 학생이 더 잘 알죠.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겁니다.   객관식 시험 같은 지필 고사는 전혀 안 보나요? 단일 교과 수업의 성취 기준을 확인하기 위해 지필 고사도 봅니다. 각 학급에선 교사 재량으로 단원평가를 보고, 학교에선 새 학기 시작과 끝인 3월, 7월, 12월 세 번 총괄 평가를 봅니다. 시험의 목적은 학습 성취 수준을 확인하는 겁니다. 시험 결과 학습 결손이 발견되면 수업시간에 보충합니다. 시험 점수를 각 가정에 보내지만, 아이들은 점수에 큰 타격을 받지 않아요. 잘 봤다고 우쭐대지 않고, 못 봤다고 주눅들지 않아요. 오히려 틀린 문제를 공유하고 서로 모르는 걸 알려줍니다.       보통 틀리면 창피해하고, 감추려고 하지 않나요? 점수 외에도 내 실력을 입증할 기회는 많으니까요. 시험에서 50점 받았어도 ‘나는 발표할 때 목소리가 좋아’ ‘글씨를 잘 써’라는 식으로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방식으로 평가받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실력을 믿어요. 자기효능감이 높죠. 또 하나, 지식은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유된 정보라고 인식합니다. 내가 아는 것 좀 알려준다고, 내 지식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 혼자 많이 알고, 잘하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다 같이 알고, 잘해야 해요. 학교에서 모둠 활동을 하면 아이들이 뒤처지는 친구를 배제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야 높은 점수를 받으니까요. 하지만 IB 수업에서는 그런 친구도 함께 잘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합니다. 우리 모둠 전체가 일정한 성취 수준에 도달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죠. 경쟁이 아닌 협력을 하는 겁니다. 이런 변화가 가능한 건 수업마다 ‘학문의 정직성’을 철저하게 가르친 효과입니다.   학문의 정직성이요?   이미 알려진 지식은 내 생각이 아니라는 걸 가르치는 거예요. 예를 들어 IB 학교에서는 교과서 지식을 그대로 암기해 내 것으로 만드는 건 학문의 정직성에 위배된다고 배웁니다. 교과서 지식을 암기하는 건 저자의 관점과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걸로 보거든요. 그러니 시험 문제 하나 맞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IB 학교에서는 학문의 정직성을 위해 ‘자료 인용표기’로 습관화합니다. 교사도 모든 수업 자료에 출처를 표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자료를 인용표기 없이 내 생각인 양 쓰면 점수를 모조리 깎아요. 정직하게 배우고 지식과 생각을 공유하는 습관은 자기 생각에 책임을 지는 밑바탕이 됩니다. IB 교육에서는 정직하게 배우고, 생각에 책임질 줄 아는 '학문의 정직성'을 가르친다. 이선미 교사는 "학문의 정직성을 배운 아이들은 시험에서 틀려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로 알려주며 부족한 지식을 채워 간다"고 말했다. 송봉근 기자    ━  변화③ 교사도 학생이 된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 새로운 교육을 하려면 교사의 역량과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IB를 성공적으로 도입하려면 교사의 역량 개발이 먼저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 IB 수업을 하고 있는 교사의 생각은 어떨까? 이 부장은 “아이들만큼이나 교사도 많이 변했다”고 했다. 그는 “IB 수업은 교사도 공부하게 한다”며 “완벽한 수업에 대한 강박만 내려놓으면 누구나 새로운 수업을 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완벽한 수업에 대한 강박이요? 교사는 수업으로 모든 걸 말합니다. 수업을 통해 정체성을 찾고, 평가받죠. 저도 과거엔 멋지게 수업하고, 말 한마디로 아이들을 통제하는 걸 교사의 전문성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IB 수업을 하며 완벽함에 대한 환상이 모두 깨졌어요. 교과 간 융합 수업에 개념 기반 탐구 수업, 다양한 방식의 평가까지. 새롭게 배워야 할 것투성이거든요. 게다가 교과서 내용만 다루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교사가 정말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탐구 주제를 찾고, 질문을 고민하는 거죠.      생소한 교육 프로그램이에요. 교사 혼자 감당하기 힘들 거 같아요. 그래서 집단 지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IB는 닫혀 있던 교실 문을 열었어요. 교사에게 수업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예요. 그래서 늘 문을 닫고 수업합니다. 하지만 IB 학교에서는 수업을 공개하지 않으면 진행 상황을 알 수가 없어요. 수업 주제와 방법, 평가 틀이 동일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수업에 답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사례를 많이 알아야 교사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교사들이 먼저 교실 문을 열고 수업을 공개합니다. 사례와 정보를 공유하고요. 우리 학교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씩 교사의 전문성 개발을 위해 선생님들끼리 모여 스터디를 합니다. IB의 새로운 수업법, 평가법을 익히고,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에요. 아마 교과서 중심 수업이었다면 수업이 끝난 뒤 저 혼자 교실에 덩그러니 남아 교과서를 연구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동료 교사와 모여서 함께 수업 준비를 합니다. 교사도 협력하는 거예요.   교사도 성장하고 있네요. 교사와 학교도 IB 본부로부터 계속 평가를 받거든요. 공부할 수밖예요. IB 학교는 하루아침에 뚝딱 완성되는 게 아니에요. 관심 학교에서 후보 학교로, 또 최종 인증 학교로 3단계를 거치며 교사와 학교의 역량도 하나둘 늘어갑니다. 그래야 승인을 받으니까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승인을 받은 뒤에도 5년마다 재평가받아야 해요. 재평가는 매년 교사가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성찰을 했는지 5년간의 기록물을 봅니다. 상급 학교 진학률이나 학생 성적 변화, 수업 만족도 같은 수치를 보지 않아요. 교사의 성장을 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배우는 걸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저는 IB 학교에서 근무하며 교사의 전문성을 더 키웠다고 자신해요.  이선미 교사는 IB 학교에서의 경험을 통해 교사의 전문성을 기른 것을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그는 "아이와 교사, 학교가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봉근 기자   이 교사는 IB 학교에서 일하며 자신이 ‘지식 전달자’에서 ‘탐구 파트너’가 됐다고 했다. 학생들과 함께 배우고 탐구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거다. 덕분에 모르는 것 없는 완벽한 교사가 돼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났다고 했다.    교육은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변하는 게 아니에요. 학생, 교사, 학교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IB 교육이 정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IB가 학생과 교사, 학교를 변하게 만드는 계기는 충분히 될 수 있죠.   ■ 국공립 교사가 말하는 IB 교육이 만든 학교의 변화 「 ① 교과서에 집착하지 않는다. IB 수업의 가장 큰 특징은 교과 간 융합 교육이다. 교과서 속 지식이 아닌 일상과 연결된 실용적인 지식을 배운다. 교과 단원을 해체해 만든 6가지 주제와 8가지 개념을 기반으로 탐구형 수업을 진행함으로써, 학생이 주도하는 교육을 구현한다. ② 학생이 평가도 한다. IB수업에서의 수업의 전 과정이 평가다. 아이들은 늘 '내가 배운 걸 어떻게 보여줄까?'를 고민한다. 평가 방식을 교사와 함께 협의해 결정하고, 좋은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 학습내용·학습법을 스스로 찾는다.  ③ 교사도 학생이 된다. IB학교에선 교사도 계속 공부해야 한다. IB교육에서 제시하는 교수법과 평가법이 방대하기 때문이다. 5년마다 돌아오는 재평가에서도 성과가 아닌 교사와 학교의 노력 과정을 주로 본다. 」   ■ 객관식 시험 시대의 종언 시리즈 「 ① “수능 안 변하면, 미래 없다” 교육 전문가 9인의 진단(6월 5일 발행)  ② 『챗GPT 교육혁명』쓴 정제영(교육학) 이화여대 교수(6월 8일 발행) ③ 『공부를 공부하다』쓴 박재원 에듀니티랩 소장(6월 9일 발행) ④ 수능 만든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대 원장 박도순(교육학) 고려대 명예교수(6월 12일 발행) ⑤ 『문재인 이후의 교육』 쓴 이범 교육평론가(6월 13일 발행) ⑥ 서울대 입학본부장 지낸 권오현(독어교육과) 서울대 교수(6월 15일 발행) ⑦ 『대한민국의 시험』쓴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6월 16일 발행) ⑧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 이선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운영기획부장(6월 19일 발행) ⑨ 호찌민시 한국국제학교 손성호 교장(6월 20일 발행) ⑩ 마이클 매기 미네르바대학 총장(6월 22일 발행) 」 

    2023.06.18 16:50

  • 현실은 주관식 탈 쓴 객관식…서울대 A+ 학생이 그랬다

    현실은 주관식 탈 쓴 객관식…서울대 A+ 학생이 그랬다 유료 전용

    챗GPT 시대, 객관식 시험으론 안 된다. 하지만 논술 시험을 보긴 쉽지 않다. 문제 출제부터 채점까지 공정성을 담보할 매뉴얼이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국제 바칼로레아(International Baccalaureate)가 논의되기 시작한 배경이다.    IB는 비영리 민간교육단체인 IB본부(IBO)가 개발·운영하는 교육과정(curriculum·교육 프로그램) 및 대입 시험이다. 프랑스 대입 시험인 바칼로레아와 이름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시험이다. 매년 전 세계 160여 개국 18만 명이 논술형으로 대입 시험을 보지만 공정성 논란은 없다. 영국 옥스퍼드대, 미국 하버드대 등 유수의 대학에서 IB 점수도 입학 점수의 한 부분으로 인정한다. IB 점수만으로도 입학을 허가하는 대학도 많다.    국내에 IB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건 2019년, 대구와 제주교육청이 시작이었다. 서울시와 경기도 교육청도 IB를 도입할 학교를 모집 중이다. IB교육을 우리 공교육 교사들이 직접 운영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형 바칼로레아(KB·가칭)를 개발하는 게 목표다. IB는 객관식 수능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IB 전문가로 꼽히는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에게 직접 물었다. 박정민 디자이너   논술 시험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닙니다. 지식을 서술하는 것에 그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생각을 쓰게 해야 합니다.   객관식에서 주관식으로의 전환이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 소장은 “쓰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며 이렇게 말했다. 특정 지식을 아는지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자기 생각을 쓰게 문제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엔 정답이 없다. 이걸 어떻게 채점할 수 있을까? 이 소장은 “어떤 주장을 했느냐보다 어떤 주장을 하든 그 생각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득력있게 표현할 수 있느냐를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교육공학 박사인 이 소장의 연구 주제는 교수법이었다.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까’는 질문의 끝에는 시험이 있었다. 평가가 달라지지 않으면 수업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 학생들도 논술형 시험을 치르지만 이 시험엔 정해진 답이 있다”며 “단순히 지식의 정의를 묻거나 교수의 말을 그대로 써야 고득점을 받는 주관식 시험으로는 비판적·창의적 사고력을 기를 수 없다”고 말했다.    IB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래서다. IB 교육에선 생각을 묻고, 논리력에 점수를 줬다. 이 소장은 “수업 장면 하나만 놓고 보면 IB라고 특별히 다른 게 없어 보일 수 있다”며 “IB가 남다른 건 평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IB를 잘만 벤치마킹하면 공정성 논란을 딛고 주관식으로의 대전환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주관식 시험으로의 전환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이 소장은 세 가지를 꼽았다.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은 한국에 국제바칼로레아(IB)를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IB를 논술형 시험 시스템의 롤모델로 삼으면 한국형 IB 개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박정민 디자이너  ━  성공 조건 ① 주관식 탈을 쓴 객관식을 경계하라    이 소장의 연구 주제 중 하나는 서울대에서 A+ 받는 학생들의 학습법이었다. 서울대는 대체로 주관식으로 시험을 보는 만큼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기르는 학습법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연구에 참여한 학생의 87%가 “교수의 말을 무식하다 할 정도로 농담까지 받아 적고, 시험에 그대로 쓴다”고 답했다. 자기 생각을 쓰면 학점이 낮게 나왔다. 학생들은 “내 생각은 포기한다”고 했다. 이 소장은 “비판적 창의적 인재를 기르겠다고 말하면서 정작 평가는 다르게 하고 있었다”며 “우리 교육의 문제 대부분이 교육 목표와 평가 사이의 괴리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교육 목표와 평가 사이에 괴리가 있다? 무슨 말인가요?  기르려는 역량과 평가하는 역량이 완전히 다르다는 거예요.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기르는 게 교육 목표인데, 정작 시험에선 암기력을 평가합니다. 영어는 어떤가요? 영어로 듣고, 읽고, 말하고, 쓰는 게 목표인데 수능에선 말하고 쓰는 능력은 평가하지 않죠. 각 대학의 논술 전형 문제도 답이 존재합니다. 제시문을 읽고 글쓴이의 주장을 찾아 서술하라는 식이죠. 정답이 정해져 있다 보니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려 드는 겁니다. 서울대 학생들이 교수의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적는 이유죠. 그래서 암기한 지식을 확인하는 시험이 아닌 학생의 생각을 묻는 시험이 돼야 합니다.    그게 논술형 시험 아닌가요?   같은 논술형 주관식이라도 지식을 묻는 질문이라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서울대 A+ 학생 연구 사례에서 보셨잖아요. 결국은 비판적 창의적 역량을 측정할 수 있는 시험을 내야 하는데, 학생들에게 그런 문제를 풀게 하려면 결국 수업이 달라져야 해요. 그러려면 교육과정 설계부터 바뀌어야 하고요.   교육과정 설계를 어떻게 바꿔야 하나요? 보통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수업을 설계한 뒤 평가 방법을 만듭니다. 이걸 바꿔야 해요. 교육 목표를 설정한 뒤 해당 목표의 달성 여부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먼저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수업을 설계하는 거죠. 이걸 백워드(backward) 설계라고 불러요. IB의 교육 설계법이죠. 이렇게 해야 수업이 목표에 맞게 설계됩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문제 해결 역량을 기르는 게 교육 목표라면, 시험에선 문제 상황을 주고 해결 방법을 물어야 합니다. 논술이든 구두(口斗)시험이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시험 유형이 아니라 문제입니다. 열린 질문이 포인트죠. ‘다음 작품의 특징을 논하시오’라고 묻는 게 아니라 ‘문학은 허구임에도 진실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학교에서 배운 작품 두 가지를 골라 쓰시오’라고 물어야 합니다. 열린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학생의 생각이 곧 답이에요. 대신 그 생각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서술해 채점자를 설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려면 논리력이 필요하고, 그걸 수업 시간에 배웁니다. 시험이 바뀌니 수업도 바뀌는 거죠.    수업은 어떻게 바꾸나요? 시험이 열린 문제로 바뀌면 수업 시간에 자기 생각을 펼치고 쓰는 훈련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앞에서 예를 든 문제를 생각해보죠. 문학이 허구임에도 진실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는지 쓰려면 특정 작품만 이해해선 안 됩니다. 작품을 넘어 허구와 진실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봐야죠. 그러려면 관련된 다양한 글을 읽어야 하고요. 내 생각을 발표하고, 친구 생각도 듣고 토론하는 것도 필요하죠. 글도 써봐야 하고요. 지금 학교 현장에서 이미 토론하고, 글쓰는 수업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수업이 아무리 바뀌어도 시험에서 여전히 지식을 물으면 수업은 다시 강의식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생각의 과정을 묻는 시험이 중요하다는 거군요.  그런데 재밌는 현상이 하나 있어요. 열린 문제를 내면 학생들의 인성도 좋아집니다. 일본에선 IB 도입 후 이지메가 줄었어요. 우리로 치면 왕따와 학교 폭력이 준 거죠.    논술 시험을 보고 나서 이지메가 줄었다고요?  자기 생각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다른 의견을 듣고 토론하는 걸 안 할 수가 없거든요. 다른 의견을 들어야 내 논리를 보강하거나 반론을 만들 수 있잖아요. 내 생각이 더 정교해지는 거죠. 그렇게 다른 생각을 계속 접하다 보니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어요. 평가에 적응한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자기와 생각이 완전히 다른 친구와 조를 이뤄 토론합니다. 이렇게 12년을 배운다고 생각해보세요. 논리력은 물론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지 않겠어요?    IB 교육 전문가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은 시험 개혁의 첫 번째 조건으로 "길러내려는 역량과 평가하는 역량을 일치시키는 것"을 꼽았다. 김현동 기자  ━  성공 조건 ② 중간·기말 점수는 반영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은 자기주도학습으로 이어진다. IB 교육과정은 자기주도학습 역량을 중요하게 여긴다. 매 학기 제출하는 탐구보고서는 이 능력을 측정하는 평가 과제다. 언뜻 보면 이 탐구보고서는 수행평가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중간에 이루어지는 평가들은 최종 점수에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부 평가에는 고3 마지막 학기에 제출하는 12쪽짜리 최종 탐구보고서 점수만 반영한다. 이 소장은 “최종적으로 성취 수준에 도달했는가를 중요하게 여길 뿐 학생마다 학습 속도는 다를 수 있다는 IB의 기본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며 “덕분에 중하위권 학생이 역전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중간 평가를 성적에 반영하지 않는데, 열심히 공부할까요? 강의식 수업을 하는 경우라면 공부를 안 하겠죠. IB에서는 생각하지 않으면 교실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매 수업 ‘네 생각은 어떠하냐’의 질문을 끊임없이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답하다 보면 주체성이 생깁니다. 그 능력은 탐구 보고서로 나타나고요.    탐구보고서는 대학생도 쓰기 쉽지 않은데요. 아이들이 어려워하지 않나요?  처음엔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상위권 학생을 위한 엘리트 교육 아니냐는 비판도 받죠.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중하위권 아이들도 탐구보고서에 강하다는 겁니다. 한가지 정해진 정답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생각이든 일단 내 생각을 쓸 줄만 알면 됩니다. 그러면 교사가 다음 생각을 촉발하는 질문을 하고, 답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 과정을 정리한 게 탐구보고서예요. 중간 과제에 대한 피드백이 성적에 들어가지 않다보니 아이들은 부담 없이 내 생각을 꺼냅니다. 한국에는 중하위권을 위한 교육이 없습니다. 역전의 기회도 없고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평가하면 다릅니다.   중하위권 학생도 역전이 가능하다는 건가요? 경쟁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경쟁 대상이 상대가 아닌 내가 되기 때문이에요. 서로 다른 주제로 탐구하는데, 비교가 불가능하죠. IB 평가가 100% 절대평가로 이뤄지는 이유기도 해요. 100명이면 100개의 탐구 주제와 탐구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평가 기준도 하나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죠. 두 학생이 수학 탐구보고서를 썼어요. A는 드론을 이용해 텃밭에 농약을 뿌리는 법을 주제로 썼는데, 2차 함수를 이용해 이 문제를 풀었죠. B는 계산기가 적분 문제를 푸는 법이 궁금했어요. 이걸 주제로 적분의 원리를 밝혀냈죠. 수학적 난이도로 보면 B가 더 높은 점수를 받겠지만, 반드시 높은 점수를 보장하진 않습니다. 실용성, 비판적 성찰 등 평가 요소가 다양하기 때문에 A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어요. IB 과정에선 지식을 ‘아느냐 모르느냐’ 등 하나의 평가 요소로 한 줄 세울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최종 보고서가 성적에 반영됩니다. 결국 사교육 시장이 만들어질 것 같아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IB 체제에서는 사교육 시장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일타 강사 한 명이 1000명, 1만 명을 가르치는 식의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풀려는 문제가 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가르치겠어요. 게다가 탐구 주제 선정 기준 중 하나가 실생활과의 관계성입니다. 지역 사회 문제와 연결돼야 해요. 아무리 특출한 일타 강사라도 각 지역 문제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도움이 안 됩니다. 저절로 사교육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장은 "모두 똑같은 문제가 아닌 각자 나만의 문제를 만들어 풀면 한 줄 세우기는 불가능하다"며 "중하위권 학생에게 역전의 기회를 주고, 경쟁의 지형을 바꾸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  성공 조건 ③ 채점 기준을 표준화하고, 교차 채점하라   공정성. 암기 시험이라는 비판에도 수능이 30년간 건재했던 이유다. OMR 카드를 이용한 컴퓨터 채점 방식은 50만 개에 달하는 답안지를 정확하게 채점한다. 그 결과 선발에 필요한 ‘공정한’ 점수가 나온다. 주관식 시험으로의 전환에 대한 가장 큰 우려가 바로 이 공정성이다. 생각을 채점한 결과를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이 소장은 “IB는 타당성과 신뢰성, 두 가지 잣대로 이 문제를 돌파했다”고 말했다.   타당성과 신뢰성이 뭔가요?  측정하려는 역량을 예리하고 적확한 문제로 측정했다면 타당성이 있는 겁니다. 신뢰성은 누가 언제 어디서 채점하든 같은 점수가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거고요. 김연아 선수의 역량을 수영이 아니라 스케이트로 평가하는 건 타당성이 있는 겁니다. 신뢰성은 전 세계 어떤 채점관이 채점하든 비슷한 점수가 나와야 한다는 거고요. IB 교육과정에 있는 모든 나라, 모든 학교의 평가와 채점은 IB 본부가 일괄적으로 관리·감독합니다. 채점할 땐 예외 없이 표준화된 도구 세 가지를 씁니다. 공적 채점 기구인 중앙 채점 센터에서 교차 채점하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채점 도구를 이용하나요?  첫 번째는 ‘루브릭(rubric)’입니다. 평가할 요소를 4, 5개로 뽑은 표예요. 루브릭은 초·중·고 별로, 또 과목별로 다른데요. 예를 들어 고등학교 IB 과정인 디플로마 프로그램(DP)에서는 수학 탐구보고서를 의사소통, 수학적 표현, 학생의 직접 참여도, 비판적 성찰, 수학적 난이도로 나눠 평가합니다. 채점 기준은 완성도와 난이도예요. 각 요소를 4~6점 척도로 측정합니다. 의사소통의 경우 ‘주제가 일관되고, 잘 조직되고, 명료하고 완성도가 높다’면 4점, ‘논리가 일관되고 구조가 잘 조직되어 있다’면 3점을 주라는 식으로 점수 구간별 기준까지 명시합니다.      아무리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해도 채점관에 따라 점수가 달라질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신뢰성 문제죠. 이건 교차 채점으로 해결합니다. IB 점수는 내부 평가와 외부 평가 점수를 합산해 계산합니다. 내부 평가는 학교 내에서 이뤄지는 평가를 말합니다. 외부 평가는 매년 5월과 11월 전 세계에서 동시에 치르는 논술 시험 점수고요. 내부 평가의 경우 각 학교 담당 교사들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교사는 루브릭을 이용해 1차 채점을 하죠. 다만 교사들의 채점 기준이 일관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IB 채점 센터가 무작위로 채점 결과를 뽑아가 2차 채점을 합니다. 이때 최종 보고서만 보고 채점하지 않아요. 보고서 주제 선정부터 결과 도출까지 전 과정에 대한 기록물을 함께 검토하죠. 탐구 과정까지 보며 사교육 개입은 없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겁니다. 이때 점수 부풀리기가 발견되면 해당 학교 학생들의 점수를 모두 깎는 등 점수를 조정(moderation)합니다.   외부 평가도 교차 채점을 하나요? 전 세계 약 3만 명의 채점관이 두 달 남짓 진행합니다. 우선 시험이 끝나면 답안지는 영국에 있는 채점센터로 보내진 뒤 스캔돼 온라인 시스템에 저장됩니다. 본격적인 채점에 앞서 채점 경력이 많은 선임 채점관이 모여 채점 기준을 표준화하는 작업을 합니다. 실제 학생의 답안지를 무작위로 뽑아 채점합니다. 이 작업은 시험이 있을 때마다 과목별로 실시하는데요. 이 작업이 끝나야 전 세계 채점관들이 온라인 시스템에 로그인해 할당된 답안지를 채점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건 선임 채점관의 스파이 답안지예요.   스파이 답안지가 뭔가요? 채점관들이 채점하기 전에 선임 채점관들이 미리 채점한 답안지를 말해요. 이 답안지가 3만여 명의 채점관이 기준에 부합하게 채점하는가를 모니터링하는 역할을 합니다. 채점관 한 명당 100~200개의 답안지가 할당됩니다. 답안지는 묶음으로 전달되는데요. 예를 들어 한 묶음에 10개씩, 10묶음 총 100개의 답안지를 담당합니다. 이때 스파이 답안지를 묶음마다 무작위로 넣어요. 만약 채점관의 채점 결과가 스파이 답안지의 채점 결과(선임 채점관의 채점 결과)와 일정 수준 이상 차이가 나면 묶음 전체를 다른 채점관에게 넘겨 처음부터 다시 채점하게 하죠. 채점관은 어떤 게 스파이 답안지인지 모르니 채점에 신중할 수밖에 없고, 교차 채점에서 차이가 나면 책임 채점관이 다시 검토를 하고 판단을 하기 때문에 채점의 일관성이 맞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채점이 끝난 뒤 학생이 재채점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점수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합니다. 국제바칼로레아(IB)는 평가기준표인 '루브릭', 공식 채점 기구의 채점 점수 검증, 전 세계 3만 여명 채점관의 교차 채점으로 논술 시험의 공정성을 확보한다. 이 소장은 "IB의 평가 채점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면 우리도 논술 시험의 선진화에 발 맞출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이혜정 소장은 IB 전문가로 꼽히지만 IB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IB를 도입해 운영하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주관식 평가 방법과 교육 시스템을 찾자는 게 그의 주장이다. IB를 이용하자는 것이다.    주관식으로의 전환은 분명 엄청난 혼란과 갈등을 야기할 겁니다. 그렇다고 안 할 순 없어요. 이미 운영 중인 시스템을 잘 활용하면 혼란과 갈등을 줄일 수 있죠. 우리 사회에서 IB가 가지는 효용과 가치는 거기에 있어요.   ■ IB교육전문가가 말하는 시험 개혁의 성공 조건 「 ①“주관식 탈을 쓴 객관식을 경계하라” 주관식 시험의 목적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측정하는 겁니다. 같은 주관식이라도 지식만을 물으면 객관식 시험과 다를 게 없어요. 학생의 생각과 관점을 묻고, 답하게 하려면 수업 설계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목표 성취 여부를 평가하는 문제를 내야 합니다.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확인하려면 열린 문제를 내야 하죠. 이 문제를 풀려면 수업에선 생각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시험이 바뀌니 수업도 바뀌는 겁니다. ②“중간·기말 점수는 반영하지 않는다”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나타납니다. IB가 내신 성적에 고3 마지막에 제출하는 최종 보고서 점수만 반영하는 이유죠. 학생들은 수업 시간 끊임없이 내 생각을 꺼내고, 나만의 문제를 만들어 학습합니다. 각자 다른 문제를 푸니 한 줄 세우기가 불가능합니다. 중하위권 학생도 역전이 가능해요. 일타 강사 한 명이 100명을 가르치는 식의 사교육 시장이 무력화되고, 지형이 바뀝니다. ③“채점 기준을 표준화하고, 교차 채점하라” 시험의 공정성은 기르려는 역량을 제대로 평가했는가와 누가 채점해도 동일한 점수가 나오는가로 확보해야 합니다. IB는 루브릭으로 채점 기준을 통일화하고, 공식 채점 기구를 통해 점수를 검증합니다. 3만 명 채점관의 교차 채점이 점수의 공정성을 높이고요. 이러면 18만 개의 서로 다른 생각도 공정하게 채점할 수 있습니다.  」   ■ 객관식 시험 시대의 종언 시리즈 「 ① “수능 안 변하면, 미래 없다” 교육 전문가 9인의 진단(6월 5일 발행) ② 『챗GPT 교육혁명』쓴 정제영(교육학) 이화여대 교수(6월 8일 발행) ③ 『공부를 공부하다』쓴 박재원 에듀니티랩 소장(6월 9일 발행) ④ 수능 만든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대 원장 박도순(교육학) 고려대 명예교수(6월 12일 발행) ⑤ 『문재인 이후의 교육』 쓴 이범 교육평론가(6월 13일 발행) ⑥ 서울대 입학본부장 지낸 권오현(독어교육과) 서울대 교수(6월 15일 발행) ⑦ 『대한민국의 시험』쓴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6월 16일 발행) ⑧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 이선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운영기획부장(6월 19일 발행) ⑨ 호찌민시 한국국제학교 손성호 교장(6월 20일 발행) ⑩ 마이클 매기 미네르바대학 총장(6월 22일 발행) 」 

    2023.06.15 17:09

  • “방향은 객관식 수능 축소” 서울대 교수의 2028 입시 전망

    “방향은 객관식 수능 축소” 서울대 교수의 2028 입시 전망 유료 전용

    객관식 시험의 대안이었던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논란에 휩싸인 상황에서 또 한번의 대입개편이 예고됐다. 2025년부터 전면 도입되는 고교학점제에 맞춰 새로운 대입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교육공약 1호였던 고교학점제는 고교생도 대학생처럼 원하는 과목을 골라 들은 뒤 학점이 쌓이면 졸업하는 제도다. 진로에 따른 맞춤형 교육이 가능해 공교육이 활성화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수능 중심의 대입체제에선 국어‧수학‧영어 같은 과목으로의 쏠림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고교학점제 시행에 맞춰 대입이 달라져야 하는 이유다.   대입제도는 광복 이후 20여 차례나 바뀌었다. 4년에 한 번꼴이니, 대통령의 임기(5년)보다 자주 바뀐 셈이다. 입시경쟁, 사교육 부담, 공정성 논란을 해소하겠다는 취지였지만, 매번 크고 작은 부작용이 나타났고 결국 다시 제도에 손을 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번 대입 개편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부담에 더해 ‘인공지능(AI)시대 경쟁력을 갖춘 인재 양성’이라는 과제까지 짊어지고 있다. 챗GPT 등장 이후 교육계 안팎에서 “객관식 시험으로는 더 이상 미래 인재를 기를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챗GPT 시대에 맞는 대입제도는 뭘까? hello! Parents는 권오현(전 입학본부장) 서울대 독어교육과 교수에게 미래 대입제도의 방향을 물었다. 박정민 디자이너 객관식 시험으로 점수를 내 학생을 줄 세우는 일부터 멈춰야 합니다.   권오현 서울대 독어교육과 교수에게 미래 시험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개인을 시스템에 맞춰야 하는 산업사회의 방식으로는 AI시대에 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기를 수 없다는 얘기다.   대입 베테랑으로 꼽히는 권 교수는 1996년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고, 2014~2016년 입학본부장을 지냈다. 대학에서 입학을 총괄한 기간은 2년밖에 안 되지만, 학종을 대입제도의 중심축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입학본부장을 그만둔 뒤에도 대입 관련 전문가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이유다.   사실 교육 전문가들 사이에서 객관식 시험의 효용이 다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 논‧서술형 시험이라는 데도 대다수가 동의한다. 문제는 대입제도가 난수표처럼 얽히고설켜 손대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대체 어떻게 바꿔야 할까? 지난달 25일 권 교수를 만나 2028학년도 대입 개편 이유와 전망, 미래 시험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들었다. 권오현 서울대 독어교육과 교수는 "AI시대 경쟁력 있는 인재를 키우려면 객관식 시험부터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  ✏️고교학점제가 쏘아올린 2028 대입 개편   고교학점제는 고교생도 대학생처럼 원하는 과목을 이수한 뒤 학점을 쌓아 졸업하는 제도다. 문재인 정부의 대표 교육정책이었던 고교학점제는 정권이 바뀌면서 존치 여부가 불투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지에는 공감하나 대입제도와 연계해 고민해 봐야 하고 지역별 격차도 해소해야 한다”며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고교학점제에 회의적인 건 보수진영만이 아니었다. 진보 성향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도 보수 성향 교원단체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처럼 고교학점제에 반대했다. 전교조 조사에서는 92.7%, 교총 조사에서는 72.3%가 반대하거나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2021). 현장 이해 부족과 여건 미흡 등이 이유로 꼽혔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입이었다. 권오현 교수도 “수능 체제에선 과목 선택에 따른 유‧불리를 막을 수 없다”고 꼬집었다.   고교학점제가 필요한 걸까요? 사실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된 제도입니다. 너무 일반화된 제도라 고교학점제라는 용어조차 쓰지 않죠. 보완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지만 미래 인재를 키우는 데 적합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잠들어 있는 학교를 살릴 수 있어요. 여전히 적지 않은 고교생이 수업시간에 엎드려 잡니다. 그러고는 밤늦게까지 학원을 다니죠. 정답이 하나만 있는 객관식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 학생들은 획일화된 교육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로와 흥미에 따라 수업을 선택해 들을 수 있게 됩니다. 표준화가 아닌 개별화 교육 시대가 열리는 거죠.   고교학점제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학생의 과목 선택권 확대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2003년 7차 교육과정 때부터 10여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진돼 왔죠. 특히 2015개정 교육과정에서 문‧이과 구분을 없애면서 학생의 과목 선택권이 늘어났어요. 이에 맞춰 2022학년도 수능부터 문‧이과 통합으로 치러졌죠. 수학에서 확률과 통계, 미적분, 기하 세 과목 중 하나를 고르는 식이에요. 실제로 문과는 확률과 통계, 이과는 미적분‧기하 중에 하나를 선택해 여전히 칸막이가 있지만요. 고교학점제의 기반을 마련한 건 지난해 개정된 교육과정이고요.   2022개정 교육과정은 뭐가 다른가요? 고교 교육과정은 학점 기반의 다양한 선택과목을 이수하는 체제를 따릅니다. 과목마다 정해진 시간을 모든 학생에게 일률적으로 가르치는 초‧중 교육과정과 다른 점이죠. 현재 중2가 고교에 진학하는 2025년부터 적용됩니다. 1학년 때는 기초 소양을 닦는 공통국어‧공통수학‧공통영어·한국사와 통합사회‧통합과학을 듣습니다. 하지만 2학년부터는 진로나 적성에 따라 일반선택‧진로선택‧융합선택 중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들을 수 있죠.   딱히 달라지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쉽게 말해 고교 교육과 진로계발, 대학 선발이 연계된다고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한 학교에 장래희망이 건축가와 의사인 학생이 각각 있다고 해볼게요. 선택권이 없는 상황에서는 두 학생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똑같을 겁니다. 하지만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 이 두 학생이 진로에 맞는 수업을 들을 수 있어요.   어떻게요? 건축가를 꿈꾸는 학생은 미적분‧기하‧물리학‧미술‧미술창작 수업을 골라 듣고, 의사를 꿈꾸는 학생은 생명과학‧화학‧생활과윤리‧윤리와사상‧심리학 수업을 듣는 식이죠. 실제로 대학에서도 전공에 따라 권장하는 과목이 생길 겁니다. 컴퓨터학과에서는 핵심 과목으로 미적분‧기하, 권장 과목으로 확률과통계‧인공지능수학을 정해 놓는 식이죠.   수능이라는 똑같은 시험을 보고 상대평가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진로에 맞게 과목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게 문제입니다. 상대평가에서는 수강 인원수에 따라 내신 등급의 유‧불리가 발생해 학생들이 높은 점수를 받기 쉬운 과목만 수강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요. 현재 9등급 내신 상대평가에서는 상위 4%에 들어야 1등급을 받습니다. 90점을 받아도 100점 받은 학생이 많으면 1등급을 못 받죠. 성취평가제는 학생의 성취수준에 따라 A~E등급을 부여합니다. 90점 이상은 A, 80~89점은 B를 주는 식의 절대평가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또 다른 문제요? 강남·서초·송파‧양천구 같은 이른바 교육특구에 있는 고교나 자율형사립고·특수목적고로 학생이 쏠릴 가능성이 큽니다. 내부 경쟁이 치열한 학교인 만큼 내신에서 불리할까봐 입학을 꺼리는 학교잖아요. 내신 부담이 줄면 이런 학교에 아이들이 몰리고, 고교 서열화 문제가 커질 수 있죠. 또 성적 부풀리기도 문제입니다.   성적 부풀리기요? 학교에서 학생들의 내신성적을 잘 주려고 시험을 쉽게 내는 거죠. 물론 고교학점제의 성취평가제는 등급 외에도 과목별 평균과 원점수, 등급별 비율을 함께 제시해 학교에서 무작정 성적을 부풀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외에도 과목별 평가 내용이나 기준, 수행평가 내용, 집필고사 문항 등을 공개하면 평가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정부도 이런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평가 부분을 두고 고심 중인 것 같습니다. 권 교수는 "2025년에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려면 수능 중심의 대입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  ✏️방향은 나왔다, 객관식 수능 축소   고교학점제가 제대로 정착하려면 대학 입시 제도도 그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교육부는 올해 상반기까지 2028학년도 대입 개편 시안을 마련한 뒤, 의견수렴을 거쳐 내년 2월 확정할 예정이다. 권 교수는 “개편안이 발표돼야 알겠지만, 현재 거론되는 방안의 공통점은 객관식 시험의 영향력 약화”라고 강조했다.   대입 개편 방향이 어떨 거라고 보시나요? 수능시험에 논‧서술형 문제를 도입하거나, 수능을 절대평가로 전환해 자격고사로 만드는 방안이 나옵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다양하게 평가하는 학종과 내신 성적만으로 선발하는 학생부교과전형(교과)을 통합하는 방향도 있고요. 수능 위주 전형에서 정성평가를 도입하는 방식도 거론됩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의견수렴 과정에서 어떻게 달라질지도 모르고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수능 중심의 정시 전형은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고교학점제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대입에서 수능의 영향력이 줄어야 합니다. 지금 같은 체제에서 학생들이 진로에 맞춰 다양한 수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수능에 유리한 과목, 입시에 유리한 과목을 선택할 수밖에 없죠. 사실 고교학점제가 아니어도 객관식 시험은 이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상대평가도 마찬가지고요.   서울대에서 올해 정시에서 학생부를 반영한 것도 같은 맥락인가요? 2023학년도부터 정시에서 수능 점수와 함께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내신성적과 ‘세부 능력 및 특기사항’을 통해 학교생활을 성실히 하고 잠재력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서죠. 학생을 평가하는 데 수능 점수라는 한 가지 잣대만으론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겁니다.   교육제도는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개편이 쉽지 않습니다. 고교학점제와 가장 잘 맞는 대입제도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솔직히 학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광운대‧경기대‧덕성여대‧숭실대‧아주대에서 공동 연구한 결과 고교학점제에 가장 잘 맞는 전형은 학종으로 꼽혔어요. 공교육을 살릴 뿐만 아니라 학생이 학교에서 보낸 3년간의 생활을 다면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그렇죠. 고교 교육과 대학 선발이 연계된다는 점도 긍정적이고요. 금수저 전형으로 낙인찍히지만 않았다면 고교학점제를 계기로 정착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학종을 천덕꾸러기로 치부할 게 아니라 공정성을 강화할 방법을 찾는 것도 필요해요. 대부분 대학이 여기에 동의할 겁니다. 지난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에서 대학 90곳의 총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만 봐도 알 수 있죠.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 학종을 늘리겠다는 답변이 57.8%로 가장 많았거든요. 권 교수는 "2028학년도 대입 개편의 방향은 수능과 같은 객관식 시험의 영향력 축소"라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  ✏️논‧서술 vs 자격고사, 수능의 미래는?   고교학점제가 아니더라도 객관식 시험으로는 미래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는 데 대다수가 공감한다.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은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는 덴 논‧서술형 수능이 적합하다”고 말했고, 김도연(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도 “교육을 바꾸려면 수능부터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미래 수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권 교수는 “논‧서술형 문제를 도입하는 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를 것”이라고 봤다.   왜 그런가요? 지금 논의되는 논‧서술형이라는 게 주관식이나 정답이 있는 한 줄짜리 서술형은 아니잖아요. 프랑스 바칼로레아나 독일의 아비투어처럼 학생의 창의력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는 방향이겠죠? 이렇게 전환하는 덴 기술적인 문제가 있어요. 출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이 한다고 해도, 채점은 누가 하나요? 지금 선다형 수능도 시험을 치르고 거의 한 달 뒤에 성적표를 배부합니다. 채점에만 한 달 정도 걸리는 셈이죠. 게다가 지난해 평가원에 올라온 수능 이의신청이 640여 건에 달했어요. 논‧서술형으로 바뀐다면 채점 기준이 뭔지 등을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요? 출제와 채점의 주체를 분리할 수 있겠죠. 시험 출제는 정부가 맡고, 채점은 대학에서 하는 겁니다. 현재 학생들은 정시에서 3개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데, 1지망 대학에서 채점을 담당하는 거죠. AI가 채점하는 방식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채점을 신뢰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채점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더 큰 부작용이 있습니다.   뭔가요? 사교육비가 폭증할 겁니다. 지난해 사교육비는 2007년 조사 이래 역대 최대 수준인 26조원을 기록했어요. 코로나19로 학습 결손에 대한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 해도 정말 많은 금액이죠. 사실 대입 전형의 변화는 어떤 방식이든 사교육비 증가로 이어집니다. 학종 도입 이후 입시컨설팅 학원이 2014년 51개에서 5년 만에 248개로 5배 늘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수능을 어떻게 바꾸는 게 현실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논‧서술형을 도입해 수능의 영향력을 키우는 건 맞는 방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건 수능을 절대평가로 전환해서 자격고사로 만들고, 필요하면 대학별로 논‧서술 시험을 실시하는 겁니다. 고교에서도 논‧서술 수업과 평가가 이뤄져야겠죠. 정부는 대학이 고교 교육과정을 벗어난 논‧서술형 문제를 출제하지 않도록 관리‧감독하고요. 그래야 논‧서술형 시험이 출제‧채점‧공정성 논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부는 수능같이 민감한 제도를 변경하려면 여러 부작용을 고려해 신중하게 초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방안이 시대적으로 타당하면 적극적으로 국민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2017년의 혼란이 재연될 수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수능 절대평가를 추진했던 것 말씀인가요? 2017년 마련한 2021학년도 수능 개편안이었죠. 수능 7과목 중 영어‧한국사‧통합사회‧통합과학 등을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1안과 전과목을 모두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2안 중 하나를 택한다는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변별력 상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교육부는 대입개편을 1년 유예했죠. 의견수렴이라는 명문을 내세웠지만 총선을 앞두고 민심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결정이란 시각이 우세했어요.   1년 뒤에도 제대로 개편이 이뤄지진 않았던 것 같아요. 2018년에는 대입 정시‧수시 비중, 수능의 절대평가 여부가 겹쳐져서 갈등이 한층 심각해졌습니다. 개편 논의가 교육부에서 국가교육회의, 대입특위와 공론화위를 거쳐 결국 시민참여단으로 떠넘겨졌고요. 결국 정시 비율을 30%로 상향하는 선에서 결론이 났죠. 진보‧보수 양쪽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고요. 대입 개편 방향이 어떻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부작용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권 교수는 “사실 어떤 개편안이 나오더라도 갈등과 혼란은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입제도를 바꾸는 건 그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다. 변화의 속도를 감안하면 더는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혼란과 갈등이 있다고 안 바꿀 수는 없습니다. 객관식 문제풀이식 교육의 축소라는 방향에 맞춰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권 교수는 " 논‧서술형 수능은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며 "수능을 절대평가로 전환해 자격고사로 만들고 대학에서 논술고사를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 2028학년도 대입개편 전망 「 ① “고교학점제에 맞는 대입 제도 필요하다.” 2025학년도에 전면 도입되는 고교학점제는 고교생도 대학생처럼 원하는 선택과목을 이수한 뒤 학점이 쌓이면 졸업하는 제도다. 진로에 따른 맞춤형 교육이 가능하지만, 현재 대입 체제에서는 수능과목으로 쏠림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교육부는 올해 상반기까지 대입개편 시안을 마련한 뒤 내년 2월 확정한다.   ② “방향은 객관식 시험의 영향력 축소다.” 선다형 시험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미래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구체적으로는 수능 논‧서술형 도입, 수능 자격고사화, 학종‧학교 통합, 정시에서 교과평가 도입 등이 거론된다. ③ “논‧서술 vs 자격고사, 미래 수능은?” 2028학년도부터 수능에 논‧서술을 도입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 출제부터 채점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수능은 절대평가로 전환해 자격고사로 만들고 대학별로 논‧서술 시험을 치르는 게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이다. 」   ■ 객관식 시험 시대의 종언 시리즈 「 ① “수능 안 변하면, 미래 없다” 교육 전문가 9인의 진단(6월 5일 발행) ② 『챗GPT 교육혁명』쓴 정제영(교육학) 이화여대 교수(6월 8일 발행) ③ 『공부를 공부하다』쓴 박재원 에듀니티랩 소장(6월 9일 발행) ④ 수능 만든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대 원장 박도순(교육학) 고려대 명예교수(6월 12일 발행) ⑤ 『문재인 이후의 교육』 쓴 이범 교육평론가(6월 13일 발행) ⑥ 서울대 입학본부장 지낸 권오현(독어교육과) 서울대 교수(6월 15일 발행) ⑦ 『대한민국의 시험』쓴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6월 16일 발행) ⑧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 이선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운영기획부장(6월 19일 발행) ⑨ 호찌민시 한국국제학교 손성호 교장(6월 20일 발행) ⑩ 마이클 매기 미네르바대학 총장(6월 22일 발행) 」 

    2023.06.14 17:24

  • “학종·수능 다 불공정한데, 조국 사태로 학종만 오명”

    “학종·수능 다 불공정한데, 조국 사태로 학종만 오명” 유료 전용

    대한민국 교육의 정점에 있는 수능시험은 창시자조차 폐지를 외치는 제도가 돼버렸다. 객관식 문제로 한 사람의 수학(修學) 능력을 평가하는 건 시대에 맞지 않아서다. 그 대안으로 나왔던 게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다. 수능이라는 단 하나의 시험 성적으로 아이들을 한 줄 세우지 않고, 다양한 역량과 창의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겠다는 취지였다.   야심 차게 시작한 학종은 그러나 20년 만에 ‘금수저 전형’이란 오명을 얻고 말았다.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챗GPT가 막힘없이 논문을 쓰는 시대에도 이 제도는 유효할까? hello! Parents는 이범 교육평론가를 만나 학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물었다. 박정민 디자이너 학종의 전신은 입학사정관제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가 사실은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요. 미국에서 보편화된 입학사정관제는 명문가 자녀를 입학시키거나 유대인 선발을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됐거든요. ‘학생의 다양한 능력을 평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말이죠.   이범 교육평론가에게 “학종이 수능으로 대표되는 객관식 시험의 대안이 될 수 있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쉽게 말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얘기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강남 대치동을 주름잡던 스타강사 출신으로 메가스터디를 공동 창업했지만, 2003년 돌연 학원가를 떠나 EBS 등에서 무료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과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을 지냈다. 『문재인 이후의 교육』 『나의 직업 우리의 미래』 『우리 교육 100문 100답』 등 교육 관련 도서도 여럿 썼다.   입학사정관제는 진보와 보수의 합작품이다. 2007년 노무현 정부에서 시범 도입된 입학사정관제는 이명박 정부 들어 대대적으로 확대됐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외부 수상 이력을 금지하고 교내 활동만으로 제한하는 학종으로 바꿨다. 진보 정부에서 시작해 보수 정부를 거쳐 면면이 이어져 온 제도가 시작부터 잘못됐다니, 무슨 뜻일까? 교육정책 박사과정을 시작할 예정으로 영국에 머무르고 있는 이범 교육평론가를 지난달 22일과 29일 두 차례에 걸쳐 줌으로 만났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학생부종합전형의 전신인 입학사정관제는 학생을 다양하게 평가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됐지만, 한국처럼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선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중앙포토  ━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입학사정관제에서 시작한 학종에 기여한 대통령은 총 5명. 김영삼 정부 시절 이뤄진 ‘5‧31 교육개혁안’에 포함된 ‘자율’, 김대중 정부가 내세웠던 ‘여러 줄 세우기’가 토대가 됐다. 미국의 입학사정관제를 시범 도입한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2007년 이뤄진 2008학년도 수시에서 서울대‧연세대 등 10개 대학이 254명을 모집한 게 시작이었다. 당시 대입선발 인원(37만8268명)의 0.07% 정도밖에 안 되는 비율이다. 하지만 이후 집권한 이명박 대통령은 입학사정관제를 급속도로 확대했다. 2024학년도 기준 학종 선발 비율은 23.0%로 전체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한다. 이범 평론가는 “지금처럼 주요 전형으로 자리 잡을 게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왜 그렇죠? 한국처럼 경쟁이 치열하고, 명문대 선호 현상이 강한 나라에선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 부담도, 사교육도 커지는 구조죠. 하지만 ‘대학 자율화’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입학사정관제를 크게 확대했어요. 거액의 예산을 지원하면서 대학들이 이 제도를 실시하도록 유도했죠. 시행 첫해에 20억원이었던 재정 지원 규모는 2010년 350억원으로 늘어났습니다. 입학사정관제가 자리 잡으면 교육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현재 교육부 장관이기도 한 이주호 당시 교육부 차관의 주장이었죠.   입학사정관제가 교육 문제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 공교육이 살아나고, 대학의 자율성이 확대될 거란 기대였죠. 일정 부분 맞는 얘깁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부담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요. 정부가 ‘자율’을 내세울 때마다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게 바로 이 부담 때문입니다. 입학사정관제도 점수 일변도의 대입제도를 완화시킬 보완재 정도의 역할이 적당해요.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입학사정관제를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했죠.   입학사정관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제도는 아니잖아요. 미국에선 보편화된 제도인데, 미국은 어떤가요? 미국에서 입학사정관제가 시작된 건 1920~30년대예요. 이전에는 대학별로 출제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이 도입되는 한편 입학사정관제가 시작됩니다. 재밌는 건 입학사정관제가 다양한 역량을 가진 학생을 입체적으로 선발하겠다는 좋은 취지로 도입된 것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또 다른 취지가 뭔가요? 19세기 후반부터 유대인 이민자들이 미국에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하버드대‧컬럼비아대 같은 아이비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냈어요. 20세기 초반 미국의 유대인 인구 비율이 5% 정도였는데, 하버드대 신입생의 30%, 컬럼비아대 신입생의 50%를 유대인이 차지했죠. 미국의 주류는 앵글로색슨 계열 백인과 개신교도거든요. 이들 입장에서는 이교도인 유대인이 자신들의 상아탑을 휘젓고 다니는 게 용납이 안 됐던 거죠. 그래서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해 유대인 입학자 비율을 제한해버렸어요. 제 얘기가 아닙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대니얼 골든이 쓴 『왜 학벌은 세습되는가?』, 제롬 캐러벨 버클리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누가 선발되는가』 같은 책에 다 나온 얘기죠. 게다가 이건 현재 진행형이에요. 유대인뿐 아니라 아시아계 차별에 활용되고 있다는 의심도 받거든요.   아시아계 차별이요? 아시아 학생들이 상당히 성적이 좋은데, 그래도 아이비리그 대학의 입학정원 중 20%를 넘지 못하거든요. 학생들이 2018년부터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어요. 예상하다시피 법원은 ‘자율 존중’을 내세워 대학의 손을 들어줬죠. 게다가 입학사정관제는 명문가 자녀를 입학시키는 방법으로도 활용됐어요.   어떻게요? 우리나라 대입제도로 설명하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아요. 재벌 3세인 A가 공부를 못한다고 해볼게요. 수능에서 7~8등급을 받는다고 했을 때, 정시로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에 합격할 수 있을까요? 이건 불가능할 겁니다. 점수라는 명백한 기준이 있으니까요. 한국이 그 정도 비리를 용인해 줄 정도로 혼탁한 사회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입학사정관제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요. 대학에서 학생을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평가하는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니까요. ‘깜깜이 전형’이라고 불리는 이유죠.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보시나요? 미국식 입학사정관제도가 아니라 유럽식 논‧서술형 시험을 도입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논‧서술형 시험도 사교육비 폭증 같은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왔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제도를 도입하든 부작용은 피할 수 없어요. 이걸 인정한다면, 전 논‧서술형 시험이 미래 인재를 키우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이범 교육평론가는 "학종이 공교육을 살리는 데 기여했지만, 학생 부담도 키웠다"고 말했다. 교육정책 박사과정 진학을 앞두고 현재 영국 런던에서 지내고 있는 이범 교육평론가가 런던 중심가에서 찍은 사진.  ━  ✏️공교육 정상화 vs 학생 부담 가중   입학사정관제의 가장 큰 문제는 학교생활기록부에 외부 수상 경력을 적도록 허용한 점이었다. 토익‧토플‧텝스 같은 공인외국어인증시험을 비롯해 소논문 같은 ‘스펙 쌓기’ 열풍이 불었고, 관련 사교육도 성행했다.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대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2014년 입학사정관제의 명칭을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바꾸고 외부 스펙이 아닌 학교 내 활동만 기재할 수 있게 했다.   이후 학교에서는 학생 참여 활동을 늘리기 위해 교내 대회를 신설했고, 교사들은 수업을 다양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학종이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한 셈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효과만 있었던 건 아니다. 학생‧학부모의 부담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이범 평론가는 “철인 3종 경기가 철인 10종 경기가 됐다”고 비판했다.   왜 부담이 더 커진 거죠? 올해 대입부터 자기소개서와 교과 외 활동(동아리·봉사·독서활동 등)이 폐지됐지만, 이전까지 학생들은 내신시험, 교과 외 활동, 수능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려야 했어요. 내신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데, 그 와중에 동아리‧독서‧봉사활동도 챙겨야 했죠. 그리고 대부분 대학이 수능에서 일정 점수를 넘겨야 하는 최저학력기준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수능 준비도 소홀히 할 수 없었어요. 결국 학생들은 수퍼맨이 돼야 했습니다. 고교‧대학과 달리 학생‧학부모가 학종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죠.   학생은 그럴 거 같아요. 그런데 학부모도 학종을 싫어하나요? 입학사정관제가 학종으로 바뀌었어도 부모의 영향력이 여전히 힘을 발휘했거든요. 교수‧의사 같은 전문직이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없는 대다수 평범한 학부모는 학종을 불공정한 전형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죠. 또 학교‧교사별 편차가 큰 것도 문제였어요. 외부 스펙을 못 쓰니 학교 활동이 다양해야 하는데, 고교별로 차이가 컸죠. 또 교사 역량에 따라 학생부의 질(質)이 달라졌기 때문에 학생‧학부모 입장에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죠.   학교, 그러니까 고등학교와 대학은 학종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고등학교부터 설명할게요. 학종이 실제로 공교육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됐어요. 내신성적을 반영하니까 애들이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수업‧평가 방식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도 효과가 있었죠. 수업 중 학생의 활동 내용을 적는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이 있는데, 그냥 교과서 읽어주고 판서하는 수업으로는 적을 게 없잖아요? ‘바른 자세로 수업 들었다’ 이렇게 쓸 수는 없으니 토론‧탐구 수업이 이전보다 활성화됐죠. 또 교과 외 활동이 중요하다 보니 동아리 같은 학교 내 학생 활동도 늘어났고요. 실제로 교사 중에는 학종 도입 이후 ‘처음으로 수업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어요.   대학도 학종을 선호하나요? 학종으로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이 성적은 높고 중도 이탈률은 낮았거든요. 2015~2016년 서울 지역 주요 사립대 10곳에서 공동조사한 결과예요. 학종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평균 학점이 3.33점으로 수능으로 입학한 학생(3.17점)보다 높았어요. 또 재수 등으로 대학을 떠나는 비율이 현격히 낮았습니다. 수능 입학생은 6%가 그만두는데, 학종 입학생은 중도 이탈 비율이 2.5%에 불과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예요. 학종은 비교과 활동이나 자기소개서에서 전공적합성을 중요하게 평가하기 때문에 준비 과정에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학생이 진학 후 적응을 잘하는 건 당연한 거죠. 대학에 대한 애정과 충성도 역시 수능 점수에 맞춰서 합격한 학생과 다를 수밖에 없고요. 학종 시작 첫해인 2015학년도에 15.6%였던 학종 전형 비율은 2021학년도에 24.8%까지 높아졌죠. 이범 교육평론가는 "학종은 2019년 조국 사태를 계기로 불공정 전형으로 낙인찍혀 버렸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  ✏️“조국 사태로 불공정 낙인 찍혀”   학종은 입학사정관제 때부터 금수저‧깜깜이 전형이라는 비판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2018년 국가교육회의가 대입에서 정시모집을 30% 이상으로 늘릴 것을 권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학종이 불공정 전형으로 추락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다. 2019년 불거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 특혜다. 조민씨가 대학 진학 과정에서 교수인 부모의 지위를 이용해 스펙을 쌓은 게 문제가 됐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입 정시 비율의 상향을 포함한 입시 개편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범 평론가는 “1997학년도 수시 도입을 시작으로 객관식 시험인 수능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노력이 조국 사태를 계기로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조국 사태로 객관식 시험 시대로 회귀했다는 건가요? 대입에서 학종‧논술전형 비율이 높은 서울 16개 대학의 정시 비율이 40%로 늘어났으니까요. 경희대‧고려대‧서울대‧성균관대‧연세대‧한양대 등 학생‧학부모가 선호하는 소위 명문대가 대부분 포함됐죠.   이전까지는 이들 대학에서 학종의 비율이 높았나요? 2021학년도 기준 전체 학종 비율이 24.8%인데, 이들 16개 대학의 비율은 46.2%예요. 거의 2배죠. 반면에 수능 위주의 정시 전형은 29.5%였는데, 지난해 41.2%까지 올라갔어요. 대입 시계가 20년 전으로 회귀한 셈이죠. 박정민 디자이너 엄밀히 말하면 조민씨가 대학 간 2010년에는 학종이 아니라 입학사정관제였잖아요. 맞아요. 입학사정관제는 토익‧토플 같은 공인영어성적이나 논문‧표창장 등을 입시에 반영하는 게 별문제가 안 됐죠. 당시에는 전문직을 가진 부모들끼리 스펙 품앗이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고요. 하지만 문재인 정부로서는 조국 사태에 대한 부담이 컸을 거예요. 문재인 정부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입시비리였으니까요.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급히 정시 확대라는 카드를 꺼내 든 거죠.   사실 학종은 성적뿐 아니라 학생의 다양한 활동을 평가하는 건데, 교과 외 활동이 축소되면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지는 것 아닌가요? 일부에서 그런 지적도 합니다. 학생의 다양한 활동이나 자기소개서 같은 걸 없애버리면 대학에서 학생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게 내신 성적이랑 세특(세부능력 및 특기사항)밖에 안 남으니까요. 다양한 잠재력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기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뽑는 제도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죠. 쉽게 말해 학종이 껍데기만 남게 된 겁니다. 학종뿐 아니라 수능도 불공정한 제도인데, 학종만 비판의 대상이 됐죠.   학종뿐 아니라 수능도 불공정한데, 학종만 오명을 뒤집어썼다는 건가요? 학종파와 수능파가 서로 다른 공정성을 두고 싸우고 있어요. 둘 중에 어떤 게 더 공정하다고 보세요?   공정성을 놓고 봤을 때는 수능인 것 같아요. 점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수능에서 380점 받은 학생이 합격하고, 300점 받은 학생이 떨어지는 건 납득이 갈 것 같아요. 그건 공정성을 ‘비례성’이라고 해석하는 시각이에요. 결과가 실력이나 노력에 비례해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서울대와 전국 의대의 정시모집 합격자를 살펴보면 수시보다 수도권 강세가 두드러져요. 서울대를 기준으로 보면 학종을 포함한 수시에서 수도권 비율이 58.4%였지만, 정시로 보면 78.4%(2022학년도)로 높아지거든요. 쉽게 말해 수시보다 정시에서 잘사는 아이들이 더 많이 합격한다는 겁니다. 정시가 개천에서 용 나기 더 어려운 구조라는 얘기죠. 이게 공정한 걸까요?   그럼 학종이 더 공정한 건가요? 공정성을 ‘형평성’이나 ‘결과의 평등’이라고 해석하면 그래요. 학종이 계층별‧지역별로 골고루 뽑히는 효과가 있거든요. 실제로 2017년 서울 10개 사립대에서 조사해 봤더니 학종으로 뽑힌 학생이 정시보다 중‧저소득층이나 비수도권 비율이 높았어요. 학종보다는 내신 상대평가로 인한 균등선발 효과긴 하죠. 하지만 중요한 건 대다수 학생이 수능이 더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에요.   정작 결과적으로 더 평등한 건 학종인데, 학종이 금수저 전형 오명을 쓰고 있는 셈이네요. 왜 그럴까요? 학종이 갖는 ‘결과의 평등’을 학생들은 체감하지 못해서죠. 입시가 끝난 다음 뉴스에서나 볼 수 있거든요. 하지만 학종 전형 과정의 불공정성은 쉽게 체감할 수 있어요. 교사가 성적이 우수한 학생의 학생부를 잘 써준다거나 옆자리 친구가 회당 300만원짜리 자소서 컨설팅을 받는 모습을 직접 보니까요. 일부 학교에서 상위권 학생에게 수상 실적을 몰아주는 일도 있고요.   학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시나요? 당분간은 현재 비율을 유지하면서 이어질 겁니다. 공교육과 대학의 선호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학종 내 교과 외 활동이 간소화되면서 내신이라는 객관식 시험의 중요성이 커졌잖아요. 결코 미래지향적인 제도라고 볼 수 없죠. 선진국 중에 대학이 객관식 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뿐이에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체에서는 터키·칠레·멕시코까지 6개국이고요. 하지만 미국의 객관식 시험인 SAT는 전형 요소의 일부일 뿐 입학의 결정적 요인이 아니고, 일본 역시 각 대학이 본고사를 실시해 객관식 시험인 센터시험의 영향력이 크지 않죠. 객관식 시험이 시대에 맞지 않다는 건 옆 나라만 둘러봐도 알 수 있죠.   이범 교육평론가는 “가장 이상적인 대입 개편은 독일·영국·프랑스·핀란드 등 유럽 국가들처럼 수능을 100% 논‧서술형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지선다형 문제가 미래 인재를 키우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논‧서술시험을 도입하기에는 채점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와 이로 인한 여러 가지 부작용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장 큰 부작용은 사교육비 증가일 겁니다. 이를 우려해 정치인들이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죠. 이런 상황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예일대와 옥스퍼드대 조사에 따르면 앞으로 45년 안에 모든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한다고 해요. 정답이 하나만 있는 시험으로는 절대 창의성을 키울 수 없습니다.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가장 이상적인 대입 개편은 수능을 100% 논‧서술형으로 전환하는 것이지만, 여러가지 부작용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 학생부종합전형이 대안이 되지 못한 세 가지 이유 「 ①“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학종의 전신 입학사정관제는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됐다. 수능 중심의 ‘한 줄 세우기’에서 벗어나 학생의 다양한 능력을 평가하겠다는 취지였다. 이후 MB정부에서 확대되며 대입전형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한국이 벤치마킹한 미국의 입학사정관제는 명문가 자녀를 입학시키거나, 유태인 선발을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도입됐다. ②“공교육 살렸지만, 학생 부담 늘었다.” ‘스펙쌓기 열풍’을 불러온 입학사정관제는 2014년 교내활동만으로 제한하는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바뀌었다. 내신성적과 교내활동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공교육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 교사들도 수업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하지만 학생들이 내신‧비교과‧수능까지 준비하는 삼중고에 시달린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③“조국 사태로 불공정 낙인이 찍혔다.” 학종은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 특혜 문제가 불거지면서 불공정 전형으로 추락했다. 이를 계기로 서울 16개 대학에서 정시가 40% 수준으로 확대됐고, 올해부터 교과 외 활동과 자기소개서가 폐지됐다. 2007년 입학사정관제를 시작으로 수능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노력은 조국 사태를 계기로 무산됐고, 학종은 껍데기만 남았다. 」   ■ 객관식 시험 시대의 종언 시리즈 「 ① “수능 안 변하면, 미래 없다” 교육 전문가 9인의 진단(6월 5일 발행) ② 『챗GPT 교육혁명』쓴 정제영(교육학) 이화여대 교수(6월 8일 발행) ③ 『공부를 공부하다』쓴 박재원 에듀니티랩 소장(6월 9일 발행) ④ 수능 만든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대 원장 박도순(교육학) 고려대 명예교수(6월 12일 발행) ⑤ 『문재인 이후의 교육』 쓴 이범 교육평론가(6월 13일 발행) ⑥ 서울대 입학본부장 지낸 권오현(독어교육과) 서울대 교수(6월 15일 발행) ⑦ 『대한민국의 시험』쓴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6월 16일 발행) ⑧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 이선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운영기획부장(6월 19일 발행) ⑨ 호치민시 한국국제학교 손성호 교장(6월 20일 발행) ⑩ 마이클 매기 미네르바대학 총장(6월 22일 발행) 」 

    2023.06.12 17:03

  • 수능 폐지 외치는 수능 창시자 “지금 수능, 공정하지 않다”

    수능 폐지 외치는 수능 창시자 “지금 수능, 공정하지 않다” 유료 전용

    대한민국 교육의 정점엔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있다. 초·중·고교 12년 교육이 단 하나의 시험으로 수렴한다. 오직 수능을 위해 학교를 떠나고 두 번, 세 번 수능을 보는 이들도 늘고 있다. 지난해 수능에서는 졸업생, 검정고시생 등 기타 수험생의 비율이 전체 응시생의 31%를 차지했다. 1997학년도 수능 이후 최대치다.     hello! Parents가 『객관적 시험 시대의 종언』기획으로 만난 전문가 9인 대부분이 객관식 문제 풀이, 암기 중심의 교육이 바뀌지 않는 주요 사유로 수능을 꼽았다. 수능 창시자를 찾아간 건 그래서다. 1980년대 말 수능을 설계하고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초대 원장(1998~2000년), 한국교육학회장, 교육평가학회장 등을 역임한 박도순(교육학)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오랜 기간 수능 시험과 교육을 고민한 원로 교육학자인 그에게 수능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물었다.     박정민 디자이너 수능 만점자가 수만 명씩 나와야 정상입니다.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는 수능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능의 최대 화두가 변별력인 마당에 그가 이런 도발적인 주장을 펼치는 건 왜일까. 박 교수는 “고등학교 교과 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사람이면 누구나 맞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당초 수능의 취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잠재력을 입증할 수 있는 입시 자격 시험, 수능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박 교수가 처음 구상했던 새 입시 시험, 수능의 청사진은 그랬다. 그는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0년대 말 교육부 대학교육심의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현 수능의 시초가 된 시험을 설계했다. ‘암기 위주의 교과목 시험’이라는 비판을 받던 학력고사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수능이었다. 그렇게 1993년(1994학년도 수능) 첫선을 보인 수능은 ‘획기적인 시험’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종합적 사고력을 잴 수 있는 신선한 시험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30년 뒤, 수능은 과거 학력고사가 받았던 질타를 똑같이 받고 있다. 특히 챗GPT 시대가 열리며 객관식 암기 시험으로 전락한 수능에 대한 회의론, 폐지론이 거세어지고 있다.     박 교수는 “수능을 살리려면 처음 수능이 탄생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수능의 문제 형식부터 유형, 쓰임새까지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수능에 대한 오해와 미신부터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못할 바엔 “아예 수능을 없애는 게 낫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수능 창시자인 그는 왜 수능 폐지론자가 돼버렸을까? 대학 입학 시험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지난달 23일 박 교수를 만나 물었다.   '수능 창시자'로 불리는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는 "애초 수능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수하면 누구나 맞힐 수 있는 문제로 출제하려 했다"며 "수능 만점자가 수만 명 나와야 정상인 셈"이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  “수능은 교과목 시험이 아니었다.”   박도순 교수는 “지금 수능은 처음과 99% 달라졌다”는 진단을 내린다. 1990년 당시 교육부(문교부)가 발표한 대학입시제도 개선안에는 향후 수능이 될 새 시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특정 고교 교과별 시험이 아닌 고차적인 사고력을 측정한다’. 단편적인 교과목 지식의 암기를 탈피하는 게 수능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애초엔 시험 영역도 언어, 수리·탐구, 외국어(영어) 등 3개 영역이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그 명칭이 최종 확정되기 전인 1991년까지는 ‘대학교육적성시험’으로 불렸다.     수능이 적성 시험이었다고요? 수능의 원래 의도는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가늠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적성이란 이름이 붙었죠.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말그대로 수학(修學)의 기초가 되는 보편적 학업 능력을 평가하겠다는 겁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충실히 배우고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답할 수 있도록 문제를 내려고 했어요. 그러면 한 고등학교에 열명만 어림잡아도 고등학교가 천 곳이 넘으니 만점자가 수만 명이 나오는 게 맞잖아요. 문제도 개별 과목이 아니라 통합 교과적으로 내겠다고 했고요.   통합 교과적인 문제가 뭔가요? 국어·영어·수학 이런 교과목별 시험이 아니라는 거예요. 두 개 이상의 여러 과목이 직접·간접적으로 연관되고, 암기가 아닌 사고력으로 풀 수 있는 문제를 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 수능을 만들 때는 언어와 수리 두 영역만 보려고 했어요. 언어 능력이란 건 대학에서 고차원적 생각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하잖아요. 교수의 강의를 잘 들어야 하니 듣기 문제도 넣었죠. 수리 능력은 논리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데 이걸 측정하기에는 수학이 가장 적합하니까 수학이 들어갔고요.   그런데 어쩌다 영어나 과학, 사회 같은 다른 과목이 수능에 포함된 거죠?   당시 대학에서 쓰는 교재가 영어로 된 게 많았어요. 영어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꼭 필요하니 시험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서 들어갔죠. 그랬더니 과학계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학은 왜 넣지 않느냐고 반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탐구가 생겼죠. 이번엔 사회과학 분야에서 들고 일어나더라고요. 결국 사회탐구도 포함됐죠. 노태우 대통령도 ‘어쩔 수 없다’고 했어요. 시험에 개별 교과목이 들어가다보니 적성검사라는 이름도 쓸 수 없게 됐어요.   그래도 초기엔 암기 위주 시험에서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과거 학력고사는 교과서 달달 잘 외우는 학생이 점수를 잘 받는 시험이었어요. 암기 위주 공부의 부작용을 없애자고 만든 게 수능이었고요. 그런데 요즘 수능은 다시 학력고사 시절로 돌아갔어요.   박도순 교수는 "수능이 처음과 99% 달라졌다"며 "암기력 위주의 학력고사 시절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수능이 학력고사가 됐다?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수능 문제를 다시 풀어보는 거죠. 제가 고려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에 3·4학년 학생 10명을 모아서 그해 수능을 다시 풀어보게 했거든요. 그중 절반만 고려대에 다시 합격할 수 있는 점수가 나왔어요. 기자님이 올해 수능을 다시 본다면, 나왔던 대학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나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수능이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 적격자를 뽑는 시험이라고 하면 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고3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더 못 보는 시험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수능을 처음 기획하던 30여년 전에도 제가 문교부(교육부) 출입 기자들한테 언어 영역 시범 문제를 풀어보게 한 적이 있어요. 그때 30명 넘는 기자들이 모두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 높은 점수를 받았어요. 고등학생보단 언어나 사고 능력이 뛰어난 이들일 테니까 당연한 결과였죠. 암기한 지식이라는 건 3년 이내에 75%가량은 잊어버려요. 잊어버릴 만한 걸로 시험을 내니 다시 못 푸는 문제가 지금 수능인 거예요. 애초 의도했던 종합적인, 고차원적 사고력 측정이란 목표에서 벗어났다는 얘깁니다.   종합적인 사고력이라는 건 시험에서 어떻게 평가하죠? 문제 상황을 주고 이를 해석하고 해결할 수 있는지 봐야 합니다. 지금처럼 EBS 연계로 지문이나 문제를 알려주고 거기서 시험을 내면 결국 암기력 시험밖에 안 돼요. 예를 들어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상황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추락의 이유를 물리적, 화학적, 지구과학적, 심리적 측면에서 추정해 보라고 하는 거죠. 이러면 자신이 배운 걸 가지고 추론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이러려면 사실 객관식, 선다형 시험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수능이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 논술·서술형이 돼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주관식도 포함되야죠. 대신 그냥 단답식이나 개념을 외워서 그대로 옮겨 쓸 수 있는 유형은 안 돼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이걸 글로 잘 풀어낼 수 있어야죠. 이건 수능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다른 시험들도 마찬가지죠. 4차산업 시대에는 논리적·통합적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이 필요해요. 지금의 수능, 객관식 위주 시험과 교육으로는 이런 역량을 길러낼 수 없어요. 그러려면 시험이 바뀌고 교육이 달라져야 합니다.     ━  “수능은 공정하지 않다.”   수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국가기관이 출제하고 객관식 점수로 산출되는 수능 시험이 가장 공정한 평가라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수시 학생부종합전형(학종) 비리가 불거졌을 때 수능 중심의 정시 확대 정책이 나온 것도 그래서다. 그래야 공정성이 강화된다는 논리였다. 박 교수는 수능이 공정하단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수능 점수에 대한 미신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박도순 교수는 "수능 점수는 측정 오차가 크고, 학력이란 정신상태의 일부만 잴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수능을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건 "숫자에 대한 미신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장진영 기자   수능 점수가 미신이라뇨? 수능 점수가 곧 그 사람의 학습 역량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시험으로 재려는 건 공부할 수 있는 역량인데, 역량이라는 게 고정적인 게 아니잖아요. 시험을 아침에 보느냐, 저녁에 보느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질 수도 있어요. 다시 말해 측정 오차가 크단 겁니다. 전문가들이 오랜 기간 걸쳐 만들고 보완한 지능검사도 측정 오차가 5점이 넘어요. 한 달여간 합숙해 만든 수능 점수 오차는 말할 것도 없겠죠. 수능 점수 10점 정도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고 봐요.     국어시험 잘본 사람이 국어 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는 건가요? 수능 시험 결과 잴 수 있는 학습 역량이라는 건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요. 예를 들어 국어 능력이라는 건 수많은 영역으로 나뉠 텐데, 영역별로 몇 개 문항 맞고 틀렸는지로 전체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냐는 거죠. 다시 말하지만 370점 받은 학생이 360점 받은 학생보다 지적으로 더 우수하고, 학업적인 능력도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는 얘깁니다. 그건 숫자의 차이지, 능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점수를 맹신해요. 미신이죠.     사람들은 더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 더 상위권 대학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더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시험을 본 내용이 타당하지 않은데, 어째서 공정한가요? 게다가 수능 점수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대학의 당락이 결정된다, 이게 공정한가요? 370점이랑 369점은 차이가 없는데, 한 사람은 대학에 붙고 다른 사람은 떨어지는 것만큼 불합리한 게 어디 있냐는 말입니다.    서울 주요 대학 입시에선 수능 위주로 뽑는 정시 비중이 40% 이상입니다. 그만큼 수능 영향력이 커졌어요. 대학에서 수능을 쓰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전국 단위의 시험이 수능밖에 없어서예요. 대학 입장에서는 우수한 학생을 뽑아야 하는데, 이 학생이 전국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상대평가로 점수로 줄을 세우는 거죠. 상대평가라는 건, 다른 사람과 비교해 구분하려는 게 목적이에요. 구분이 아니라 개인별 ‘수준’을 파악하는 데 시험의 주안점을 둬야 해요.   수능을 절대평가 방식으로 바꿔야 한단 말씀인가요? 절대평가로 가는 게 교육적으로도 옳은 방향이에요. 각 개인이 목표한 수준에 도달했느냐를 보는 거죠. 줄세우기를 하면 학생들을 화나게 하는 것 외엔 효과가 없어요. 심리적인 부담을 주고 학교 가기 싫어하게 만드는 첫 번째 요인이 서열화입니다.  지난달 23일 만난 박도순 교수가 수능 시험 개발과 관련해 자신이 주도한 연구 보고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 교수는 "수능을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게 교육적으로 옳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수능을 절대평가로 만들면 변별력이 없어진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학생부종합전형 같은 입시 제도는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도 강하고요. 실제로 비리도 많았고요. 세상 어떤 평가도 완벽하게 공정할 수는 없어요. 모든 평가는 주관적입니다. 하지만 그 주관적인 평가가 모이면 객관적인 걸 만듭니다. 한 사람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심층 면접을 하는 게 맞아요. 예를 들어볼게요.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 사람이 내 애인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판단하죠? 그 사람에 대해 시험을 보면 알 수 있나요? 대화를 깊게 나눠 보면 바로 감이 오잖아요. 대학에서 면접관 10여 명이 학생 한 명을 심층 면접하면, 그 평가와 의견이 90% 이상 일치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부작용은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잘 정착시키는 게 관건이에요. 믿을 수 없다고 안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  “수능은 고등학교에서 가르치지 말라.”   수능이 처음 도입될 당시 목표에는 ‘고교 교육 정상화’도 포함돼 있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춰 문제를 출제하고, 암기가 아닌 사고력 중심의 교육을 유도하겠다는 취지였다. 30년이 흐른 지금, 현실은 정반대다. 변별력을 위해 고난도 문제가 출제되자 사교육이 성행했고, 수능을 잘보기 위해 학교를 떠나 검정고시를 치르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문제 유형에 익숙해질수록 유리한 시험이 되면서 재수생, 삼수생을 넘어 N수생이 양산되고 있다. 박 교수는 이런 폐단을 해결하려면 수능의 지배력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능이 최소한의 자격시험이자 입시 참조 자료 정도로 역할이 축소돼야 한다”는 것이다.     박도순 명예교수가 23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 20230523 수능이 처음에 대학 입시 참조 자료일 뿐이었다고요. 도입 당시만 해도 국가가 수능이란 시험을 만들 테니, 대학은 필요하면 쓰고 아니면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초기엔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보는 본고사도 같이 볼 수 있었죠. 수능은 선택 자료로 활용하라는 거였으니까요. 그런데 수능을 만들어 놓고 나니, 대학들이 본고사는 보지 않고 수능으로만 학생을 뽑는 거예요. 대학들에 제발 본고사도 같이 실시하라고 요구할 정도였어요.     당시 대학들은 왜 수능을 선호했나요? 일단 대학 자체적으로 시험을 만들고 관리하는 데 돈이 많이 드니까요. 그리고 제대로 된 양질의 시험을 출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곳들도 많았을 거예요. 전국의 아이들을 점수로 줄을 세우니 뽑기 편하기도 했겠죠. 문제는 대학 입시에서 수능 의존도가 커지니까, 수능이 대학 서열화를 더 공고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능이 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줄여야 해요. 자격시험이 돼야 합니다. 절대평가로 5등급 정도로 등급을 나누거나 합격·불합격 등을 산출해 입시에서 최소한의 자격요건으로 써야한다는 겁니다. 본질적으로는 수능이 자유로워져야 해요.    수능이 자유로워진다는 건 어떤 의미죠? 수능이 초·중·고교 교육과정을 지배하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수능이란 대학 시험이 그 아래 교육과정을 지배하고 있는 게 문제예요. 수능 시험 내용이나 과목이 바뀐다고 하면 고등학교 교육 과정이 완전히 바뀌잖아요. 시험이란 건 배운 교육 과정을 평가하기 위해 있는 건데, 지금 완전 거꾸로죠. 고등학교 평가가 자꾸 대학 입학 시험에 예속되어 있는 거예요. 처음에 수능을 고차원적인 사고능력을 평가하는 통합 교과문제로 내겠다고 했을 때, 고등학교 교사들 반발이 심했어요. 그런 걸 어떻게 가르치냐고 따진 거죠. 저는 ‘가르치지 말라’고 했어요.   고등학교에서 수능 공부를 시키지 말라고요? 고등학교는 고등학교에서 필요한 교육과정을 가르치면 됩니다. 고교 교과 과정만 잘 따라오면 볼 수 있는 시험이 수능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대학은 원하는 학생들을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서 잘 뽑으면 돼요. 대학이 필요한 건 대학에서 가르쳐야지, 고등학교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아야죠. 이때 전제는 대학에 학생을 선발하는 자율권을 충분히 줘야 한다는 겁니다. 대학원생 뽑는데 자체적으로 시험 보고 면접 본다고 공정하지 않다고 누가 비난하나요? 공정성에 문제가 없게 국가는 최소한 가이드라인만 주고, 각 대학이 책임지도록 엄격하게 관리하면 됩니다.     그럼 고등학교나 초등·중학교에선 어떤 걸 가르쳐야 할까요? 학생들이 학습하는 법을 학습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시험도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어요.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부모님이나 선배, 전문가에게 물어볼 수도 있고, 도서관 가서 책을 찾아보면서 배울 수도 있어야 하는 거죠. 이런 문제 해결 경험, 창의력, 협력 능력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학생들에게 더욱 중요합니다. 문제 푼다고 혼자 책상에 앉아 머릿속으로 끙끙댄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수업 시간에 토론도 하고, 실습도 해야죠. 시험도 배운 걸 마지막에 평가하는 결과 중심이 아니라 과정 중심으로 이뤄져야겠고요.   박 교수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수능이 초래한 각종 병폐는 입시 경쟁, 대학 서열화와 학벌 중심 사회 현상과 뿌리 깊게 연관돼 있다”고 지적했다. 수능을 바꾸는 게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그가 수능부터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수능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시험이 돼야 해요. 그래야 교육이 살고, 아이들에게도 미래가 있습니다.     ■ 수능 창시자가 말하는 수능 이야기 「 ·“수능은 교과목 시험이 아니었어요.”: 수능은 교과서 암기 위주 시험인 학력고사를 탈피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여러 교과를 망라하는 통합 교과 문제로 종합적인 사고력을 시험하려 했죠. 과목도 언어, 수리탐구, 영어 3개 영역뿐이었고요. 고교 교육과정을 잘 따라오면 누구나 풀 수 있고,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잠재력을 평가한다는 취지였어요. ·“수능은 공정하지 않아요.”: 수능 시험 점수가 학력의 전부를 말해줄 수 없어요. 측정 오차도 큰데 수능 점수 몇 점 차이로 대학 입시를 결정하는 건 공정한 걸까요? 줄 세우기로 남들과 구분하려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개인의 수준을 평가할 수 있도록 절대평가로 수능을 전환하는 게 교육적으로도 바람직해요.  ·“수능은 고등학교에서 가르치지 말아야 해요.”: 입시에서 수능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해요. 자격시험 정도로 만들어야 해요. 고등학교는 고등학교 교과를 충실히 가르치면 돼요. 대학은 자체 기준으로 학생들을 뽑을 수 있는 자율권을 주고요. 수능이 초·중·고교 학교를 지배하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교육이 살고 미래가 존재합니다.   」   ■ 객관식 시험 시대의 종언 시리즈 「 ① “수능 안 변하면, 미래 없다” 교육 전문가 9인의 진단(6월 5일 발행) ② 『챗GPT 교육혁명』쓴 정제영(교육학) 이화여대 교수(6월 8일 발행) ③ 『공부를 공부하다』쓴 박재원 에듀니티랩 소장(6월 9일 발행) ④ 수능 만든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대 원장 박도순(교육학) 고려대 명예교수(6월 12일 발행) ⑤ 『문재인 이후의 교육』 쓴 이범 교육평론가(6월 13일 발행) ⑥ 서울대 입학본부장 지낸 권오현(독어교육과) 서울대 교수(6월 15일 발행) ⑦ 『대한민국의 시험』쓴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6월 16일 발행) ⑧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 이선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운영기획부장(6월 19일 발행) ⑨ 호찌민시 한국국제학교 손성호 교장(6월 20일 발행) ⑩ 마이클 매기 미네르바대학 총장(6월 22일 발행) 」 

    2023.06.11 15:42

  • “학원 레벨 테스트는 연출이다” 대치동 ‘박보살’의 고백

    “학원 레벨 테스트는 연출이다” 대치동 ‘박보살’의 고백 유료 전용

    ‘수능까지 이어지는 비문학 독해’. 고등학생이 풀 것 같은 이름의 이 문제집은 초등학교 4학년용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는 게 더 이상 유별난 대치동만의 현상은 아닌 것이다.    첫 장을 펼치자 심리학 용어인 ‘바넘 효과’와 관련된 1100개 글자로 이뤄진 지문이 나온다. 여기에 오지선다형 객관식 문제 10개가 달려 있다. 수능 출제 유형과 비슷한 문제엔 특별히 ‘수능 연계’라는 표시도 달아놨다. ‘14분 안에 푸세요’ 라며 제한 시간도 제시한다. 문제를 다 풀면 정답 개수와 걸린 시간을 적는 칸도 있다.    챗GPT 시대, 어른들은 창의성을 고민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수능을 목표로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 풀이 교육을 받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객관식 시험이 지배하는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짚어보자.  박정민 디자이너 운동 잘하려면 체력을 바탕으로 기본기를 닦고 개인기를 길러야 해요. 공부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요? 체력도, 기본기도 없는데 개인기만 훈련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모교육·학습법 전문가인 박재원 에듀니티랩 학습과학연구소장은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이들은 공부 할 마음도 없고, 읽고 이해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체력과 기본기가 없는 셈이다. 그런데 학교와 학원에선 문제 풀이에만 골몰하고 있다. 왜 그럴까? 박 소장은 “이런 현상의 중심에 객관식 시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문제는 시대가,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과거엔 그럭저럭 먹혔던 문제 풀이 기술이 앞으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남보다 더 정답을 잘 찾는 능력이야말로 인공지능이 가장 먼저 대체할 영역”이라며 “객관식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인생을 찾기 위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한때 사교육 1번지 대치동에서 유명한 입시 컨설턴트였다. ‘선생님 말씀이 맞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 ‘박보살’로 불렸다. 그러다 10여 년 전 돌연 학원가를 떠났다. 그는 “아이들을 시험 기계로 만드는 데 염증을 느꼈다”고 했다. 이후 “학교에서 교육의 본질을 되찾자”는 신념으로 전국 각지에서 부모와 교사·학생들을 만나 학습법과 부모 역할 등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그는 경기도교육청 산하 경기도교육연구원 이사를 지냈고,『공부를 공부하다』『중위권 학부모를 위한 공부, 진로, 진학』『핀란드 교실혁명』 등을 쓰기도 했다.    박 소장은 그동안 사교육과 공교육 현장을 넘나들며 시험 때문에 울고 웃은 학생과 양육자를 수없이 만나왔다. 객관식 시험, 그것도 상대평가 방식으로 치러지는 객관식 시험은 대한민국 교육과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있을까? 지난달 25일 박 소장을 만나 물었다.   박재원 에듀니티랩 소장은 “남보다 시험 잘 보는 능력이야말로 인공지능이 가장 먼저 대체할 능력”이라며 “문제 풀이 개인기로는 급변하는 미래에 대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  ✏️시험 안 보면 공부 안 한다   박 소장은 2013년 말 비상교육 공부연구소장 자리를 끝으로 사교육계를 떠났다. 그 후 10년, 박 소장은 “‘의치약한수(의대·치대·약대·한의대·수의대)’ 쏠림 현상과 학군지 열풍이 더 심해졌다”고 평가했다. 성공으로 가는 문은 더 좁아지고,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는 것이다. 경쟁은 심해졌는데, 정작 학교에선 중학교 1학년까지 7년간 시험이 사라졌다. 수능이란 입시 관문은 여전한데, 학교에선 시험조차 보지 않자 양육자들은 불안해졌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한다 ” “아이의 실력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호소가 늘어났다. 결국 이들이 문을 두드린 곳은 학원가다. 박 소장은 “요즘 학부모들은 더 일찍 사교육을 시작하는 것으로 시험 경쟁에 대비하려 한다”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학원에 다니기도 전에 시험을 봐야 합니다. 유명 학원은 레벨 테스트를 보고 합격해야 다닐 수 있어요. 학원에선 레벨 테스트를 통해 아이의 수준을 확인하고 이에 맞춰 수업을 진행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죠. 철저하게 실적을 연출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레벨 테스트입니다. 학원의 실적이 뭔가요? 이 학원에 다니면 성적이 오르고, 공부를 잘하게 된다는 걸 보여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일부 학원은 레벨 테스트를 통해 실적 내기 쉬운 학생, 그러니까 원래 공부 잘하는 학생을 골라내는 겁니다. 그렇게 내는 실적은 학생 덕이지, 학원 덕이 아니에요. 원래 뛰어난 학생은 어느 학원에 다녀도 공부를 잘합니다. 그런 아이들이 특정 학원의 성공 사례로 이용되고 있는 거죠. 여기에 또 한 가지 비밀이 있어요. 학원의 레벨 테스트는 명분을 제공해줍니다.   명분요? 공부하라고 아이를 채근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명분이에요. 막연히 ‘영어 공부해라’가 아니라 ‘무슨 학원 무슨 반에 들어가자’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렇게 학원에 가서 레벨 테스트를 보면 ‘이런 점이 부족하다’고 알려주겠죠? 다음 상위 레벨을 목표로 제시하고요. 이를 위해 숙제도 끊임없이 내주고, 끊임없이 시험을 볼 겁니다. 그러면 부모는 당연히 아이에게 숙제하라거나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라는 말을 더 할 수밖에 없고요.   그렇게라도 시켜서 공부하면 좋은 것 아닌가요?  레벨 테스트나 시험이 공부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하고, 성취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애초 경쟁을 즐기는 승부욕이 강한 아이, 공부가 생활습관으로 잘 잡힌 아이들이라면요. 그런데 이런 아이들은 전체의 5%도 채 안 될 겁니다. 대다수 아이들은 시험을 떠올리면 스트레스부터 받고 결과에 압박을 느끼죠. 그런 상태로 계속 시험과 공부에 노출되면 학습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만 쌓이고,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사라져버립니다. 공부를 포기하게 되는 길에 들어서는 거죠. 시험 중심의 공부가 놓치는 게 또 있어요.   그게 뭔가요? 아이가 자발적으로 공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험이란 외부 자극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죠. 관리형·수동형 학습자가 돼 버려요. 시험을 봐야지만 공부를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시험을 보지 않으면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이 되는 거죠. 문제는 또 있어요. 배움의 순간이 사라집니다.   배움의 순간이 사라진다는 건 무슨 뜻이죠?  시험 본다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정작 기억에 남는 게 없어요. 재수학원 다니는 학생 300명을 모아놓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일주일 전 본 모의고사 국어 지문이나 영어 지문에서 기억나는 내용이 있느냐고요. 기억나는 게 있다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공부하는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는 과정 없이 정답만 찾으려 해서 그런 겁니다. 열심히 했는데 남는 게 없다, 너무 비극적인 일 아닌가요? 객관식 시험을 대비한 공부가 결과적으로 남는 게 없다는 건 실험으로도 증명됐습니다.   어떤 실험인가요? 어떤 문장을 제시하고 올바르게 기억할 확률을 실험하는 겁니다. 그냥 문장을 읽고, 그 문장을 제대로 기억할 확률은 35%에 불과해요. 문장을 읽고 설명을 들었을 때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37%로요. 그런데 문장과 관련해서 ‘왜?’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게 하면, 그 문장을 기억할 확률이 71%까지 높아집니다. 단순히 어떤 내용을 읽고 듣는 걸 넘어 직접 생각하고 처리해야 더 잘 기억하는 거죠. 그런데 객관식 시험에서 정답 찾는 공부는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문제를 다 풀기도 벅차니까요. 그냥 암기하는 방식의 공부가 효율적이죠. 문제는 그렇게 외워도 남는 게 없다는 거예요. 고부담 비효율의 학습법이 바로 객관식 시험공부입니다.   박재원 소장은 “객관식의 줄 세우기 시험은 과도한 경쟁을 유발해 학생들에게 상처만 남긴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  ✏️과당 경쟁, 남는 건 상처뿐   객관식 시험의 또 다른 얼굴은 줄 세우기다. 오지선다형 객관식 평가 방식은 1등과 2등을 가르는 데 가장 명료하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박 소장은 “그 결과 남는 건 경쟁과 그로 인한 상처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라고 상처를 안 받는 게 아니다. 모든 아이에게 상처가 남는다.   객관식 시험이 어떻게 경쟁을 부추긴다는 건가요? 객관식 시험은 시험 범위도, 정답도 정해져 있어요. 모두가 같은 내용을 가지고 하나의 정답을 찾기 위해 공부하죠. 심지어 시험도 다 같이 모여 한 번에 보잖아요. 수능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두 번 세 번 꼬아 낸 문제가 나오는 건 정해진 범위 안에서 기존에 없던 다른 문제를 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거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같은 내용을 더 많이 반복해서 공부한 재수생이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살면서 경쟁은 피할 수 없지 않나요? 문제는 ‘무엇을 위한 경쟁이냐’는 겁니다. 이걸 아무도 묻지 않아요. 객관식 시험은 개인의 배움이나 성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결과를 두고 줄을 세울 뿐이죠. 승자가 없어요. 공부 잘하는 학생이나 못 하는 학생 모두에게 피해가 갑니다.   성적이 좋은 상위권 학생을 승자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겉으로는 그래 보일 수 있지만, 이 학생들도 내상을 입기는 마찬가지입니다. 2018년 서울대 입학본부에서 발간한 한 연구 문서에 서울대 공대 교수가 쓴 글이 있습니다.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보이더래요. 공부를 꽤 한다는 학생들인데, 실패나 어려움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안전한 선택만 하려 한다는 걸까요? 이른바 답이 없는 문제는 실패할 수 있으니 아예 도전조차 하지 않으려는 학생이 많다고 해요. 프로젝트 졸업 연구처럼 독자적 창의성을 발휘해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매우 어려워하고요. 답이 주어지는 교육에 익숙해져 있고, 남들보다 답을 잘 맞히는 능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받았던 아이들에게 남겨진 일종의 후유증입니다.   중위권 학생들에겐 어떤 후유증이 남나요? 중위권 학생들은 국·영·수라는 시험 과목에 불리할 뿐이지 지적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건 아니죠. 그러면 자기 관심 분야를 발견해서 계속 공부하고 성장하는 경험을 해야 하는데, 상위권 애들과 똑같은 문제로 경쟁을 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패배감만 남죠. 또 중위권 아이들도 나름 노력해 열심히 공부한 겁니다. 그런데 상대평가 체제에서 등수는 노력으로 결정되지 않잖아요. 점수는 그렇지만, 등수는 아니죠. 그러면 누가 공부하고 싶을까요? 해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겠죠. 결국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 테고요. 문제는 상황이 이런데도 중위권 학생과 양육자가 사교육의 유혹을 떨쳐내기 어렵다는 겁니다. 특정 학원 시스템을 따라가면 상위권이 될 수 있다는 헛된 기대에 빠지는 순간, 비극이 시작되는 겁니다.   어떤 비극이 생긴다는 거죠? 중위권 학생들은 문제 풀이 능력만 기른다고 성적이 올라갈까요? 단기간 반짝 성적이 조금 오르는 효과는 있겠지만, 큰 실력 향상엔 한계가 있습니다.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과 읽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능력이 부족하니까요. 그런데 학부모들은 아이를 학원을 보내고 이런 생각을 해요. ‘다른 아이들은 성적이 오르는데, 내 아이는 왜 안 오를까?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구나!’ 자녀 탓을 하는 겁니다. 그때부터 부모와 자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고요. 내향적인 아이들은 무기력에 빠져들고, 외향적인 경우엔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아요. 불행의 시작입니다.   박재원 소장은 “답이 주어지는 교육에 익숙해진 상위권 학생들도 시험 공부로 후유증을 겪는다”며 “실패와 어려움에 대해 과도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  ✏️찾지 못한 나만의 길   박재원 소장은 “문제 풀이 시험공부는 취업 시장에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객관식 시험이 대학 입시뿐만 아니라 취업 시장에서도 과도한 경쟁을 유발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시험을 바꾸는 건, 한 사람의 진로와 인생을 바꾸는 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시험공부와 취업난이 무슨 상관이죠? 아이들이 학교 다니면서 문제 풀이 공부를 하느라 정작 중요한 고민을 하지 못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어떤 일에 기여할 수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죠. 그러다 보니 부모나 사회가 원하는 직업을 선망하게 됩니다. 개발자가 인기라고 하니 개발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거죠. 모두가 같은 직업을 원하니까 경쟁이 불가피하고, 취업난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거꾸로 가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요.   거꾸로 간다고요? 진로를 고민할 때 나로부터 출발을 하는 거예요. 어떤 직무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로 시작해서 직무를 정하는 거죠. 그리고 그런 일을 할 기회를 주는 회사를 찾아가는 겁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도, 잘할 수 있는 일도 다 다릅니다. 그러면 취업 시장에서 분산이 돼요. 이미 직업 세계는, 채용 시장은 바뀌고 있잖아요.   채용 시장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건가요? 이젠 대기업도 대규모로 신입사원을 공개 채용하는 곳이 거의 없어요. 기업들이 객관식 시험을 보고 정량 평가로 직원을 뽑지 않는다는 얘기예요. 대부분 실력이 있는 경력직을 뽑습니다. 학벌이 아니라 나의 역량과 일로 평가받는 시대가 된 겁니다. 이 사람이 어떤 일 경험을 가지고 있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봅니다. 심층 면접, 정성 평가를 통해서요. 최근엔 챗GPT 같은 인공지능(AI) 기술이 직업 세계를 빠르게 바꾸고 있는데, 10년 뒤, 20년 뒤에 취업 시장에 나올 아이들이 문제 풀이만 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렇다면 인공지능(AI)시대엔 어떤 능력을 길러야 할까요? 남보다 시험 잘 보는 능력이야말로 AI가 가장 먼저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8년에 발표한 ‘OECD 교육 2030: 미래교육과 역량’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필요한 역량은 자기 주도성이에요. 이 주도성을 기르려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협업하고, 갈등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량은 수능 등급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AI가 일자리를 앗아가는 상황에선 사람 냄새가 나는 일이 경쟁력이 됩니다. 독특한 자기 영역을 구축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요.   박재원 소장은 “직무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 시작해서 진로를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박 소장은 그러면서 “각기 다른 아이들을 남과 똑같이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수능 시험 킬러 문항 몇 개로 입시와 직장이 바뀌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면, 미래도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이의 미래에 진짜 필요한 공부는 시험지에 없습니다. 아이가 자기만의 길을 찾아 성장할 수 있도록 교사와 부모의 관심과 소통이 필요합니다. 답은 아이가 쥐고 있어요.    ■ 객관식 시험이 아이들에게 남기는 것들 「 ◦ 시험을 보지 않으면 공부하지 않아요: 정답 찾는 문제 풀이 시험 공부는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공부는 무의미하고, 피곤하고 하기 싫은 일이 됩니다. 시험이 없으면 공부하지 않고, 공부와 점점 멀어지는 부작용도 생기죠. ◦ 과당 경쟁은 상처만 남깁니다: 하나의 정답을 향해 모두가 같은 내용을 공부하는 경쟁 구조에선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상위권 학생에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중위권 학생에겐 패배감을 줄 뿐이죠.  ◦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없어요: 문제 풀이 공부에만 매달리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어려워요. 자기만의 일로 평가받는 직업 시장에 필요한 역량을 키울 수 없어요.      」   ■ 객관식 시험 시대의 종언 시리즈 「 ① “수능 안 변하면, 미래 없다” 교육 전문가 9인의 진단(6월 5일 발행) ② 『챗GPT 교육혁명』쓴 정제영 이화여대(교육학) 교수(6월 8일 발행) ③ 『공부를 공부하다』쓴 박재원 에듀니티랩 소장(6월 9일 발행) ④ 수능 만든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대원장 박도순 고려대(교육학) 명예교수(6월 12일 발행) ⑤ 『문재인 이후의 교육』 쓴 이범 교육평론가 (6월 13일 발행)   ⑥ 서울대 입학본부장 지낸 권오현 서울대(독어교육과) 교수 (6월 15일 발행) ⑦ 『대한민국의 시험』쓴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6월 16일 발행) ⑧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이선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운영기획부장 (6월 19일 발행) ⑨ 호찌민시한국국제학교 손성호 교장 (6월 20일 발행) ⑩ 마이클 매기 미네르바대학 총장(6월 22일 발행) 」 

    2023.06.08 16:04

  • “경쟁하지 말고 튜터로 써라” 교육학자의 AI시대 생존법

    “경쟁하지 말고 튜터로 써라” 교육학자의 AI시대 생존법 유료 전용

    인공지능(AI)은 노동시장의 대변혁을 예고했다. 챗GPT는 고급스러운 단어와 문장을 구사하며 영어 e메일을 대신 써주고, 번역도 해준다. 논문을 요약해 주고,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그림을 그리고,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는가 하면 작곡까지 한다. 기계가 대신할 거라고 믿었던 건 육체노동이었는데, 정반대로 지적 노동을 대신하고 나선 셈이다.   노동시장 재편은 곧 교육 시스템의 변화를 의미한다. 언제나 교육은 마지막에 바뀌었다. 기술이 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새로운 산업은 새로운 인재를 원했다. 노동시장이 바뀌면, 이제 교육이 바뀔 차례다. 2023년, 교육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 본격적으로 교육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전, 챗GPT 시대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게 먼저다. hello! Parents는 ‘객관식 시험 시대의 종언’ 특별 기획 시리즈의 첫 인터뷰이로 정제영 이화여대(교육학) 교수를 찾아갔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AI를 경쟁자로 보지 말고, 튜터(개인교사)로 쓰세요. 관점에 따라 결과는 180도 달라집니다.   정제영 이화여대 교수는 “챗GPT 등장 이후 화이트칼라마저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커졌다”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AI는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면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제영 교수는 국내에서 AI와 교육을 주요 키워드로 연구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2001년 행정고시 합격 후 10년간 교육부에서 근무한 교육행정가 출신이기도 하다. 그는 『인공지능시대의 미래 교육』을 편역한 이후 『AI 교육혁명』 『AI 융합 교육 개론』 등을 썼다. 올 3월 나온 『챗GPT 교육혁명』은 6쇄 넘게 팔리며 화제를 모았다.   정 교수는 챗GPT에 대해 “획기적인 기술”이라고 평가했다. “인간의 언어를 학습해 인간처럼 답하기 때문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왜 그럴까? 챗GPT 시대, 과연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지난달 17일 이화여대를 찾아가 직접 물었다.   정제영 이화여대 미래교육연구소장은 “챗GPT 시대엔 AI를 도구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5쇄 넘게 팔린 그의 책 『챗GPT 교육혁명』역시 챗GPT를 교육에 어떻게 활용할지를 담고 있다. 강정현 기자  ━  질문① 챗GPT, 특이점(singularity) 왔나? : “임박했지만, 아직 아니다”   챗GPT에 적용되는 언어모델은 지난 3월 GPT-4다. GPT-4는 미국 모의 변호사 자격시험에서 상위 10%에 해당하는 성적을 냈다. 정제영 교수는 “변호사 시험은 똑똑한 사람이 본다는 걸 고려하면, 전체 인류 중에서 상위 1% 수준의 법률 지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챗GPT가 그만큼 똑똑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정제영 교수는 “아직 특이점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특이점은 기술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거대해 인류의 삶이 완전히 변하는 시점을 의미한다. 왜 아직 특이점이 아닌 걸까?   전체 인류의 상위 1% 안에 들 만큼 똑똑한데, 아직 특이점이 아니라고요? 영역별로는 특이점에 도달했습니다. 법률도 그런 영역 중 하나고요. 바둑은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겼을 때, 특이점이 왔죠. 체스는 바둑보다 훨씬 전에 특이점에 도달했고요.   영역별로는 AI가 인간보다 똑똑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여전히 인간이 AI보다 우위에 있다는 건가요? 챗GPT는 인간과 커뮤니케이션할 때 언어만 사용합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바로 비언어적 소통입니다. 인간은 표정이나 행동 같은 것도 감지합니다. 맥락을 읽는 겁니다. 챗GPT는 이런 비언어적 소통을 전혀 못 해요. 게다가 챗GPT는 질문해야만 답합니다. 결코 먼저 질문하는 법이 없죠.   교수님이 생각하기에, 특이점이라고 할 만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소위 ‘강한 AI’라고 불리는 인공일반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이 등장하면, 그땐 확실히 특이점이 올 겁니다. AGI는 인간처럼 학습과 이해, 개념 형성과 추론, 의사결정과 통찰까지 모든 지적 행위를 다 합니다. 챗GPT는 언어와 관련된 특정 작업에서 인상적인 성과를 내는 것일 뿐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을 수행하는 건 아닙니다.   챗GPT가 지난해 11월 출시된 후 100만 명의 사용자를 모으는 데 단 5일이 걸렸어요. 사람들은 AI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날이 머지않은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고요. 호들갑 떠는 걸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챗GPT는 충분히 놀랍습니다. 특히 할루시네이션 문제가 크게 좋아졌다는 게 눈에 띕니다.   할루시네이션이 뭔가요? 맥락과 관련 없거나 사실이 아닌 걸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본래 환각을 뜻하는 정신의학 용어인데요. 챗GPT 같은 생성형 AI는 할루시네이션이 심했어요. 이를테면 “연어가 강물을 올라가는 그림을 그려줘”라고 하면 연어 휠레가 강물을 올라가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식이었죠. 언어 모델이 할루시네이션 문제가 특히 심각했어요. 챗GPT를 만든 오픈AI는 이 부분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어요.   어떻게 한 건가요? 챗GPT가 내놓은 답을 보고 인간이 피드백해 줬어요. 맞는 답인지 아닌지 가르쳐준 거죠. 이런 걸 강화학습이라고 합니다. AI가 혼자 학습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관여해 학습한 겁니다. 덕분에 챗GPT가 굉장히 빠르게 발달했죠.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5년에서 10년은 빨랐어요.   하지만 챗GPT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합니다. 완벽하게 풀진 못했어요. 하지만 이 문제를 푸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아직 특이점에 도달한 건 아니지만, AI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왔다는 건가요? 특이점이 상당히 임박한 것 같아요. 챗GPT 같은 AI는 이미 문서 작성, 고객 서비스,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지식 노동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데 있어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죠.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아내고, 이를 기반으로 특정 작업을 일정 수준까지 자동화할 수 있습니다.   이미 화이트칼라의 지식 노동을 일부 대체하고 있군요?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특이점이 왔다고 볼 수 있는 법률 영역에서조차 완전히 인간을 대체하진 못할 겁니다. 판례를 분석해 1차 판결문까지는 쓸 수 있겠죠. 하지만 최종 판단은 인간 판사가 할 겁니다. 정제영 소장은 “챗GPT는 상당히 놀라운 기술이지만,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이점을 가져올 만큼 강력한 AI는 아니라는 얘기다. 강정현 기자    ━  질문② 챗GPT 시대, 무엇을 갖춰야 하나? : “지식보다 역량”   아직 인간을 완벽하게 대체하진 못하지만, 상당한 수준으로 지적 활동을 수행한다. AI의 현재 수준은 이렇게 평가할 수 있다. “경쟁하려 들지 말고, 이용하라”고 정제영 교수는 말하지만, 불안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하물며 아이의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걱정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인간만큼 똑똑한 AI와 함께 살아가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   교육학자인 정제영 교수가 고민하고 연구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바로 그 능력을 교육을 통해 갖추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2020년 이화여대 안에 미래교육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을 맡은 이유이기도 하다.   챗GPT 시대, 인간은 무엇을 갖춰야 하나요? 바로 그것들이 인공지능 시대 교육의 목표가 될 텐데요. 저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식, 역량, 인성 그리고 메타학습입니다.   하나하나 설명을 좀 해주세요. 지식은 알고 이해하는 겁니다. 수학같이 전통적인 지식부터 머신러닝이나 기업가정신처럼 새로운 지식을 포함합니다. 역량은 아는 걸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창의성이나 비판적인 사고, 소통 역량이나 협업 역량이 여기에 해당하죠. 인성은 행동하고 세상에 참여하는 겁니다. 호기심이나 용기, 회복 탄력성, 윤리, 리더십 같은 거죠. 메타학습은 변화와 상황을 반영하고 적응하는 겁니다. 메타인지나 성장 마인드 같은 걸 포함하죠.   지식은 산업사회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아닌가요? 지금의 강의식 교육 시스템이 많은 지식을 효율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요. 지식은 인류 역사에서 늘 중요했습니다. 그 중요성이 점점 커졌죠.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중요했습니다. 수렵·채집법 같은 지식이 입에서 입으로, 동굴 벽화 등으로 전수됐죠. 농업 혁명 이후 지식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농사를 짓는 법은 수렵·채집보다 훨씬 복잡하고 노동 집약적이었으니까요. 산업혁명 이후 지식은 더 중요해졌고, 인터넷이 등장한 정보시대엔 더더욱 중요해졌죠. AI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더 많은 지식이 유통되고, 필요하겠죠. 지식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습니다.   산업사회에선 지식만 있으면 됐는데, 챗GPT 시대엔 지식 외에도 여러 가지가 필요하군요. 말씀하신 역량이나 인성, 메타학습 같은 거요. 특히 역량이 중요해요. 사실 산업사회에선 역량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분업화를 통해 대량 생산하던 시대니까요. 좁은 영역에서 깊이 아는 거로 충분했습니다. I자형 인재의 시대였죠. 하지만 정보화 시대엔 T자형 인재가 주목받았어요. 한 영역에서 깊이가 있으면서, 두루두루 아는 게 중요했죠. 검색을 떠올려 보세요. 하지만 지금은 M자형 인재가 필요합니다. 깊이 있게 아는 영역이 하나여선 안 되는 거죠.    여러 영역을 깊이 알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역량과 인성과 메타학습이 중요해요. 지금처럼 10대 시절 바짝 배워서 평생 그걸로 먹고사는 시대는 끝났어요.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호기심을 가지고, 용기 있게 도전하고, 실패해도 회복성을 발휘해야죠. 또한 여러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려면 반드시 협업해야 합니다. 소통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하죠. 그리고 자신의 상태와 수준을 알고 성장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요.   하지만 한국의 교육은 지식을 개발하는 데 특화된 것 같습니다. 강의가 중심인 교육 체계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건을 대량 생산하듯, I자형 인재를 대량으로 교육할 수 있는 공장형 교육 체계죠. 이건 분명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1950년 의무 교육을 시행한 덕에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이 가능했으니까요. 한국의 산업 발달과 경제성장은 일사불란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하지만 지식 중심의 교육만으로는 챗GPT 시대에 맞는 인재를 길러낼 수 없어요. 교육 정책 당국도, 학교도, 교사도 알고 있습니다. 변화가 없다고 보지 않아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양육자로서, 변화가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칠판을 쳐다보고 앉아서 선생님이 하는 얘기를 받아 적고 있어요. 피부로 느낄 만큼 변화가 크지 않은 건 맞습니다.   대체 왜 변하지 않은 거죠? 평가가 바뀌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은 12년의 교육 과정 끝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고 있어요. 다섯 개 중 하나의 답을 고르는 객관식 시험이죠. 객관식 시험 중심의 평가가 바뀌지 않는 한, 더 나아가 대입 시험 그러니까 수능이 바뀌지 않는 한 학교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객관식 평가 방법이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역량과 인성과 메타학습을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객관식보다는 주관식 평가에 가깝겠죠. 주관식 평가라고 논술형 지필고사만 떠올리면 안 됩니다. 프로젝트 기반으로 학습, 문제 해결 과제, 포트폴리오 등 방법은 다양합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해요. 정제영 소장은 “한국의 교육은 산업화 과정에서 고도 성장을 만들어낸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챗GPT 시대엔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변화를 위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으로 그는 객관식 평가를 들었다. 강정현 기자    ━  질문③ 챗GPT,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 “경쟁하지 말고, 튜터로 써라”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로, 평균(2020년 현재 1.59명)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정제영 교수는 “인구가 줄수록 한 명 한 명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한다”며 “지금까지의 교육은 잘 따라오는 아이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앞으로는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I를 잘만 활용하면 한 명 한 명에게 맞춘 개별화 교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AI를 튜터(개인교사)로 써야 한다는 얘기다.   AI를 개인교사처럼 쓰기 위해선 무엇부터 해야 하나요? 학생 한 명 한 명 개인별 학습 분석과 진단이 이뤄져야 합니다. 학생들의 학습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분석함으로써 개개인의 학습 특성과 성과를 이해하는 것이죠. 그걸 바탕으로 각 학생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 맞춤형으로 학습 계획을 수립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AI가 사용될 수 있어요. 똑같이 1학년에 입학했지만, 다 다른 속도로 각자 다른 학습 내용을 공부하면서 자기만의 공부를 할 수 있죠. 학생들은 모두 서로 다른 학습 목표를 가지고, 각자의 학습 선호도에 맞춘 학습 자료와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으로 들려요. 실제로 사용 중인 AI 기술이나 서비스를 예로 들어주세요. 대표적으로 지능형 튜터링 시스템(ITS)이 있어요. 국내에서는 아이스크림 홈런이나 밀크티, 토도수학, 산타토익 같은 스마트 교육 서비스가 대표적이죠. 학습자에게 학습 콘텐트를 제공하고, 이걸 활용해 학습하는 상황과 결과를 분석해 맞춤형으로 다음 학습 자료와 문제를 제시합니다. 이 과정을 챗봇처럼 대화형 UI(user interface)로 제공하는 게 대화형 튜터링 시스템(DBTS)인데요, 챗GPT의 등장으로 이런 서비스가 탄력을 받겠죠. 주관식 평가와 쓰기 과제가 일반화된 미국에서는 자동 서술형 평가(AWE) 시스템도 발달했습니다. AWE는 자연어 처리와 AI 기술을 이용해, 학생들이 쓴 글을 분석하고 평가해 개별적인 피드백을 제공하는 시스템입니다. 주관식 평가는 교사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어요. AWE 기술이 발달한 이유입니다. 토플 같은 경우 과거엔 3명의 채점관이 채점했다면, 이제 한 명의 채점관과 자동 서술형 평가 시스템을 활용해 채점하고 있어요.   교육 과정 전반에 AI가 사용되면,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AI가 분석한 데이터를 검토하고, 제안한 학습 경로와 콘텐트가 학생에게 효과적인지 검증합니다. AI의 도움을 받아 프로젝트 학습 등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일도 하겠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은 학생이 포기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진 않은지 챙기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교사가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면, 챗GPT 시대엔 코치 역할을 하는 거죠.   AI 기술이 교육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면, 교사의 일자리도 위협받게 될까요?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요. AI가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올수록 교육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라고 봐요. AI가 인간 대신 일을 하면, 인간은 지금보다 일을 덜 할 겁니다. 늘어난 시간엔 여가 활동을 하겠죠. 계속 놀면 지겹습니다. 인간의 욕구 중 가장 상위의 욕구가 자아실현이잖아요. 배움을 통해 자아실현을 할 거예요. 교육의 시대가 오는 거죠. 거기서 생각지도 못한 일자리가 생길 겁니다. 정제영 소장은 “AI를 도구로 쓸 수 있는 사람만 노동시장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가 “AI와 경쟁하려 들지 말고, 튜터로 쓰라”고 강조하는 건 그래서다. 강정현 기자   정제영 교수는 “AI를 경쟁자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지적 노동으로 만들어진 서비스는 대부분 고가의 프리미엄 서비스다. 법률 서비스나 의료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AI 기술이 발달하고 보편화될수록 이런 서비스의 가격은 낮아지고 대중화될 수 있다. 정 교수는 “AI를 활용할 줄 알면 어떤 영역에서든 살아남아 AI가 만든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AI가 인간만큼 똑똑해지더라도 결코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진 못할 겁니다. 상황과 맥락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니까요. 결국 노동시장엔 AI를 도구로 쓸 수 있는 사람만 남겠죠. AI를 보는 관점을 바꿔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①챗GPT, 아직 특이점은 아니다. 언어적 소통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비언어적 소통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인간처럼 창의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 하지만 특이점이 임박했다. ②챗GPT 시대, 지식보다 역량이 중요하다. 챗GPT 시대엔 여러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M자형 인재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호기심을 갖고 도전하며 소통하고 협업하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③챗GPT 시대, AI와 경쟁하려 들지 말고 튜터로 써야 한다. 이미 교육 분야에선 AI를 접목해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 역할에서 벗어나 코치가 되어야 한다.  」   ■ 객관식 시험 시대의 종언 시리즈 「 ① “수능 안 변하면, 미래 없다” 교육 전문가 9인의 진단(6월 5일 발행) ② 『챗GPT 교육혁명』쓴 정제영 이화여대(교육학) 교수(6월 8일 발행) ③ 『공부를 공부하다』쓴 박재원 에듀니티랩 소장(6월 9일 발행) ④ 수능 만든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대원장 박도순 고려대(교육학) 명예교수(6월 12일 발행) ⑤ 『문재인 이후의 교육』 쓴 이범 교육평론가 (6월 13일 발행)   ⑥ 서울대 입학본부장 지낸 권오현 서울대(독어교육과) 교수 (6월 15일 발행) ⑦ 『대한민국의 시험』쓴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6월 16일 발행) ⑧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이선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운영기획부장 (6월 19일 발행) ⑨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 손성호 교장 (6월 20일 발행) ⑩ 마이클 매기 미네르바대학 총장(6월 22일 발행) 」 

    2023.06.07 16:18

  • 교육전문가 9인의 호소 “수능과 대입을 분리하자”

    교육전문가 9인의 호소 “수능과 대입을 분리하자” 유료 전용

        ■  「 1. 지난해 11월 선보인 챗GPT, 이 서비스가 100만 사용자를 모으는 데 걸린 시간은 단 5일이었다. 이전에 100만 사용자 최단 기록을 가진 건 인스타그램으로, 2개월 보름이었다.   2.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은 최근 여러 자리에서 “수학능력시험에 논·서술형 문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창의형 인재를 육성하는 데 객관식 시험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  가히 챗GPT 시대다. 아직 먼 미래 같았던 인공지능(AI)은 챗GPT 이후 우리 삶으로 성큼 들어왔다. 이제 AI가 그림도 그려주고, 논문도 요약해 주고, 번역도 해주고, e메일도 대신 써준다. 그동안 이런 일들을 하던 자리에 이제 사람 대신 컴퓨터가 들어앉은 셈이다. 화이트칼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건 그래서다. 교육 혁신에 대한 요구는 이제 수능에까지 미쳤다. 지금처럼 가르치고 배워선 AI와 공존은커녕 경쟁조차 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AI와 경쟁하게 된 밀레니얼은 궁금하다. 20년 후 고용 시장에 참여할 알파 세대는 대체 어떻게 길러야 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hello! Parents가 9명의 교육 전문가를 직접 만났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park.jeongmin@joongang.co.kr   수능이 객관식 시험인 한 교육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12년 교육 끝에서 결국 다섯 개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다르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다르게 배우고 싶을까요?   정제영 이화여대(교육학) 교수는 “어떻게 해야 다르게 가르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정제영 교수뿐이 아니다. hello! Parents가 만난 9명의 교육 전문가 모두 같은 얘기를 했다. 시험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선 전문가마다 생각이 조금씩 달랐지만, ‘객관식 시험으로는 안 된다’는 데엔 뜻을 같이했다. 시험이 뭐길래 시험이 바뀌어야 교육이 바뀐다고 말하는 걸까? 챗GPT 시대, 교육은 대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  ①왜 시험인가?: 평가가 바뀌어야, 모든 게 바뀐다   ◦ 평가가 교육의 핵심이다: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은 “교육 목표가 교육 현장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결국 평가도 그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 교육은 교육 목표와 평가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교육 목표는 시대에 맞게 설정됐지만, 평가 방식은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다. 그는 “비단 객관식이냐, 주관식이냐 하는 시험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주관식 시험을 보더라도 학생의 생각을 묻는 게 아니라 특정 지식을 알고 있는지 물으면 객관식 시험과 다를 바가 없다는 얘기다.    국내 국립초등학교 최초로 국제바칼로레아(IB) 인증을 받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이선미 IB 운영기획부장은 “평가 중심으로 교육을 설계해 보니 수업이 바뀌더라”고 말했다. 18년 차 초등 교사인 이 부장은 IB 교육과정을 접하며 수업 계획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지금은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평가 방법을 정한 뒤 교수법을 설계하는 식으로 수업을 계획한다. 그 전엔 교육 목표를 설정한 뒤 교수법을 설계하고 마지막으로 평가 방법을 정했다. 그는 “평가를 먼저 생각했을 뿐인데, 수업 내용과 방법이 훨씬 선명해졌다”며 “직접 해보니 평가가 바뀌어야 교육이 바뀐다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 다 바꿔봤지만, 결국 안 됐다: 정제영 교수는 “교육 현장이 전혀 안 변한 건 아니다”고 말했다. 교육과정도 끊임없이 개정됐고, 교사들 역시 새로운 교수법을 현장에 도입하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그럼에도 달라진 게 없다고 느끼는 건 평가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가가 달라지지 않는 한 미시적인 변화에 그칠 뿐이라는 얘기다. 서울대 입학본부장을 지낸 권오현(독어교육과) 교수는 ‘평가는 학습을 은밀하게 죽이는 킬러’라는 에릭 마주르 하버드대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제아무리 수업을 바꾸고 교사가 달라져도 평가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문제풀이식 수능, 내신 상대평가 체제를 하루빨리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결국 대입이 바뀌어야 한다: 평가, 시험이 바뀌려면 그 정점에 있는 대입 시험이 바뀌어야 한다는 데 전문가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정제영 교수는 “결국 다섯 개 중 하나를 고르는 객관식 시험으로 평가하는데 다르게 가르치고, 다르게 배우는 게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범 교육평론가도 “현실적으로 대입이 바뀌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다”면서도 “대입이 바뀌어야 교육이 바뀌는 건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권오현 교수 역시 “수능에 논·서술형 문제를 도입하든, 수능은 객관식 자격시험으로 만들고 개별 대학 중심으로 구술·논술 시험을 보든 대입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대입이 바뀌지 않는 한 문제풀이식 교육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②교육, 왜 달라져야 하나?: 지식에서 채용까지, 모든 게 변했다   ◦ 정기 채용에서 수시 채용으로: 이범 평론가는 노동 시장 변화를 통해 교육의 변화 방향을 가늠했다. 정기 채용으로 사람을 뽑을 땐 그 사람이 나중에 무슨 일을 할지 모르고 뽑는다. 두루두루 잘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 평론가는 “명문대 졸업장, 스펙 등이 올라운드 플레이어를 선별하는 잣대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시 채용의 경우 당장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 직무 능력을 보고 뽑을 수밖에 없다. 이 평론가는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요구하는 직무 능력도 빠르게 변한다”며 “결국 수시 채용 시장에서 필요한 건 자기주도학습 능력”이라고 말했다. 특정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필요한 지식이나 능력을 갖출 수 있는 학습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지식이 아니라 자기주도학습 능력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데 우리는 아이들을 오히려 거꾸로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의대’나 ‘서울대’라는 목표도 주고, 공부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과정까지 옆에서 지켜 서서 챙긴다는 얘기다. 사교육을 통해서 말이다. 이 평론가는 “이렇게 배운 아이는 채용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 매뉴얼·제조 지식에서 응용·생성 지식으로: 이혜정 소장은 지식을 가지고 교육의 변화 방향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지식은 생성적 지식, 응용적 지식, 제조적 지식, 매뉴얼적 지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생성적 지식은 새로운 개념이나 원리를 생성해내는 지식으로, 이걸 기반으로 수많은 다른 지식을 만들 수 있다. 만유인력이나 원심력 같은 게 여기에 해당한다. 응용적 지식은 생성적 지식을 현실에 적용한 지식이다. 중력과 원심력을 활용해 롤러코스터를 만드는 게 응용적 지식이다. 제조적 지식은 개발된 롤러코스터를 대량 생산하는 지식이다. 매뉴얼적 지식은 대량 생산된 롤러코스터를 사다가 동네 놀이공원에 설치하고, 운영하는 지식을 뜻한다. 이 소장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매뉴얼적 지식과 제조적 지식을 기반으로 산업을 일궈 왔지만, 이제는 응용적 지식과 생성적 지식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매뉴얼적 지식과 제조적 지식은 소위 ‘집어넣는 교육’으로 익힐 수 있지만, 응용적 지식과 생성적 지식은 ‘꺼내는 교육’을 통해서만 기를 수 있다. 주입식 교육에서 생각하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 I형 인재에서 T형 인재 거쳐 M형 인재로: 정제영 교수는 인재론을 들어 교육의 변화 방향을 예측했다. 분업화를 통해 대량 생산하던 산업사회에선 좁은 영역을 깊이 아는 사람이 인재였다. I형 인재다. 정보화 시대엔 T자형 인재가 주목 받았다. 한 영역에 깊이가 있으면서, 그 외 영역을 두루두루 아는 게 중요했다. 검색 서비스가 T자형 인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 교수는 “인공지능 시대엔 M자형 인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깊이 아는 영역이 세 개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10대 시절 바짝 배운 것만으론 M자형 인재가 될 수 없다”며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공부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협업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은 I자형 인재를 기를 순 있지만, M자형 인재를 길러낼 순 없다. 지속해서 공부하고 협업하는 역량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   ◦ 빅블러 시대, 경계가 사라졌다: 권오현 교수는 정보 지식 환경이 변하면서 교육도 변했다고 봤다. 권 교수는 “인터넷 덕에 모든 영역의 전문 지식에 누구나 접근하면서, 이런 정보와 콘텐트를 각자의 관점으로 결합해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바로 이게 창의성”이라며 “개별 지식을 이해하는 걸 넘어 연결하고 통합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결하고 통합하는 중심엔 ‘개인’이 있다. 권 교수는 “교육은 이제 학생 한명 한명이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그 위에서 성장하는 힘을 키워줘야 한다”고 말했다.   ◦ 확장기에서 수축기로: 박재원 에듀니티랩 소장은 시장의 성장 단계에 따라 필요로 하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달라지고, 필요로 하는 인재도 달라진다고 봤다. 시장과 산업이 막 생겨날 땐 물건을 만들면 팔렸다. 물건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시장이 커지고 고도화되면서 일자리도 질적, 양적으로 팽창한다. 전문성을 요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시기엔 대학 교육이 일반화되고, 직업 교육도 다양해진다. 시장은 한없이 커지진 않는다. 호황 뒤에 불황이 오듯 시장이 수축하는 시기도 있다. 이미 경쟁은 포화 상태다. 블루오션을 찾아야 생존할 수 있다. 없는 수요를 창출해내야 한다. 박 소장은 “패스트팔로어가 아니라 퍼스트무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건 시장이 그만큼 성숙해 더는 클 수 없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서울대 같은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이 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며 “시장이 팽창하던 시대에 맞는 교육으로는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했다.    ━  ③ 그런데도 바뀌지 못한 이유는?: 경쟁 그리고 공정성   ◦ 무한 경쟁 사회, 숨 쉴 틈이 없다: 시대가 교육의 변화를 요구하는데도, 우리 교육이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 교육과정으로, 한국 교사가 가르치면서 프로젝트 중심의 역량 교육을 하는 호찌민시한국국제학교 손성호 교장은 “한국이었다면 지금처럼 학교를 운영하지 못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한국의 유별난 경쟁 분위기 때문이다. 교사 출신으로 교육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손 교장은 “이곳(호찌민) 아이들이 역량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건 수능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라면서도 “한국의 아이들이 설령 수능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경쟁 분위기 때문에 이렇게 가르치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유난한 경쟁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범 평론가는 “광복 직후 이뤄진 농지개혁과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 덕에 자산과 소득의 평등이 이뤄졌고, 누구나 남다른 교육열과 경쟁의식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남미나 필리핀 같은 다른 아시아 지역은 자산과 소득의 평등이 이뤄지지 않아 대부분 사람이 경쟁에 참여할 수조차 없었는데, 한국은 달랐다는 얘기다.   ◦ 공정성 담보되지 않는 시험은 허락할 수 없다: 경쟁이 심하다 보니, 공정성에 대한 요구도 클 수밖에 없다. 정제영 교수는 “객관식 시험으로 한 줄 세우기를 하는 게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학생부종합전형 같은 수시 전형이 생겼다”면서 “하지만 학종은 조국 사태를 거치며 공정성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내신 전형으로 전락해버렸다”고 말했다. 공정성 논란으로 학종에서 비교과 영역 활동이 제외되면서 사실상 내신 시험 성적이 주요 평가 항목이 된 것이다. 정 교수는 “이제 국가 단위 객관식 시험과 학교 단위 객관식 시험 성적, 이 두 가지만 가지고 평가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  ④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수능과 대입을 분리하자   ◦ 평가와 선발, 분리해야: 이혜정 소장은 “평가와 선발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가는 교육의 목표에 맞게 잘 학습했는지 점검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 소장은 “여기까지는 시험(평가)이 교육적 기능을 한다”고 했다. 시험 결과를 대학 진학, 그러니까 대입 선발에 활용하는 순간 문제가 생겨난다. 이때부터 시험은 교육적 기능을 넘어 사회적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이 소장은 “선발의 방법은 조합하기 나름”이라며 “시험 점수를 반영할지 안 할지, 한다면 얼마나 반영할지, 시험 성적 외 다른 평가 기준은 뭐로 할지 등을 입체적으로 논의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시험, 그것도 수능이라는 시험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평가와 선발이 분리될 때 비로소 평가가 교육을 바꾸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수능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박도순 고려대(교육학) 명예교수도 같은 의견을 폈다. 그는 “평가와 선발이 분리돼야 대학교 입시가 고등학교를 지배하고, 고등학교 입시가 중학교를 지배하는 기형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는 고등학교에서 필요한 걸 가르치고, 대학은 대학에서 원하는 학생을 뽑으면 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수능은 고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걸 잘 배웠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인데, 이걸로 대학이 선발까지 하려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 지식에서 역량으로: 정제영 교수는 “이제 학교는 지식을 너머 역량을 가르쳐야 한다”고 봤다. 인류 역사에서 지식의 중요성은 늘 커져 왔다. AI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다만 이 시대엔 스스로 학습하고, 서로 소통하며 협업하는 역량도 중요한데, 기존의 교육은 이걸 충분히 가르치지 않았다. 정 교수는 “역량을 가르치는 방법은 그나마 경험과 노하우가 쌓였는데, 평가하는 방법까지 만들지는 못했다”고 했다. 객관식 시험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이유다. 정 교수는 “역량은 객관식 시험으로 평가할 수 없다”며 “객관성과 타당성, 공정성이 확보할 수 있는 수준까지 평가법을 끌어올려야 역량 교육이 보편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 동질화 교육에서 맞춤형 교육으로: 권오현 교수는 “과거엔 학생이 학교에 맞췄다면, 이제 학교가 학생에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화 시대엔 모든 학생을 동일한 교재를 가지고 동일한 속도로 가르쳤다. 서로 다른 아이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비슷해졌다. 하지만 이제 그 반대가 돼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역량을 기르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학교를 학생을 가르치는 곳에서 학생이 배우는 곳으로 다시 정의해야 한다”며 “교사 중심이던 학교가 교육 내용 중심이던 시절을 거쳐 이제 학생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제영 교수는 “정보기술(IT)과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궁극의 1:1 맞춤형 교육도 실현할 수 있다”고 봤다.    hello! Parents는 오는 22일까지 ‘객관식 시험 시대의 종언’ 특별 시리즈를 통해 9명의 교육 전문가를 만나 챗GPT 시대, 교육의 나아갈 길을 찾고자 한다. 2023년 우리가 처한 현실과 교육 상황, 시험을 둘러싼 변화, 그리고 새로운 교육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AI가 생활 깊숙이 들어온 2023년, 2010년대 태어나 20년 후에 직업을 갖게 될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10번째 기사가 끝났을 땐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객관식 시험 시대의 종언 시리즈 「 ① “수능 안 변하면, 미래 없다” 교육 전문가 9인의 진단(6월 5일 발행) ② 『챗GPT 교육혁명』쓴 정제영 이화여대(교육학) 교수(6월 8일 발행) ③ 『공부를 공부하다』쓴 박재원 에듀니티랩 소장(6월 9일 발행)④ 수능 만든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대원장 박도순 고려대(교육학) 명예교수(6월 12일 발행) ⑤ 『문재인 이후의 교육』 쓴 이범 교육평론가 (6월 13일 발행)  ⑥ 서울대 입학본부장 지낸 권오현 서울대(독어교육과) 교수 (6월 15일 발행) ⑦ 『대한민국의 시험』쓴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6월 16일 발행) ⑧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이선미 IB( International Baccalaureate) 운영기획부장 (6월 19일 발행) ⑨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 손성호 교장 (6월 20일 발행) ⑩ 마이클 매기 미네르바대학 총장(6월 22일 발행) 」 

    2023.06.04 16:13

  • “맘카페 수다쟁이 멀리하라” 성적 올리는 ‘의사의 교육법’

    “맘카페 수다쟁이 멀리하라” 성적 올리는 ‘의사의 교육법’ 유료 전용

    옆집 엄마를 멀리하세요. 그래야 아이가 공부를 잘합니다.   김효원(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김은주(강남세브란스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게 “공부 잘하는 아이,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두 사람을 포함한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소속 의사 8명은 지난 3월 『공부하는 뇌, 성장하는 마음』을 냈다. 학회 차원에서 기획한 책은 2021년 나온 『아이들이 사회를 만날 때』에 이어 두 번째다.   공부는 소아청소년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함께 책을 낼 만큼 중요한 주제일까? 이들은 “그렇다”고 잘라 말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아이들 대부분이 학습과 관련한 크고 작은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김효원‧김은주 교수는 “아이건, 양육자건 할 것 없이 모두 ‘대입’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경주하고 있다”며 “제대로 된 정보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경쟁하진 않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특히 두 교수는 “무엇보다 근거 없이 떠도는 이야기를 경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hello! Parents가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와 ‘공부력(力) 진단’ 칼럼을 시작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8명의 의사가 각자 뇌발달‧문해력‧수학‧외국어 학습 등을 주제로 양육자가 가진 오해를 명쾌하게 풀어 줄 예정이다. 연재를 앞두고 지난 17일 김효원‧김은주 교수를 만나 공부에 관해 양육자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직접 물었다. 김효원(왼쪽)‧김은주 교수는 “아이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학습에 대한 불안감을 키워 주는 옆집 엄마와 거리를 두라”고 조언했다. 장진영 기자  ━  📢양육의 최대 적은 옆집 엄마다.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 한때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로 꼽히던 것들이다. 할아버지의 재력은 어쩔 수 없지만,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게 바로 정보력이다. 양육자들이 맘카페에 가입하고, 주변 양육자와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기도 하다. 어떤 학교가 좋은 학교인지, 학원은 어딜 보내야 하는지 같은 작지만 강력한 정보는 뉴스에도, 책에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효원‧김은주 교수는 “아이의 공부를 생각한다면 주변 양육자들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옆집 엄마’가 왜 문제인가요. 김효원(이하 원) 공부를 잘하게 하려면 내 아이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양육자가 가장 잘못하는 일이기도 하죠. 이렇게 질문해 볼까요? 선행학습은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전문가들은 대체로 선행학습은 뇌 발달과 학습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원) 맞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지능지수(IQ)가 높고,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며 성취욕도 상당히 크다면 어떨까요?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재미없어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아이의 흥미와 동기를 유발하기엔 쉬울테니까요. 이 경우엔 선행학습이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반대로 글씨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아이에게 자기보다 높은 학년이 배우는 내용을 가르치는 것도 맞지 않고요.   그게 옆집 엄마와 무슨 관계인가요? 김은주(이하 주) 교육열 높은 양육자의 대부분은 선행학습을 시켜요. 서울 강남의 유별난 엄마 얘기가 더는 아닙니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고1 수준인 ‘수학의 정석’을 풀게 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마저도 ‘두 번 돌렸다’ ‘세 번 돌렸다’ 할 정도로 여러 번 시키기도 하고요. 그런데 수학의 정석을 푼 초등학생이 이 내용을 정말로 이해했을까요? 대다수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중요한 걸 하나 말씀드릴게요.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엄마들은 맘카페나 모임에서 ‘빅마우스’(수다쟁이)가 아닙니다. 아이가 월등하게 뛰어난 엄마들만 얘기를 늘어놓죠. 그러다 보니 일부 우수한 아이들의 수준이 마치 평균인 것인 양 왜곡이 일어나요.   그럼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원) 우리 애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있는데, 마치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죠. 초등학교 6학년이 초등학교 6학년 수학책에 나오는 문제를 푸는 게 정상이잖아요. 고등학교 1학년 수학 문제를 푸는 게 비정상이고요. 그런데 기준이 높아지다 보니 우리 애만 뒤처지는 것같이 느끼는 겁니다. 양육자의 불안감이 커지면 결국 아이 수준을 파악하지 못한 채 버거운 과제를 내주게 됩니다.   아이가 잘 따라간다면 문제가 없지 않나요? (원) 일부 뛰어난 아이들은 문제없이 따라갈 수 있겠죠. 하지만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아이들도 대부분 평범한 아이들입니다. 잘 따라간다고 느끼신다면 그건 아이도, 양육자도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수준에 안 맞는 걸 학습하면 흥미를 잃게 되죠. 정확하게 말하면 선행학습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아이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선행학습이 문제인 거죠.   아이 수준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주) 학교 수업을 잘 이해하는 게 기본입니다. 만약 학교 수업을 버거워한다면 기초학습이 부족하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난독증이나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 같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요.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는 경우에도 아이가 수업 내용을 잘 따라가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보통 학습 내용의 60~70%를 이해하고 있다면 적당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아이가 학원 시험에서 매번 낮은 점수를 받는다면 학원을 옮기거나 아랫반으로 바꿔야 해요. 문제는 양육자들이 대부분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죠.   무슨 의미인가요? (주) 강남구 대치동에서 정말 인기 많은 H학원이 있어요. H학원에 보내려고 아이를 소위 ‘새끼학원’만 네 군데 보내는 경우도 봤어요. 그렇게 어렵게 H학원에 들어갔어요. 그럼 아이가 시험 좀 못 본다고 그만두게 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들어왔는데요.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있을까?’ 고민이 되죠. 하지만 기억하세요. 아이 상황·수준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공부 잘하게 하는 첫 단추라는 걸요. 무리한 선행학습의 끝에서 마주하는 건 공부를 싫어하는, 그리고 ‘나는 공부 못한다’고 스스로 낙인찍어 버린 아이일 겁니다.   어려운 걸 공부하면 흥미를 잃는 건 왜 그렇죠? 오히려 도전의식을 불태울 수도 있잖아요. (주) 개인의 실력과 과제의 난도가 적절한 수준이어야지 몰입할 수 있어요. 아이고, 어른이고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과제가 너무 쉬우면 학습자는 권태를 느끼고, 너무 어려우면 좌절과 불안을 느끼죠. 누구나 잘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성취욕이죠. 그런데 버거운 과제를 계속 주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은 미숙하기 때문에 좌절을 주는 대상을 회피해 버려요. 결국 공부에 손을 놓는 겁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도전의식을 느끼며 달려드는지, 어떨 때 포기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해요. 그래서 그사이 난이도의 학습을 제시해 주는 게 필요하죠. 아이가 느리면 양육자가 좀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요. 김효원 서울아산병원 소아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아이 수준에 맞지 않는 선행학습은 결국 공부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장진영 기자  ━  📢의대 준비반이 인생 패배자 만든다.   강남구 대치동을 중심으로 의대 광풍(狂風)이 불고 있다. 초등학생 대상 학원에서 의대 입시반을 운영하는 것은 물론, 유아 대상 의대 입시설명회가 열릴 정도다. 물론 어려서부터 의대를 준비해 의대 진학에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2024학년도 기준 의대 선발 인원은 총 3091명. 지난해 수능 응시생(44만7669명)의 0.7%로, 1%도 채 안 된다. 대다수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김효원‧김은주 교수도 “어려서부터 ‘의대’만을 목표로 살아 온 아이들은 의대 진학 실패와 동시에 인생을 실패한 것 같은 좌절감을 느낀다”고 경고했다.   입시에서 실패하면 곧 인생에서 실패한 것 같이 느낀다는 건가요? (주) 의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의사가 꼭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의대에 진학하지 않았다고 인생이 끝난 것도 아니에요. 고3은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이잖아요.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시기죠.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의대’만을 목표로 살아왔기 때문에 의대 진학 실패를 인생 실패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요. 문제는 소위 명문대에 합격해도 스스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재수‧삼수는 기본이고, 구(9)수까지 하는 경우도 봤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원) 양육자의 목표를 아이에게 주입하는 게 문제예요. 아이들이 공부 열심히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양육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거든요. 애착관계에 있는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거죠. 그러다 아이가 조금만 두각을 나타내면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도 인정받게 되고, 의대 진학만이 인생의 전부가 돼버려요. 하지만 의대 진학 준비를 그만두고 ‘의대 준비반’이라는 집단이 주는 자부심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을 잃은 심정이 되는 거죠.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의대 열풍을 넘어 광풍 수준이 된 이유가 뭐라고 보시나요? (주) 양육자의 의대 진학 열망과 사교육 마케팅 전략의 합작품 같아요. 사실 최상위권 학생을 위한 사교육은 예전부터 있었어요. 영재반·특목자사고반이 의대반이 된 거죠. 상담을 하다 보면 초등학생 자녀를 둔 양육자 중에 의대에 보내고 싶다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고등학생만 돼도 “어머니 의대 준비 어떻게 돼가요?”라고 물어보면 “선생님, 성적이 나와야 의대를 가죠.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하면서 웃어넘기시죠. 사실 의대 가기가 쉬운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초등학교 때는 아직 그게 얼마나 치열한지 실감을 못하시는 것 같아요.   병원을 찾는 아이들의 연령도 낮아졌나요? (주) 아무래도 예전보다 병원을 찾는 아이들의 나이가 어려지긴 했어요. 특히 조용한 ADHD 상담이 늘었어요. 정상 발달하고 있고, 겉으로 봐서 집중력이 나쁘지는 않은데, 선행을 버거워하니까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하고 싶은 거죠. 이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병원을 찾는 분들이 늘었어요. 과거와 비교하면 확실히 많아졌죠.   어떤 이유로 병원을 찾아오나요? (주) 아이의 집중력이나 정서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고 싶어하는 양육자가 많아요. 선행학습 시기가 빨라진 영향으로 보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선행학습을 하고, 밤 늦게까지 학원숙제를 하는 아이들이죠. 주변에서 다 선행학습을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데,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있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어떤 검사를 받나요? (주) 초등학교 입학 전에 ‘풀 배터리 검사’를 많이 받으세요. IQ 외에 집중력‧정서‧사회성‧부모관계를 들여다보는 검사예요. 대학병원 소아청소년정신건강의학과 뿐 아니라 심리센터·발달센터에서 하는 경우도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 곳에서 이상이 있다고 나오면 대학병원에 2차 의견을 구하러 오기도 하고요. 김은주 강남세브란스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강남구 대치동을 중심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의대 광풍이 불고 있다”며 “어려서부터 ‘의대’만을 목표로 살아 온 아이들은 의대 진학 실패와 함께 큰 좌절감을 느낄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안전해야 진짜 가정이다.   지능‧주의력‧실행기능‧기억력‧문해력‧동기‧자기조절…. 정신과 의사들이 꼽은 공부 잘하는데 영향을 주는 요소다. 김효원‧김은주 교수는 “무엇보다 정서적 안정이 중요하다”며 “양육자가 도와줘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양육자는 아이가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안전기지가 돼줘야 한다는 얘기다.   안전기지라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주) 아이에게 엄마‧아빠가 자기편이라는 믿음을 주는 거죠. ‘내가 힘들 때 기대면 나를 위로하고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말이에요.    대다수 양육자가 그렇지 않나요? (원) 아닌 분도 많을 겁니다. 특히 대치동 아이들은 학교 끝나고 학원 갔다가 밤 10시에 파김치가 돼 집에 가면 엄마가 도끼눈을 뜨고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숨 돌릴 틈도 없이 학원에서 받은 점수를 묻고 “너 이렇게 해서 의대 가겠어?” 하고 다그치는 거죠. 그러면 아이는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양육자에게 털어놓지 않죠. 그러다 문제가 심각해지면 우울증·공황장애가 생기거나 비행을 저지르기도 하고요.   안전기지가 돼 주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는 양육자가 많을 것 같아요. (원)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합니다. 탁구‧농구 같은 운동뿐 아니라 보드게임이나 아이돌 콘서트 관람 등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세요. 이때 주의할 게 있어요. 양육자가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안 됩니다. 얘기하다 보면 잔소리를 안 할 수가 없거든요. 좋은 의지로 시작해도 결국 관계만 나쁘게 만들고 말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이랑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세요. 그러다 보면 아이가 학교나 선생님·친구 얘기를 꺼낼 거예요. 그러면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세요. 일상을 함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안전기지 역할을 언제부터 해야 할까요? (주) 어리면 어릴수록 좋아요. 특히 영·유아기나 초등학교 때는 사춘기를 대비해 저축한다는 마음으로 아이와 감정적인 유대를 쌓아야 해요. 이런 정서적 유대가 밑바탕이 돼야 10대 때도 자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10대 때는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해 주고 마음을 읽어 줄 필요가 있어요. 어긋난 관계를 10대 때 바로잡지 못하면 20대, 30대 때는 양육자와 자녀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기도 합니다.   아이뿐 아니라 양육자 중에도 지친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원) 맞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관계없이 모두 지쳐있어요. 감정소모가 많다 보니 번아웃증후군(정신적 탈진 상태)을 겪는 분들도 있죠. 그런 분들께는 아이와 상관없는 자기 일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게 뭐라도 좋아요. 일이든, 취미생활이든, 운동이든 뭐든지요. 하루 10분만 카페에 앉아서 찬찬히 커피를 마시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가족이 아닌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고, 아이와 잠시라도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가 됩니다.   김효원‧김은주 교수는 “내 인생도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세상일인데, 아이의 인생을 자기 뜻대로 하려는 양육자가 너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내 아이의 인생이 남의 인생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아이와의 관계도 좋아지고, 결과적으로 공부도 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 공부 더 시킬걸’ 하는 아쉬움보다는 좀 더 놀아주고 시간 보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아이 성적 때문에 지나치게 전전긍긍한 것도 후회되고요. 양육자 여러분은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아이를 좀 더 믿어 주세요. 그게 공부 잘하는 아이 만드는 자양분이 될 겁니다. 김은주(왼쪽)‧김효원 교수는 “양육자는 아이가 힘들 때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안전기지’가 돼줘야 한다”며 “결국 정서가 안정돼야 성적도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① 양육의 최대 적은 옆집 엄마입니다. 양육자들이 가장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자녀의 수준 파악이에요. ‘맘카페’ 같은 곳에서 잘하는 아이 얘기만 회자되다 보니 과도한 선행이 평균인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아이 수준에 맞지 않는 버거운 과제를 내주면 학습에 흥미를 잃게 됩니다. ② 의대 준비반, 인생 패배자 만듭니다. 최근 초등학생은 물론 유아 대상 의대 입시설명회가 열릴 정도로 의대 광풍이 불고 있어요. 어려서부터 ‘의대’만을 목표로 살면 의대 진학 실패와 동시에 인생을 실패한 것 같은 좌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③ 안전해야 진짜 가정입니다. 양육자는 아이가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안전기지가 돼야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 마음을 읽어 주고 공감해 주는 게 필요해요. 그래야 아이 성적이 오르고 사춘기 때도 큰 갈등 없이 보낼 수 있습니다.   」 관련기사 하버드 상위 1%, 세계 토론왕…‘영알못’ 소심한 코리안이었다 “대한민국 좋은 학군은 여기” 대치동 전문가가 콕 집었다 약 처방 없이 병 고치는 교수, 아이에 ‘이 지능’ 심고 있었다

    2023.05.24 16:09

  • 하버드 상위 1%, 세계 토론왕…‘영알못’ 소심한 코리안이었다

    하버드 상위 1%, 세계 토론왕…‘영알못’ 소심한 코리안이었다 유료 전용

    하버드대에선 교수님이나 다른 학생들로부터 이 말을 자주 들어요. ‘우리 여기 앉아서 같이 논의(discuss)해 보자.’   세계 토론대회를 두 차례 우승하고 미국 하버드대를 최우등 졸업한 서보현 작가. ‘하버드대 수업은 무엇이 다르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러면서 “책이나 강의실보다 세미나실에서 배우는 게 훨씬 많았다”고 말을 이어갔다.   세계토론대회 챔피언 출신으로 책 『디베이터』를 쓴 서보현 작가는 하버드대 최우등 졸업생이기도 하다. 그는 “책이나 강의실보다 세미나실에서 더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는 뜻이에요. 저를, 제 의견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거죠. 그러면 내 의견을 더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만들고 싶어지죠. 자연스럽게 더 공부하고 연구합니다. 다른 사람과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더 큰 답을 찾을 수 있어요.”   세계 최고 명문대학은 지식을 익히고 정답을 찾기보다는 서로 소통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는 얘기다. 서보현 작가는 “토론은 배움을 끌어내는 마중물이자, 인생을 바꾸는 강력한 도구”라고 강조했다.   그의 인생이 증거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호주로 이민을 간 그는 학교 동아리 활동으로 토론 세계에 입문했다. 고등학교 때 세계학생토론대회(WSDC, 2013년)에서 우승했고, 이어 하버드대 토론팀 소속으로 세계대학생토론대회(WUDC, 2016년)까지 제패했다. 호주 국가대표 토론팀, 하버드대 토론팀 코치도 역임했다. 하버드대에서는 정치 이론 전공으로 최우등 졸업해 상위 1%에 해당하는 ‘주니어 24’에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가 최근 『디베이터』라는 책을 냈다. 토론의 기술과 그의 성장기를 엮었다.   그가 세계토론대회, 하버드대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토론은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최근 한국을 찾은 서 작가를 지난 16일 만나 물었다.    ━  📢토론의 효용①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다   세계토론대회 챔피언 하면 말재간이 좋은 외향적인 사람이 떠오른다. 하지만 서 작가는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성향”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민 초기에는 자신의 다름과 부족함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 조용하고 온순한 아이로 지냈다고 한다. 논쟁을 피하려고 ‘예스 보이(yes boy)’가 됐다는 것이다. 그런 그를 바꾼 건 토론이었다. 토론을 하며 숨겨져 있던 목소리를 찾았다. 토론장에서 그는 자기 이야기를 마음껏 펼쳤다. 그리고 더 큰 무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다. “토론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서 작가는 말했다. 서보현 작가는 “토론을 통해 나만의 목소리를 찾아줬다”며 “소심하고 내성적인 편이라 토론의 수혜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내성적인 아이였는데, 어떻게 토론 활동을 시작한 거죠? 처음 이민 갔을 때 영어를 거의 못했어요. 엉터리 단어랑 문장을 가지곤 제대로 주장을 펼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제 생각을 숨겼죠. 그냥 웃고 고개 끄덕이면서 묻혀 지내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 제안으로 교내 토론팀에 가입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거절했는데, 저는 선생님과의 논쟁을 피하려다 얼떨결에 가입했죠. 물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토론의 약속에도 많이 끌렸고요.   토론의 약속이 뭔가요? ‘토론에서는 한 사람이 말할 때 다른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한마디로 제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겁니다. 또 토론이 여러 기술을 알려줘서 제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고 했어요. 토론의 약속과 원칙이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인 제게는 도움이 됐어요.   토론을 배우면서 성격이 달라지던가요? 성격 자체가 변하진 않아요. 그보다는 잠재돼 있는 내 안의 다른 면, 저만의 목소리를 갖게 됩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는 토론을 통해 많은 사람 앞에 서 보고 다른 사람과 교감하는 경험을 합니다. 리더십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죠. 덕분에 내성적인 제가 초·중·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을 했어요. 외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못하거나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토론하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죠.    자신에게 부족한 역량을 보완해 준다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내 생각이 틀릴까 봐, 비판받는 게 두려워서 선뜻 생각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더 많이 공부하고 연습했어요. 열심히 자료를 조사하고 밤늦게까지 생각을 글로 정리했죠. 아침에 샤워할 때면 명연설이나 인상적인 구절을 듣고 따라 했고요. 호주에서 이민자로서 저는 주변부(periphery) 삶을 살았어요. 주변부에 살면 자기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확실하지 않단 느낌이 들어요. 자신이 주변 환경과 다르니까요. ‘이 차이를 내가 설명해야겠구나.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내 의견이 우세해질 수 없겠구나’ 하고 느꼈죠. 어떤 주장에 반대하려면 더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어요. 재밌는 건 토론에서 많이 지다 보면, 오히려 내 생각을 더 편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자꾸 지면 오히려 위축되지 않나요?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죠? 지면서 배우는 게 많아요. 토론대회에 나가면 이길 때보다 질 때가 훨씬 많죠. 오늘 이겨도 내일 질 수 있고요. 토론에서 자꾸 지다 보면 겸손해져요.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걸 경험하니까요. 하지만 정답을 알아야만 말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정답이 아니더라도 내 생각을 말할 수 있고, 대화를 통해 배워가겠다는 태도가 생겨요. 그런 태도는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고요.   한국에선 토론 문화나 교육이 서양만큼 뿌리 깊고 대중적이진 않아요. 어떻게 토론 교육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토론 수업을 듣고, 토론 학원에 다녀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자주 물어보는 거예요. 그게 시작입니다. 제 부모님도 항상 저의 의견과 생각을 물어보셨죠.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본능이 있거든요. 내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호기심도 있고요. 그런 본능과 호기심을 꺾지 말고, 잘 살리는 게 어른들의 역할이라고 봐요. 학교에서 수업하는 방식만 좀 달라져도 토론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 시간에 단순히 어떤 사실을 외우고 지나갈 게 아니라 그 당시 어떤 인물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고 말해보는 거죠.    ━  📢토론의 효용② 더 큰 세상에 나를 알리다   토론은 낯선 사회에서 서보현이란 존재를 알린 무대였다. 동시에 하버드대 진학의 문을 열어준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하버드대에서 상위 1%에 꼽힐 만큼 공부를 잘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토론이다. 그는 “공부할 때 마음가짐이 토론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2016년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열린 세계대학생토론대회 결승전에서 서보현 작가 (가운데)가 말하고 있다. 서보현 작가 제공   토론이 공부할 때 어떤 도움이 됐나요? 토론은 종합적인 활동이에요. 어떤 주제에 관해서 다각도로 연구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글을 쓰는 연습을 하죠. 팀을 이뤄 협력하고, 전략을 짜고, 대중연설을 하는 것까지 포함해요. 학습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기술 전반을 익힐 수 있죠. 그런데 더 결정적인 건 토론을 하면 배우려는 마음, 동기가 생긴다는 겁니다.   토론이 어떻게 공부하겠다는 동기를 강하게 만들죠? 토론을 하려면 나만의 뚜렷한 관점이 필요해요. 그걸 가지려면 어떤 주제에 관해 다양한 정보를 탐색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실시간으로 논쟁할 수 있을 만큼 이해하려면, 그 깊이도 상당하죠. 공부도 그렇게 했어요. 나만의 관점, 나만의 이론을 가지고, 수많은 정보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식으로요. 그렇게 공부했더니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공부를 오래 하려면,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납득해야 하잖아요. 내 관점을 갖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니, 공부가 나를 위한 거라고 느껴졌어요.   자기만의 관점과 이론으로 공부하는 건 어떤 거죠? 예를 들면 책을 읽을 때도 작가랑 대화하듯이 읽어요. 어렸을 때부터 책 가장자리에 꼭 저의 감상이나 생각, 느낌을 적었어요. 책 내용에 느낌표, 물음표를 쓰면서 적극적으로 읽었어요. 책을 읽고 어머니와 대화도 많이 나눴죠. 주말이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와 책 속의 주인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은지 얘기했어요. 그런 과정들이 나만의 시각과 이론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서보현 작가는 “토론할 때처럼 자기만의 관점과 이론을 가지고 공부를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자기만의 관점을 갖는 게 공부하는 데 있어 왜 중요한가요? 하버드대 토론팀 코치를 했을 때 일이에요. 똑똑하고 경쟁적인 학생들이다 보니, 이미 성공한 과거 사례를 따라 하려는 경우가 많았죠. 물론 그렇게 하면 성공할 확률이 큽니다. 하지만 한계 역시 분명하죠. 저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진 독특한 특징과 강점에 집중하라’고 했어요. 그 사람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겁니다. 사실 지시를 잘 따르고 암기만 해도 어느 정도 공부는 잘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러면 한 기업의 직원이 되는 수준에 그치겠죠. 자기만의 시각이 있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출 수 있다면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 토론의 효용③ 상대를, 세계를 이해하다   토론 실력의 핵심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능력에 있다. 세계 대회에서 두 차례나 우승한 토론 챔피언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 걸까? 서 작가가 밝힌 비법의 열쇠는 말하기가 아닌 듣기에 있었다.    토론에선 논리적인 사고가 필수적이잖아요.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어떤 주장에 대한 논증을 해야 할 때 필요한 저만의 구조가 있어요. ‘네 가지 W 만들기’ 훈련이죠. 핵심이 무엇(what)인지, 왜(why) 그게 진실인지, 과거에 언제(when)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게 왜 중요한지(Who cares)를 뼈대로 삼았죠. 단순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저만의 논증법이죠. 이 틀을 가지고 여러 의제를 다루는 연습을 계속 했어요.   설득력 있게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먼저 말을 잘 들어야 해요. 저는 토론에서 말하기에 앞서 경청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합니다.   서보현 작가는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상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어떻게 하면 잘 들을 수 있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고 공평한 입장에서 들어야 해요. 찬반 토론을 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뭔지 아세요? 반대하는 입장에서 듣는 거에요. 허점이나 약점을 잡으려는 거죠. 그럼 말하는 사람의 생각을 오해할 가능성이 커요. 상대 주장을 반박하려는데, 그 사람이 ‘당신이 나를 오해했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설득에 실패한 거나 다름없죠. 그래서 심판관의 입장에서 들어야 해요. 또 한 가지, 잘 들으려면 중요성이란 단어를 잊지 말아야 해요.   중요성이요? ‘듣는 사람에게 무엇이 중요할까’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겁니다. 내 주장이 진실인 걸 증명하려고 수많은 증거를 갖다 대느라, 정작 이게 왜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지 간과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을 바꾸려면 지금 내가 말하는 바가 그 사람에게 왜 중요한지 설득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의 관심사나 이해관계, 가치관을 이해해야 하고요. 채식주의자가 채식에 동참하라고 누군가를 설득하는 상황을 가정해 볼게요. 상대가 건강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환경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공략 포인트가 다르겠죠.   2019년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AI) ‘프로젝트 디베이터’가 인간 토론자와 맞붙어 패배했는데요. 최근 AI기술이 발전하는 걸 보면 언젠가 AI가 인간의 토론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토론도 언젠가 AI가 인간보다 더 잘 해주지 않을까요? AI가 방대하고 적절한 정보를 빠르게 찾는 데는 더 뛰어날 겁니다. 그런데 챗GPT가 못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챗GPT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 질문에 답은 잘할지 몰라도요. 대화하는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거예요. AI가 인간의 토론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죠. 그리고 또 한 가지. 인간이 AI의 도움을 받아서 토론하면 토론이 다 비슷해질지도 모릅니다. 말 그대로 기계적인 토론이 되는 거죠.    서 작가는 그러면서 “AI시대, 어떻게 하면 더 인간적인 토론과 대화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대의 말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질문하고, 교감하며 공감할 줄 아는 인간적인 토론 역량들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토론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과 목소리가 있죠. 토론을 하면 자신을 찾을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렇게 세상을 더 다채롭게 만드는 게 토론의 힘입니다   ■ 세계 토론 챔피언이 밝힌 토론의 힘 「 ①"나만의 목소리를 찾아줘요": 토론의 기술은 내성적인 아이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줘요. 리더십도 길러주죠. 정답이 아니어도 자기 생각을 말해보는 경험이 중요해요. ②"배우려는 열정, 공부하는 힘을 키워줘요": 토론을 하려면 깊이 있게 주제를 이해해야 해요. 스스로 자료를 찾고 생각을 정리해야하죠. 토론에서처럼 자기만의 관점과 이론을 만들면 공부하는 재미가 생깁니다. ③"세상을 잘 이해할 수 있어요": 토론에서 설득력 있게 말하려면 잘 듣는 게 중요해요. 상대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파악해야하죠. 상대에게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고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해요. 」 관련기사 강의 30%도 안하고 “글 써라”…서울대 교수의 이상한 수업 ④ 집안일 안 해도 이건 꼭 했다, 세 딸 하버드 보낸 ‘母의 비밀’ "자녀들 선행학습은 시대착오" 서울대 교수가 권한 공부법

    2023.05.21 16:27

  • “대한민국 좋은 학군은 여기” 대치동 전문가가 콕 집었다

    “대한민국 좋은 학군은 여기” 대치동 전문가가 콕 집었다 유료 전용

    대치동에서도 5명 중 1명(약 20%)꼴로 학업 성취도에서 가장 낮은 등급을 받습니다. 학군지 간다고 다 공부 잘하는 거 아닙니다.   지난 10일 만난 심정섭 더나음연구소장은 “아이 교육을 위해 학군지로 가야 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전국 1등 학군지로 꼽히는 대치동에 공부 잘하는, 입시에 성공한 학생만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심 소장은 “겨우 이 정도 결과를 내려고 엄청난 사교육비와 집값을 감당했나 후회하는 가정도 많다”고 잘라 말했다.   심정섭 더나음연구소장은 학군 전문가로 꼽힌다. 양육자 사이에 읽히던『대한민국 학군지도』가 2018년 이후 부동산 상승기에 투자자 사이에 널리 읽히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중앙일보   대치동에서 20년 가까이 영어 강사로 활동하던 심정섭 소장은 2016년 『대한민국 학군지도』란 책을 썼다. 사실 그가 쓴 책의 대부분은 유대인 자녀 교육이나 토론·독서 교육서다. 그런데 강연을 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받았단다. “그래서 학군지에 가야 하나요?” “언제 가야 하나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대치동 강사 경험을 살려 개별적으로 대답하다, 아예 책으로 묶어 냈다. 양육자 사이에 회자되던 책은 2018년 이후 부동산 상승이 본격화되면서 부동산 투자자 사이에서도 읽혔다. 2019년에 이어 올 초 개정증보판을 낸 이유다.   학군지 분석으로 교육 시장뿐 아니라 부동산 시장에서도 이름을 알렸지만 정작 그는 충청북도 증평에 살면서 6세, 4세 두 아이를 키운다. 지난 10일 증평에서 그를 만나 학군지의 의미와 미래를 물었다.    ━  질문① 어디가 좋은 학군지인가요?   아파트 단지 안엔 새로 지은 학교가 있고, 상가를 중심으로 학원가까지 잘 갖춰진 신도시. 아이 키우기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이지만, 심정섭 소장에 따르면 학군지는 아니다. 그가 말하는 ‘좋은 학군’은 아이가 초등학교 5, 6학년이 됐을 때 이사를 고민하지 않는 곳이다. 시골이 아니고선 중·고등학교가 없는 지역은 없다. 중학교가 없어서 이사해야 하는 지역은 없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양육자가 이사 고민하지 않는 곳이라니, 대체 무슨 얘길까?   중·고등학교가 없는 동네는 없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5, 6학년 때 이사를 고민하지 않는 곳이라뇨?  중·고등학교 6년을 계속 살아도 원하는 대학에 가는 데 큰 문제가 없는 곳이요. 다시 말해 학업 성취도 평가 결과나 입시 성과가 좋은 중·고등학교가 충분히 있는 곳이요. 중학교를 볼 땐 특목·자사고 진학률을, 고등학교는 서울대 진학률을 보면 됩니다. 요즘엔 서울대보다 의대가 더 인기가 높지만, 의대 진학률은 파악하기 힘들거든요. 반면에 서울대 진학률은 국정감사 등을 통해 정보가 공개되고요. 서울대 진학률이 높은 곳이 대체로 의대 진학률이 높기도 합니다.   그럼 어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어야 학군지인가요? 입시 성과나 학업 성취도 측면에서 전국 100위권 중·고등학교가 있으면 학군지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학교가 각각 서너 개씩 있으면 최상위권 학군지죠. 보통 중학교보다 고등학교가 적어요. 고등학교는 인문계와 특성화고로 나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국 100위권 고등학교는 없지만 전국 100위권 중학교는 있는 동네가 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이사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동네죠. 이런 곳이 상위권 학군지로 볼 수 있어요.   최상위권 학군지는 어디 어디인가요? 학군 하면 대치동(서울 강남구)이죠. 대치동엔 100위권 일반고가 10개나 있어요. 대치동이 명실상부한 전국 1위 학군지가 된 건 이렇게 좋은 학교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에요. 강남을 개발하면서 명문고를 대거 이전하게 한 게 주효했습니다. 여기에 오래된 아파트 상가를 중심으로 학원가도 조밀하게 발달했고요. 서울 양천구와 강서구를 아우르는 목동 학군은 특히 중학교가 넓게 포진해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학교가 밀집해 있으면 근처 지역의 좋은 학생들을 빨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목동은 서울 서부 지역뿐 아니라 부천이나 인천 등에서도 이사를 오는 곳이죠. 반포(서울 서초구)와 중계(서울 노원구) 학군도 100위권 중·고등학교가 서너 곳 이상 고르게 분포하는 좋은 학군지입니다. 송파·잠실 학군을 최상위권 학군지로 많이들 꼽는데요. 저는 최상위권과 상위권 중간쯤 있는 학군지로 분류합니다. 송파·잠실 학군의 경우 서울대나 의대를 노리는 최상위권 학생은 남지만, 상위권 학생 대다수가 특목·자사고 혹은 대치동 일반고로 빠지기 때문이죠. 경기도에선 분당이, 지역에선 대구 수성과 대전 둔산 학군이 최상위권 학군지로 볼 수 있어요. 의아한 게,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도시는 부산이잖아요. 그런데 부산에는 최상위권 학군지로 볼 수 있는 곳이 없네요. 부산은 전국 100위권 일반고 두세 곳, 200위권 일반고 대여섯 곳이 있어요. 그리 나쁜 편은 아니죠. 하지만 부산보다 인구가 100만 명가량 적은 대구의 경우 100위권 일반고가 대여섯 곳, 200위권 일반고가 네다섯 곳이나 있어요. 부산의 신흥 명문 학군이라 할 수 있는 해운대 쪽에 아직 강력한 일반고 라인업이 형성되지 않은 것도 학군 면에선 아쉬운 대목이죠. 학원가 역시 여러 곳으로 분산돼 있어 학군 형성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요. 대구가 우수한 고등학교 자원과 학원가를 중심으로 경북 전체의 우수한 학생을 끌어들이며 전국권 학군지를 만든 것과 대조적이죠.   경기권에선 분당이 유일하게 최상위권 학군지에 이름을 올렸어요. 분당은 특목·자사고가 안 됐을 때 갈 만한 일반고가 수도권에서 가장 많은 학군입니다. 100위권 고등학교로는 낙생고, 분당대진고, 분당중앙고, 서현고가 있고, 200위권 고등학교도 영덕여고, 늘푸른고, 분당고, 보평고, 수내고, 야탑고, 이매고, 태원고, 한솔고가 있어요. 이런 강력한 일반고 라인업이, 분당을 다른 수도권 1기 신도시나 인천 학군과 차원이 다른 학군으로 만들었죠.   대전 둔산 학군도 최상위권 학군지로 손색이 없군요? 서울과 수도권을 제외하면 단연 최고의 학군은 대구와 대전입니다. 고등학교만 놓고 보면 대전이나 대구, 부산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중학교까지 고려하면 둔산 학군이 좀 더 탄탄합니다. 여기에 아파트 가격이나 인구 대비 교육 성과를 따진다면 가성비가 좋은 학군이라 할 수 있어요. KAIST와 대덕연구단지 등을 중심으로 이공계 석·박사급 고급 인력이 많고, 학교와 연구시설 등 주변 환경이 좋은 것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요. 심정섭 소장이 꼽은 좋은 학군은 중·고등학교 5, 6년간 이사를 고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학업 성취도 평가와 입시 성과가 좋은 명문중·고가 다수 포진하고 있다. ⓒ중앙일보      ━  질문② 학군지, 언제 이사해야 할까?   심정섭 소장이 꼽은 소위 ‘최상위권 학군지’는 부동산 대장 지역이기도 하다. 아이가 설령 공부를 잘한다 해도 이런 지역에 진입하는 건 쉽지 않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심정섭 소장은 “경제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최상위권 학군지에 바로 진입하는 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장기적으로 몇 번의 갈아타기를 통해 최종적으로 최상위권 학군지에 진입하는 전략을 쓰라는 것이다.   열거해 주신 최상위권 학군지는 집값이 너무 비싸요.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동네가 아닙니다. 최상위권 학군지에 바로 진입하는 건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지만, 교육적으로도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 수 있어요. 우수한 학생이 많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면 아이가 감당하기 힘들 수 있죠. 그럴 때 좋은 방법이 상위권 학군지에 먼저 진입하는 겁니다.   상위권 학군지는 어떤 곳인가요? 중학생 때까진 버텨볼 만한 곳이죠. 100위권 중학교는 몇 개 있지만, 고등학교 라인업은 그만큼 받쳐주지 못하는 곳을 말합니다. 서울 송파 외곽·강동 학군, 광장 학군, 경기도 평촌 학군, 일산 학군, 수원 영통 학군, 광교 학군 등입니다. 먼저 이들 학군에 진입해서 아이의 학업 성취를 보면서 적당한 시기에 더 좋은 학군지로 갈아타는 식으로 진입하는 걸 추천해요. 장기적 관점에서 관심 지역의 학군을 공부하고, 목표 지역을 향해 적당한 시기에 갈아타면서 최종적으로 목표 지역에 진입하라는 얘깁니다.   내가 사는 지역이 좋은 학군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나요? 중·고등학교 5, 6년을 이사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이 좋은 학군이라고 말씀드렸죠? 여기에 힌트가 있어요. 보통 초등학교 5, 6학년이 되면 학군지로의 이주가 시작되는데요. 여러분이 사는 지역의 초등학교가 저학년 학생보다 고학년 학생이 많으면 중학교 때까지 버텨볼 만한 동네라고 할 수 있어요.   초등학교 고학년 비율이 적은 지역에 산다면, 결국 이사를 해야 하는 걸까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군지에 무리하게 진입하면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있으니까요. 어릴 때는 공부 자신감이 중요해요. 우수한 학생이 모여 있는 학군지에선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지역에선 상위권 그룹으로 선생님의 주목을 받으며 자신감을 키울 수 있는 아이도, 학군지에선 중위권 그룹에 그칠 가능성이 높아요. 아이가 스스로 “나는 공부 못해”라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이런 지역은 어릴 때부터 영어 유치원이다 뭐다 사교육비가 많이 듭니다. 이때 쓰는 사교육비를 아껴서 진짜 써야 할 때 쓰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어요.    소장님이 충북 증평에 사는 것도 그래선가요? 저는 6세, 4세 두 아이를 둔 아빠인데요. 사교육비가 0원입니다. 첫째는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다니거든요. 저는 여기서 당분간 아이를 키울 겁니다. 증평에서도 1등을 못하는데, 다른 지역 가서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학군지에 진입하기 적절한 때는 언제인가요? 초등학교 5, 6학년 때 가도 늦지 않습니다. 다만 전제가 있어요. 우리 아이가 학군지의 경쟁을 견딜 수 있는 기질인지, 공부 머리는 가졌는지 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해요.   내 아이가 공부 머리가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제가 추천하는 ‘공부 머리 테스트’가 있어요. 초등학교 5, 6학년 아이에게 중학교 1학년 국어 시험지를 풀게 합니다. 수학이나 영어와 달리 선행 학습이 없어도 풀 수 있는 과목이 국어니까요. 한 번은 시험 볼 때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풀게 하고, 또 한 번은 시간제한 없이 풀게 해요. 둘 다 우수한 성적이 나오면 공부 머리가 있는 거겠죠. 시험 환경에서 본 시험은 성적이 낮아도, 시간제한 없이 본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는 경우도 공부 머리가 있다고 봐야 해요. 이런 학생은 공부하는 요령 등을 익히면 충분히 성적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기질도 봐야 한다고요? 디스크(DISC) 행동 유형 검사나 회복 탄력성 검사를 추천합니다. 디스크 검사는 한 사람의 행동 유형을 4가지로 나눕니다. 행동의 속도가 빠른지, 일과 사람 중 어떤 걸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렇게 두 가지 기준으로 나누죠. 이 검사에서 D(주도) 성향이 높은 학생은 경쟁이 치열한 학군지에서도 잘 견딜 수 있어요. 이 유형은 승부욕이 강하거든요. 만약 아이가 C(안정) 성향이나 S(신중) 성향이 높다면, 주요 과목의 선행 학습을 보다 철저히 할 필요가 있어요. 이런 유형의 학생은 완벽하게 준비돼 있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거든요.   회복 탄력성 검사는 뭔가요? 역경을 딛고 원래 상태로 얼마나 잘 돌아올 수 있는지, 나아가 더 도약할 수 있는지 체크하는 검사입니다. 한국인의 회복 탄력성 점수는 평균 195점인데요. 제가 상담한 대치동 학생들은 평균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회복 탄력성이 높지 않다면 학군지의 경쟁적 상황을 견뎌내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 검사 결과 학군지에 가는 게 좋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제 아이가 그런 경우라면, 저는 증평에 남을 겁니다. 증평에 있는 형석고는 매년 서울대를 한두 명 정도는 보내죠. 여기서 좋은 성적을 내면 지역 인재 전형 등을 활용해 좋은 입시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학군지만 답이 아니에요. 전략적으로 접근하면, 지금 사는 지역에서도 좋은 입시 결과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충북 증평군 보강천변에서 아이들과 산책 중인 심정섭 소장. 대치동 강사 출신으로 학군 전문가로 꼽히지만, 정작 그는 충북 증평에 살고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굳이 학군지에 진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경쟁이 덜한 환경에서 공부 자신감을 기르고, 양육자는 중·고등학교 시기에 써야 할 사교육비를 비축할 수 있다. ⓒ중앙일보    ━  질문③ 저출생 상황에서 학군이 유효할까?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로, 평균(2020년 현재 1.59명)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기록적인 저출생 시대에도 과연 학군은 유효한 걸까? 심정섭 소장은 “학군의 유효기간은 넉넉잡아 10년”이라고 잘라 말했다.   왜 10년은 유효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인구가 줄면 사교육 시장도 지금 같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일자리를 놓고 사람들이 경쟁하지만, 앞으로는 일자리를 가진 기업이 사람을 놓고 경쟁할 테니까요. 다만 적어도 10년은 경쟁이 만만치 않을 거예요. 인구 통계를 보면 알 수 있죠. 연간 출생아 숫자가 60만 명이 무너진 게 2001년이에요. 이후 2002년부터 2016년까지는 40만 명대를 유지하다, 2017년부터 30만 명대로 떨어지죠. 출생아의 60~65%가 수능을 응시합니다. 그리고 재수생 비율이 25~30% 정도 되고요. 이 두 가지를 고려하면 2033년까지는 대입 수험생이 40만 명 선을 유지할 거라고 전망할 수 있죠. 상위 30~40개 대학 정원이자, 정규직 같은 의미 있는 일자리 숫자가 7만~10만 정도인 걸 고려하면 이때까지는 경쟁이 치열할 거예요.    인구가 줄면 학군 지형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가뭄으로 호수의 물이 줄 때는 가장자리부터 주는 법입니다. 시장이 작아지면 넘버3부터 무너지죠. 학군도 상대적으로 덜 좋은 학군지부터 무너질 겁니다. 최상위권 학군지로의 쏠림은 더 심해질 테고요. 같은 학군 안에서도 1, 2등 명문중, 명문고로의 쏠림이 더 심해지겠죠.   결국 대치 학군만 남는 건가요? 모든 사람이 다 대치동에 살 수는 없으니까요. 서울 서부권과 동부권에선 목동 학군과 중계 학군이, 경기 지역에선 분당 학군이, 영남권에선 대구 수성 학군이, 중부 지역에선 대전 둔산 학군이 살아남을 겁니다. 이런 지역 주변의 상위권 학군지는 저출생이 가속화되면 위축될 가능성이 크고요.   챗GPT 등장 이후 화이트칼라 일자리도 위협받고 있어요. 교육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고요. 이런 흐름 속에서 학군의 의미는 더 퇴색되는 것 아닌가요? 제가 대치동 강사 생활을 접은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어떻게 해서든 아이들을 서울 수도권 대학에 보냈어요. 그런데 4, 5년 뒤에 이 친구들이 취업을 못 하는 거예요. 시간과 자원을 엄청나게 써서 성과를 만들었는데, 허무하더군요. 학업 성적 중위권 학생은 노동 시장에서 화이트칼라로 살아남는 게 지금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AI)이 등장했어요. 이제 탁월한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이 사람이 AI를 활용해 일하면 과거 3, 4명이 하던 일을 혼자서도 할 수 있죠.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수능 1, 2등급 일자리는 계속 있을 겁니다. 수능 7, 8등급은 공부가 아닌 다른 길을 찾겠죠. 문제는 수능 3~6등급 아이들이에요. 이 아이들이 갈 화이트칼라 일자리는 이제 없어질 겁니다. 어설프게 공부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심정섭 소장이 학군 전문가로 유명세를 얻게 된 건 2016년 쓴 『대한민국 학군지도』 덕분이다. 사진은 2023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이다. ⓒ중앙일보   심정섭 소장은 “사교육에 아무리 투자해도 수능 등급을 바꿀 순 없다”고 말했다. 점수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올릴 수 있지만 등급을 울리는 건 본인만이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맹모삼천지교가 가능했던 건 아이가 맹자였기 때문이다.    “투자에 관심 있는 분들은 들어보셨을 거예요.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사고, 잔치 분위기일 때 팔라는 말이요. 의대 진학을 위해 초등학생 때부터 선행 학습을 시작하는 지금이 사교육 시장의 꼭지 아닐까요? 지금은 사교육 시장에 진입할 때가 아니라 떠나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증평=정선언 기자 jung.sunean@joongang.co.kr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①좋은 학군은 중·고등학교 6년 간 이사를 고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지역이다. 학업 성취도 평가나 입시 성과가 좋은 명문 중·고등학교가 다수 포진한 곳이 여기에 해당한다. 서울에선 대치 학군, 목동 학군, 중계 학군, 반포 학군이, 지역에선 대구 수성 학군과 대전 둔산 학군이 최상위권 학군지로 볼 수 있다. ②학군지 간다고 다 공부 잘 하는 건 아니다. 아이가 공부 머리가 있는지, 학군지의 경쟁을 견뎌낼 수 있는 기질인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학군지에 진입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초등학교 5, 6학년 때를 추천한다. 너무 일찍 진입하면, 아이는 공부 자심감을 잃고 양육자는 사교육비를 과도하게 지출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③학군지, 10년은 유효하지만 그 뒤에는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인구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10년은 대입 수험생이 40만 명대를 유지할 것이다. 이 기간 동안은 상위 30~40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이후엔 사람을 놓고 일자리를 가진 기업이 경쟁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챗GPT 같은 인공지능(AI) 기술도 이같은 흐름을 가속화할 것이다. 」 관련기사 우리 아이 성적 올리려면…회복탄력성 전문가의 조언 집안일 안 해도 이건 꼭 했다, 세 딸 하버드 보낸 ‘母의 비밀’ “문해력 키우려면 학원 끊어!” 12년 대치동 논술강사 일침 ③

    2023.05.17 15:57

  • 약 처방 없이 병 고치는 교수, 아이에 ‘이 지능’ 심고 있었다

    약 처방 없이 병 고치는 교수, 아이에 ‘이 지능’ 심고 있었다 유료 전용

      아파도 약 안 주는 의사로 유명한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최연호 교수. 그는 크론병 등 소아청소년 소화 영양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꼽힌다. 그런데 『기억 안아주기』, 『통찰 지능』 등 소아정신과 교수가 썼을 법한 책을 썼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뜻밖의 카드 한장을 내밀었다. 아마존 원주민의 상형문자로 만들어진 카드였다. 그는 “세모는 분노, 동그라미는 평화, 다각형은 변화를 뜻한다. 그렇다면, 아래 이미지는 무슨 뜻인 것 같냐?”고 물었다. 아무리 봐도 뾰쪽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최연호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환자의 증상과 주변 환경을 두루 고려해 진단하는 '휴머니즘 진료'를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검은색 말고, 빈 곳을 보세요. 이제 ABBA가 보이죠?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부분의 합을 통해 더 큰 전체를 볼 줄 아는 것, 그게 통찰 지능입니다. 제가 약 없이 치료하는 비결이기도 해요.   증상에 집착하지 않고, 아이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살핀다는 것이다. 그러면 전엔 보이지 않던 진짜 원인이 보인다. 그걸 해결해주면 증상을 완화하는 약을 쓰지 않아도 병이 낫는다. 최 교수는 “의사건 양육자건 눈에 보이는 증상에만 집착하고, 빨리 그것부터 없애려고 한다”면서 “그래선 아이를 제대로 치료할 수도, 키울 수도 없다”고 말했다.   통찰 지능이 뭔가요? 보이는 것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해 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통찰의 사전적 의미는 ‘예리하게 관찰해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리한 관찰력’은 지능(IQ)을,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은 공감 능력(EQ)을 의미해요. 이 두 가지를 합친 것, 아니 그 이상이 바로 통찰 지능(InQ)이죠. ‘1+1=2’가 아니라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걸 아는 겁니다. 암기를 통한 지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잊히지만, 통찰을 통해 깨우친 건 내 지혜로 영원히 남아요.     왜 통찰 지능을 강조하시는 건가요?   증상만 보고 진단하고 치료하는 관행을 깨고 싶었어요. 소아청소년과를 찾는 아이 대부분은 복통, 구토, 설사, 변비 등 기능성 장 질환 증상 때문에 옵니다. 그런데 검사를 해보면 특별히 문제가 없습니다. 의학 지식만 가지고는 진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죠. 문제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좋을 텐데, 보호자와 의사는 아이가 빨리 낫길 바랍니다. 그래서 항생제, 스테로이드 등 일단 증상을 가라앉히는 약을 씁니다. 당장은 낫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인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는 또 아파요. 항생제 내성만 생기고, 병은 낫지 않은 거죠. 이 과정을 반복하다 지친 아이들이 저를 찾아옵니다. 아이들과 몇 마디 나눠보면 처음 받은 진단명이 제가 보는 것과 달라요. 처음 아이를 진찰할 때 의사와 양육자가 놓친 게 있는 거예요.   무엇을 놓쳤던 건가요?   아이의 생각이요. 아이와 대화를 나눠보면 병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된 게 많았어요. ‘왜 아픈 걸까?’ 하고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데, 모두 증상만 본 겁니다. 아이의 기질, 일상생활 같은 환경적 요인도 놓쳤고요. 진료를 해보면 기능성 장 질환인 아이 상당수가 예민합니다. 그래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 말초 신경에 민감하게 반응해요. 먹고, 자고, 싸는 게 까다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는 이미 괴롭다고 말을 했을 겁니다. “먹기 싫다” “대변 보는 게 힘들다”고요. 하지만 의사도, 양육자도 증상만 보느라 그걸 놓친 거예요. 그리고는 어떻게든 먹게 하고, 자게 하고, 싸게 만든 거예요. 아이는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 상황을 피하려고 구토와 복통을 일으킨 겁니다.   그럼, 이 아이들은 어떻게 치료하나요?   약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우선 아이 스스로 자신을 이해해야 해요. 아이에게도 통찰이 필요한 건데요, 자기 성찰이 시작입니다. 아픈 이유를 내 마음에서 찾는 거예요. 이게 아이들에게는 썩 유쾌하지 않은 일입니다.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어야 했던 순간을 떠올려야 하거든요. 하지만 통찰하려면 두려움과도 맞서야 합니다. 회피하면 안 돼요. 이때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위안과 인정입니다. “배 아파도 괜찮아. 별일 아니야.” 이 한마디면 돼요. 구토와 복통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이해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가 “안 먹어도 괜찮아.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돼”라고 아이의 입장을 인정해 줍니다. 이렇게 위안과 인정을 받으면 증상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이게 통찰의 과정이에요. 보이는 증상과 보이지 않았던 마음을 이해해서 내 몸의 메커니즘, ‘전체’를 보는 눈이 생기는 거죠.     ━  📢 “경험과 상상, 통찰 지능의 핵심”   통찰의 핵심은 ‘상상’이다. 보이지 않는 걸 읽으려면 우선 상상해 봐야 한다. 이때 배경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상상 이전에 경험해야 하는 이유다. 최 교수는 “통찰은 경험과 상상으로 이뤄진다”고 말한다. 경험은 hello!Parents가 만났던 수많은 전문가가 공통으로 꼽은 성장 조건이기도 하다. 다만 최 교수는 경험에 조건을 달았다.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쌓여야 한다는 거다. 최연호 교수는 “통찰은 ‘경험과 상상’을 통해 전체를 보는 힘”이라며 “좋은 경험을 쌓고, 타인의 입장에서 마음을 상상하는 훈련을 하라”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왜 좋은 기억이 중요한가요? 그래야 경험을 반복하니까요. 사람은 나쁜 기억은 회피하려 하고, 좋은 기억은 반복하려고 해요. 이렇게 좋은 기억을 통해 경험이 쌓이면 직관이 됩니다. 흔히 촉 좋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건 임기응변이 아니에요. 경험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를 가지고 패턴을 만들고, 그 패턴이 쌓여 직관적인 행동으로 나오는 거죠. 이렇게 직관이 생기면 더 쉽게 큰 그림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어요. 실제 뇌 연구 결과를 보면 미래를 떠올릴 때 세 군데가 활성화됐어요. 판단을 담당하는 전전두엽,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두려움을 담당하는 편도체요. 우리 뇌가 미래를 생각할 때 과거의 경험을 이용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좋은 미래를 상상하려면 좋은 경험이 필요한 겁니다.   경험, 어떻게 쌓아야 하나요? 무엇이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자기 결정권이 있어야 하는 거죠. 통찰은 스스로 깨우치는 과정이기 때문이에요. 경험은 어릴 적부터 쌓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양육자는 아이의 자기 결정권을 뺏으면 안 됩니다. 특히 유아동기에는 먹고, 자고, 싸는 생리 현상에는 개입하면 안 돼요. 기저귀 떼는 시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시기는 변기가 익숙하지 않아 변비가 잘 걸리는 때예요. 배변이 불편하니 참게 되고, 변이 딱딱해져 배변 활동이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이건 질병이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고, 아이가 경험해 가며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양육자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관장 등을 통해 억지로 변을 빼내요. 아이 입장에서는 배변 활동을 강요당한 거예요. 이러면 아이에게 배변 활동은 나쁜 경험이 되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됩니다.   그러다 크게 아프면 어쩌나요? 잘 모르기 때문에 걱정하는 겁니다. 아이를 모르니까 자꾸만 내 의지대로 내 뜻대로 아이를 끌고 가려는 해요. 양육자도 경험이 필요합니다. 양육자도 공부하고, 육아 경험을 쌓아야 해요. 육아 선배에게 들어보고, 사례를 찾아봐야죠. 위인전도 아이보다 양육자가 먼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아이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면 아이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죠. 그렇게 아이를 알아가면 아이의 행동도 이해될 거예요. 또 하나, 아이의 입장에서 상황을 봐야 해요. 아이의 마음을 상상해 보는 거예요.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나요? 아이 입장에 서서 상황을 보는 겁니다.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상대의 뇌를 모방하는 거울 뉴런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상대가 말하고 행동하는 걸 관찰하고 상상하며 상대를 이해합니다. 양육자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안 먹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맛있는데, 왜 안 먹는지 모르겠네’라는 말이 나와요. 그런데 아이의 입장에 서 보면 음식 냄새를 역겨워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럼 그제야 ‘아이가 후각이 예민하구나’ 하고 깨닫죠. 깨닫고 나면 아이에게 먹으라고, 자라고, 싸라고 강요하지 못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아이를 인정하게 돼요. 양육자에게 이해 받았던 아이는 타인에게도 똑같이 합니다. 통찰 지능은 그렇게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통찰 지능을 키우려면 양육자와 아이가 함께 타인의 마음을 상상하는 연습을 해보라고 합니다.   타인의 마음을 상상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요약하는 능력을 키워보세요. 요약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요약은 듣는 사람을 위한 거잖아요. 듣는 사람이 원하는 게 뭔지, 기뻐할 게 뭔지, 무엇을 궁금해할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죠. 그리고 짧고 간결하게 핵심 포인트만 뽑아야 합니다. 스티브 잡스를 보세요. 그림 한 장, 문장 한 줄로 깨달음을 주고, 감동을 주죠. 부분을 모아서 하나로 보는 능력을 갖춘 사람인 거예요. 또 다른 방법은 가족을 웃게 만드는 시간을 가지는 겁니다. 아이는 양육자를, 양육자는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보세요. 상대를 만족하게 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그 사람을 인정해야 하거든요. 누군가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진심이 담기면 서로를 이해하기 더 쉬워지기도 하고요.    ━  📢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통찰 지능 큰다”   통찰은 나이가 들면 저절로 생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통찰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잘 헤쳐 나가야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는 경지에 오른다. 그러려면 “본능이 만든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무엇이 우리를 작은 데 집착하게 할까? 최 교수는 “손실 회피 편향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최연호 교수에 따르면 인간은 손해를 피하려는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이 본능을 자각할 때 통찰할 수 있다.김종호 기자   손실 회피 편향이 무엇인가요? 손해 보지 않으려는 본능이에요. 누구나 얻은 것의 가치보다 잃는 것의 가치를 더 크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질문을 하나 해볼게요. 회사에서 보너스를 주는데,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하나는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100만원, 뒷면이 나오면 안 줍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냥 70만원을 주고요. 어느 것을 택하실래요?   70만원이요. 대개 이득을 볼 때는 이렇게 안정성을 택합니다. 반대로 월급을 잃는 상황이면 어떨까요? 동전 앞면이 나오면 100만원을 깎고, 뒷면이 나오면 안 깎는 선택지와 무조건 70만원을 깎는 선택지라면? 이 상황에서는 대개 동전 던지기를 선택합니다.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박을 택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손실 회피 편향이 부른 함정이에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건 본능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차단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내가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생각하면 통찰 지능을 키울 수 있어요.   손실 회피 편향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걸 조심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가용성 휴리스틱이에요. 최근에 많이 접했거나 가장 먼저 떠오른 사건이나 정보에 근거해 판단하고 선택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제주도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비행기 사고 뉴스를 봤어요. 그럼 많은 사람이 제주도 여행을 취소하고 자동차로 부산 여행을 갑니다. 그런데 사실 사고 확률은 자동차가 더 높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자동차 여행을 택합니다. 놀랐거나 무서웠던 기억이 뇌를 지배해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그 기억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에요. 강력한 경험 하나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는 거죠.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사건에 속지 말아야 해요. 내가 최근에 관련 정보를 많이 접했던 건 아닌지, 이 정보가 사실이긴 한 건지, 특수한 사례는 아닌지, 다른 변수는 없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또 조심해야 하는 게 있을까요?? 행동 편향이요.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뭐라도 하려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으면 약을 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의사는 또다시 검사하게 하고, 안 먹어도 될 약을 줍니다.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으면 비난받을 확률이 커지거든요. 양육자도 마찬가지예요. 아이가 제대로 먹고, 자고, 싸지 않으면 역할을 다 못했다는 죄책감에 휘말려요. 그래서 먹고, 자고, 싸라고 강요합니다. 내 마음 편하자고요.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아이가 고스란히 입습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두려움의 반대말은 용기가 아니라 확신입니다. 손해를 보는 게 결국엔 이득이라는 걸,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걸 믿어야 합니다. 세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움직여요. 베풀어야 받을 수 있고, 뺏으면 뺏기게 마련이에요. 내가 잘되면 남도 잘되고, 남이 잘돼야 나도 잘되는 거고요. 그래서 손해 봐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상황을 봐야 합니다. 이걸 잘하는 사람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보지 못하는 걸 보는 능력은 인공지능(AI)은 가질 수 없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하는데, 보이지 않는 건 흔적(데이터)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최 교수가 “AI 시대, 통찰 지능이 더 빛날 것”이라고 믿는 이유다.   더 많이 경험하고 상상하십시오. 아이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돕고요. 그럼 AI도 두렵지 않게 될 겁니다. 전 확신합니다.   ■ 통찰 지능 키우는 세 가지 방법 「 ①“통찰 지능은 1+1=2 이상인 걸 깨치는 능력” 보이지 않는 걸 볼 줄 알아야 성공합니다. 아이가 아플 땐 증상과 아이의 마음을 두루 관찰하세요. 아이가 직접 아픈 이유를 찾게 하세요. 자기 몸을 이해해야 치유됩니다. ②“경험과 상상, 통찰 지능의 핵심” 통찰은 경험과 상상으로 깨우쳐야 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결정해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하세요. 양육자도 아이를 알아가기 위해 공부하세요. 양육자가 먼저 아이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세요. 요약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도 좋습니다. ③“손해 볼 줄도 알아야 통찰 지능 큰다” 손해를 피하려는 본능을 이겨내고 시야를 넓히세요.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시야를 흐리니 다시 확인하세요. 손해 보는 게 이득이고, 베푼 만큼 받는다는 걸 믿어야 걱정이 줄고 통찰할 수 있습니다.  」 관련기사 “사촌이 땅 사게 도와줘라” 뇌과학자가 본 ‘미래 리더’ “서울대생은 경주마 같았다” 그 교수가 가천대 간 이유 AI가 만든 ‘연봉 4억’ 직업…질문하는 창의성 시대 왔다

    2023.05.14 16:16

  • “화 치솟아 내 밑바닥 봤다”…정신과 의사의 번아웃 탈출법

    “화 치솟아 내 밑바닥 봤다”…정신과 의사의 번아웃 탈출법 유료 전용

    아이가 세 살쯤 되면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겨요. 부모와 떨어져 스스로 세상을 탐색하려 하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겁니다. 이건 아이만의 과업이 아니에요. 엄마와 아빠도 자녀로부터 분리되고, 개별화돼야 합니다.   부모가 육아 번아웃(burnout·정신적 탈진, 소진)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정신과 의사인 문요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이를 챙기느라 너무 애쓴 나머지 자신은 돌보지 못하는 게 양육자 번아웃의 핵심”이라며 “아이를 안아주지만 말고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신과 의사인 문요한 작가는 “부모가 자녀를 안아주기만 하지 말고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hello!Parents가 그동안 만난 수많은 전문가는 “아이가 행복하길 원하면 양육자부터 행복해지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아이 돌보느라 자신은 뒷전으로 밀리는 게 양육자의 삶이다. 정신적·신체적으로 버거움을 호소하고, 급기야 삶 전체가 무기력해지는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양육자가 적지 않은 이유다.   자기 돌봄을 연구하는 정신과 의사이자 지금은 작가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러운 문요한 작가를 찾아간 건 그래서다. 9년 전 몸과 마음의 이상을 느낀 그는 병원 생활을 정리하고 자기 치유, 돌봄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나는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관계를 읽는 시간』『이제 몸을 챙깁니다』등의 책을 썼다. 양육자는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아야 할까? 아니, 과연 가능하긴 할까? 지난 4일 문 작가를 만나 직접 물었다.     ━  📢번아웃 부르는 애착 신화에서 벗어나라   문 작가는 “양육자 번아웃은 사회문화적인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그 중심에 애착에 관한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애착이란 아이가 양육자 등 특별한 대상과 맺는 친밀한 정서적 유대를 말한다. 안정적 애착이 아이 발달에 중요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문제는 안정 애착에 대한 집착, 즉 애착 신화가 부모를 너무 애쓰게 만든다는 것이다.    애착이 문제라고요? 인생 초기 양육자와 맺은 애착은 타인과 자신을 대하는 관계의 틀을 형성해요. 부모에게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한 아이는 자존감, 나아가 세상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자라납니다. 살아가며 다양한 성취를 이룰 가능성도 크고요. 반면에 어릴 때 양육자로부터 학대나 방임을 당하면 애착이 손상되고 건강하게 자아를 발달시키기 힘들어요. 안정적인 애착이 중요한 건 맞습니다. 문제는 애착이 과도하게 강조된다는 겁니다. 양육자의 불안과 죄책감을 자극할 정도로요. 결과적으로 양육자들이 애착을 오해하고 있어요.   애착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다는 걸까요? 안정적인 애착을 애착에 손상을 주지 않는 걸로 착각하는 겁니다. 살면서 상처를 안 받을 순 없어요. 욕구 역시 모두 만족시킬 순 없습니다. 오히려 적절한 좌절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고 시련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주죠. 그래서 좌절이 필요하기도 해요. 그런데 많은 분이 애초부터 자녀에게 애착 손상을 가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애씁니다. 아이한테 절대 상처주는 말을 안 하려 하고, 소리치고 화내지 않으려고 자신의 감정을 과하게 통제하죠. 그런데 감정이라는 건 관리되지 못하는 순간이 분명 있거든요. 화내면 감정 통제에 실패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비난하고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양육자가 많아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애착에 손상을 주지 않으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상처 난 애착을 회복하는 데 힘쓰는 편이 낫다고요.   상처 난 애착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나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대화가 중요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소리 지르며 화낸 상황을 가정해 볼게요. 많은 부모가 아이에게 사과하거나 양해를 구하죠. “소리 질러서 미안해. 엄마도 피곤해서 어떨 때는 통제가 안 돼”라고요. 이건 회복의 대화가 아니에요. 부모 자기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거죠. 또 자녀가 고통스럽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니 아이 마음을 빨리 바꿔주려는 것이기도 해요. 그래서 “속상했구나” 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문요한 작가는 “아이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하고 물어봐야 한다”며 “상처 난 아이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힘은 그런 대화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아이 마음에 공감해 주는 건 좋지 않나요?  “속상했구나” 하는 건 양육자가 아이 마음을 짐작하고 단정짓는 겁니다. 아이 마음을 헤아리려면 이렇게 말해야 해요. “엄마가 소리를 질렀을 때 네 마음이 어땠어?” 아이가 자기 마음을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물어봐야 한다는 겁니다. 공감이나 사과는 그 이후에 해야 해요. 아이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하고 물어보는 게 상처 난 아이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핵심입니다. 양육자가 먼저 사과하고 위로해 버린 뒤 아이의 마음을 바꾸길 요구하면, 아이가 언젠가 마음의 문을 닫게 돼요.   애착에 관한 또 다른 오해도 있나요? 양육자가 항상 곁에 있어야 안정적인 애착이 형성된다고 믿는 거죠. 애착 형성에 있어 양육자의 접근성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아이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고 그에 맞게 반응하는 행동이 더 중요하죠. 항상 아이 옆에서 붙어 지낸다고 애착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이에겐 의존 욕구도 있지만, 탐색 욕구도 있어요. 생애 초기 부모 껌딱지처럼 붙어 지내다가도 기고 걸으면서 세상을 탐색하려고 하죠. 아이는 양육자가 자기를 안아주길 원하지만 동시에 내려놔 주기도 원해요. 그런 아이의 탐색 욕구와 독립 욕구를 존중해 줘야 합니다. 문제는 양육자예요. 아이는 자기 세계로 나아가려는데, 양육자가 자녀로부터 분화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적지 않거든요. 계속 아이 옆에 머물면서 뭔가 해주려고 애쓰는 겁니다.   양육자 입장에선 세상이 갈수록 복잡하고 불안해지니 곁에서 아이를 챙겨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요. 불안한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혼자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이런저런 관여가 늘어나면 그게 오히려 아이에겐 스트레스가 됩니다. 자립 시도가 좌절되면 자기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느끼죠. 불안정 애착엔 여러 유형이 있는데요, 요즘엔 회피형이 많아요. 상대와 가까워지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거죠. 양육자의 과도한 개입 때문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양육의 목적은 아이가 독립된 인격체로 자립하는 겁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애착도 이걸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양육자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해도 아이가 제대로 독립하지 못하면 그건 잘못된 애착입니다. 분리 개별화는 아이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양육자 스스로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해요.    ━  📢자주 ‘버럭’ 한다면 가슴 토닥여라   문 작가가 정의하는 자기 돌봄은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고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없는 시간과 체력을 쪼개 쓰는 양육자가 자신을 돌보는 건 쉽지 않다. 위기에 처한 양육자에겐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   아이에게 화를 쏟아내고 자신의 밑바닥을 봤다는 양육자가 많습니다. 마음 챙기는 게 쉽지 않아요.  번아웃의 초기 증상 중 하나가 감정 조절의 어려움이에요. 쉽게 짜증나고 감정 조절이 안 돼서 폭발하죠. 이런 상태가 좀 더 심각해지면 삶 전반이 무기력해지고 우울증이 오죠. 마음 챙김의 시작은 마음을 놓치는 걸 허락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집중해야 하는 현재 상황으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화를 냈다고 해도 곧 진정하고 적정한 각성 상태로 돌아오면 됩니다.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힘든 건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지, 이게 가능한 건지 파악할 수 있으면 충분해요.   문요한 작가는 “번아웃의 초기 증상은 감정 조절의 어려움”이라며 “힘든 마음을 진정시키려면 느리게 호흡하고, 가슴을 토닥이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김종호 기자   화가 치솟는 순간에 어떻게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나요? 천천히 호흡해야 해요. 뻔하게 들리겠지만, 이게 가장 효과적이죠. 천천히 호흡하면 스트레스 경감과 관련된 미주신경이 활성화되면서 진정·이완 효과가 생깁니다. 미주 신경이 많이 분포돼 있는 얼굴, 목, 심장 위쪽 신체 부위의 마사지도 추천해요. 세수하듯이 얼굴 부분을 마사지하고 목빗근(목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근육) 부분을 주물러주는 거죠. 또 가슴 부분을 토닥이면서 ‘괜찮아, 괜찮아’ ‘침착해, 침착해’ 라고 자신에게 짧게 말해 주는 겁니다. 힘든 상황에선 긴 말이 안 나오니까요. 부모가 아기가 울고 보채면 가슴 부분을 토닥토닥이는 것처럼요. 이런 마음 챙김은 마음먹는다고 바로 되지 않습니다. 의식적인 훈련이 필요해요.   어떻게 연습하면 되나요? 저녁에 잠자기 전 누워서 자신을 토닥이면서 자기 자신과 대화해 보세요. 감정적으로 너무 소진됐다고 느낀다면 자신에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세요. 30초면 충분합니다. 처음엔 어색하겠죠. 하지만 꾸준히 하면 자기를 돌보는 언어가 내면화됩니다. 어렸을 적 자신의 부모로부터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하는 지지와 사랑의 언어를 받지 못해 상처가 깊은 사람들일수록 추천합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좋은 벗이 돼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따뜻한 말을 해주는 거죠.   그렇다면 몸은 어떻게 챙겨야 할까요? 마음도 힘들지만, 사실 몸도 힘들어요. 몸과 마음은 연결돼 있어요.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신체적 자원이 없으면 정신 에너지도 만들어질 수가 없어요. 몸 챙김의 기본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움직이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 종종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잘 챙길 수 있는 방법을 찾으세요. 배우자, 가족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양육자가 자기를 돌보려면 부부가 원팀이 돼야 하는 거죠.   자녀 양육에서 원팀이 되라는 건가요? 맞아요. 양육이라는 장기전에서 2인3각처럼 서로 호흡을 맞추는 거죠. 예를 들어 아직 밤에 수시로 깨는 신생아를 키운다면 부부가 번갈아가면서 아이와 잘 수 있겠죠. 적어도 한 사람이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도록요. 아이가 좀 크고 나면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요. 하루에 30분이라도 아이에게서 온전히 벗어나 나와 만나는 시간이 필요해요. 규칙적이고 의식적으로 양육자가 나만의 시간을 각자 가지는 게 좋아요.   독박 육아를 하는 경우엔 어떡하죠? 독박 육아는 번아웃의 지름길이에요. 기본적으로 육아의 양도 많지만, 육아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쉽거든요. 아무리 힘들어도 부부가 같이 힘들다는 느낌이 들면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 피폐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억울하고 화가 납니다. 양육자가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려는 욕구가 커져요. 아이에게 헌신하는 엄마의 경우 남편에 대한 기대감이 굉장히 높아지는 게 그래섭니다. 무조건 내편이 돼 주길 바라죠. 내 자녀에게서 보상받고 싶어 하는 마음도 커지고요. 스스로 자기 몸과 마음을 잘 돌볼 수 있어야 나와 연결된 사람들도 잘 돌볼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  📢깊이 있는 취미생활을 하라   문 작가는 “자신을 돌보려면 몸과 마음을 챙기고 나아가 생활을 돌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의 생활을 돌볼 수 있을까? 그는 배움이 있는 취미활동이 그 답이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놀이가 필수적인 것처럼 양육자 역시 고갈된 에너지를 채우고 삶의 기쁨을 주는 어른의 놀이가 필요하단 얘기다.   부모에게 놀이는 왜 필요한가요? 아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면 양육자도 자기만의 시간이 늘어납니다. 관건은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만으로는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거든요. 순수하게 어떤 활동이 좋아서 몰입하고 성장을 맛보면 일상의 생기가 돌고 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오티움’입니다.    문요한 작가는 “부모가 자기만의 시간을 깊이 있는 능동적 여가 활동으로 채우면 일상의 기쁨과 활력이 살아난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오티움이 뭔가요? 라틴어로 여가, 은퇴 후 시간, 학예 활동을 뜻합니다. 저는 ‘내적 기쁨을 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으로 정의해요. 어떤 책임, 보상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좋아서 하는 깊이 있는 여가 활동이죠. 슬렁슬렁하는 취미활동이나 어쩌다 한 번 즐기는 특별활동이 아니에요. 배움과 난이도가 있는 운동, 공부, 창작, 봉사, 신앙 활동 등을 말합니다. 마흔이 넘었지만 발레에 빠지고, 퇴근 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옷이나 목공예 작품을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 같은 거죠.   양육자에게 그런 여가는 사치 같아요. 취미활동을 하겠다고 가족에게 소홀해지면 갈등의 씨앗이 될 것도 같고요. 아이가 아직 어리면 어려울 겁니다. 여가활동에도 조절과 균형이 필요해요. 가족은 돌보지 않고 낚시만 하러 가고, 동호회 활동을 한다고 일하지 않으면 그건 현실 도피고 중독입니다. 제가 만난 한 여성은 달리기에서 기쁨을 찾았어요. 경력 단절 여성이었죠. 그런데 저녁 달리기 모임에 나가다 보니 가족들의 불만이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그분이 새벽 달리기 모임을 나서서 만들었죠. 이후엔 가족들도 달리기를 좋아하게 돼서 가족이 마라톤 대회에 나갔고요. 자기 삶과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연쇄 효과가 있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연쇄 효과요? 오티움이 깊어지면 자신의 삶을 성장시키고 도전하려는 힘이 생깁니다. 활동의 수준이 깊어져 제2의 직업이 되기도 하고요. 아이 아토피를 치료하기 위해 천연비누 공예를 시작했다가 수제비누 사업을 하는 식으로요.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네트워크가 생기고 취향, 학습 공동체도 생겨요. 서로 격려해 주고 함께 성장하는 사람들끼리 교류하는 기쁨도 맛볼 수 있고요. 깊이 있는 여가활동을 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해질 수 있어요. 가족이나 다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하길 기대하지 않고요. 특히 번아웃에 빠진 부모에겐 그런 활동이 치유와 회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죠. 부모 역할에 매진하느라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잖아요. 오티움으로 다시 나를 만들어 갈 수 있어요.   그런 취미활동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떤 활동이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먼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살펴보세요. 자기가 잘할 수 있어야 즐거운 활동이 되거든요. 가족의 여가활동을 참고해 볼 수도 있어요. 어머니가 옷 만드는 걸 잘하셨는데, 딸은 천으로 인형을 만드는 데 재미를 느껴서 오티움이 된 사례도 있어요. 많은 경우 인생의 여가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동네에 새로 생긴 발레학원에 아이를 보내고 엄마도 체험 수업을 들었다가 발레가 인생 취미가 되고, 선배가 권한 찻집에 들렸다가 차의 매력에 빠지는 식으로요. 그러니 강박적으로 오티움을 찾겠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문 작가는 그러면서 “경험에 대해 열려 있는 자세”를 강조했다.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새로운 일을 들여다보고, 나의 관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 육아에만 갇혀 살지 말라는 말이었다.   부모도 자기 삶을 살아야 해요. 그래야 아이도 자기 삶을 만들어 갑니다. 자신을 돌보고 스스로 행복한 부모가 돼야 할 이유입니다.   관련기사 화 좀 그만 내고 싶다고요? 이 말 한마디면 됩니다 “60대에 진짜 혁명 일어난다” 김미경이 말하는 마흔의 희망 “서울대생은 경주마 같았다” 그 교수가 가천대 간 이유  ■ 부모가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세가지 방법 「 ·애착 신화에서 벗어나라: 아이에게 상처주지 않으려 너무 애쓰지 마세요. 마음을 헤아리는 대화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어요. 아이가 세상을 탐색하려 할 땐 내려놓아 주세요. 부모도 자녀에게 분리돼야 아이의 자립이 가능해요.   ·자주 버럭한다면 가슴을 토닥여라: 화가 나면 느리게 호흡하고, 가슴을 토닥이며 마음을 챙기세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움직이는지 몸을 돌보는 일도 중요합니다. 부모의 자기 돌봄에는 배우자와 원팀이 되는 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깊이 있는 여가활동을 하라: 삶의 기쁨과 활력이 되는 깊이 있는 여가활동으로 일상생활을 채우세요. 부모 역할에 잃어버린 자신을 만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경험에 열려 있으면 인생 여가를 찾을 수 있어요.     」 

    2023.05.10 16:09

  • 설명 말고 “그냥 해” 하세요…30년 육아고수의 반전 훈육

    설명 말고 “그냥 해” 하세요…30년 육아고수의 반전 훈육 유료 전용

    제가 일을 시작하던 1997년만 해도 체벌이 문제였어요. ‘제발 아이 좀 때리지 말라’고 하소연할 정도였죠. 30년 만에 상황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양육자의 과도한 ‘마음읽기’가 떼쓰고 말 안 듣는 아이를 만들고 있어요.   “병원을 찾는 양육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 뭐냐”는 질문에 조선미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조 교수는 30년 가까이 아이와 양육자를 직접 만나 상담해 온 현장 전문가다. ‘60분 부모’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와 같은 방송에도 참여했고,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나는 오늘도 아이를 혼냈다』『현실 육아상담소』등 책도 여러 권 출간했다.   그는 “감정코칭이란 개념이 알려지면서 양육자가 아이에게 과하게 공감하고 위로하는 흐름이 생겼다”면서 “결국 양육자가 말 안 듣고 떼쓰는 아이로 키운 셈”이라고 지적했다. 아이의 상황과 마음에 공감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공감은 하되 행동은 통제해야 하는데, 마음읽기만 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떼쓰고 말 안 듣는 아이, 어떻게 훈육하면 좋을까? 지난달 28일 조 교수를 직접 만나 물었다. 조선미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는 “양육자의 과도한 ‘마음 읽기’가 떼쓰고 말 안 듣는 아이들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김종호 기자  ━  📢과도한 마음읽기, 약이 아니라 독   존 가트먼 워싱턴대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체계화한 감정코칭 이론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건 2005년이다. 자신의 감정을 존중받으며 자란 아이가 자존감과 회복탄력성(고난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이 높다고 알려지면서 양육자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조 교수는 “감정코칭이 국내에 오면서 반쪽짜리가 돼버렸다”며 “공감과 위로만큼 중요한 게 통제”라고 강조했다.   아이 마음을 알아주고 공감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마음읽기 자체는 문제가 없어요. 공감‧위로를 넘어 아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게 문제죠. 특히 훈육할 때는 감정을 읽어주되 행동은 철저히 통제해야 합니다. 요즘 ‘친구 같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양육자가 많습니다. 마음읽기를 잘못하면 ‘친구 같은 부모’가 아니라 친구 취급을 당하게 돼요. 아이의 문제행동을 바로잡으려고 해도 “엄마가 뭔데 그러냐”는 얘기를 듣는 거죠.   마음읽기와 행동통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 상황을 가정해 볼게요. 양육자가 “그만 놀고 집에 가서 밥 먹자”고 할 때 아이는 “더 놀겠다”고 할 겁니다. 양육자가 아이를 억지로 집에 데리고 간다면 “가기 싫다”고 하겠죠. 이때 제대로 된 마음읽기는 아이를 데리고 가면서 “더 놀고 싶구나. 속상하겠네”라고 하는 거예요. ‘아이를 집에 데려가는’ 행동 통제를 하면서 ‘속상한’ 아이 마음에 공감해 주는 거죠. 딱 이 정도에서 끝내야 합니다. 이런 일도 하루에 두 번, 3분씩이면 됩니다.   거기서 더 하면 과도한 마음읽기가 되나요? 아이의 마음에 공감하는 걸 넘어 아이에게 자율권을 주는 건 위험해요. 한두 번은 아이 스스로 집에 갈 마음이 들 때까지 놀이터에서 놀게 내버려 둘 수 있겠죠. 하지만 아무리 좋은 양육자라도 아이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원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야 해요. 3~4살까지 아이 요구를 무조건 허용하다 5~6살 때 아이 행동을 통제하려고 하면 그게 될까요? 일찍부터 좌절내구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죠.   좌절내구력요? 훈육의 본질이 좌절내구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작은 좌절을 겪고 이를 견디면서 자아의 힘을 키우는 과정이죠. 과자 4개를 먹고 더 먹고 싶다고 조르는 아이에게 양육자가 ‘내일 먹자’고 하는 겁니다. 당장 과자가 먹고 싶은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거절당했을 때 기분이 나빠져 떼를 쓰겠죠. 이때 양육자가 아이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버티면 이 과정에서 아이는 인내심을 배우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 게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 봐 걱정하는 양육자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놀이터에서 놀고 싶지만 놀지 못하고, 과자를 먹고 싶지만 먹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사소한 좌절을 겪으면서 키운 감정의 맷집이 더 큰 좌절을 견디는 힘이 되거든요. 쉽게 말해 회복탄력성의 기초가 되는 힘이 좌절내구력인 셈이죠.   몇 살부터 좌절을 경험하게 해야 할까요? 18개월부터 훈육을 시작해야 해요. 양육자 사이에 ‘마(魔)의 18개월’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힘든 시기죠. 이때부터 행동의 경계를 정하고, 좋은 습관을 기를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식사 후에 양치하기’ ‘과자는 하루에 4개만 먹기’ ‘친구 때리지 않기’처럼 아이가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드는 거죠. 아이와 갈등이 불거질 수 있는 영역에서 기준과 원칙을 정해놓으면 훈육하기 수월합니다. 이때 규칙은 최대한 구체적으로 자세히 정하는 게 좋아요. 조선미 교수는 “‘양치하기’처럼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설명이나 설득보다 지시나 명령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종호 기자  ━  📢설명‧설득 말고 지시해야   과도한 감정읽기의 문제는 또 있다. 양육자들이 아이를 훈육할 때 설명‧설득에 집착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지시‧명령보다는 설명‧설득이 아이를 존중하는 행동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쇼핑몰 같은 곳에서 아이를 붙잡고 ‘공공장소에서 왜 뛰면 안 되는지’를 설명하는 양육자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열 살까지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배우고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설명과 설득으로는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설명하면 안 되는 이유는 뭔가요? 양치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 볼게요. 양치하라고 할 때 아이가 “왜 이를 닦아야 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설명하는 방식은 이때 “이를 안 닦으면 충치가 생겨서 치과에 가야 해”라고 말하는 거죠. 하지만 이때 양육자가 원하는 건 아이에게 양치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게 아니에요. 아이가 양치하는 거죠. 이런 질문에 일일이 답해 주다 보면 아이는 매일 ‘왜 이를 닦아야 하는지’ 물어볼 겁니다. 양치하기 싫으니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서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설명하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설득한다는 건 아이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의미예요. 아이 자신이 갑이 됐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양치처럼 꼭 해야 할 일을 가르칠 때는 설명하고 설득해선 안 됩니다. “화장실 가서 이 닦아”라고 지시하세요. 설명은 딱 세 번만 해주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 후에도 또 물어보면 “그냥 해”라고 말하세요. 그래도 안 되면 조금 더 무서운 표정과 말투로 명령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건 아이가 울어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이가 양육자를 무서워하진 않을까요? 기억하세요. 권위적일 필요는 없지만, 권위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양치는 물론,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는 건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죠. 아이에게 양치해야 하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다 보면 유치원에 가는 일, 학교에 가는 일도 계속 설명하고 설득해야 해요. 결국 아이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겠죠.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민주적인 게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선택권을 주는 건 방임이에요.   지시를 잘하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다섯 가지를 지키면 됩니다. 첫 번째는 어떤 지시를 할지 명확히 정하는 겁니다. “숙제 빨리해”라고 했다가 “밥부터 먹어”라는 식으로 지시가 시시때때로 바뀌면 효과가 떨어집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는 지시를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된다고 느끼죠. 또 아이가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양치를 시켰다면 아이가 제대로 마무리까지 하는지 살펴봐야 해요. 한 번에 하나씩 시키고,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지시를 따를 때는 칭찬해야 합니다. 양육자의 지시를 긍정적인 상호작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니까요. 조선미 교수는 “타임아웃과 스티커제도를 활용하면 훈육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  📢타임아웃‧스티커제도 쓰면 훈육 효과 높아진다   아이는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양육자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게 당연하다. 양육자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처음엔 말로 타이르려고 한다. 하지만 양육자도 사람이다. 아이가 계속해 떼를 쓰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도깨비가 잡아간다’는 식으로 겁을 주기도 한다. 조 교수는 “아이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는 건 행동교정에 도움이 안 된다”며 “타임아웃과 스티커제도를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타임아웃이 뭔가요? 아이가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할 때 벌을 주는 겁니다. 운동경기할 때 선수 부상 등의 상황에서 경기를 잠시 중단하는 것처럼 아이의 행동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겁니다. 핵심은 아이에게 불안이나 공포를 주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 일정 시간 못 놀게 된다는 걸 깨닫게 하는 거죠. 그럼 그 행동을 하지 않거든요. 타임아웃을 할 때는 아이를 의자에 앉혀 두거나 장난감이 없는 방에 혼자 두면 됩니다. 초반에는 아이가 심하게 울면서 거부할 수 있으니 상태를 잘 살펴야 하고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다섯 살짜리 아이가 물건을 집어던지는 상황을 예로 들어 볼게요. 처음 이런 행동을 할 때는 우선 아이와 눈을 맞추고 단호하게 “안 돼”라고 얘기합니다. 손으로 ‘엑스(X)’자를 그리면서 말하는 것도 좋습니다. 행동이 두세 번 반복될 때까지는 말로 경고하고, 세 번 이상부터는 행동에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말을 안 들으니 여기 앉아야겠다”고 한 뒤 의자에 앉힙니다. 보통 아이 나이만큼 의자에 앉혀 놓으면 됩니다. 5세는 5분 정도요.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타임아웃을 끝내세요. 만약 반항하거나 제대로 앉아 있지 않으면 시간을 늘리고요. 아이가 걷기 전의 영아라면 안아서 1분 정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효과가 있습니다.   아이가 심하게 반항하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당연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겁니다. 실제로 상담했던 아이 중에는 제대로 앉아 있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린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가 변명하거나 불만을 표할 때 대꾸해선 안 됩니다. 그럼 행동을 제약한다는 본질이 흐려지고 실랑이를 하게 되거든요. 그때는 “지금부터 말하면 5분 늘어난다”는 식으로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이 방법에 익숙해지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훈육할 수 있어요. 공공장소라면 화장실 앞이나 계단처럼 사람들이 없는 장소를 선택하면 됩니다.   타임아웃이 벌을 주는 제도라면, 스티커제도는 상을 주는 제도군요. 스티커제도는 ‘해야 하지만 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4단계로 해볼 수 있습니다. 1단계는 스티커와 달력을 준비하는 겁니다. 스티커는 동그라미나 네모 같은 심플한 모양을 선택해야 숫자를 세기가 수월합니다. 노란색 10점, 주황색 20점, 빨간색 30점처럼 색깔에 따라 점수를 다르게 하는 것도 좋죠. 2단계는 상의 목록을 정하는 겁니다. 장난감‧간식 같은 물질적 보상, 축구‧게임 같은 활동 보상, 상장받기 같은 사회적 보상이죠. 스티커를 10개 모으면 간식을 주거나 게임을 할 수 있게 하는 거죠. 3단계는 고치고 싶은 행동이나 할 일의 목록을 정하는 겁니다. 초반에는 ‘벗은 옷 빨래 바구니에 넣기’ ‘쓰레기 버리기’ ‘양치질할 때 바로 화장실 가기’처럼 쉬운 일로 시작해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아이가 하루에 몇 점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겁니다. 3~4세 때는 이틀에 한 번,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3~4일에 한 번 상을 주는 게 좋습니다.   스티커제도를 할 때 주의할 점은 없나요? 반드시 지시한 행동이 끝난 후에 스티커를 줘야 합니다. 양육자의 판단에 따라 목록에 없는 행동에 대해 보상해 줄 수는 있지만, 아이의 요구로 스티커를 주는 건 금물입니다. ‘나 이거 했으니 스티커 줘’라고 했을 때 이를 수용하면 스티커제도의 주도권이 아이한테로 넘어가거든요.   보상하는 건 우려스러운 점도 있어요. 보상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이가 될 수도 있잖아요. 맞는 말입니다. 외부에서 주는 상이나 칭찬 같은 외적 동기가 아니라 자율성이나 자신감 같은 내적 동기가 더 중요하죠. 하지만 어떤 행동이 습관이 될 때까지는 외적 보상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미성숙해서 어떤 행동이 좋고 옳은지 모릅니다. 이때 보상을 통해 좋은 행동이 뭔지 알려주는 거죠. 또 칭찬 같은 외적 보상을 계속해 주면 내적 동기로 전환됩니다. 간식을 먹기 위해 책가방을 혼자 싸다 보면 어느 순간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느끼게 되거든요. 이렇게 특정한 행동을 시키지 않아도 잘하게 되면, 더는 보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 교수는 인터뷰 내내 “훈육은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기술을 알려주는 도구”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내 아이를 이렇게 키우고 싶다’는 감정을 넘어 아이가 사회로 나가 평생 살아가는 기술의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라는 의미다.   훈육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하루하루가 쌓여 아이가 좋은 습관을 갖게 된다는 것 잊지 마세요. 조선미 교수는 “훈육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게 아니다”며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하다 보면 아이가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① 과도한 마음읽기, 오히려 독입니다. 떼쓰고 말 안 듣는 아이 때문에 상담받는 양육자가 많습니다. 원인은 과도한 마음읽기입니다. 공감과 위로는 하루 두 번이면 충분합니다. 아이가 좌절을 경험하고 이를 견디면서 성장할 수 있게 해 주세요. ② 설명‧설득 말고 지시하세요. 열 살까지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배우고 습관으로 만드는 시기입니다. “양치를 왜 해야 해?” 하고 물으면, 세 번만 설명하고 이후엔 그냥 하라고 하세요. 과도하게 설명하다 보면 부모로서 권위를 잃고, 아이 행동을 통제하는 게 어려워집니다. ③ 타임아웃‧스티커제도 활용하세요. 양육자가 소리 지르거나 불안‧공포를 자극하는 건 행동 교정에 도움이 안 됩니다. 상벌을 활용하는 게 필요합니다. 아이가 떼쓸 때 방에 혼자 두거나 의자에 앉혀서 행동을 제재하고, 좋은 행동을 하면 스티커로 보상하는 걸 추천합니다. 」 관련기사 집안일 안 해도 이건 꼭 했다, 세 딸 하버드 보낸 ‘母의 비밀’ 화 좀 그만 내고 싶다고요? 이 말 한마디면 됩니다 “화났구나 그랬구나” 이 말만 하면, 떼쓰는 아이에겐 '독'

    2023.05.07 16:23

  • 집안일 안 해도 이건 꼭 했다, 세 딸 하버드 보낸 ‘母의 비밀’

    집안일 안 해도 이건 꼭 했다, 세 딸 하버드 보낸 ‘母의 비밀’ 유료 전용

    잘하려면 오래 해야 합니다. 오래 하려면 재미있어야 하고요. 공부도, 일도 마찬가지예요.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푹 빠져야 해요.     미국에서 세 딸을 모두 하버드에 보낸 엄마로 이름을 알린 심활경(56) 작가. 아이들을 잘 키운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런 답을 내놨다. 무엇을 하든 즐겁게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얘기다. 똘똘하게 타고 난 아이 엄마의 한가한 조언으로 들린다고 반박하자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즐겁게 하는 게 쉬울 것 같죠? 아이한테 즐겁게 하는 법을 알려주려면 양육자부터 즐겁게 해야 해요. 지금 하는 일을 즐겁게 하고 있나요?”    『나는 이렇게 세 딸을 하버드에 보냈다』 심활경 작가의 세 딸. 심 작가는 세 아이를 모두 하버드에 보내 미국 내에서 화제가 됐다. 사진은 둘째 지혜은씨(가운데)의 하버드대 사회학과 졸업식 날. 첫째 지혜민씨(왼쪽)는 국제 정치학을, 셋째 지혜성씨(왼쪽)는 생물학을 전공했다. 사진 본인   심활경 작가는 자신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전업주부였던 그는 남편이 신학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한국을 떠났다. 말도 잘 안 통하는 낯선 나라에서, 넉넉지 않은 형편에 아이 셋을 키우는 건 녹록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 셋이 나란히 하버드대에 들어갔다. 그것도 변변한 사교육 한 번 없이 말이다. 첫째는 국제정치학, 둘째는 사회학, 셋째는 생물학으로 전공도 제각각이다. 주변 사람들이 비결이 뭐냐며 수없이 물었다. 그에 대한 답을 정리해 펴낸 책이『나는 이렇게 세 딸을 하버드에 보냈다』다.    심 작가의 비결은 세 개의 원칙이었다. 그 원칙이 “아이에겐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힘이 있다”는 그의 믿음을 현실로 만들었다. 세 딸을 하버드대에 보낸 세 가지 원칙은 뭘까? 미국에서 통한 그 원칙이 한국에서도 통할까? 지난달 21일, 미국에 있는 그를 화상으로 만났다.    ━  🎓 원칙① 좋아하는 일이 재능이다.   심활경 작가는 “아이는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고유한 그 특성이 재능이다. 재능을 발견하는 것에서 아이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려면 양육자의 관찰력이 필요하다. 그는 “재능 없는 사람은 없다”며 “그걸 발견하고 인정해 주는 게 양육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잘 관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재능은 잘하는 것과 관련 있지 않나요? 처음부터 잘하는 게 어디 있나요? 꾸준히 하다 보면 잘하게 되죠. 그런데 꾸준히 하려면 원동력이 필요해요. 재미·흥미·호기심만큼 강렬한 건 없습니다. 이걸 다 갖춘 게 좋아하는 일이에요. 좋아하는 일을 할 땐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몰입하고, 아무리 뜯어말려도 합니다. 그렇게 파는데 성과가 나지 않을 리가 있나요. 좋아하는 게 곧 재능이라고 하는 건 그래서예요. 잘하게 만들 힘이 있다는 얘기죠.     딱히 좋아하는 게 없고, 뭘 하든 시큰둥한 아이도 있어요. 좋아하는 게 없는 아이는 없습니다. 단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죠.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도, 아이가 관심을 보이면 기회를 주세요. 예를 들어 아이가 심부름할 때 유독 표정이 밝다면, 책임감이 남다른 겁니다. 이럴 땐 아이에게 집안일을 맡겨보세요. 성공 경험이 쌓이면, 자신감이 생기고, 스스로 역할을 찾아 도전합니다. 무엇보다 아이의 재능을 미리 단정 짓지 마세요. 재능이 발견되는 때는 아이마다 다르거든요. 그러니 여러 경험을 해보고, 그 경험을 통해 뭘 느끼고, 배웠는지부터 깨닫게 해주세요. 그러려면 양육자가 먼저 물어봐야 합니다. “오늘 뭐가 가장 재밌었니?”, “해보니 어땠어?”라고요. 이런 질문은 아이 스스로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너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라는 질문에도 답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게 바로 자기 확신입니다. 심활경 작가는 미국에서 세 아이를 모두 하버드에 보낸 엄마로 유명세를 치렀다. “하버드를 보낸 비결이 무엇이냐”는 수많은 질문 요청에 그는 『나는 이렇게 세 딸을 하버드에 보냈다』를 통해 답했다. 사진 본인   자기 확신요?  내가 누군지 아는 겁니다. 내 개성과 성향을 알고 나면 사는 게 명쾌합니다. 중심이 잡히니 안정감이 생기죠. 그러면 좋아하는 일에도 자신감이 생기며 더 잘하고 싶어집니다. 시키지 않아도 공부합니다. 이때 양육자는 공부의 틀만 잡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공부의 틀,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요? 책 읽기를 좋아하게 만들어 주면 됩니다. 독서가 곧 공부이거든요. 읽고 싶은 책을 고르고, 내용을 이해하고, 여러 분야의 학문을 통합하는 전 과정이 결국 학문을 탐구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책 읽기가 공부의 틀이 되려면 웬만큼 읽어선 안 됩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읽어야 해요. 우리 집 아이들은 지역 도서관에 있는 아동·청소년 부문 책은 모조리 다 읽었어요. 걸어가면서도 읽고, 밤에 몰래 불 켜고 읽을 정도였죠. 그만큼 책을 좋아했다는 얘기인데요, 책 좋아하게 하려면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게 뭔가요?  무엇보다 책 읽는 게 재밌어야 해요. 그러려면 친숙해야 합니다. 저는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소리 내어 책을 읽어줬어요. 한글 익힐 때까진 집안일은 안 해도 하루 두 시간씩 책 읽어주는 건 반드시 했어요. 집 안 곳곳에 책을 펼쳐놨고요. 손만 뻗으면 잡히게 말이죠. 그런데 책이 있다고 다 보지 않습니다. 심심해야 찾습니다. 이게 두 번째 조건인데, 세 가지가 없어야 하죠. TV, 스마트폰, 게임요. 우리 집엔 이 세 가지가 전혀 없었어요. 세 아이 모두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스마트폰도 없었을 정도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뒤처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있었지만, 기술은 언제라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TV, 스마트폰, 게임 이기는 아이 없습니다. 이건 양육자가 결단할 문제지 아이가 결정할 게 아니에요. 이 세 가지가 없어야 책이 장난감이 됩니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면 궁금한 게 생기고, 그럼 찾아보죠. 그리고 더 깊이 읽습니다.    ━  🎓 원칙② 아이마다 다르게 대하라   ‘100명의 아이가 있으면 100가지 교육법이 있다’는 유대인 속담이 있다. 심활경 작가도 똑같은 얘길 한다. 교육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아이의 기질과 특성에 따라 쏟는 관심과 애정의 크기도 달랐다고 한다.   아이들을 똑같이 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차별하라는 게 아니에요. 아이의 입장에 서보라는 거예요. 아이가 둘 이상인 집이라면 유독 손해보는 아이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집은 둘째가 그랬어요. 둘째는 기질적으로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런데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위치예요. 살아남으려면 빼앗기지 않아야 하고,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야 하죠. 그러다 보니 경쟁심, 질투심이 더 자극받을 수밖에 없었고요. 그래서 둘째는 늘 불공평하다고 느껴요. 양육자가 아무리 똑같이 대해도요. 저는 이걸 ‘둘째병’이라고 부르는데, 둘째 입장에선 부족한 게 다 채워지지 않은 겁니다. 이런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아줘야 해요. 첫째, 셋째 한 번 칭찬할 때 두 번 칭찬하고, 한 번 바라볼 거 두 번 봐주는 거죠. 그래야 아이가 불공평하다거나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질투하거나 경쟁하려 들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이는 그저 잘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만 그 방법이 서툰 거죠. 형제·자매 사이에 느끼는 경쟁심, 질투심은 훈육의 대상이 아니에요. 잘 관리해서 성장의 기회로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의 입장을 헤아리고, ‘한 발짝만 앞서 가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심활경 작가의 세 딸도 서로를 견제하며 경쟁하며 성장했다고 했다. 심 작가는 “경쟁심이 나쁜 건 아니다”라며 “서로의 성장을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게 양육자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왼쪽부터) 큰딸 지혜민씨, 막내 혜성씨, 둘째 혜은씨. 사진 본인 한 발짝 앞서 가라니 무슨 얘긴가요? 양육자가 살짝 앞에 서서 큰 그림을 그리라는 겁니다. 제가 사용한 방법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경쟁 요인을 제거하는 겁니다. 우리 집은 첫째와 둘째 간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었어요. 그래서 두 아이에게 서로 다른 과제를 줍니다. 예를 들어 첫째는 피아노, 둘째는 바이올린을 가르쳤어요. 둘이 똑같이 피아노를 가르쳤더니 서로 견제하느라 스트레스만 받고 정작 제대로 못 배우더라고요. 그래서 둘째에게는 바이올린을 권했어요. 누구와 비교할 필요 없이 자기 속도에 따라 배움에 집중할 기회를 만들어준 거죠.   또 한 가지는 뭔가요? 실패했을 때의 계획, 플랜 B를 마련해 두는 겁니다. 그래야 아이가 도움을 청하는 순간 제때 지원할 수 있어요. 둘째가 고3 때였어요. 한국으로 치면 수시 전형으로 하버드에 합격했는데, 저는 일반 전형으로 다른 학교에도 지원해 보라고 했어요. 안 그래도 언니에 대한 묘한 경쟁심이 있는데, 대학에서까지 언니 그늘에 가려졌다고 느낄 수도 있잖아요. 결국 둘째는 예일대에도 지원했고, 합격했죠. 그렇게 자기 실력을 스스로 확인하고 나니 둘째 병도 사라지더군요.    그러다 상대적으로 함께 보낸 시간이 적은 아이가 서운해 하는 거 아닌가요?    양보다 질이에요. 얼마나 오래 함께했느냐보다 얼마나 진심을 다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함께하는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한 아이에게만 집중하세요. 아이가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세요. 직접적이고 과감하게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 “너는 축복받은 아이야” “엄마는 언제나 널 사랑해”라고 말해 주세요.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거라는 착각은 버리시고요. 쑥스러워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심이 정확하게 전달되고 아이의 자존감도 높아집니다.    ━  🎓 원칙③ 주도권은 양육자가 쥔다.   심활경 작가는 인터뷰 내내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외가 하나 있다. 바로 훈육의 순간이다. 그때만큼은 아이가 아니라 양육자가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훈육할 때는 아이 입장에 서면 안 된다는 건가요?  훈육할 땐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아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됩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 같은 건 타협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럴 땐 훈육을 통해 아이가 받아들이게 만들어야죠. 막무가내로 떼를 쓰거나, 남에게 폐를 끼쳤다면 아이에게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훈육하는 거죠. 이때 주도권을 아이에게 넘겨주면 아이는 제멋대로 생각하고 잘못된 행동을 몸에 익힙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죠. 저는 적어도 초등학교 졸업 전까진 양육자가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자신의 가치관이 생기고, 판단할 수 있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그때 서서히 주도권을 나눠주며 타협하면 됩니다.   아이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거 아닐까요?  무작정 아이를 다그치고 억압하라는 게 아닙니다.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해요. 아이의 자유에 경계선을 그어주라는 건데요, 저는 그걸 울타리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큰 딸 지혜민씨(가운데)는 지난해 가정을 꾸렸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혜민씨는 현재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의 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진 본인   울타리 교육요?  행동 규칙과 규범을 만드는 거예요. 연구에 따르면 초원에서 방목한 소보다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키운 소의 우유 생산량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서적 안정감이 있기 때문이에요.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는 것도 없는데 다짜고짜 스스로 기준을 세워 살아가라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건 불안만 자극할 뿐 어떤 교육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규칙이 필요한 거예요.    최소한의 규칙,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요?     양육자가 옳다고 생각하고, 바람직하게 여기는 것이 기준이 돼야 해요. 그래서 규칙을 정하기 전에 양육자가 자기 생각을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봐야 해요. 우리 집은 사람에 대한 예의, 어른에 대한 공경, 신앙심 이렇게 세 가지로 압축됐어요. 이 규칙은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공부, 취미, 친구, 놀이에 대해선 아이의 자율성을 우선했어요. 아이의 영역이니 양육자가 이래라저래라 못합니다. 이렇게 권한을 명확히 하고,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에 선을 그어 주면 아이는 주어진 자유 속에서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규칙에 반항하거나 도전하는 아이도 있잖아요.   당연한 반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 의지가 있으니까요. 아이들이 앞에선 “네”라고 해도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을 막을 순 없습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규칙에 도전하고,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그랬어요. 학교 숙제 때문에 TV를 봐야 한다면서 저와 타협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죠. 이유를 들어가며 자기 논리로 저를 설득합니다. 아이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면, 저도 원칙을 깨지 않는 선에서는 조율합니다. 만약 최소한의 규칙도 없었다면 아이들은 한계에 도전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어요. 이게 규칙의 장점입니다. 주어진 경계에 도전해 보며 기성세대와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자연스레 배우죠. 이 경험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적응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발판이 되고요.    27년 전 엄마·아빠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낯선 땅을 밟은 아이들은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됐다. 첫째는 현재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 정치학 교수가 됐고, 사회학을 전공한 둘째는 로스쿨에 진학해 법학도의 길을 걷고 있다. 탐구력 강한 셋째는 생물학을 공부한다. 큰 아이부터 막내까지, 양육자로 30여 년을 보낸 심활경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런 소회를 남겼다.     애 키우는 것도 즐거워야 시간이 금방 갑니다. 그러다 보면 양육도 졸업하는 날이 오고요. 힘 빼고 즐기세요. 당신,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 세 아이 하버드 보낸 30년 차 엄마의 양육 원칙  「 ·원칙① “좋아하는 게 재능이다.” 재능은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데 있습니다. 아이에게 느낀 점을 자주 물어봐 주세요. 그래야 좋아하는 걸 깨닫고, 그 안에서 재능을 발견합니다. 독서는 곧 공부입니다. 책 읽기가 놀이가 되게 해 주세요. 재밌어야 많이 읽고, 그래야 잘 읽습니다.    ·원칙② “다르다면 다르게 대해야 한다.” 형제·자매 간 경쟁심을 관리해 줘야 합니다. 아이는 기질·환경에 따라 처한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이 더 필요한 아이에겐 더 많은 시간을 쏟으세요. 양육자가 한 발짝 나서서 경쟁 요인을 제거하고, 실패 계획을 세워주는 것도 좋습니다.   ·원칙③ “주도권은 양육자가 쥐세요.” 세상엔 타협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가르쳐야 합니다. 훈육은 규칙에 따라 일관성 있게 해야 합니다. 최소한의 규칙 안에서는 공부·놀이·친구 등 아이 자율권을 인정해 주세요. 정서적 안정감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 관련기사 "일단 해!" 39살에 삼성 최연소 임원, 그녀가 돌연 사표 쓴 이유 아이에게 집안일만 가르쳤다…부족 같은 이 가족이 사는 법 명함에 아이 이름도 적는다, 尹도 반한 ‘100% 재택’ 회사

    2023.04.30 17:16

  • "자녀에게 다 쏟아붓는다? 큰일난다"…김미경이 알려준 '마흔의 희망'

    "자녀에게 다 쏟아붓는다? 큰일난다"…김미경이 알려준 '마흔의 희망'

    저는 집에서 살림했으면 마사 스튜어트(‘살림의 여왕’으로 불리는 미국 여성 기업가)가 됐을 거에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기 계발 강사 중 하나인 김미경 MKYU대표. 그에게 하고 싶은 일에 거침없이 뛰어들 수 있는 비결을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이름 석 자가 브랜드가 된 스타강사가 살림 고수가 되었을 거라니. 웃어 넘기려 하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진심으로 성실하고 싶거든요, 내 인생에.” 그렇다. 그는 삶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결국 인생은 성실하게 몸으로 일구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건, 명령이나 책임감이 아니라 소망이다.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MKYU 사옥에서 만난 김미경 MKYU 대표는 "내 인생에 진심으로 성실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김 대표가 최근 ‘마흔’이라는 키워드를 들고 나온 건 그래서다. 마흔, 인생의 소망이 흐려지는 나이다. 일 하랴, 아이 키우랴, 노쇠해진 부모님 챙기랴, 삶은 바쁘고 힘에 부친다. 꿈보단 현실을 보게 되고, 희망보단 불안과 좌절을 더 자주 마주한다.     10여년 전 김 대표를 ‘독한 언니’로 부르던 이들도 어느덧 마흔이다. 과거 그는 “당당하게 꿈을 꾸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이제 위안부터 건넨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지금 이 모습이 정상이라고. 그리고 인생 후반부, 두 번째 인생을 단단하게 키우라고 조언한다. 위로와 조언을 담아 지난 2월『김미경의 마흔 수업』을 펴냈다. 출간 한달 여, 책은 10만부 넘게 팔렸다.     김 대표는 이 시대 마흔을 만나기 위해 이달 28일 The JoongAng Plus 인사이트 세미나에 연사로 선다. 그가 평소 강조해온 세 가지 키워드, 성장과 도전, 꿈은 마흔에도 여전히 유효한 걸까? 지난 6일 서울 홍대 MKYU사옥에서 김 대표를 만나 직접 물었다.     ━  🎤성장: “아이만 키우지 말고, 엄마·아빠도 키워라”   4년 전 김미경 대표에겐 ‘학장’이란 직함이 생겼다. 3050 대상 온라인 교육 플랫폼 MKYU(MK&You University)를 열면서다. MKYU는 ‘김미경(MK)과 당신이 함께 성장한다’는 뜻의 온라인 대학이다. 재태크, 자격증, 영어, 미래 트렌드에 대한 온라인 강좌를 제공하고, 북클럽 등 커뮤니티 활동도 지원한다. 지금은 폐지된 유료 멤버십 회원이 8만명이 넘었다. 김 대표는 이 시대 마흔이 얼마나 성장에 목말랐는지 확인했다.    40대는 너무 바쁩니다. 없는 시간과 체력을 짜내면서까지 공부해야 하나요?   앞으로는 삶과 공부를 분리할 수 없을 거예요. 사회가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요. 예전엔 변하는 데 20~30년은 걸렸는데, 이제는 5년도 안 돼서 바뀌어요. 지금 40대는 컴퓨터 엑셀 배우고 직장에 들어왔는데 이제 메타버스, 인공지능(AI)이 나오죠. 이게 일터를, 돈 버는 방식을 바꾸고 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전혀 배운 적이 없어요. 어쩔 수 있나요. 시간을 쪼개서 배울 수 밖에요. 이제 공부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요행을 바라면 안 돼요. 그냥 항복하세요. 어떻게 공부할 시간을 만들지 고민하세요.     어떻게 하면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을까요? 40대가 바쁜 건 아이를 키우기 때문입니다. 40대가 풀어야할 가장 큰 숙제가 바로 양육인 겁니다. 아이 키우는 데 드는 시간과 돈을 어떻게 배분할지 완전히 다시 고민해야 해요. 아이나 나나 모두 100살을 살고, 그 중 70년을 같이 살아야 하거든요. 옛날 부모처럼 모든 시간과 돈을 아이에게 다 쏟아붓고, 자녀에게 노후를 책임지라고 할 수 없잖아요.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희생당해요. 큰 일납니다. 영리하게 자산을 배분해야 해요.   김미경 MKYU 대표는 "양육에 드는 시간과 돈을 재분배해야한다"며 "집안 예산의 30%이상을 자녀 교육비에 쓰지 말라"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어떻게 배분하죠? 자녀 교육에 투자하는 돈이 전체 예산의 20~30%를 넘으선 안 돼요. 그럼 빚만 남죠. ‘교육의 혜택은 집안의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처럼 아빠 혼자 벌어서 애들 끝까지 공부시키기도 어렵고,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를 먹여 살리는 것도 불가능하잖아요. 결국 모든 가족이 경제 활동인구가 되어야만 살 수 있어요. 그러려면 지속적으로 엄마 아빠도 공부하고 자기에게 투자해야 해요. 60살부터 100살까지, 40년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도록, 고갈되지 않게 채워야 하는 거죠.     자신을 위한 투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작더라도 내 책상부터 마련하세요. 식탁 말고요. 책상 하나로 ‘공부하는 사람’,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란 정체성이 생겨요. 책상을 두고, 책상 앞에 앉는 시간을 루틴으로 만드세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내 시간, 내 공간을 확보하는 데서부터요.   아이는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요? 무슨 대학에 가고, 뭘 전공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세대도 대학 때 배운 걸로 못 버티는데,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오죽할까요? 경력이나 학습 교체 주기가 얼마나 짧겠어요. 계속 학습하고, 경력을 바꾸면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러려면 자기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지, 또 어떻게 자기를 먹여 살릴지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에 집중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가장 먼저 사회적 알람부터 해제해야 합니다. 저도 아이가 셋인데, 우리 애들한테도 그 알람 끄라고 말했어요.     사회적 알람을 해제한다는 게 뭔가요? 나는 나의 시간대로 산다는 겁니다. 20살에 대학 가고, 25살이면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고, 30살엔 결혼해야 한다는 알람, 싹 무시해야 해요. 저도 그 알람 끄고 살려고 합니다. 나이 60에 외국으로 유학을 가잖아요. 가능성 넘치는 디지털 세상인데, 16살에 사업부터 하면 왜 안 되는 거죠? 가장 체력도 좋고 머리도 팡팡 돌아가는데? 필요한 공부, 24살에 해도 되잖아요. 사실 일흔 넘으면, 대학을 20살에 가건 24살에 가건 표시도 안 나요. 스무살까지 모든 자원을 다 몰빵하는 거, 그만해야 합니다. 한방에 다 끝내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부모가 먼저 틀을 깨서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고, 시간을 넉넉히 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김미경 대표는 이 시대 마흔을 만나기 위해 The Joongang Plus 인사이트 세미나 연사로 나섰다. 이달 28일 열리는 세미나는 The Joongang Plus 회원이라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 김종호 기자 기사 전문은 The Jonngang Plu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사 전문 중 후반부에는 김미경 대표가 말한 나머지 두 개의 키워드, 도전과 꿈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사 후반부의 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Q.낯선 분야에도 거침 없이, 또 끊임없이 도전하시는 것 같아요. 비결이 뭔가요? Q.지난해 미래를 바꾸는 기술에 관한 책(『세븐테크』)도 내셨어요. IT 분야는 왜 파고 드시는 건가요? Q.도전하려면 열정이 있어야 하잖아요. 대표님은 바쁘신 와중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시는 것 같은데, 비결이 있나요? Q.대표님은 어떻게 쉬고, 재충전하시나요? Q.진짜 나, 어떻게 찾을 수 있죠? Q.자기가 뭘 좋아하는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그걸 어떻게 찾을 수 있나요? Q.‘진짜 나’라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 같아요. 대표님은 자기에 대한 확신이 강하신 것 같은데, 어디서 나오는 힘인가요? Q.10년 뒤 삶이 기대돼야 지금을 즐겁게 살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마흔이 되어서 50대, 60대를 떠올리면 불안하고 우울한 생각부터 들어요. Q.60대 김미경은 어떤 꿈을 꾸나요?    ☞ 김미경 대표의 The Joongang Plus 인사이트 세미나 신청하기   관련기사 AI가 만든 ‘연봉 4억’ 직업…질문하는 창의성 시대 왔다 “서울대생은 경주마 같았다” 그 교수가 가천대 간 이유 "일단 해!" 39살에 삼성 최연소 임원, 그녀가 돌연 사표 쓴 이유

    2023.04.17 06:00

  • “60대에 진짜 혁명 일어난다” 김미경이 말하는 마흔의 희망

    “60대에 진짜 혁명 일어난다” 김미경이 말하는 마흔의 희망 유료 전용

    저는 집에서 살림했으면 마사 스튜어트(‘살림의 여왕’으로 불리는 미국 여성 기업가)가 됐을 거예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기 계발 강사 중 하나인 김미경 MKYU 대표. 그에게 하고 싶은 일에 거침없이 뛰어들 수 있는 비결을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이름 석 자가 브랜드가 된 스타강사가 살림 고수가 됐을 거라니. 웃어 넘기려 하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진심으로 성실하고 싶거든요, 내 인생에.” 그렇다. 그는 삶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결국 인생은 성실하게 몸으로 일구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건 명령이나 책임감이 아니라 소망이다.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MKYU 사옥에서 만난 김미경 MKYU 대표는 “내 인생에 진심으로 성실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김 대표가 최근 ‘마흔’이라는 키워드를 들고 나온 건 그래서다. 마흔, 인생의 소망이 흐려지는 나이다. 일하랴, 아이 키우랴, 노쇠해진 부모님 챙기랴, 삶은 바쁘고 힘에 부친다. 꿈보단 현실을 보게 되고, 희망보단 불안과 좌절을 더 자주 마주한다.   10여 년 전 김 대표를 ‘독한 언니’로 부르던 이들도 어느덧 마흔이다. 과거 그는 “당당하게 꿈을 꾸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이제 위안부터 건넨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지금 이 모습이 정상이라고. 그리고 인생 후반부, 두 번째 인생을 단단하게 키우라고 조언한다. 위로와 조언을 담아 지난 2월 『김미경의 마흔 수업』을 펴냈다. 출간 한 달여, 책은 10만 부 넘게 팔렸다.   김 대표는 이 시대의 마흔을 만나기 위해 이달 말 The Joongang Plus 인사이트 세미나에 연사로 나선다. 그가 평소 강조해 온 세 가지 키워드, 성장과 도전, 꿈은 마흔에도 여전히 유효한 걸까? 지난 6일 서울 홍대 MKYU 사옥에서 김 대표를 만나 직접 물었다.     ━  🎤성장: “아이만 키우지 말고, 엄마·아빠도 키워라”   4년 전 김미경 대표에겐 ‘학장’이란 직함이 생겼다. 3050 대상 온라인 교육 플랫폼 MKYU(MK&You University)를 열면서다. MKYU는 ‘김미경(MK)과 당신이 함께 성장한다’는 뜻의 온라인 대학이다. 재테크, 자격증, 영어, 미래 트렌드에 대한 온라인 강좌를 제공하고, 북클럽 등 커뮤니티 활동도 지원한다. 지금은 폐지된 유료 멤버십 회원이 8만 명이 넘었다. 김 대표는 이 시대 마흔이 얼마나 성장에 목말랐는지 확인했다.    40대는 너무 바쁩니다. 없는 시간과 체력을 짜내면서까지 공부해야 하나요? 앞으로는 삶과 공부를 분리할 수 없을 거예요. 사회가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요. 예전엔 변하는 데 20~30년 걸렸는데, 이제는 5년도 안 돼서 바뀌어요. 지금 40대는 컴퓨터 엑셀 배우고 직장에 들어왔는데 이제 메타버스, AI(인공지능)가 나오죠. 이게 일터를, 돈 버는 방식을 바꾸고 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전혀 배운 적이 없어요. 어쩔 수 있나요. 시간을 쪼개서 배울 수 밖에요. 이제 공부 안 해도 먹고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요행을 바라면 안 돼요. 그냥 항복하세요. 어떻게 공부할 시간을 만들지 고민하세요.   어떻게 하면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을까요? 40대가 바쁜 건 아이를 키우기 때문입니다. 40대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가 바로 양육인 겁니다. 아이 키우는 데 드는 시간과 돈을 어떻게 배분할지 완전히 다시 고민해야 해요. 아이나 나나 모두 100세를 살고, 그중 70년을 같이 살아야 하거든요. 옛날 부모처럼 모든 시간과 돈을 아이에게 다 쏟아붓고, 자녀에게 노후를 책임지라고 할 수 없잖아요.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희생당해요. 큰일납니다. 영리하게 자산을 배분해야 해요.   김미경 MKYU 대표는 “양육에 드는 시간과 돈을 재분배해야 한다”며 “집안 예산의 30% 이상을 자녀 교육비에 쓰지 말라”고 말한다. 김종호 기자 어떻게 배분하죠? 자녀 교육에 투자하는 돈이 전체 예산의 20~30%를 넘어선 안 돼요. 그럼 빚만 남죠. ‘교육의 혜택은 집안의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처럼 아빠 혼자 벌어서 애들 끝까지 공부시키기도 어렵고,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를 먹여 살리는 것도 불가능하잖아요. 결국 모든 가족이 경제활동인구가 돼야만 살 수 있어요. 그러려면 지속적으로 엄마, 아빠도 공부하고 자기에게 투자해야 해요. 60세부터 100세까지, 40년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도록 고갈되지 않게 채워야 하는 거죠.   자신을 위한 투자,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할까요? 작더라도 내 책상부터 마련하세요. 식탁 말고요. 책상 하나로 ‘공부하는 사람’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란 정체성이 생겨요. 책상을 두고, 책상 앞에 앉는 시간을 루틴으로 만드세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내 시간, 내 공간을 확보하는 데서부터요.   아이는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요? 무슨 대학에 가고, 뭘 전공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세대도 대학 때 배운 걸로 못 버티는데,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오죽할까요? 경력이나 학습 교체 주기가 얼마나 짧겠어요. 계속 학습하고, 경력을 바꾸면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러려면 자기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지, 또 어떻게 자기를 먹여 살릴지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에 집중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가장 먼저 사회적 알람부터 해제해야 합니다. 저도 아이가 셋인데, 우리 애들한테도 그 알람을 끄라고 말했어요.   사회적 알람을 해제한다는 게 뭔가요? 나는 나의 시간대로 산다는 겁니다. 20세에 대학 가고, 25세면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고, 30세엔 결혼해야 한다는 알람, 싹 무시해야 해요. 저도 그 알람을 끄고 살려고 합니다. 나이 60에 외국으로 유학을 가잖아요. 가능성 넘치는 디지털 세상인데, 16세에 사업부터 하면 왜 안 되는 거죠? 가장 체력도 좋고 머리도 팡팡 돌아가는데? 필요한 공부, 24세에 해도 되잖아요. 사실 일흔 넘으면, 대학을 20세에 가건, 24세에 가건 표시도 안 나요. 스무 살까지 모든 자원을 다 몰빵하는 거, 그만해야 합니다. 한 방에 다 끝내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부모가 먼저 틀을 깨서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고 시간을 넉넉히 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도전: “가장 깊은 열정이 도전을 만든다”   김미경 대표는 본업인 강의, 교육 외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걸 서슴지 않는다. 6년 전엔 미혼모 지원을 위한 비영리 패션 브랜드를 만들고 직접 옷을 디자인했다. 최근엔 테크 분야에 꽂혔다.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을 읽어내고 싶어서다. 웹3.0, 메타버스, AI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고, 코딩도 익혔다. 영어 공부에도 매진하고 있다. 미국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게 목표다.   김미경 MKYU 대표는 “수많은 사람과 전문가들을 모시고 무언가 전달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다”며 “뭘 했어도 전달하는 사람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종호 기자 낯선 분야에도 거침없이, 또 끊임없이 도전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 직원들 하는 말이 있어요. 저만 가만히 있으면 흑자 난다고요(웃음). 제가 일에 막 뛰어드는 건, 솔직히 그걸 안 하면 24시간을 어디에 써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예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걸 꼭 해야 직성이 풀리고요. 어떤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실체가 보일 때까지 해야 해요. 눈으로 봐야 속이 시원하거든요. 패션 디자인도 처음에 가정용 재봉틀을 사서 수건에 무늬 붙이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코트까지 만드는 데 3년 정도 걸렸죠. 너무 재미있게 했어요.   지난해 미래를 바꾸는 기술에 관한 책(『세븐 테크』)도 내셨어요. IT 분야는 왜 파고드시는 거예요? 디지털이, 챗GPT 같은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꾸고 있잖아요. 강사가 최신 트렌드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무슨 강의를 해요. 현재도 모르면서 미래는 얘기할 수도 없죠. 그냥 새로운 트렌드에 대해 공부하는 게 몸에 밴 거예요. 제가 잘하는 게 사람 모으는 거잖아요. 이걸 활용해 큐레이션해 주는 게 전 너무 재미있어요. 전 뭘 했어도 무언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됐을 것 같아요.   도전하려면 열정이 있어야 하잖아요. 대표님은 바쁘신 와중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시는 것 같은데, 열정을 유지하는 비법이 있나요? 하기 싫고, 쉬고 싶고, 심지어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이 저라고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끊임없이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치지 않게 만드는 환경이요. 전 책임감이 강한 편이라 내 영역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망치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열심히 돌았어요. 아마 지금 40대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번아웃’이 오더라고요. 열심히 사는 것도 열정인데, 더 크고 깊은 열정은 잠시 멈추고 쉬는 거라고 생각해요.   쉬는 게 더 큰 열정이라고요? 24시간 뭔가를 하고 있어야 열정이 아니에요. 잠시 나를 멈추고 다음을 도모할 줄 아는 것도 열정이에요. 쉬면서 나를 돌아보고 공부도 하면서 다른 문도 열어보는 거죠. 그러면 다른 걸 할 수 있는 새살이 돋거든요. 쉬는 것도 열정이니까, 변화를 주는 데 너무 겁내지 않아도 돼요.   대표님은 어떻게 쉬고 재충전하시나요? 혼자 걷는 걸 너무 좋아해요. 집에서 사무실까지 걸으면 40분 정도 걸려요. 출퇴근할 때 안 걸어봤던 골목들을 찾아서 걷습니다. 그게 저한테 큰 위로이자 힐링이었어요. 왜일까 생각해 봤는데, 일상 속 여행이었던 거예요. 마흔쯤엔 일상에서 혼자 여행을 안 하면 급기야 우울해져요. 나를 만나지 못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만 계속 만나면 완전히 고갈되거든요. 그래서 혼자 걷기도 하고, 집에 다 와도 차에서 잠깐 음악 듣는 그런 시간이 필요해요. 일상에서 나를 만나고 쉬어가는 시간은 정말 필요하거든요.    ━  🎤꿈: “가장 좋은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꿈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다. 일상은 극히 단조로워지고, 나의 쓸모도 흐려진다. 마흔에 다시 버킷리스트를 쓰고, 꿈을 쫓아야 하는 이유다. 그러려면 먼저 나를 찾아야 한다. 김미경 대표는 “내 안의 진짜 나를 찾으라”고 강조한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사랑하며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답을 줄 파트너가 바로 진짜 나라는 거다.   김미경 MKYU 대표는 “좋아하는 것, 내 가치를 찾는 힘도 하나를 꾸준히 끝까지 해보는 몸 실력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진짜 나, 어떻게 찾을 수 있죠? 전 힘든 일이 있을수록 무조건 새벽에 일어나요. 신에게 기도하면서 답을 구하듯 나한테 수천 번 물어보고 답하는 거죠. 나랑 묻고 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이어리나 감사 일기를 쓰는 거예요. 처음에 쓰기 힘들어도 계속 쓰다 보면 진짜 내가 튀어나와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요. 이럴 땐 추구하고 싶은 가치를 어떻게 찾죠?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말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끝까지 확인을 안 해봤다’는 말하고 똑같다고 생각해요. 요리를 좋아해 거기서 내 가치를 찾겠다 생각했으면, 삼시 세끼 삼 년 내내 해 봐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걸 찾는 것도 결국 ‘몸 실력’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다들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때 그거 했으면 되게 잘했을 텐데’ 하면서 얘기만 하지 정작 안 해요. 정말 40대 이후는 내 몸 실력대로 집안 경제, 나의 가치, 사회적 가치가 다 결정되거든요. 근데 안 하는 거죠.   ‘몸 실력’ 키우는 건 어떻게 하죠? 작은 경험이라도 스스로 자신감을 느낄 수 있는 걸 해야 해요.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해도 됩니다. 그러다 매일 하면 습관이 되는 거죠.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꾸준히만 하면 브랜드가 돼요.   결국 ‘진짜 나’라는 건 자신에 대한 믿음인 것 같아요. 대표님은 자기에 대한 확신이 강하신 것 같은데, 어디서 나오는 힘일까요? 어렸을 때부터 내적 동기가 잘 형성됐던 것 같아요. ‘난 이 정도는 해야 되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죠. 그 뿌리가 우리 부모님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아버지가 지난해에 돌아가셨는데, 저랑 통화할 때면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미경이 전화가 왔다’고요.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가 쓰신 일기장을 봤는데, 미경이와 대화하기 위해 해야 할 공부, 메타버스, NFT 이런 게 써 있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인지 어렸을 때부터 심어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우리 아이들에게 ‘평생 응원단장이 되겠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평생 응원단장이요? 자녀가 어떤 상황이라도 응원한다는 걸 부모가 죽을 때까지 보여줘야 한다는 거죠. 아이가 지하 10층으로 떨어지면, 부모는 지하 11층에 가 있어야 해요. 바로 가서 ‘괜찮다. 문제없다. 다 잘 될 거다’ 하고 말해주는 거예요. 우리 둘째가 음악을 하는데, 옛날에 고등학교 자퇴했을 때 ‘축 자퇴’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걸어줬어요. ‘뮤지션은 고등학교 자퇴 정도는 해야 먹힌다’면서 제가 먼저 내려와서 받쳤어요. 그리고 천천히 같이 지상으로 올라갔어요. 부모가 아이에게 배 속 깊이 심어줘야 하는 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에요. 왜냐면 살면서 100번도 더 넘어질 거거든요.   김미경 MKYU 대표는 “60대야말로 세상에 완벽한 독립인간이 되는 것”이라며 “60대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10년 뒤 삶이 기대돼야 지금을 즐겁게 살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마흔이 돼서 50대, 60대를 떠올리면 불안하고 우울한 생각부터 들어요. 60대부터 진짜 혁명이 일어납니다. 시간, 공간 다요. 애들 다 독립하고, 부모님도 돌아가시고요. 그때야 비로소 완벽한 독립 인간이 되는 거예요. 이제부터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어요. 대부분 ‘너무 늙었어. 하긴 뭘 해’ 이러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100세까지 사는데 60세면 얼마나 젊은가요? 전 그 10년이 너무 기대돼요.   60대 김미경은 어떤 꿈을 꾸나요? 일단 공간을 바꿀 생각이에요. 59세까지 한국에서 살았잖아요. 공간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져요. 전 미국에 가서 한 번도 안 해본 공부를 하고 싶어요. 나이 들수록 내 인생 전반을 해석할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빨리 늙고 싶어요. 아직 가장 좋은 시간은 안 온 거예요. 40대는 그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해요.   김미경 대표는 “모든 꿈이 다 응원을 받으며 시작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동시에 “누구의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다”고 덧붙였다. 김미경이라는 인생이 몸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하고 싶은 걸 그냥 하세요. 대신 꾸준히 하세요. 그러다 보면 그게 길이 되고 룰(rule)이 됩니다. 그 길에 누군가는 따라 오게 돼 있어요.   ☞ 김미경 대표의 The Joongang Plus 인사이트 세미나 신청하기   ■ 김미경이 말하는 마흔의 성장과 도전, 꿈 「 ◦아이만 키우지 말고 엄마·아빠도 키우세요 : 100세 시대, 자녀와 함께 70년을 삽니다. 양육에 드는 돈과 시간을 재분배하세요. 엄마, 아빠도 공부하고 자신에게 투자해야합니다. ◦깊은 열정이 도전을 만들어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만 만나면 고갈되요. 잠시 멈추는 것도 도전을 위한 크고 깊은 열정이에요. 일상 속에서 나와 만나는 시간을 주세요.   ◦가장 좋은 시간은 아직 안 왔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 가치를 찾고 꾸준히 하세요. 60대는 가장 완벽한 독립체가 되는 시간입니다. 이때를 위해 지금부터 꿈꾸고 몸 실력을 키우세요.   」 관련기사 AI가 만든 ‘연봉 4억’ 직업…질문하는 창의성 시대 왔다 “서울대생은 경주마 같았다” 그 교수가 가천대 간 이유 "일단 해!" 39살에 삼성 최연소 임원, 그녀가 돌연 사표 쓴 이유

    2023.04.16 14:15

  • 키 크려면 줄넘기 시켜라? ‘운동 궁합’ 꽝이면 소용없다

    키 크려면 줄넘기 시켜라? ‘운동 궁합’ 꽝이면 소용없다 유료 전용

    키 크는 데 좋다는 운동은 인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다고 모두가 할 수 없어요. 내 아이의 몸에 맞는 운동을 찾아야 합니다. 세 가지만 확인하면 되죠. 어린이 운동 전문가 이수경 톨앤핏 대표는 “성장기에 좋은 운동의 첫째 조건은 아이의 현재 상태에 맞는 운동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성장기 아이에게는 어떤 운동을 시켜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수경 톨앤핏 대표는 이런 답을 내놨다. 이 대표가 꼽은 세 가지는 아이와 운동의 궁합이 맞는지, 운동과 일상이 균형을 이루는지, 그리고 운동의 전 과정을 아이가 주도하는지다. 성장판을 자극하고, 근육을 늘리는 데 효과가 있는 운동이라도 이 세 가지에 맞지 않으면 성장에 독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 대표는 18일부터 발행하는 칼럼 ‘내 아이를 위한 맞춤 운동 처방’을 통해 상황과 아이에게 맞는 운동법을 알려준다.   운동생리학 박사인 이수경 대표는 어린이 운동 전문가로 유명하다. 2008년 어린이 성장 운동 전문가로 일을 시작해, 2017년 어린이 토탈성장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톨앤핏을 창업했다. 키부터 비만, 체형교정, 성조숙증까지 성장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그를 찾는다. 그는 주사나 약물이 아닌 운동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한창 크는 아이들은 운동만 제대로 해도 성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 운동처방사였던 이 대표는 2005년 엄마가 되고 아이의 성장 운동으로 눈을 돌렸다. 아이의 발달 상태에 따라 운동도 다르게 해야 하는데, 시중에는 온통 성인을 위한 운동법만 있었다. 어린이 체육 교실은 축구, 발레, 검도 등 유행을 좇는 종목뿐이었고, 그나마도 몸 놀이 수준에 머물러 성장에는 별 도움이 안 됐다. 이 대표가 성장기 아이를 위한 사업을 직접 하게 된 이유다. 이 대표는 “아무리 좋은 운동도 내 아이에게 맞지 않으면 소용없다”며 “키 크는 데 줄넘기가, 유연성엔 발레가 좋다고 하지만 그건 그 운동이 맞을 때 얘기”라고 했다.     ━  📢 조건 ①아이와 궁합이 맞나요?   이 대표가 운동을 선택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아이의 몸과 마음 상태다. 신체 조건에 맞는 운동을 찾기 위해서다.  이수경 대표가 운영하는 톨앤핏은 아이의 성장 발달에 맞는 토탈성장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운동을 통해 키와 체중 등 성장 문제를 처방한다. 우상조 기자   운동 전 무엇을 점검해야 할까요? 우선 신체 상태를 봐야 해요. 키, 몸무게는 대한민국 소아·청소년 연령별 발육 표준치를 기준으로 발달 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또 근육은 충분한지, 평발은 아닌지, 좌우 균형은 맞는지 등도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발목 근육이 부족하다면 과한 줄넘기는 금물입니다. 근육이 없으면 뛸 때 가해지는 힘을 견디지 못해 발목을 다칠 수 있거든요. 둘째는 아이의 성향을 파악하는 거예요. 내향적인 아이에게 거친 운동은 스트레스가 될 수 있거든요. 이 두 가지를 체크하면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운동과 필요한 운동이 무엇인지 보일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운동의 목적을 정해야 합니다.   운동의 목적이라, 너무 거창한데요. 운동장에서 공만 차도 운동 아닌가요?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운동장에서 뛰어 놀면 좋죠. 몸을 움직여 에너지를 소비하니까요. 운동생리학에서는 이걸 신체활동(activity)이라고 하는데, 운동(exercise)과는 다릅니다. 운동은 움직임을 통한 변화를 목적으로 하거든요. 예를 들어 아이는 성장을 위해, 환자는 재활을 위해 운동으로 하죠. 운동은 이렇게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운동 강도, 빈도, 방법 등이 달라집니다. 아이 운동의 경우 키 성장이냐, 체중 조절이냐에 따라 또 나뉩니다. 똑같이 축구를 해도, 집중력을 높이려는 아이와 협동력을 높이려는 아이의 운동법은 다르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저는 아이의 운동을 선택할 때 성장, 체중 조절, 체형 교정, 스트레스 해소, 사회성 등 다섯 가지 목적 중 뭘 원하는지 확실히 하라고 권합니다.   목적에 맞는 운동만 찾아주면 아이들이 잘할까요? 영어 유치원 보낸다고 모두 영어 잘하지 않잖아요. 운동도 마찬가지예요. 최소 3개월에 한 번씩은 효과를 점검해야 해요. 체중 감량을 위해 매일 태권도를 보냈는데, 수개월이 지나도 변화가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이럴 땐 아이가 운동에 잘 적응하는지, 운동법에는 문제가 없는지, 간식이 과한 건 아닌지 등을 확인하고 해결법을 찾아야 합니다.   운동 효과라는 게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나요? 아이가 자랄 때는 신체 변화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키보다 체중을 보세요. 키는 조절할 수 없지만, 체중은 관리가 가능하니까요. 성장기에는 ‘살이 키로 간다’는 속설 때문에 체중 조절을 간과하곤 하는데, 이론에 따르면 성장기 고도비만은 오히려 키 성장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체중이 성숙도와 비례하기 때문이에요. 비만은 성조숙증을 유발하고, 성조숙증은 키 성장을 방해하거든요. 그래서 성장기에는 매주 한 번은 같은 조건에서 체중을 재봐야 해요. 운동을 하면 기본적으로 근육량이 늡니다. 근육은 기초 대사량을 높이고, 체지방의 축적을 막죠. 그리고 결과적으로 체중 변화를 만듭니다. 운동을 제대로 했다면 체중 변화가 눈에 보일 겁니다.   효과가 없는데도 아이가 계속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죠? 그 운동을 좋아하는 이유를 잘 관찰해 보세요. 외향적인 아이는 친구가 좋아 운동을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성 발달 측면에서는 좋습니다. 하지만 운동 전후 간식을 섭취하는 등의 나쁜 식습관이 생길 수 있으니 관리해 줘야 합니다. 반대로 쉽게 관두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때는 아이가 싫어하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힘들어서인지, 아파서인지, 아이들과 사이가 나빠서인지요. 운동은 지속성이 중요합니다. 수시로 변하는 아이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며 운동도 수정 보완해 나가야 해요.    ━  📢 조건 ②균형을 이루고 있나요?   이 대표에 따르면 몸은 근육의 움직임을 기억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못하던 동작도 여러 번 반복하면 점차 잘하게 된다. 이 대표가 “운동을 통해 몸 쓰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몸을 쓸 줄 안다’는 건 힘을 적절히 안배해 원하는 동작을 만들어 내는 걸 말한다. 그러려면 “균형 잡힌 운동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이수경 대표는 “운동은 심폐지구력, 근력, 유연성, 자세, 사회성 다섯 가지가 골고루 발달할 수 있게 여러 운동을 섞어서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균형 잡힌 운동이라는 게 뭔가요? 체력의 구성 요소를 골고루 발달시키는 운동을 말합니다. 체력은 크게 심폐 지구력, 근력, 유연성, 자세로 나뉩니다. 아이들의 경우 사회성도 포함되죠. 심폐 지구력은 심장과 폐, 근력은 근육, 유연성은 관절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 자세는 체형의 균형, 사회성은 협동·배려·소통 기술 등을 말합니다. 각 요소를 발달시키는 운동은 조금씩 달라요. 심폐 기능은 달리기와 수영, 근력은 계단 또는 경사로 오르기, 유연성은 스트레칭을 하면 좋아집니다. 체형의 경우는 꾸준히 관찰을 해야 하고요. 성장기 운동은 이 다섯 가지를 골고루 발달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이 모든 걸 한 번에 발달시키는 운동은 없나요? 그런 운동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운동을 돌아가며 하는 게 좋습니다. 전신 운동인 수영은 심폐 기능 강화와 체지방 분해에는 좋지만, 근력 발달엔 약하죠. 수영만 하면 뼈 성장을 위한 성장판 자극과 근육 발달은 부족합니다. 이럴 땐 하루는 수영, 하루는 계단 오르기를 번갈아가며 하면 됩니다. 초등학생의 경우 이런 방식으로 최소 주 3회, 1회에 60분 이상, 중강도 이상의 운동을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양한 운동을 해도 변화가 없는 경우가 있어요.  아직 성장 중인 아이들은 식사와 수면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식습관과 수면 습관도 균형이 잡혀야 해요. 식습관부터 보죠. 양육자 가운데는 “클 때 잘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간식에 야식까지 하루 다섯 끼를 주는 경우가 있어요. 식단은 뼈 성장을 위해 고기, 계란, 우유 등 칼슘과 단백질 위주로만 구성하고요. 이렇게 많은 양을 편식하면 영양소는 근육이 아닌 지방으로 축적됩니다. 단백질이 근육으로 전환되게 돕는 비타민과 운동량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성장기에는 비타민이 풍부한 채소를 반드시 함께 먹어야 합니다. 채소는 색마다 함유된 비타민이 다르기 때문에 골고루 챙겨야 해요. 저는 신호등 식단이라고 하는데요. 예를 들어 빨간색은 김치와 파프리카, 노란색은 버섯·콩나물, 초록색은 브로콜리가 좋습니다. 아마 채소 먹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을 겁니다. 그럴 땐 한입에 넣을 수 있는 꼬마 김밥을 활용해 보세요. 육류와 채소류를 동시에 먹기 때문에 거부감이 덜합니다.   수면 습관은 충분히 자는 게 중요할까요?  얼마나 오래 잤느냐보다 얼마나 깊게 잤느냐가 중요합니다. 수면의 질을 결정하는 건 긴장입니다. 긴장이 풀려야 깊은 잠에 빠질 수 있거든요. 수면 중 몸과 정신이 긴장 상태면 근육은 굳고, 유연성은 떨어집니다. 자연히 피로도 풀리지 않죠.    숙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두 가지를 추천하는데요. 하나는 근육 풀어주기예요. 탕 목욕이 도움이 됩니다. 탕 목욕은 저녁 시간, 일주일에 두 번, 20분씩 하면 좋아요. 다만 자기 직전에 하는 건 금물입니다. 자기 직전에 하는 목욕이나 운동은 숙면을 방해하거든요. 또 한 가지는 일찍 일어나는 겁니다. 보통 키 크려면 일찍 자야 한다고 하죠. 성장호르몬 분비가 높은 밤 10시~새벽 2시를 취침 시간으로 정하는데, 저는 이보다 더 일찍 자면 좋다고 봐요. 키 성장을 방해하는 성호르몬 분비를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하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 활동량을 늘려야 합니다. 하루에 써야 할 에너지를 빨리 소모할수록 빨리 잘 수 있으니까요. 특히 아침밥 챙겨 먹을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합니다. 아침밥을 거르면 몸은 저혈당에 저항해 에너지를 저장하는 몸으로 바뀝니다. 이러면 운동을 해도 효과가 떨어져요. 그러니 등교 시간 최소 1시간 전에는 일어나길 추천합니다.    ━  📢 조건 ③아이가 주도적으로 운동 하나요?   성장에 좋은 운동의 마지막 조건은 아이가 운동의 전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양육자는 아이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조력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수경 대표는 “운동을 할 때 아이의 주도권을 빼앗지 않으려면 양육자는 ‘조력자’에 머물러야 한다”며 “아이가 운동에 필요한 장비를 스스로 챙기고 관리할 수 있게 지켜보라”고 조언했다. 우상조 기자   아직 힘도, 경험도 부족한 아이들은 챙겨줄 게 많습니다. 신체를 움직이는 활동만 운동이 아니에요. 운동 전 준비부터 운동 후 정리까지 전 과정이 다 운동입니다. 아이는 이 과정에서 겪는 여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죠. 그래야 신체는 물론이고 정서, 사회성까지 고르게 발달하거든요. 만약 이 과제를 양육자가 대신하면 아이의 주도성은 꺾이고, 운동의 의미는 무색해집니다. 운동 장비부터 유니폼, 신발 같은 물품을 직접 챙겨주고, 아이를 운동하는 곳까지 실어 날라주는 양육자가 많아요. 물론 야구, 아이스하키, 골프처럼 장비가 많은 운동이라면 양육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집에 돌아와 장비를 정리하는 건 아이가 직접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장비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고, 내 몸에 맞게 장비를 길들이고 관리하는 법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운동에서 주도성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요? 운동을 대하는 태도와 스포츠맨십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맨십은 운동할 때 지켜야 할 매너와 에티켓을 말합니다. 성장에 대한 의지, 이기고 싶다는 욕망 등을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이 우선돼야 하는데요. 쉽게 말해 철이 들어야 합니다. 운동을 주도적으로 해온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이 생겨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상대 선수에 대한 예의로 발전합니다.    스포츠맨십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개인 운동보다 단체 운동을 해본 경험이 필요합니다. 저는 6~7세 무렵부터 팀 운동을 권하는데요. 또래와 함께 공동의 목표를 갖고 함께 움직인 경험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됩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알게 되는 거죠. 이게 바로 사회성입니다. 단체 운동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아이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은 타인과 섞일 때 숨겨왔던 성향을 드러내곤 합니다. 소극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줄 알았는데 팀에서 리더십을 보이는 아이도 있고, 적극적인 줄 알았는데 단체 활동에선 얌전해지는 아이도 있어요.    승부욕이 너무 강해 단체 활동이 어려운 아이도 있어요. 승부욕이 강한 아이의 특징은 무조건 자신이 돋보여야 만족한다는 겁니다. 단체 운동을 할 때도 경기의 중심에 자신이 있어야 해요. 축구나 농구 경기를 하는데 자신에게 공이 오지 않거나 골을 넣지 못하면 화를 냅니다. 경기에 지는 것도 용납하지 못해요. 경기에서 지면 운동을 중단합니다. 이때 양육자는 아이가 가진 승부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줘야 합니다. 승부욕이 강한 아이들은 에너지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걸 잘합니다. 이 에너지를 결과가 아닌 과정에 집중하게 관점을 바꿔주세요. 예를 들어 운동 자세와 경기에 임한 태도에 대해 피드백해 주는 겁니다. “출발할 때 허리를 굽히니 더 빠르더라” “빈 공간을 찾아서 정확하게 패스하더라” 같은 말로요. 또 규칙과 매너를 강조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승부욕을 조절하며 페어플레이할 수 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육상과 스키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이 대표의 롤모델은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자 전문 산악인으로 활동하신 아버지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운동을 하며 삶의 태도를 배웠다. 이 대표가 운동하다 힘들다고 투정하면 아버지는 “네 운동 장비도 스스로 들지 못하면, 운동도 하지 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엔 서운했지만, 그 말을 곱씹으며 세상 어떤 어려움과 마주해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그가 양육자도 아이와 함께 운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어떤 운동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어떻게 운동하느냐가 더 중요해요. 체육 학원에만 맡기지 말고,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운동해 보세요. 몸으로 쌓은 기억만큼 강렬한 건 없습니다. 그 경험의 중심에 양육자가 있다면, 그보다 단단한 관계는 없을 겁니다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좋은 운동의 조건 ① 아이와 궁합이 맞나요? 아이의 몸과 마음상태에 맞는 운동이 있습니다. 아이의 신체 상태와 성향을 점검하고, 운동의 목적을 정해주세요. 운동을 시작했다면 3개월마다 효과를 점검해야 합니다.  좋은 운동의 조건 ②운동과 일상, 균형을 이뤘나요? 심폐지구력·근력·유연성·자세·사회성을 골고루 높일 수 있게 여러 운동을 섞어서 하는 게 좋습니다. 성장에 필요한 근육은 단백질과 비타민을 섭취해야 만들어집니다. 단백질 위주의 식단은 위험합니다. 채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게 신경 써주세요. 수면은 양보다 질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 탕목욕으로 근육을 풀어주고, 등교 1시간 전에는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좋은 운동의 조건 ③ 운동 전후 관리, 아이가 스스로 하나요? 운동 전 준비부터 운동 후 정리까지 아이가 주도적으로 해야 책임감이 생깁니다. 이런 책임감은 운동의 규칙을 지키고 상대 선수를 배려할 줄 아는 스포츠맨십으로 발전하고요. 6세부터는 단체 운동도 경험하게 해주세요. 그래야 스포츠맨십도 생기고 사회성도 길러집니다.  」 관련기사 코로나 동안 30㎏ 살찐 아이…발바닥 운동으로 뺄 수 있다 “키도 공부도 허리힘 우선” 뼈 성장 돕는 슈퍼맨 자세 매년 5㎝ 크고, 5㎏ 늘었다면…“키 컸으니 괜찮아” 안 된다

    2023.04.10 14:33

  • AI가 만든 ‘연봉 4억’ 직업…질문하는 창의성 시대 왔다

    AI가 만든 ‘연봉 4억’ 직업…질문하는 창의성 시대 왔다 유료 전용

    챗GPT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수작업으로 이뤄지던 지식 노동이 자동화된다는 겁니다. 그 창작물도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겠죠.   가히 돌풍을 일으킨 챗GPT의 의미를 묻자, 김대식 KAIST 전자및전기공학부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해 11월 공개된 챗GPT(GPT 3.5)가 100만 사용자를 모으는 데 걸린 시간은 단 5일. 이전 최고 기록은 2.5개월로, 인스타그램이 갖고 있었다. 챗GPT는 출시 두 달만에 유료 서비스를 내놨다. 현재 전체 사용자는 1억 명, 유료 사용자는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업계는 추정한다. 그리고 지난달 14일, GPT4가 나왔다.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는 말은 수사가 아니다. 챗GPT에 적응할 새도 없이 다음 버전이 나왔으니 말이다.   김대식 교수는 AI 전문가로 꼽히는 뇌과학자다. 어린 시절 독일에서 자라고 공부한 덕에 공학자이면서도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는 책도 여러 권 냈다. AI가 바꿀 미래에 대해 그를 찾아가 물은 이유다. 굳이 흑백 사진을 선택한 건 현실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얘기를 주로 나눴기 때문이다. 대전=김성태 기자 김대식 교수는 알파고와 이세돌 구단이 대국을 벌인 2016년 『인간 vs 기계』란 책을 통해 인공지능(AI)을 정면으로 다룬 바 있다. 그는 독일 막스플랑크 뇌연구소에서 뇌과학을 공부하고, 미국 미네소타대·보스턴대에서 교수로 일한 대표적인 뇌과학자다. 생물학에 기반을 둔 보통의 뇌과학자와 달리, 전자공학과 컴퓨터사이언스를 뇌과학에 접목하는 연구를 한다. 인간의 뇌를 모방해 만든 컴퓨터인 AI 분야 전문가로 꼽히는 이유다. GPT가 바꿀 미래에 대해 김 교수만큼 설명할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4일, 대전을 찾아간 건 그래서다.    ━  📢 챗GPT, 수작업 지적 노동의 대량 생산 시대를 열다   인간과 컴퓨터의 가장 큰 차이는 프로그래밍 여부다. 컴퓨터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하지 못한다. 인간이 프로그램을 짜주면, 그에 따라 계산을 해 결과를 도출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오감을 이용해 정보를 습득하고 학습하면서 원리를 파악한다. 그런데 인간 같이 행동하는 컴퓨터가 나왔다. 바로 AI다. 데이터를 주면 스스로 학습해 결과값을 도출하는 계산식을 스스로 찾아낸다. 김대식 교수는 “지금껏 우리가 경험한 AI 스피커는 프로그램된 질문에는 답하지만,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면서 “챗GPT는 바로 그 대화가 됐기 때문에 돌풍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김대식 교수는 “AI의 등장은 지식 노동의 기계화, 대량생산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인간보다 더 싼 가격에 균질한 수준의 창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효율적인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블루칼라 노동자가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겼듯, 화이트칼라 노동자 역시 그렇게 될 운명이다. 대전=김성태 기자 일반적인 컴퓨터와 AI의 차이를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세요. 컴퓨터는 계산기입니다. 어떤 숫자를 넣으면, 입력된 계산식에 따라 결과값을 알려주죠. 이게 가능하려면, 인간이 컴퓨터에 계산식를 미리 입력해야 합니다. 개발자가 코드를 짜는 게 바로 이겁니다. 게임을 할 때 어떤 버튼을 누르면 어떤 행위를 하잖아요. 개발자가 하나하나 코드를 짜서 입력해둔 겁니다. 사용자가 특정 버튼을 누르면 특정한 행위가 결과값으로 나오도록요. 우리가 쓰는 수많은 소프트웨어가 다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게임이나 앱 서비스부터 워드나 윈도 같은 프로그램까지 다요. 코드가 수천 줄에서 수억 줄에 이릅니다. 그런데 AI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인간이 코드를 짜주지 않아도 스스로 학습해 결과값을 도출해 내거든요. 인간처럼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데이터가 있으면 됩니다. 강아지 사진을 주고, 이게 강아지라고 알려주는 거죠. 이걸 수없이 반복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컴퓨터가 강아지를 알아봅니다.   마치 아이에게 강아지를 알려주는 것처럼 컴퓨터를 가르치는 건가요? 맞아요. 그 어떤 양육자도 아이에게 강아지는 눈이 두 개고, 온몸에 털이 있고, 꼬리가 있다는 식으로 가르쳐주지 않잖아요. 사진이나 진짜 강아지를 보여주면서 ‘강아지’라고 알려주죠. ‘컴퓨터도 그렇게 할 수 없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게 바로 AI입니다. 특정 값이 들어오면 어떤 값을 결과로 도출하라는 프로그램을 짜주는 대신 그냥 데이터를 주고 답을 가르쳐주는 거죠. 그럼 컴퓨터가 스스로 답을 내는 계산식을 찾아냅니다. 인간이 학습하는 것과 아주 유사하죠. 그래서 인간의 지능을 모방했다는 의미로 인공지능(AI)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AI가 세상에 존재를 각인시킨 건, 알파고가 이세돌 구단과 대국을 벌인 2016년이에요. 그즈음 본격화된 건가요? AI 연구가 시작된 건 1950년대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표해 체제 경쟁을 하던 시기죠. 미국 정부는 소련 수학자, 과학자가 쓴 러시아어 논문을 빨리 번역하고 싶어 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면서 미국을 충격에 빠뜨리거든요. 일명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하죠. 미국 과학자들은 6개월이면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어요. 그런데 60년 넘게 걸렸어요.   왜죠?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데이터입니다. AI를 학습시키려면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거든요. 강아지를 구분하는 데 1980년대엔 사진 100장을 썼어요. 실패했죠. 그런데 1990년대 인터넷이 생겨나면서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강아지 사진 100만 장을 가지고 훈련시켰더니, 그제야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빅데이터를 가지고 확률 분포를 기반으로 규칙을 찾아낸 겁니다.   아무리 데이터가 많아도,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죠? 인간은 AI가 찾아낸 그 규칙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저 AI가 강아지를 구분하는지 못하는지 결과값만 볼 뿐이죠. 맞는지, 틀리는지요.   사진을 보고 강아지를 구분하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챗GPT처럼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대답하는 건 고차원의 두뇌 활동이잖아요. 어떻게 가능하죠? 언어학자들도 데이터 학습만으로는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노엄 촘스키가 대표적인 학자죠. 아이들은 문법을 몰라도 문법에 맞는 말을 하잖아요. 그게 가능한 건 문법을 만들어 내는 뇌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AI는 그게 없으니까 안 될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지난해 11월에 언어학자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게 증명됐어요. 챗GPT가 등장하면서요. 챗GPT는 대규모 언어 데이터를 가지고 학습하는 것만으로 인간과 대화하고 있어요.   챗GPT가 문법에 맞는 문장을 구사하고 인간과 대화하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걸까요? 노엄 촘스키가 정확하게 그런 주장을 담을 글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했죠. 그런데 이해한다는 게 뭘까요? 우리가 아이에게 어떤 개념을 설명해요. 그리고 아이가 이해했는지 어떻게 확인하죠?   설명해 보라고 하거나, 문제를 풀어보게 하고 맞는지 보고 확인하죠. 챗GPT는 설명도 하고, 문제도 맞게 풀어요. 그러니 문법에 맞는 문장을 구사하면서 질문에 맞는 대답을 하죠. 그런데도 챗GPT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대규모 데이터 학습을 통해 인간처럼 지적 활동을 하는 컴퓨터가 등장한 거네요. AI가 인간이 하던 지식 노동을 대신할 수 있게 된 거죠.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게 포인트인데,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심지어 품질도 균질해요. 그간 지식 노동은 수작업으로 했어요. 그래서 대량생산이 어려웠죠. 지식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서비스나 제품이 비쌌던 이윱니다. 누가 하느냐에 따라 품질도 차이가 났고요. 마치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통해 자동차를 대량생산해 내면서 마차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은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  📢만드는 창의성의 시대에서, 질문하는 창의성의 시대로   지식 노동을 통해 만들어내는 창작물은 다양한 품목이 조금씩 생산됐다. 일명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다. 그런데 AI의 등장으로, 지적 노동의 창작물도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컴퓨터가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팔리는 품종을 집중적으로 빠르게 대량 생산하는 게 가능해진 셈이다. 그럼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김대식 교수는 “만드는 창의성의 시대는 갔다”고 단언했다. 지금까진 지적 활동, 지식 노동을 통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창의성이 필요했는데, 이제 그건 컴퓨터가 하면 된다. 김 교수는 “이제 질문하는 창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대식 교수는 “만드는 창의성의 시대가 가고, 질문하는 창의성의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만드는 건 AI가 하니 인간이 할 필요가 없다. 이제 인간은 AI에게 적확한 질문을 던지고, AI로 하여금 만들게 하면 된다. 대전=김성태 기자 질문하는 창의성이 뭔가요?  챗GPT를 한 번 봅시다. 어떻게 생겼죠? 창 하나가 덩그러니 있어요. 이 창에 질문을 넣어야 비로소 챗GPT가 뭔가를 내놓습니다. 출발은 인간의 질문이라는 겁니다.   질문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챗GPT를 만든 오픈AI 출신이 차린 앤스로픽이라는 스타트업에서 프롬프트 엔지니어를 구하고 나섰어요. 그것도 4억원이 넘는 연봉을 제시하면서요. 프롬프트 엔지니어는 AI에게 질문을 던지는 직군이에요.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AI가 내놓은 답의 수준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예를 좀 들어주세요.  오픈AI가 만든 ‘달리’라는 서비스가 있어요. 문자를 입력하면 그림을 그려주는 서비스죠. 저는 간단하게 명령합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그려줘’ 이런 식으로요. 제가 친한 사진작가한테 달리를 알려줬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는 이렇게 입력하더라고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그리는데, 1975년 코닥에서 만든 흑백필름 느낌이 나게 그려줘. 조명은 4개를 사용하고, 아래서 촬영한 구도면 좋겠어.’ 결과가 어땠을까요?   질문하는 창의성이란 결국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AI가 그걸 결과물로 도출하게 하게끔 AI에게 최적화된 방식으로 질문하고 지시하는 능력을 말하는 거군요. AI가 등장했으니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는 알아야 해요. 알아야 질문도 하고 명령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프롬프트 엔지니어는 코딩할 줄 몰라도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는 인문학자가 더 잘할 수 있어요. AI의 등장으로 완전히 새로운 직업이 생겨난 셈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AI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 일을 인공지능이 빼앗아 갈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이에요. 블루칼라 노동자가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겼듯, 화이트칼라 노동자 역시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니까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챗GPT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코딩이에요. 파이선이라는 컴퓨터 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죠. 개발자마저 위협받는 셈이죠. 하지만 사라지는 직업만큼 새로운 직업이 생겨날 겁니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직군이 생겨난 것처럼요.   어떤 직업이 생겨날까요? 그걸 예측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200년 전을 떠올려 보세요. 한국은 고종 황제 시절이고, 중국은 청나라였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이 한창일 때죠. 미국은 노예 해방을 놓고 남북전쟁을 벌였고, 유럽은 제국주의 아래 아시아와 남미로 식민지를 개척할 시기예요. 그 시절 사람들이 마케터라는 직업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 시대엔 지금 인간이 하는 지식 노동이나 서비스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2023년엔 수많은 사람이 그런 일을 하면서 돈을 벌죠. 지금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새로운 일이 엄청나게 많이 생겨날 거란 얘깁니다.   내 직업의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기도 어려운데, 양육자들은 그보다 더 먼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아이를 키워야 하니까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역량, 교수님이 강조한 질문하는 창의성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최근 양육자를 타깃으로 독서에 관한 책을 낸 이유가 있어요. 책을 읽어야 뇌가 발달하거든요. 정보를 그림이나 동영상으로 습득하면 뇌는 일을 별로 안 합니다. 그림이나 동영상을 보는 건 그냥 할 수 있거든요. 30만 년 전부터 해오던 일이니까요. 30만 년 전엔 스크린은 없었지만, 사냥해야 할 동물은 움직였고 열매를 따야 하는 나무는 흔들렸죠. 그래서 30만 년 후에 인류가 동영상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글자를 읽는 건 다릅니다. 문자가 만들어진 건 겨우 5000년 전이거든요. 글을 읽으려면 뇌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과’라는 글자를 보고 진짜 사과를 떠올려야 하니까요. 글을 읽는다는 건 뇌를 바꾸는 겁니다. 노력해서 얻은 정보기 때문에 더 오래 가고요. 글을 읽는 것이야말로 뇌에 가장 좋은 영향력을 주는 행위죠.   다른 건 또 없나요? 잠을 많이 자야 합니다.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공부하느라 잠을 못 자는데, 너무 안타까워요. 잠을 자는 동안 우리 뇌는 깨어 있는 동안 배운 걸 정리합니다. 자는 동안에도 공부를 하는 셈이죠. 잠을 자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컨디션, 몸 상태가 좋아야 뇌도 최상의 상태가 되기 때문이에요. 잠을 못 자서 피곤하고 짜증이 나는데 공부가 될까요?    ━  📢 직업의 미래? 던져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김대식 교수는 AI와 관련된 논의가 직업과 일자리 중심으로 이뤄지는 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아무리 얘기해 봐야 예측하기도 힘들고, 바꾸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고 했다. “우리의 합의에 따라 판세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엉뚱하게 로마 제국 얘기를 꺼냈다.   김대식 교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간다면, AI가 만들 인류의 역사는 로마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소득과 함게 다양한 놀거리를 국가가 나서서 제공했던 로마는 결국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대전=김성태 기자 갑자기 왜 로마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건가요?  역사는 반복되니까요. 전쟁을 통해 로마엔 엄청나게 많은 노예가 생겼어요. 노예가 생산 활동과 노동을 다 하니까, 시민들은 할 일이 없었죠. 일을 안 하니까 생계를 유지할 방법도 없었고요. 게다가 전쟁이 일어난 동안 로마에선 중산층이 무너져버렸어요. 남자들이 멀리까지 전쟁을 나가면서 오랫동안 부재했기 때문이죠. 그사이 여성과 아이들은 생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해서 있던 땅이나 집을 팔고 몸종이 된 겁니다. 전쟁이 끝난 후 노예 덕에 로마는 엄청난 생산성을 갖게 됐지만, 그 부는 결국 극소수에게 집중됐죠.   로마의 상황에서 노예 자리에 AI가 들어가면 지금 상황이 되는 건가요? AI라는 뛰어난 노예가 생긴 겁니다. 많은 사람은 할 일이 없어지고, 돈 벌 방도가 없어지겠죠. 극강의 생산성으로 엄청난 부를 만들어 낼 AI, 그걸 가진 극소수만 부자가 될 거예요.   로마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요?  정부가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했어요. 할 일은 없고, 시간도, 불만도 많은 그 상태가 계속되면 폭동이나 혁명이 일어날 테니까요. 1년에 한 사람당 돼지고기 몇 ㎏, 와인과 올리브유 몇 L, 밀가루 몇 포대 등 굶어 죽지 않을 만큼 기본적인 것들을 나눠줬어요. 국가가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린 겁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됐지만, 여전히 시간이 많잖아요. 혁명이나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된 건 아니에요. 그래서 로마는 놀거리를 제공했습니다. 로마의 유적을 떠올려 보세요. 콜로세움, 목욕탕 같은 게 떠오르시죠? 이게 다 오락 시설입니다. 다 공짜였어요. 콜로세움에선 하루 16시간 동안 잔인한 경기를 보여줬죠. 전투 경기나 전차 경기 같은요. 다른 생각을 못 하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지금 우리 상황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건가요? 최악의 시나리오로 간다면요. AI 기술을 가진 기업이 기본소득을 제공해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해 딴 생각을 못 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죠.    모두가 퇴사를 꿈꾸는 데, 정작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왔을 때의 미래는 왜 이렇게 암울하죠? 노예, AI가 만들어낼 엄청난 생산성과 부를 극소수가 독점하기 때문입니다. AI를 소유한 기업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 논의해야 해요. AI 덕에 얻게 될 막대한 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해요. AI에 세금을 부과하는 식으로 그 이익을 국가가 환수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겠죠. 그걸 찾으면 하루에 4시간만 일하면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는 유토피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AI가 만들 부를 나눌 방법만 찾으면, 유토피아인가요? 논의할 게 하나 더 있어요. ‘AI를 누가 통제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AI는 약한 AI와 강한 AI로 나뉩니다. 이 둘의 차이는 ‘자아’입니다. 자아가 있는 AI는 강한 AI죠. 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나와 있는 AI는 약한 AI예요. 하지만 이게 강한 AI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챗GPT를 만든 오픈AI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세요? 강한 AI를 막기 위한 기술을 만드는 비영리 단체로 시작했어요. 이 문제에 동의한 천재적인 AI 과학자들이 모여서 강한 AI에게 가장 빠르게 다가간 셈이죠. 아이러니죠. AI 기술의 발달은 인간이 막을 순 없을 겁니다. 모든 기술의 역사가 증명하죠. 그렇다면, 이 기술을 누가 통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해요. 엄청난 기술의 시대가 인간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겁니다.   김대식 교수의 연구실엔 나무 목마가 있었다. 사진기자의 요청에 그가 나무 목마에 앉았다. 그는 여러모로 튀는 존재다.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한 청바지 차림의 대학교수, 인문학을 넘나드는 공학자. 그 자체가 AI 시대 필요한 창의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대전=김성태 기자 김대식 교수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사진이 발명된 19세기 얘기를 꺼냈다. 사진의 등장으로 미술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현실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린 그림이 최고의 작품이었는데, 그 어떤 그림보다 정확하게 현실을 모사하는 존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어떤 미술가는 “사진은 흑백인 데다 그림보다 품질도 떨어진다”며 현실을 더 정확하고 자세하게 그렸다. 프랑스 아카데미파다. 그런데 어떤 미술가는 이렇게 질문했다. “화가, 그림의 역할은 뭘까?” 그들은 기계(사진기)가 보여줄 수 없는 걸 보여주기로 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시간의 변화에 따른 색채 변화와 찰나의 인상을 그렸고, 표현주의 화가들은 극단적으로 형태를 단순화하고 내면의 세계를 그렸다.   AI는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어요. 아카데미파가 될 건지, 인상파나 표현파가 될 건지요. 우리는 아카데미파가 돼도 굶어 죽진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다릅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①AI는 기존의 컴퓨터 프로그램과 달리 인간이 미리 코드를 짜 줄 필요가 없다. 인간처럼 데이터를 기반으로 스스로 학습해, 답을 찾는 계산식을 찾아낸다. 이 방식으로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고 구사하기 시작한 AI가 바로 챗GPT다. 챗GPT로, 인간이 하던 지식 활동을 AI가 대신할 수 있다는 게 증명됐다. 지적 창작물도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②AI가 창작물을 만드는 걸 대신하게 되면서, 만드는 창의성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됐다. 이제 질문하는 창의성의 시대가 왔다. AI에게 원하는 걸 정확하게 설명하고, AI가 그걸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적확하게 질문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그걸 갖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다. 책을 읽는 행위야 말로 뇌를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③역사는 반복된다. 최악의 시나리오로 흐른다면, AI는 로마 제국의 역사를 반복하게 할 것이다. AI를 소유해 막대한 부를 챙긴 기업이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기본소득과 놀거리를 제공하는 식으로 말이다. 로마는 결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AI를 누가 통제하고, AI가 만들 부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 관련기사 “사촌이 땅 사게 도와줘라” 뇌과학자가 본 ‘미래 리더’ “서울대생은 경주마 같았다” 그 교수가 가천대 간 이유

    2023.04.09 13:20

  • 읽어놓고 딴소리하는 아이…“6학년까진 소리내 읽어라” ⑤

    읽어놓고 딴소리하는 아이…“6학년까진 소리내 읽어라” ⑤ 유료 전용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년마다 벌이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의 읽기 능력은 2006년 이후 꾸준히 하락해 왔다. 가장 최근 발표된 2018년 평가 결과에서 눈여겨볼 건 하위권 학생의 비율이다. 2000년 전체 5.7%였던 게 2018년 15.1%로 급증한 것이다. 같은 기간 상위권 비율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었다는 얘기다. 코로나19로 인한 학습 격차를 감안하면, 하위권 비율은 더 크게 늘었을 가능성이 크다.    hello! Parents가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의 마지막 전문가로 홍인재 전주 신동초등학교 교장을 만난 이유다. 홍 교장은 33년간 학교 현장에서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쳐 왔다. 말하기부터 한글 깨치기, 독해에 이르는 문해력 전반에 걸쳐 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법을 연구해 왔다. 연구와 실전 노하우를 정리해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펴내기도 했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park.jeongmin@joongang.co.kr 문해력은 ‘글자’가 아니라 ‘소리’에서 시작합니다. 소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 글자도 못 배웁니다. 그런데 요즘엔 소리를 배워야 할 어린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글자를 익혀야 할 아이가 독해를 하고 있어요. 문해력 부진은 여기서 시작된 겁니다.   “문해력 부진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홍인재 교장은 이렇게 답했다. 문해력은 빨리 습득해도, 늦게 습득해도 안 된다는 얘기다. 그는 “문해력은 적기(適期) 교육”이라며 “대강 배우고 익히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앞서 배우는 것도 큰 문제”라고 말했다. 홍 교장은 “만 3세까지는 소리를 듣고 구분하는데,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말놀이·글놀이를 통해 다양한 표현을 익히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인재 전주 신동초등학교 교장은 “문해력의 시작은 소리에 대한 인식”이라며 “영유아기 땐 사람의 말소리를 많이 들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  📢 “소리 구분이 먼저다”   읽기는 소리와 문자를 연결하는 활동이다. 홍 교장이 “읽기에 앞서 소리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소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문자를 학습하면 읽기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소리를 제대로 인식하는 방법으로, 만 3세 전에 사람의 말을 많이 듣는 걸 추천했다.   읽으려면 문자를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문자, 그러니까 한글을 배우는 건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아요. 한글의 구성 원리 덕분이죠. 한글은 소리 나는 대로 만들어지잖아요. 영어와 다르게 예외가 없죠. ‘ㄴ’은 어디서나 ‘느’ 소리가 나고, ‘ㅏ’는 예외 없이 ‘아’ 소리가 나서 이 둘을 합친 글자 ‘나’는 언제나 ‘나(na)’ 소리가 납니다. ㄱ(기역), ㄷ(디귿), ㅅ(시옷)을 제외하면 규칙이 아주 단순하고 정확하죠. 그래서 말소리 분화만 정확하게 돼 있다면, 한글은 금세 배워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배워도 충분하죠.   말소리 분화라는 게 뭔가요? 소리를 구분해서 듣는 걸 말해요. ‘아빠’라는 단어는 ‘아’와 ‘빠’ 두 개의 소리로 나눠집니다. 또 ‘아’와 ‘쁘(ㅃ)’와 ‘아(ㅏ)’ 더 잘게 세 개로 구분됩니다. 신생아는 말소리를 이렇게 구분해서 듣지 못합니다. 새소리처럼 하나의 소리로 받아들이죠.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리가 분화됩니다. 처음엔 의미 없는 옹알이를 하다가 점차 정확한 단어를 발음하게 되는 건 그래서죠.   소리 분화와 읽기는 어떤 관련이 있나요? 글자도 소리를 구분해서 익히듯 단계별로 익혀요. 아이들은 처음엔 단어를 그림처럼 통으로 인식해요. ‘아빠’를 하나로요. 그러다가 ‘아’와 ‘빠’를 구분하고, 각각을 다시 한번 자음(ㅇ)과 모음(ㅏ)로 분리하는 식으로요. 글자를 이렇게 구분해 익힐 때 소리 분화가 어설프면 각 문자에 맞는 소리를 찾지 못해요. 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면 발음도 부정확해지고, 발음이 부정확하면 유창하게 읽기도 못하죠. 영유아 때 어른의 입 모양을 보고 따라 하면서 입과 혀를 움직이는 자체가 문해력을 키우는 훈련입니다.   동영상을 보여주면 안 되나요? 영상 속 인물들의 입 모양을 볼 수 있잖아요. 말은 의사소통 도구입니다. 주고받아야 의미가 생겨요. 일방적으로 떠드는 말만 들으면 말의 쓰임을 배울 수가 없어요. 제가 교실에서 만난 아이 중에 TV만 보고 자란 아이가 있었어요. 영유아기에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방치된 거죠. 이 아이는 글자는 깨우쳤는데 표현을 못 했어요. 사탕을 주고 어떤 맛인지 물어보면 “포도 맛”이라고는 하는데 “달콤하다”거나 “새콤하다”는 식의 표현을 전혀 못 했어요.   뭐가 문제였던 건가요? 사탕과 ‘달콤하다’는 표현을 연결해 들은 경험이 없던 거예요. 대화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영유아기엔 함께 다양한 자극을 경험하게 하고, 그때의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해 들려주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의성어·의태어를 써주면 좋아요. 표현이 풍성해지거든요. “달팽이가 기어간다”보다 “달팽이가 스르르 기어간다”, “계단을 내려간다”보다 “계단을 폴짝폴짝 내려간다” 식으로요. 꾸며주는 말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지 가르쳐주는 거죠. 이게 바로 어휘력으로 이어집니다.   아이가 제대로 들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질문을 던져주세요. “초록색 차가 빠르게 지나가네”라고 말했다면, 아이에게 “차가 어떻게 지나갔지?”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이때 가능하면 아이가 문장으로 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직접 문장을 만들어 말하면 그 상황이나 표현이 내 경험이랑 더해지면서 이미지로 기억에 남습니다. 나중에 읽기로 넘어가도 이 방법을 쓸 수 있어요. 간단한 문장(초록색 차가 빠르게 지나갔다)을 읽게 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차가 어떻게 지나갔지?”라고 묻고 문장으로 답하게 돕는 겁니다.   홍인재 교장에 따르면 두뇌는 소리를 내어 읽을 때 글자와 소리를 더 잘 연결시킨다. 그가 “초등학생 때는 소리내어 정확하게 읽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프리랜서 김성태]  ━  📢 “정확하게 읽지 않으면 읽어도 모른다”   잘 읽으려면 소리와 글자를 연결하는 데 능숙해야 한다. 여기엔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그 연결이 정확해야 한다는 거다. 한글은 남들보다 빨리 뗐는데, 정작 단어와 문장 읽기가 안 된다면 이 연결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홍인재 교장은 “한글(글자)과 소리를 정확하게 연결하지 못하면 글자(이미지)를 보고 소릿값이 안 떠오르고, 소릿값을 찾는 데 집중하느라 뜻을 떠올리는 건 요원해진다”고 말했다. 글자와 소리가 막힘없이 연결되는 것, 이게 바로 읽기 자동화다.    읽기 자동화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세요. 문자를 보고 소리뿐 아니라 이미지가 자동으로 떠오르고, 뜻까지 이해하는 걸 말해요. 제가 한 글자씩 말해볼 테니, 머릿속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보세요. 먼저 ‘호’, 그다음은 ‘주’. 아마 여기까지 들으면 특정한 이미지가 떠오를 겁니다. 여기에 한 글자를 더 보탤게요, ‘머’. 뭐가 떠오르나요?   호주머니요. 바로 이게 자동화입니다. 지금은 소리를 듣고 자동화가 일어난 건데요, 읽을 때도 이런 자동화 과정이 일어나요. 문자를 보는 것과 동시에 소리와 이미지, 뜻까지 한번에 떠오르는 거죠. 성인은 이 과정이 너무 익숙해서 인식하기 어렵지만, 아이들은 이 과정 자체가 막힘없이 일어나지 못해요. 능숙해질 때까지 연습이 필요하죠.   어떤 연습을 해야 하나요?  정확하게 읽어야 해요. 그러려면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한 소릿값(音價)으로, 맥락에 맞게 의미를 살려 읽는 겁니다. 소리를 내면 우리 뇌는 본 것과 들은 것을 더 정확하게 연결합니다. 반면에 눈으로만 보면 대강 흘려 읽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아는 단어로 치환해서 읽고 지나가죠. ‘입금(入金)’의 뜻을 모르는 초등학생이 ‘통장으로 입금합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 ‘입금’을 ‘임금(왕)’ 등으로 바꿔 읽는 식으로요. 읽기 편한 대로 대충 보고 넘기는 겁니다. 읽기에 미숙한 아이들은 글자를 쫓아 읽는 데 바빠 틀리게 읽은 줄도 모릅니다. 이러면 전체 맥락도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고, 읽고도 어떤 내용인지 모르죠. 그래서 저는 한글 해득 이후부터 초등 6학년까지는 소리 내어 읽기를 권장합니다.   무조건 소리 내어 읽으면 되나요?  읽기 수준에 따라 단계별로 도와줘야 하는데요. 아이들의 읽기 단계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1단계는 음절 단위로 읽기예요. ‘호주머니’를 ‘호’ ‘주’ ‘머’ ‘니’ 한 글자씩 읽습니다. 한글을 떼고 읽기를 시작하는 아이들이 주로 음절 단위 읽기를 합니다. 이 시기에는 낱글자의 소릿값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소리와 글자 연결이 매끄러워집니다. 음절 단위에 익숙해지면 2단계 어절 단위로 읽습니다. ‘어제/ 호주머니에/ 구슬을/ 넣었습니다’라는 한 문장을 낱말 단위로 끊어 읽어요. 문장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음절과 어절 단위로 읽는 시기에는 ‘빠르게’ 보다 ‘정확하게’ 읽고 이해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단어를 읽고 난 뒤에는 떠오른 이미지를 말로 꺼내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가요? 의미 단위 읽기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문장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면서 낯선 단어가 나와도 읽는 걸 멈추지 않습니다. 맥락에 맞게 추론해가며 문장의 의미를 살려 읽을 줄 알죠. 이걸 ‘유창하게’ 읽는다고 하는데요. 유창하게 읽어도 초등 6학년까지는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아직 낯선 단어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렴풋이 추론해서 읽고 넘어갔더라도 따로 시간을 내어 단어의 정확한 뜻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전을 찾아서 뜻을 파악하라는 의미인가요? 단순히 사전적 의미만 찾으면 안 됩니다. 동의어, 반대어 등 관련어를 포함해 맞춤법까지 정확하게 확인해야 해요. 이 과정을 건너뛰면 언어 감각이 저하됩니다. 예를 들어 ‘싫다’와 ‘어렵다’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두 단어의 의미가 전혀 다른데, 비슷하게 사용한 겁니다. 이러면 같은 문장을 읽고도 각자 자기 식대로 이해합니다. 낱말 뜻을 대충 알면 학습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하죠. 상대의 말을 오해하니까요.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사흘’ 논란이나 ‘심심한 사과’ 논란 모두 단어 뜻을 제대로 몰라서 일어났던 해프닝이죠.   33년간 학교 현장에서 문해력 교육을 해온 홍 교장은 경험과 노하우를 담아 선생님들과 함께 『말글 공부』 , 『손바닥 그림책』을 펴냈다.[프리랜서 김성태]  ━  📢 “깊이 있게 읽어야 문해력 큰다”   문해력의 마지막 퍼즐은 ‘깊이 있게 읽기’다. 깊이 읽어야 읽고 쓰는 능력을 일상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 교장은 “읽은 내용을 학습에 활용할 줄 모른다면 독자를 배려해 글 쓸 줄 모른다면 그것도 문해력 부진”이라며 “깊이 있게 읽어야 이것들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깊이 있게 읽는 건 무엇인가요? 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경 지식을 활용해 해석하는 걸 말합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글쓴이가 의도하는 것을 찾고, 글에 대한 내 생각을 덧붙이는 것까지 포함하죠.    초등학교 저학년이 하기엔 어려워 보이는데요? 깊이 있게 읽으려면 먼저 독해(讀解)가 돼야 합니다. 독해는 말 그대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거죠. 아이들은 한글을 떼고 읽기에 익숙해지는 과정 내내 독해를 해왔어요. 듣고 읽은 것을 경험과 연결해 이미지로 떠올리는 식으로요. 이미지로 이해하기에 충실했다면 탄탄한 기초를 만든 겁니다. 여기에 배경 지식이 더해지면 글을 이해하는 폭이 깊어집니다.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고, 중심 문장을 찾을 수 있는 것도 가능해지고요. 초등학교 4~6학년 정도면 깊이 있게 읽는 활동이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상당수 아이들이 깊이 있게 읽기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독해를 하려면 유창하게 읽기와 어휘력이 선행돼야 합니다. 유창하게 읽지 못하면 글자의 소리를 기억해 내느라 정작 내용에는 집중할 수 없거든요. 이는 곧 이미지를 떠올려 이해하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초등학생 때 소리 내어 정확하게 읽는 활동을 많이 해야 하는 건 그래서예요. 그러나 현재의 초등 교육과정은 ‘정확하고 유창하게 읽기’보다 그 다음 단계인 ‘읽고 이해하기’ 활동이 너무 많습니다. 기초를 탄탄히 다질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포기하는 겁니다. 이러면 독서도 쉽지 않습니다.    깊이 있게 읽기에 도움 되는 책이 따로 있을까요? 기승전결 있는,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진 책이 좋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선악 구조가 분명한 전래동화를 추천해요. 맥락이 있으면 상황을 이미지로 그릴 수 있거든요. 고학년으로 가면 스토리가 있되 비교·분석·추리 등 종합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책을 권합니다. 추리 소설이 대표적입니다. 추리 소설은 앞뒤 맥락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상황의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다음 장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방대해 단숨에 읽기 힘듭니다. 한 권을 놓고 여러 번 읽기를 반복하며 자신만의 논리를 펼쳐 가면 좋습니다. 여기 중요한 건 연령이나 학년이 아니라 아이의 문해력 수준에 맞게 책을 선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직 의미 단위 읽기가 유창하지 않은 아이에게 추리 소설을 읽히면 책에 대한 흥미만 떨어집니다. 홍인재 교장은 “깊이 있게 읽으려면 유창하게 읽기와 어휘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정확하게 읽기 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홍 교장은 “한국의 문해력 교육은 한 번 미끄러지면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미끄럼틀”이라고 비판했다. 읽고 쓰기에 문제가 생기면 이전 단계로 돌아가 배워야 하는데 그런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아이 한명 한명에게 맞춘 맞춤형 교육이 필요하다. 홍 교장은 “문해력 교육의 핵심은 애착”이라며 “말을 걸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함께 소리 내어 읽어 줄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이와 함께 다양한 소리를 듣고, 분위기를 느끼고, 생각을 말로 나눠 보세요. 함께하는 시간보다 밀도 있는 소통이 중요합니다. 누군가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줄 때 잃어버린 문해력도 다시 살아납니다   ■ 문해맹 교육 전문가 홍인재 교장이 말하는 문해력 부진 피하는 법  「 ① 읽기 전 소리 구분이 먼저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까진 사람의 말소리를 많이 들려주세요. 소리를 작은 단위로 구분할 수 있어야 글자와 연결해 읽습니다. 의성어·의태어를 적극 사용해 어휘력을 기르고, 읽고 들은 걸 질문으로 확인하면서 이해력을 높여주세요.  ② 정확하게 읽지 못하면 읽어도 모릅니다. 글자를 읽는 순간 소리와 이미지가 떠오르고 내용이 이해되는 읽기 자동화 연습이 필요합니다. 소리 내어 읽을 수 있게 독려해 주세요. 그래야 정확하게 읽습니다. 모르는 단어 뜻도 정확하게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③ 깊이 있게 읽어야 제대로 된 문해력을 갖춘 겁니다. 깊이 읽기는 배경 지식을 활용한 이해 활동입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의미 단위로 유창하게 읽는 게 선행되어야 합니다. 유창하게 읽기가 완성되었다면, 기승전결 분명한 이야기과 추리 소설을 읽게 하세요. 」   ■ hello! Parents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 ① “문해력, 읽고 쓰는 능력이 전부 아니다” 문해력 전문가 4인의 진단 ② “냉장고에 붙인 단어카드, 소용없다”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   ③ “문해력 부진 주범은 사교육” 12년 논술 강사 출신 『공부머리독서법』 저자 최승필 ④ “글 잘 쓰려면, 자료 조사할 시간에 ‘이것’ 하라”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⑤ “읽어도 모르겠다면, 세 가지를 확인하라” 홍인재 전주 신동초 교장  」 관련기사 요즘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문해력 부진, 범인 밝혀졌다 ①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문해력 키우려면 학원 끊어!” 12년 대치동 논술강사 일침 강의 30%도 안하고 “글 써라”…서울대 교수의 이상한 수업

    2023.04.02 14:30

  • “아이 바꾸려고 하지 마라” 예민한 아이와 대화하는 법

    “아이 바꾸려고 하지 마라” 예민한 아이와 대화하는 법 유료 전용

    순간의 말이 아이의 가슴에는 평생 남습니다. 옳은 말 백 마디보다 좋은 말 한마디를 해줘야 하는 이유죠. 좋은 말은 내 생각과 감정에 달렸어요.   『엄마의 말 연습』 저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윤지영 교사는 “양육자의 좋은 말에는 ‘공감, 가르침, 긍정성’ 이 세 가지가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우상조 기자 “양육자에게 말 연습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에 윤지영 교사는 이렇게 답했다. 말도 습관으로 굳어지기 때문에 평소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육서를 아무리 읽어도 아이 앞에 서면 머릿속이 하얘져 화를 내고 마는 건 그래서다.   18년 차 초등학교 교사이자 14세·10세 두 아이의 엄마인 윤지영씨는 교사로서, 양육자로서 좋은 말을 늘 고민해 왔다. 공감과 가르침 그리고 긍정, 이 세 가지만 담겨도 오해 없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말을 상황별로 정리해 『엄마의 말 연습』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책이 나온 후 ‘좋은 말’은 결국 양육자의 감정과 생각에 달렸다는 생각이 더해졌다. hello! Parents와 ‘우리 아이 자존감 키우는 엄마의 대화법’을 연재한 이유다. 윤지영 교사는 “아이와의 관계는 어떤 말을 주고받느냐에 달렸다”며 “양육자부터 옳은 말이 아니라 좋은 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말과 옳은 말, 어떤 차이가 있나요? 좋은 말은 공감과 가르침, 긍정을 담고 있습니다.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제공해야 하는 양육자의 역할에 충실하죠. 반면에 옳은 말은 공감과 가르침, 긍정 중 일부만 담고 있거나, 모두 담고 있더라도 균형 잡혀 있지 않죠. 예를 들어볼게요. 양육자가 코로나19에 걸려 방에서 격리 중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규칙을 어기고 자꾸만 방문을 엽니다. 이때 어떤 말을 하게 되나요?   들어오지 마. 자꾸 만나면 전염돼. 너도 아프고 싶어? 아이가 양육자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행동 지침도 가르쳐주는 말이네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말입니다. 가르침이 담겨 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좋은 말은 아닙니다. 공감과 긍정성이 빠져 있거든요. 문을 열고 싶었던 아이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협박으로 행동을 통제하고 있죠. 가르침만 있고 공감과 긍정성은 빠져 있는 대표적인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좋은 말’로 착각하곤 합니다. 틀린 내용은 없거든요. 말대로만 하면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죠. 하지만 아이는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양육자에게 공감받지 못한 기억은 거리감을 만들고, 대화를 어렵게 만듭니다. 옳은 말을 좋은 말로 바꿔야 하는 건 그래서예요.   하지만 말 습관을 바꾼다는 게 쉽지 않아요. 이론대로 안 되는 게 양육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말은 내 생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에요. 수많은 양육서를 읽어도 실전에서 무용지물인 이유죠.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말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양육자들이 평소 자신의 말과 생각을 돌아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면 합니다. 말을 관찰하고, 그 말이 나오기까지의 생각을 복기해 보는 겁니다.   어떻게요? 첫 번째는 내 말에 질문을 던져보는 겁니다. 현재 내 말의 문제를 찾기 위해서예요. 아이에게 말을 마친 뒤 ‘공감하는 단어가 있었나?’  ‘적절한 가르침을 줬나?’ ‘긍정적으로 말했나?’ 묻고 답해봅니다. 이때 말의 어조가 높았는지 낮았는지, 톤이 차분했는지, 흥분했는지 등 표현 방식도 점검하면 좋습니다. 이런 질문은 내 말의 유형을 알아차리고, 부족한 부분을 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park.jeongmin@joongang.co.kr   말의 유형은 뭔가요? 양육자의 말은 공감과 가르침을 기준으로 네 가지로 나뉩니다. 공감과 가르침 없이 상황을 회피하는 ‘방관형’, 가르치지만, 공감은 없는 ‘명령형’, 공감하지만 가르침은 없는 ‘친구형’입니다. 마지막 ‘멘토형’에는 공감과 가르침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네 가지 유형 중 내 말이 어디에 속하는지 알면 개선점이 선명해집니다. 예를 들어 “들어오지 마. 전염돼. 아프고 싶어?”라는 말은 ‘명령형’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내 말을 돌아보면 “틀린 말은 아니잖아”라며 합리화했던 말에 공감은 없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러면 아이의 입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가 왜 문을 열고 들어왔던 걸까라는 궁금증이 생기며 공감할 수 있는 말을 찾게 됩니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을 때가 있어요. 생각을 불러일으킨 원인도 찾아야 합니다. 단서는 상황에 있습니다. 말의 유형과 그 말이 나온 상황을 연결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양육자의 몸이 아플 때나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는 ‘방관형’ 말이, 시간에 쫓길 때는 ‘명령형’ 말이 자주 나오곤 합니다. 이렇게 연결해 보면 ‘좋은 말’이 나오기 힘든 상황의 공통점이 보입니다. 주변을 돌볼 심리적 여유가 없을 때인데요. 그 기저에 깔린 불편한 감정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결국 이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생각이 바뀌고, 말도 변합니다.    ━  📢 감정 조절력을 키워라   좋은 말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감정’이다. 윤지영 교사의 말을 빌리자면 감정은 생각을 지배하고, 생각은 말을 지배한다. 그래서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줄 알면 심리적 여유가 없더라도 생각을 바꿔 ‘좋은 말’을 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하지만 감정을 조절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18년 차 초등학교 교사인 윤지영씨는 아이와 대화할 때 감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감정이 생각을, 생각이 말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제주=우상조 기자 당장 아이가 거리에서 떼쓰고, 바쁜 아침 시간 징징거리면 감정이 폭발하기 마련이에요. 양육자도 사람이니까요. 그럴 때 감정을 숨겨야 하나요? 감정을 숨기라는 게 아니라 성숙하게 처리하자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감정도 공감과 가르침, 긍정을 담아 품위 있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내 감정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정을 어떻게 알아차리나요? 감정은 하나가 아닙니다. 분노, 불안, 초조, 수치심, 죄책감 등 온갖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요. 그 가운데 말의 뿌리가 되는 핵심 감정을 이해해야 하는데요, 양육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감정은 ‘불안’과 ‘죄책감’입니다. 자신이 명령형의 말을 자주 한다면 ‘내가 지금 불안한가?’, 친구형의 말을 자주 한다면 ‘내가 책임감을 느끼나?’라고 물어보세요.   불안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말에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불안은 예측 가능성에 영향을 많이 받아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듭니다. 그래서 “빨리 먹어” “제대로 씻어”처럼 짧고 굵은 명령형으로 말합니다. 불안은 분노도 동반합니다. 죄책감은 자신감과 자존감이 부족할 때 느끼기 쉽습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내 탓’으로 돌리며 아이에게 “엄마·아빠가 미안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친구형의 말이 그렇습니다. 아이 마음에 공감은 잘해주지만 가르치는 말은 서툽니다. 불안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말은 아이를 위한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양육자 자신의 불안과 죄책감을 숨기려는 게 진짜 이유입니다.   아이를 기르면 누구나 불안과 죄책감이 커지는 것 같아요. 감정은 자신이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내 내면의 상처나 자신의 가치관, 생활 습관의 결과물인 거죠. 양육자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말을 통해 감정을 드러내면 아이 역시 똑같은 감정을 느낍니다. 결국 감정 다루는 법이 대물림될 수밖에 없죠. 우리가 먼저 감정을 조절하지 않으면 아이도 그렇게 자라는 겁니다.   그럼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요? 두 가지를 연습해야 합니다. 우선 상황을 보는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거든요. 부정적 감정이 일어난다는 건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죠. 관점을 바꾸려면 긍정적 감정, 예를 들어 감사함, 자랑스러운, 자신감, 용감한, 뿌듯한 등의 감정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장점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저는 매일 장점 찾기를 추천합니다. 내 아이의 장점 , 나의 장점, 아이가 잘 한 일, 일상에서 기분이 좋았던 순간 등 긍정적 감정과 그 상황을 기록하는 거예요. 또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에 내가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나머지 하나는 뭔가요? 눈에 보이는 사실만 말하는 연습을 하세요. 부정적 감정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부풀려 생각할 때 더 커집니다. 아이가 시험 공부를 안 하면 “너 이러면 대학 못 가” “너 이러면 꼴찌야”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근거 없이 불안만 조장하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럴 땐 “오늘 안 하면 내일은 두 배로 해야 해” 또는 “1시간 게임하고 놀았네. 쉰만큼 공부한다고 했으니 앞으로 1시간 공부해”라고 하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실은 반박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도 수긍합니다.    ━  📢 아이를 바꾸려고 하지 마라   말 습관을 바꾼다는 건 그리 간단치 않다. 감정과 생각을 먼저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윤 교사도 ‘옳은 말’에서 ‘좋은 말’로 바꾸기까지 2년이 넘게 연습했다고 한다. 지금도 완벽하지 않아 매일 노력 중이다. 말을 바꾼 뒤 배운 게 하나 있다. 말 연습의 목적을 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두어야 한다는 거다.    두 아이의 엄마인 윤지영 교사는 “예민한 둘째 아이를 위해 말 공부를 시작했다”며 “말을 바꾸면 양육자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이 바뀌고, 아이의 말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우상조 기자 아이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좋은 말을 연습하는 거 아닌가요? 그 어떤 힘으로도 쉽게 바꿀 수 없는 게 사람입니다.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부모라도 타고난 성향을 바꿀 수 없습니다. 나를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말을 바꾸는 건 그것보단 쉽습니다. 말이 바뀌면 생각과 감정도 바뀌고요. 그러면서 아이와의 관계도 좋아집니다. 제가 경험자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열 살 둘째가 촉감에 예민한 편이에요. 그래서 옷 입히고, 밥 먹이고, 외출 할 때마다 애를 먹었어요. 아이의 예민함을 낮추려고 이사도 하고, 놀아주는 시간도 늘리고, 공부법도 바꿔봤는데 나아지질 않았어요. 저는 저대로 지치니 감정적인 말만 쏟아내고, 아이는 그럴수록 더 예민해졌죠. 아이를 위해 제가 어떤 노력을 했나 정리해 봤는데, 딱 하나 안 한 게 있더라고요.   뭐였나요? 양육자 윤지영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요. 아이를 대하는 제 태도엔 변한 게 없더라고요. 문제는 저에게 있는데, 해결책을 외부에서만 찾은 거예요. 그때부터 아이를 새롭게 보려고 했어요. 아이가 무엇 때문에 예민해졌고, 무엇 때문에 뾰족하게 말하는지 아이에게 호기심을 가졌어요. 그랬더니 아이의 속마음이 보이더라고요. 아이가 아무리 거칠게 말해도 말속에 숨겨진 아이의 마음이 보이니 제 감정이 쉽게 흔들리지 않았어요. 그러니 좋은 말도 더 쉽게 나오고요. 그래서 저는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만들려면 아이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아이를 관찰하라고 말합니다. 내 아이 전문가가 되는 거예요. 이때 주의할 건 아이의 좋은 면을 보고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이가 새로운 음식을 먹지 않았더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도전하려고 노력한다’고 봐야 한다는 거예요. 예민함의 긍정적 측면을 보면 아이는 적이 아닌 동지가 됩니다.   하지만 예민한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는 알 거에요. 얼마나 힘든지요. 말씀하신 게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민한 아이가 힘든 이유는 아이의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해서예요. 예민한 아이들은 불안도는 높은데 표현을 못해요. 이럴 땐 양육자가 아이의 숨겨진 욕구를 직접 읽어주면 한결 관계가 좋아집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곳에서 외식하자고 했을 때 아이는 무조건 “싫다”고 합니다. 예전의 저라면 “그럼 넌 가지마”라고 말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아이가 왜 안 가려는지 알아요. 낯선 음식을 먹는 게 힘든 거예요. 그럴 땐 “낯선 음식이 먹고 싶지 않구나? 그럼 네가 먹어봤던 메뉴를 시키면 어떨까?”라고 말하는 거죠. 그러면 아이도 수긍합니다. 아이의 예민함은 바꿀 순 없어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아이 역시 긍정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감정을 처리하는 법을 배워갈 겁니다.    예민한 아이와 잘 지내기 위해 ‘좋은 말’을 고민하던 시절 윤지영 교사는 매일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아이를 키우며 행복할 순 없을까?” 풀리지 않았던 질문의 답은 ‘말 습관’에 있었다.   아이에게 화내도 괜찮습니다. 완벽한 말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매일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그렇게 양육자가 먼저 말을 바꾸면 아이도 따라 합니다. 서로가 좋은 말을 주고받을 때 좋은 관계도 만들어지고요. 모든 게 말에 달렸어요.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좋은 말엔 세 가지가 있다” 아이에게는 공감·가르침·긍정이 담긴 말을 해야 합니다. 좋은 말 습관을 바꾸려면 내 말을 되새기며 말 유형을 찾아보고, 세 가지 요소 모두 담겼나 체크합니다. 각 말의 유형이 주로 나오는 상황의 감정을 파악합니다. -“감정 조절력을 키우자” 말 습관은 ‘감정 조절력’이 높아야 합니다. 감정 중 ‘불안’과 ‘좌절감’ 관리가 제일 중요해요.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아이와 양육자 모두의 장점을 찾으며 긍정적으로 상황을 이해합니다. 또 아이에게는 눈에 보인 사실만 말합니다. -“아이를 바꾸려 하지 마라” 내 아이 전문가가 되세요. 아이에게 궁금증을 갖고, 속마음을 헤아리세요. 예민한 아이는 아이 욕구를 읽어주세요. 양육자의 말이 바뀌어도 아이는 변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이가 양육자의 말을 따라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 관련기사 “나 50점 맞았어” 아이 고백…자존감 키우는 부모의 말 “속상했구나? 엄마가 미안해” 이 공감, 만능 공식 아니다 “말 잘 듣네~” 칭찬 아니다…‘애어른’ 만드는 부모 화법 “싸울 거면 밖에 나가 싸워” 이 말이 가장 안 좋습니다

    2023.04.02 12:09

  • 강의 30%도 안하고 “글 써라”…서울대 교수의 이상한 수업 ④

    강의 30%도 안하고 “글 써라”…서울대 교수의 이상한 수업 ④ 유료 전용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인 유네스코는 문해력을 ‘최소문해력’과 ‘기능적 문해력’으로 나누어 정의한다. 최소문해력은 글자를 읽고 글씨를 쓰는 기초 능력을 뜻하고, 기능적 문해력은 글자로 이뤄진 의미 덩어리, 즉 글을 읽고 이해하고, 쓰고 활용하는 능력을 뜻한다. 두 가지 문해력 모두 ‘읽기’만큼 ‘쓰기’를 강조하고 있다.   hello! Parents가 만난 4인의 전문가들은 문해력을 ‘커뮤니케이션 역량’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 비춰보아도 쓰기는 읽기만큼 중요하다. 읽기가 누군가가 쓴 글을 읽고 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쓰기는 누군가를 이해시킬 목적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해야 소통하고 협업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 문해력 논의는 아직 ‘읽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hello! Parents 문해력 집중 해부 4편에서는 충분히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쓰기’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를 만났다. 박 교수는 서울대 창의성 교육을 위한 교수 모임의 일원으로, 9년간 글쓰기 중심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park.jeongmin@joongang.co.kr   글쓰기는 종이 위에서 생각하는 행위다.   “글쓰기 수업도 아닌데 왜 매시간 학생들에게 글을 쓰게 하냐”는 질문에 박주용 교수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교육자인 윌리엄 진서의 말을 인용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글을 써오라고 하는 것은 너의 생각을 가져오라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박주용 교수의 수업에서 학생들은 매 수업 주어진 읽을거리를 읽고 글을 써 제출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친구의 글에 A·B·C 등의 학점을 부여해 평가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이 될지 제안도 해야 한다. 그럼 친구는 그 제안이 글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됐는지 다시 평가한다. 고강도 글쓰기 수업 같지만 심리학 전공 수업이다.   박주용 교수가 서울대 한 강의실에서 자신의 수업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9년 전부터 학생들에게 매 수업 글쓰기 과제를 제출하게 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배워야 할 개념이 많은 전공 수업을 굳이 이렇게 운영하는 이유가 뭔가요? 굳이 교수한테 그런 개념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려고 대학 온 거 아닌가요? 인터넷만 있으면 누구나 온갖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요. 과거엔 전문가만 접근할 수 있던 지식이나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해력이 최근 ‘경제 문해력’ ‘과학 문해력’ 등으로 세분화되는 것도 바로 이런 변화 때문이고요. 혼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걸 굳이 교수한테 배울 필요가 없죠.   그럼 학교에서는, 그리고 교사나 교수로부터는 무엇을 배워야 하나요? 읽고, 이해하고, 생각하고, 쓰는 방법요. 이게 곧 문해력이고, 스스로 공부하는 힘이죠. 제 수업은 바로 이걸 위해 설계됐어요.   교수가 제시하는 읽을거리를 읽는 건 이해가 갑니다. 어떤 개념이나 핵심 내용을 알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왜 꼭 글쓰기를 해야 하나요?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글을 써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내가 어디까지 이해했고, 어떤 부분을 모르는지도 글을 써야만 알 수 있죠. 읽기만 했을 땐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써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론』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독서는 지식이 많은 사람을,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학생들에게 어떤 개념이나 핵심 내용을 설명하는 글을 쓰게 하는 건가요? 글을 쓴다는 건 생각한다는 겁니다. 내용을 파악하는 글을 쓴다는 건 글쓴이의 생각을 이해하는 수준의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한 차원 더 높은 생각은 뭘까요? 글쓴이의 생각에 대한 나의 생각이죠. 그래서 저는 글의 핵심 내용이나 주장을 비판하거나 발전시키라는 쓰기 과제를 냅니다. 너의 생각을 가져오라는 겁니다.   비판하거나 발전시키는 글을 쓰라고 요구하면 자기 생각을 가져오나요? 어떤 내용이나 주장을 비판하려면 왜 그게 말이 안 되는지 설득해야 해요. 왜 비판하는지, 그 이유가 자기 생각이죠. 글쓴이의 생각을 발전시키려면 그걸 긍정하는 이유와 발전 방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자기 생각이고요.   읽기에서 끝나지 않고 글쓰기도 해야 하는 이유는 알겠어요. 그런데 저는 학교에서 글쓰기를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어요. 신문사에 들어와서야 글쓰기를 배웠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글쓰기를 왜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건가요? 지금까지는 굳이 나의 생각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패스트 팔로잉 전략으로 충분했거든요. 이미 만들어진 지식을 더 많이, 더 빨리 아는 게 더 중요했죠. 강의 중심 교육이 이뤄진 이유예요. 하지만 이제 달라졌어요. 퍼스트 무빙 전략이 필요해졌으니까요. 그러려면 생각을 해야 해요. 미국에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전 교육과정에서 글쓰기를 하게 합니다. 프랑스에선 엄청난 예산을 써서 일주일간 100% 논술형 대학입학 자격시험(바칼로레아)을 치르게 하고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  글 잘 쓰려면, 자료 조사할 시간에 ‘이것’ 해야   박주용 교수는 “글을 잘 쓰려면 자료 조사에 시간을 쓰기보다 생각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을 쓰는 건 종이 위에서 생각하는 행위”라고도 했다. 김현동 기자   쓰지 않는 읽기는 반쪽짜리 공부라는 걸 알았다 해도 막상 쓰려고 하면 써지지 않는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국어교육 역시 독해 중심으로 이뤄지는 게 현실이다. 하얀 컴퓨터 화면 위에 깜빡이는 커서를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박주용 교수가 글쓰기 중심의 수업을 진행하면서 만난 학생들도 같은 질문을 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줄 만한 교재를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걸 찾지 못했다. 작문 중심의 쓰기 방법론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내용이나 그에 대한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치는 방법을 담은 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직접 쓴 책이 『생각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장 중요한 건 태도입니다. 실제로 글쓰기 태도 검사에서 글쓰기 능력이 타고난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글쓰기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배우고 노력하면 좋아진다는 생각을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리고 꾸준히 써야 합니다. 앞서 인용한 윌리엄 진서는 ‘글쓰기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강제로 일정한 양을 정기적으로 쓰는 것’이라고까지 했어요. 운동선수가 훈련하듯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주로 쓰는 글은 논픽션, 주장하는 글이에요. 이걸 잘 쓰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그 사람이 자기주장을 어떻게 전개하는지 분석해 보는 게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논리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어요. 또 하나, 글쓴이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보는 겁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읽을거리를 주고, 핵심 내용을 파악해 그에 대해 비판하거나 발전시키라는 글쓰기 주제를 주는 이유죠.    글을 쓰려면 자료 조사가 필수적인데요, 얼마나 해야 할까요? 저는 학생들에게 글쓰기 과제를 낼 때 제가 제시한 읽을거리만 읽고 쓰라고 합니다. 다른 자료를 찾아보는 게 나빠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확보하라는 취지죠. 자료 조사를 많이 한다고, 많이 읽는다고, 많이 안다고 꼭 좋은 글을 쓰는 건 아니에요.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생각을 하는 겁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고 조언하는 사람이 많아요. 기자들도 좋은 글을 쓰려면 취재를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자료 조사를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낯설어요. 자료 조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죠. 제 미국 유학 시절 얘기가 도움이 될 듯하네요. 지도교수가 논문을 쓰다 ‘이런 연구 있지 않나?’ 하고 물으면 열 번에 아홉 번은 제가 답을 했어요. 그것도 몇 년에 누가 썼다고 정확하게요. 연구실의 구글이었죠. 그런데 논문을 쓸 때가 됐는데, 저만 못 쓰는 거예요. 대답 한 번 못하던 미국인 친구들은 주제를 잡고 들이 파더니 성과를 막 내는 데 말이죠. 뭐가 문제였을까요?   너무 많이 알아서 궁금한 게 없었던 걸까요? 제가 알던 지식은 ‘생기 없는 지식’이었던 겁니다. 활용하지도 않고, 검증하지 않고, 참신한 생각과 결합하지도 않은 그저 주입한 지식요. 『교육의 목적』을 쓴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노스 화이트헤드는 ‘박식함에 그치는 사람은 지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제가 자료 조사보다 생각하고 글쓰기를 강조하는 건 그래서예요. 생기 없는 지식에 얽매이지 말라는 겁니다.   한 번에 완성되는 글은 없습니다. 글을 다듬는 교수님만의 노하우가 있을까요? 제가 쓴 글의 내용을 누군가에게 말해 보거나 직접 보여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얻기 위해서죠.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 좋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어요.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또 하나는 누군가가 자신의 글에 대해 피드백을 요청하면 최대한 받아주는 거예요. 그래야 내 글에 대한 피드백도 요청할 수 있으니까요(웃음).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글을 피드백하면서 글 쓰는 방법도 배울 수 있거든요.    ━  강의 대신 토론을 하는 이유   박주용 교수는 “수업 전에 미리 공부하고, 수업 시간엔 토론하는 수업은 결국 문해력과 스스로 공부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현동 기자   박주용 교수의 수업에선 ‘공부’라 부를 만한 활동이 모두 수업 전에 일어난다. 읽을거리를 읽고, 글을 쓰고, 친구의 글을 평가·피드백하고, 그 피드백을 또 평가하는 전 과정이 수업 전 온라인 공간에서 진행된다. 그럼 수업 시간엔 도대체 뭘 하는 걸까? 박주용 교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토론하고, 강의는 전체 수업의 3분의 1을 넘지 않게 한다”고 말했다.   강의를 전체 수업의 3분의 1을 넘지 않게 한다고요? 개념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학창 시절 저 역시 토론 수업을 들어봤지만, 유익했다는 기억이 별로 없어요.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미리 공부하지 않고 하는 토론은 잡담과 다르지 않아요. 제 수업에서 학생들은 충분히 공부하고,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까지 정리해 오기 때문에 완전히 다릅니다.   제가 했던 토론은 진짜 토론이 아니었네요. 제대로 토론하면 어떤 점이 좋죠?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접할 수 있습니다. 애매하거나 복잡한 사안에 대한 이해와 관용 역시 높아집니다.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의견을 덧붙이면서 공감 능력도 향상되죠. 다양한 생각을 종합하고 통합하는 기술도 늘고요. 무엇보다 학습 효과도 높습니다.   토론하면 학습 효과가 높다고요? 실험 얘길 하나 들려드리죠. 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한 그룹은 동영상 강의를 듣고 혼자 공부하게 했어요. 또 다른 그룹은 동영상 강의를 듣고 토론하게 했죠. 마지막 그룹은 동영상 강의를 필사해 텍스트로 만든 후 그걸 가지고 혼자 공부하게 하고 토론했어요.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을 두고 세 그룹 모두 학습 내용에 관한 시험을 봤죠. 결과가 어땠을까요?   토론한 그룹이 더 좋은 성적을 받았나요? 토론을 한 2개 그룹의 성적이 혼자 공부한 그룹보다 좋았어요. 두 그룹 중에선 혼자 공부하고 토론한 그룹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았고요.   왜 토론하면 학습 효과가 더 좋은 거죠? 토론하면 상호작용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에요. 일반적으로 학습 내용과 관련된 상호작용이 많으면 성취도 역시 높아집니다. 다양한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죠. 토론을 한 2개 그룹의 토론 장면을 녹음해 분석했더니, 혼자 공부하고 토론한 그룹이 더 많이 상호작용했어요. 이 그룹이 가장 높은 성적을 받은 이유죠.   교수님 수업에선 토론 주제를 어떻게 선정하나요? 제가 글쓰기와 함께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과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질문이죠. 한 사람당 최소 3개의 질문을 제출하게 합니다. 그 질문 중에서 토론 주제를 꼽기도 하고, 학생들이 쓴 글에서 추출하기도 합니다. 적당한 게 없으면 제가 만들기도 하고요.   한국인은 유독 질문을 안 하는 걸로 유명한데요, 학생들이 질문을 많이 하나요?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폐막식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줬는데, 아무도 질문하지 않은 게 회자됐을 정도잖아요. 질문하지 않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권위적인 문화 때문이기도 하고, 강의 중심의 대형 수업에선 질문을 받을 여유가 없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가 수업하면서 느낀 건 바로 이거였어요. ‘몰라서 못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질문할 수 없습니다. 알아야 그제야 궁금한 게 생기는 법이에요.   박주용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글을 쓰면 창의력도 생긴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창의력은 가장 좋은 결과물에 바치는 일종의 찬사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선 그걸 만들 때까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계속 생각하세요.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글쓰기입니다.      ■ 9년 간 글쓰기 중심 교육 실천한 박주용 교수의 쓰기론 「 ① 읽기는 반쪽짜리 공부다. 글을 써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글을 쓸 때는 핵심 내용을 설명하는 걸 넘어 그것에 대한 나의 입장과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지식을 주입하는 걸 넘어 뭔가를 만들어내는 생각을 할 수 있다. ② 글을 잘 쓰려면 꾸준히 써야 한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그 사람이 자기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생각하는 것이다. 자료 조사보다 중요하다. ③ 읽고 생각해서 써왔다면 강의할 필요가 없다. 강의를 안 해서 생긴 시간엔 토론을 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 다양한 생각과 관점을 접하고, 이들 의견을 종합하는 기술을 갖게 된다. 」   ■ hello! Parents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 ① “문해력, 읽고 쓰는 능력이 전부 아니다” 문해력 전문가 4인의 진단 ② “냉장고에 붙인 단어카드, 소용없다”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  ③ “문해력 부진 주범은 사교육” 12년 논술 강사 출신 『공부머리독서법』 저자 최승필 ④ “글 잘 쓰려면, 자료 조사할 시간에 ‘이것’ 하라”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⑤ “책 읽어주기와 소리 내 읽기부터 시작하라”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 저자  홍인재 전주 신동초 교장(4월 3일 발행) 」    관련기사 요즘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문해력 부진, 범인 밝혀졌다 ①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문해력 키우려면 학원 끊어!” 12년 대치동 논술강사 일침

    2023.03.29 10:09

  • “문해력 키우려면 학원 끊어!” 12년 대치동 논술강사 일침 ③

    “문해력 키우려면 학원 끊어!” 12년 대치동 논술강사 일침 ③ 유료 전용

    초기 문해력의 골든타임이 만 8세(초2)까지라면 초등학교 6년은 이를 한 단계 발전시킬 기회다. 학령기 문해력의 핵심은 ‘독서’다. 하지만 학령기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다. 2021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은 연간 66.6권의 책을 읽었다. 2년 전보다 20.3권 감소한 수치다. 학생들이 꼽은 독서 방해 요인 1위는 ‘스마트폰, 텔레비전, 인터넷, 게임 등을 이용해서’였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문해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hello!Parents는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기획을 하면서 두 번째로 최승필 독서전문가를 만났다. 2018년 베스트셀러였던 『공부머리 독서법』의 저자인 그를 지난 8일 만나 ‘학령기 읽기’를 중심으로 문해력 높이는 법을 물었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park.jeongmin@joongang.co.kr 아이 문해력을 키우려면 사교육부터 그만둬야 해요. 학원 강의는 듣는 공부거든요. 독서논술 학원에 다녀도 문해력이 늘지 않는 건 그래섭니다. 그 시간에 책을 읽게 해야 문해력이 높아져요.   “초등학생 자녀를 둔 양육자가 아이의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뭘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최승필 저자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해 우리 국민이 쓴 사교육비는 26조원을 기록했다.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7년 이래 최고치다. 사실 이런 통계가 아니어도 사교육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건 누구나 안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데도 그는 주저 없이 사교육을 문해력 부진의 주범으로 꼽았다. 더구나 그는 2006년부터 강남 대치동에서 12년간 아이들을 가르친 논술강사 출신이다.    ━  📢‘듣는 공부’ 시키는 사교육 그만둬라   최 저자는 논술학원에서 일하던 초기 ‘요즘 애들 정말 똑똑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초등학생이 중학교 과정 수학 문제를 술술 풀고,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수하던 아이들 대부분이 중학교에 올라가 성적이 떨어졌다. 예외가 없었다. 주변 강사들은 “원래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럴까?’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유를 알게 됐다. 문제는 사교육이었다.   문해력 부진과 사교육이 무슨 관계인가요? 학교 공부가 뭔가요? 기본적으로 교과서라는 책을 읽고 이해하는 거예요. 책에 담긴 지식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게 수업이고요. 아이들은 선생님 설명을 ‘듣고’ 교과서를 ‘읽으며’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그럼 사교육은 뭘까요? 교과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해 주는 서비스입니다. 사교육을 받으면 읽고 이해할 필요가 없어요. 강사의 설명을 듣고, 문제를 풀고, 틀린 문제에 대한 설명을 다시 듣고, 다시 문제를 풀면 되니까요. ‘읽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듣고’ 이해하는 공부를 하는 데 익숙해지는 거죠.   듣고 이해하는 게 문제인가요? 이해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닐까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시간이 너무 많이 듭니다. 교과서를 읽으면 20~30분이면 끝날 내용도 강사의 설명을 들으면 1시간이 걸리죠.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습해야 할 지식의 양이 적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안 됩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용이 많아지고 어려워져요. 초등 고학년만 돼도 전 과목을 설명해 주기 버겁습니다. 실제로 듣는 공부법이 비효율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어요. MIT미디어랩에서 한 대학생에게 교감신경을 측정하는 기기를 부착한 후 활성화 여부를 관찰했어요. 교감신경이 가장 활성화되지 않은 때가 언제였을까요? TV 시청할 때랑 수업 들을 때였어요. 강의를 들을 때 사람의 뇌는 잠을 잘 때보다 더 멍한 상태에 빠진다는 겁니다.   또 다른 문제는 뭔가요? 사교육을 많이 받으면 책 읽을 시간이 줄어듭니다. 학원 안 가는 시간에는 놀아야 하니까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책을 좋아하던 아이도 고학년이 돼 ‘학원 뺑뺑이’를 돌다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없어집니다. 독서는 자연스레 학원‧숙제‧스마트폰에 밀려 뒷전이 되죠. 이런 아이는 중학생이 되면 대부분 성적이 떨어집니다.   책 안 읽고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는 애들도 있지 않나요? 일부 특이한 경우입니다. 호기심이 많고, 집요한 아이들이요. 이런 아이들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볼 때 이해되지 않는 걸 대충 넘어가지 않고 집요하게 탐구합니다. 항상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품고 살기 때문에 일상생활이나 학교 공부만으로 언어능력이 향상됩니다. 쉽게 말해 평소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죠.    지금 당장 사교육을 끊고 혼자 공부하게 해야 한다는 건가요? 어렸을 때부터 사교육 의존도가 높은 아이들은 혼자 공부하는 습관이 없습니다. 학원을 그만둔다고 바로 스스로 공부하지 않아요. 더구나 문해력이 낮기 때문에 혼자서 교과서나 참고서를 읽고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니 공부가 잘 될 리 없고, 다시 사교육의 문을 두드리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죠. 학원을 끊기에 앞서 문해력부터 키워야 해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학원에 의존해선 안 됩니다. 학원에서 강사의 설명을 들으면 그 자리에선 이해가 됩니다. 공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죠. 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아요. 『공부머리 독서법』을 쓴 최승필 저자가 지난 8일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운영 중인 서점 ‘공독서가’에서 책에 둘러싸인 채 웃고 있다. 그는 “사교육이 아이들의 문해력을 저하시키는 주범”이라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  📢권장도서 목록부터 갖다 버려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아이가 책 읽기를 좋아할 수 있을까? 그의 답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재밌게 읽으면 된다는 것이다. 얼핏 쉬워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말 속엔 아이가 ‘주도적’으로 ‘몰입독서’를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읽을 책을 고르는 것부터 아이에게 맡겨야 한다. 최 저자는 “아이에게 학년별 권장도서를 건네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권장도서를 주는 게 왜 잘못됐나요? 양육자가 아이가 읽을 책을 정해준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게 왜 문제인가요? 양육자가 양서(良書)를 권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직접 고르지 않은 책이니까요. 결과적으로 독서에 대한 아이의 흥미와 주도성을 떨어뜨려요. 읽고 싶지도 않은 책을 줘놓고 안 읽는다고 다그치면 누가 책을 읽고 싶을까요? 독서와 문해력에서 더 멀어지는 길이죠. 책을 보고 있어도 글자만 읽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해하지 않은 채로요. 독서의 핵심은 ‘재미’예요. 아이 스스로 ‘어? 재밌네’라고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독서를 놀이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거죠. 그러려면 모든 행위의 주체가 아이여야 합니다. 책을 고르는 것도 마찬가지죠. 책 고르기는 독서의 시작입니다. 이 책 저 책 고르면서 독서와 더 가까워지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취향을 파악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다 진짜 재밌어서 ‘몰입’해 읽는 책을 만나면 게임 끝이죠.   ‘몰입’해 읽을 수 있는 책은 어떻게 찾으면 될까요? 우선 권장도서 목록부터 갖다 버리세요. 그다음 아이와 손잡고 도서관에 갑니다. 양육자와 아이가 읽고 싶은 책을 같이 빌리고 함께 읽습니다. 양육자가 책을 읽는 게 아이에게 가장 좋은 독서 환경입니다. 만약 아이가 재미없다고 하면 끝까지 읽으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책을 사지 않고 빌려 읽어야 하는 이유죠.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아이가 푹 빠질 수 있는 ‘인생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책’을 못 찾고 시간만 낭비하면 어쩌죠? 양육자가 조급해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재밌는 책을 발견할 수 있어요. 낚시와 비슷합니다. 낚싯대를 던진 다음 물고기가 덥석 물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야 하잖아요. 참지 못하고 낚싯대를 일찍 건져 올리면 그 어떤 물고기도 낚을 수 없죠. 인생책도 마찬가지예요.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는 게 낚싯대를 던지는 겁니다. 한두 번은 허탕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양육자가 기다려주면 언젠가 ‘비단잉어’ 같은 인생책을 낚을 수 있죠. 그러려면 아이가 책에 흥미를 느낄 때까지는 독서를 최우선 순위로 둬야 해요.   그러다 성적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요? 문해력을 키우지 않고는 절대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좋은 성적을 받는다 해도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문해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독서고요. 믿고 가셔야 해요. 최승필 저자는 “아이가 책에 흥미를 갖게 하려면 권장도서 목록부터 갖다 버리라”고 조언했다. 우상조 기자  ━  📢딱 한 권만 ‘제대로’ 읽게 하라   독서를 통해 문해력을 키우려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어야 할까? 최 저자는 “딱 한 권만 읽어도 된다”고 말했다. 단서가 하나 있다.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거다. 책을 본 뒤 줄거리는 물론 구체적인 장면도 몇 개 기억한다면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 그 정도는 대체로 기억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다수 아이들이 독서와 관련해 안 좋은 습관을 하나 갖고 있어요. 바로 속독(速讀)입니다. 우등생의 읽기 방법으로 한때 유행했었죠. 책을 많이 읽는데도 언어능력이 낮은 아이들은 대부분 속독을 해요. 책을 빨리 읽는 건 문해력이나 사고력을 키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책을 빨리 읽었다’는 만족감만 얻을 뿐입니다. 실제로는 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고요. 같은 맥락으로 다독(多讀)하는 것도 권장하지 않아요. 책을 많이 읽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제대로 읽기 어렵거든요. 수준에 맞지 않게 어려운 책을 읽는 것도 문해력 키우는 데는 도움이 안 됩니다.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볼 가능성이 크니까요. 이건 독서가 아니라 도서 목록 수집이죠. 저는 학습만화나 전집도 추천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소리 내 읽는 속도로 정독(精讀)해야 합니다. 등장인물의 관계와 그 인물이 처한 상황, 주요 사건과 줄거리를 충분히 파악하면서 읽어야죠.   얼마나 읽어야 할까요? 책을 읽는 게 익숙하지 않다면 많이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일주일에 2~3시간, 2주에 한 권만 읽으면 됩니다. 학교 쉬는 시간이나 자기 전에 30분만 투자해도 되죠.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아이 수준보다 낮은 책을 주는 게 좋아요. 그래야 흥미를 느낄 테니까요. 최승필 저자는 “책을 통해 문해력을 키우려면 딱 한 권만 제대로 읽어도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아이가 책을 제대로 읽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요? 초등학교 1~3학년이라면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세요. 도서관에서 『외딴 집 외딴 다락방에서』나 『내 배가 하얀 이유』 같은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책을 빌리세요. 아이가 읽어 본 적 없고, 흥미를 느끼는 책으로요. 양육자가 먼저 책을 읽은 뒤 아이에게 건네주세요. 아이가 책을 읽고 나서 줄거리를 물어봤을 때 얼마나 상세하고 정확히 얘기하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줄거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거나 내용이 단순하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볼 수 없죠. 독서퀴즈를 내는 것도 방법입니다.   독서퀴즈는 어떻게 내면 되나요? 아이가 볼 책을 양육자가 먼저 읽은 뒤 질문을 10개 정도 정리해 물어보세요. 문제를 낼 때는 줄거리와 직접 연관이 있는 핵심적인 내용을 다뤄야 합니다. 『외딴 집 외딴 다락방에서』를 예로 들면 ‘에마가 사흘 동안 쓸 방은 원래 누구의 방이었나’ ‘동생이 에마에게 다락방에 대해 한 얘기는 뭔가’ ‘다락방 선반 위 작은 도자기 인형은 어떤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나’ 같은 질문이죠.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0.1초 만에 나와야 합니다. 만약 10개 질문 중에 3문제 이상 틀렸다면 문해력이 낮다고 봐야 합니다. 2~3문제만 맞혔다면 문해력이 심각한 상태고요.   문해력이 낮은 아이들은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양육자가 읽어주는 게 좋아요. 아이의 언어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서 일주일 동안 매일 초반 3분의 1을 읽어주는 거죠. 이런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아 독서하는 행위 자체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또 도입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뒷부분도 궁금해 하지 않고요. 책의 앞부분을 읽어주면 핵심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돼 호기심을 갖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자발적으로 읽을 수 있게 되죠. 일주일 동안 반복한 뒤에는 10개 정도 핵심 질문을 던져 아이가 제대로 읽었는지 점검하면 됩니다. 4~5권을 반복하다 보면 아이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책이 나옵니다. 그때 다음 단계로 올라가면 됩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혼자 힘으로 읽게 해야죠. 단계별 독서와 반복독서가 있는데요. 단계별 독서는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학년별로 읽어 나가는 겁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의 문해력을 가졌다면 초등학교 3학년 대상 책 10권을 읽고, 독서퀴즈를 봅니다. 이때 세 권 이상 만점이 나오면 초등학교 4학년 책으로 넘어가는 식이죠. 반복독서는 자기 연령에 맞는 책을 여러 번 반복해 읽는 겁니다. 문해력이 떨어지면 자기 연령대의 책을 버거워 합니다. 글의 논리와 분량·정보량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한두 번 읽어서는 수박 겉핥기밖에 안 됩니다. 반복독서는 이 악순환을 끊어주죠. 독서퀴즈를 다 맞을 때까지 몇 번이든 반복해 읽으면 다음부터는 수월해집니다.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최승필 저자의 ‘문해력 높이기’는 책으로 시작해서 책으로 끝난다. 그가 매력 없는 정답 같은 주장을 하는 건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구구단도 못 외운 채 반에서 꼴찌를 하던 ‘열등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플란더스의 개』를 읽고 독서의 매력에 푹 빠졌고, 1년간 300권의 책을 읽었다.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내신성적 9등급이었던 그가 수능에서 1등급을 받은 비결도 독서다.   독서는 저의 인생을 바꿔놨습니다. 책을 제대로만 읽으면 누구나 저처럼 ‘기적 아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아이와 함께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같이 책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최승필 저자는 “아이가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려면 독서퀴즈를 내보면 된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 최승필 저자가 말하는 아이 문해력 키우는 법 「 ①‘듣는 공부’ 시키는 사교육 그만두세요.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을 다닌 탓에 교과서를 ‘읽으며’ 학습하기보다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문해력이 길러지지 않고 학습량이 많아지는 중학교부터 성적이 하락합니다.  ②권장도서목록부터 갖다 버리세요. 문해력을 높이는 비결은 ‘좋아하는 책을 재밌게 읽는 것’입니다. 아이 주도적으로 ‘몰입독서’를 하게 도우려면 권장도서목록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가 혼자 힘으로 재밌는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세요. ③딱 한 권만 ‘제대로’ 읽게 하세요. 줄거리는 물론 구체적인 내용까지 기억할 수 있어야 책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양육자가 퀴즈를 내서 확인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책과 담 쌓은 초등 저학년이라면 양육자가 초반 3분의 1정도를 읽어주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   ■ hello! Parent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 ① “문해력, 읽고 쓰는 능력이 전부 아니다” 문해력 전문가 4인의 진단(3월 20일 발행) ② “냉장고에 붙인 단어카드, 소용없다”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3월 23일 발행) ③ “문해력 부진 주범은 사교육” 12년 논술 강사 출신 『공부머리독서법』 저자 최승필 ④ “내가 매 수업 글쓰기 과제를 내는 이유”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3월 30일 발행) ⑤ “책 읽어주기와 소리 내 읽기부터 시작하라”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 저자  홍인재 전주 신동초 교장(4월 3일 발행) 」 관련기사 요즘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문해력 부진, 범인 밝혀졌다 ①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독서나무와 체크리스트, 2가지면 끝” 성효쌤의 특급 독서전략

    2023.03.26 11:05

  •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유료 전용

    문해력은 단숨에 키워지지 않는다. 빠르면 엄마 배 속부터 움트기 시작해 노년까지 전 생애에 걸쳐 발달한다. 평생 익히고 다져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결정적인 시기는 있다. 출생 후부터 만 여덟 살(초등학교 2학년)까지의 아동기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가 문해력 성장의 골든 타임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때 기초를 다져놓지 못하면 전 생애에 걸쳐 학습, 업무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기초 문해력이 튼튼하면 학업 성취부터 진로 선택까지 탄력을 받는다.   문해력 집중 해부 기획을 시작하며 hello!Parents가 아동 문해력 전문가인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를 가장 먼저 만난 이유다. 문해력 발달의 첫 단추는 어떻게 끼워야 하는 걸까? 문자를 읽고 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문해력의 뿌리를 단단하게 내려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지난 10일 만난 최 교수에게 ‘읽기’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문해력 발달 가이드를 물었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park.jeongmin@joongang.co.kr   문해력을 위해 한글 학습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아이에게 말을 충분히 들려주는 겁니다. 일상에서 쓰는 적절하고 의미 있는 말들요.   “아이의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최나야(아동가족학) 서울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글을 읽기 전 말의 소리와 의미를 처리하는 능력부터 잘 길러놓아야 한다는 얘기다. 문해력의 핵심이 되는 이해력은 그렇게 자란다.    최나야 교수는 아동 언어·인지 분야 전문가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로서 아이의 문해력 성장을 직접 도운 실전 경험도 있다. 그런 지식과 노하우를 담아 『문해력 유치원』『초등 문해력을 키우는 엄마의 비밀』 등의 책을 썼다.   최 교수는 “이해력은 문자를 배우기 훨씬 전부터 생기기 때문에 아이와 나누는 대화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한글은 일찍, 빨리 뗀다고 능사가 아니다.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아이 혼자 책을 읽도록 하는 것도 문해력 발달에는 바람직하지 않다. 최 교수는 아이의 문해력 성장을 위해 읽기 단계에 따라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보라고 말했다.   지난 10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최나야 교수는 “아이들이 한글을 읽기 전부터 일상 속에서 적절하고 의미있는 말소리를 충분히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  ① 읽기 전 아이: 충분히 대화하고 있나요?   최나야 교수는 “영·유아기야말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평생 가져가야 할 문해력의 바탕을 만드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문해력 발달에 필요한 건 듣고 말하는 경험, 즉 일상 대화다.   글자도 모르는 영·유아기가 문해력 발달에 왜 중요한가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말소리를 듣고 처리하는 데서 시작돼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문해력은 놀랍게도 엄마 배 속부터 시작되죠. 태아도 소리를 들으니까요. 익숙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짤막하고 반복적인 말을 아이들은 잘 기억합니다. 영·유아기에는 듣고 말하는 경험을 충분히 해야 해요. 어른과 상호작용하면서 구어(口語)로서의 언어가 입력돼야 해요. 대화가 질적으로 수준 높은 언어로 이뤄졌다면 더 좋죠. 음식도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야 건강에 좋은 것처럼요.   아이와 어떻게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아이가 잘 모르는 단어나 구문을 알게 해주면 됩니다. 일부러 유아어를 쓰거나, 쉬운 단어만 반복해 쓰는 건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중요한 건 아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먹는 오감과 일상을 언어와 결합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밥을 줄 때 ‘오늘은 밥이 고슬고슬하게 잘 됐다’고 하거나, ‘너는 진밥이 좋아, 된밥이 좋아?’라고 물어보는 거죠.   아이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아무 맥락 없이 생뚱맞게 어려운 단어나 표현을 쓰면 혼란스럽겠죠. 그런데 상황적 맥락이나 대화의 흐름 같은 단서가 있다면 충분히 뜻을 파악할 수 있어요. 어른이 부연해서 쉽게 뜻을 풀어서 말해줄 수도 있고요. 누구나 언어 습득 능력을 타고나요.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특정 상황에서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접수하고, 처리해서 활용할 줄도 알죠. 이렇게 경험, 맥락 속에서 알게 된 단어일수록 기억에도 오래 남아요.   아이와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눈다는 걸 어렵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림책을 읽어 주세요.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내용에 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거든요. 사건의 전후 관계나 이야기 흐름도 이해할 수 있고, 문자에도 익숙해져요. 다양한 단어와 표현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어휘력을 늘리는 데도 효과적입니다. 특히 아이가 다섯 살 무렵에 어휘력이 극적으로 발달하고 개인 차도 벌어지기 때문에 이때 그림책을 읽는 게 정말 좋습니다.   유아 때부터 어휘력 차이가 나기 시작하나요? 다섯 살 정도면 평균 6000개 단어를 이해하고, 2200개 정도의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요. 어휘력은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유아 때 어휘력 차이가 학령기에 더 크게 벌어진다는 겁니다. 이미 아는 단어가 많은 아이는 새로운 단어도 쉽게 학습하거든요. 폭넓은 어휘력을 토대로 독해 능력도 심화시킬 수 있고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그림책 읽기와 대화를 통해 의미 있는 단어를 알려주는 게 중요해요.    단어 카드나 낱말 사전 책을 보여주는 건 어휘력 발달에 도움이 될까요? 그렇게 하면 아이가 단어를 많이 아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이렇게 습득할 수 있는 단어엔 한계가 있어요. 낱말 카드 속 ‘서랍’이라는 글자는 어떤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게 아니죠. 또 실제 서랍에 ‘서랍’이란 글자를 붙여 놓는 것도 인위적이고 어색합니다. 집 안 사물마다 그 이름을 붙여 놓는 경우는 없잖아요. 실제로 상황 속에서 배우는 게 학습의 본질적인 방식인데, 그런 방법과 동떨어져 있어요. 은연중에 글자를 빨리 익히라는 압력으로 작용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랍에 ‘서랍’ 카드를 붙이는 건 맥락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 카드를 보면서 “아, 서랍이라는 말은 저런 모양의 글자를 가졌구나” 하고 이해할 수도 있고요.  만약 서랍마다 ‘양말’ ‘속옷’ 이런 글씨를 붙인다면 그건 이야기가 다릅니다. 일상이란 맥락이 있어요. 서랍마다 가족들의 이름을 적어두는 것도 마찬가지죠. 각각의 서랍에 든 물건의 종류, 소속을 알려주는 상황과 이유가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그냥 ‘서랍’이라고 붙여두는 건 아이에게 ‘서랍’이라는 글자를 알려주려는 목적 외엔 아무런 맥락이 없습니다. 이런 방법은 길게 갈 수도 없고, 큰 효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맥락이 있는 좋은 방법이 있나요?  동네를 산책하면서 자주 가는 가게의 간판을 함께 읽고 써보는 것, 장 보러 가서 마트 전단 속에서 좋아하는 식품 이름을 찾고 읽어 보는 것 같은 활동이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아이들은 일상의 맥락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배울 때 가장 재미있고, 능동적으로 배울 수 있어요.    ━  ② 읽기 시작한 아이: 한글 스스로 배울 기회를 주고 있나요?   문해력은 말 그대로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읽으려면 한글을 알아야 한다. 요즘 이르면 만 3세 전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늦어도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습득하고,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나야 교수는 “한글은 문해력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며 “일찍 한글을 깨쳐야 한다는 조급함과 불안함부터 버리라”고 했다.   최나야 교수는 “한글은 듣고 이해하는 기초 이해력이 있다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충분히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한글 언제 시작해서 언제까지 떼는 게 좋을까요? 기본적으로 글자라는 상징 기호가 영·유아가 습득하기 어렵다는 걸 아셔야 해요. 여러 나라에서 만 6세,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들어갈 때 문자를 가르치라고 국가 교육과정으로 정해놓은 건 그래서죠. 듣고 이해하는 기초 문해력이 있다면 입학해서 한글을 배워도 충분히 빨리 익히고 따라갈 수 있어요.   한글을 일찍 떼면 읽기도 수월해지고, 공부하는 데도 유리하지 않나요? 너무 어렸을 때 한글을 공부하면 득보다 실이 클 수 있어요. ‘엄마는 내가 이 글자를 읽기 원하는데, 어렵네’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러면 학습 자체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어요.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예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오면 너무 쉽게 배울 수 있어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면서 고난의 길을 갈 필요는 없잖아요. 문해력 논란이 일었던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한글을 못 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해를 못 하는 게 문제였잖아요. 불안해하지 마세요. 아이가 문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도 절대 늦지 않습니다.   한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는 건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나요? 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대상에 대한 설명을 외계어 같은 문자로 끼적이는 시도를 할 거예요. 이걸 ‘마킹’이라고 하는데요, 마킹이 나타나면 글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겁니다. 친구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하는 것도 신호일 수 있겠죠.   그렇다면 한글 어떻게 가르치는 게 좋을까요? 영·유아 때 모음과 자음을 쪼개서 가르치거나, 교재를 사용해 명시적으로 학습하는 건 발달에 맞지 않아요. 시키면 할 수야 있지만, 절대 좋은 방식은 아니죠. 아이들은 어떤 문자를 익힐 때 먼저 덩어리로 인식합니다. 한글이든, 영어든요. 그러고 나서 통계적 학습을 합니다. ‘저렇게 생긴 모양은 항상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 하고 깨닫는 거죠. 그래서 어떤 말소리에 해당하는 단어를 자꾸 눈에 보이도록 해주시는 게 좋아요. 다시 말하지만, 단어 카드를 보여주라는 게 아니에요. 맥락 안에 맞는 인쇄물이 좋죠. 같이 읽는 그림책, 아이에게 쓴 쪽지 같은 거요. 중요한 건 아이들이 스스로 그 원리를 파악할 기회를 주는 겁니다. 가르쳐 주면 그 기회를 빼앗는 겁니다. 그럼 스스로 배우는 학습자가 되기 어려워요.   한글을 읽을 수 있다면 문해력 발달을 위해 무엇을 하면 될까요? 읽기는 크게 해독과 이해라는 두 과정으로 나뉘어요. 해독은 문자를 인식하고 거기에 소릿값을 적용하는 과정이고, 이해는 그 뜻을 파악하는 단계죠. ‘서랍’이라는 글자를 보고 소리를 내 읽는 게 해독이고, 실제 서랍을 떠올리는 게 이해예요. 한글을 뗀다는 건 해독에 익숙해진다는 의미예요. 그런 측면에서 해독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 유창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배우는 지식의 양도 늘고 수준도 높아지거든요. 교과서만 봐도 글이 많아요. 글자를 보고 소릿값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해독이 자동화돼야 남은 에너지를 뜻을 이해하는 데 쓸 수 있어요. 결국 문해력 차이는 이해력에서 오기 때문에, 읽는 것보다 이해하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최나야 교수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소리 내어 읽는 연습을 통해 한글 소리값을 읽는 해독 과정을 자동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초등학교 2학년까지 해독을 자동화할 정도로 익숙하게 하려면 어떤 활동을 해야 하나요? 초등학교 1~2학년까지는 낭독을 꾸준히 하세요. 소리 내 읽는 거죠. 낭독은 유아에게 하게 하면 안 됩니다. 아이가 글을 읽느라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유아는 어른이 유창하게 느낌을 살려 읽는 걸 들으면서 그림책을 보는 게 훨씬 더 좋습니다.   한자도 배워야 할까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책 펴놓고 한자 형태와 음, 뜻을 외울 필요가 없다는 얘기예요. 대신 한자어에 대한 ‘감’은 있어야 해요. 우리 말의 50~60%가 한자어라 그런 감이 없으면 어휘를 습득하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거든요. 한자어에 대한 감각은 일상 대화를 통해 충분히 키워줄 수 있어요. 어떤 한자어에 대한 뜻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같은 글자가 들어가는 단어들의 군집을 만들어서 설명해 주는 거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죠? 물고기 ‘어(魚)’를 예로 들어 볼게요. 저녁 반찬으로 생선이 나오면 ‘어(魚)’로 끝나는 물고기 이름 대기 게임을 하는 겁니다. 그럼 나중에 아이가 ‘연어’ ‘병어’ 같은 단어를 처음 들어도 머릿속에 생선이란 의미가 떠오를 겁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비슷한 단어를 연결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언어에 대한 감각, 상위 언어 인식이 발달합니다. 한자도 그렇고, 우리말 단어도 배우려면 끝이 없잖아요. 언어에 대한 감이 생기면 하나의 단어를 들어도 열을 아는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  ③ 읽고 이해하는 아이: 함께 책을 읽고 있나요?   한글 읽기, 즉 해독이 능숙해지면 이해력을 본격적으로 키워야 한다. 책을 읽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문제는 클수록 점점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나야 교수는 “책을 꾸준히 읽게 하려면, 재미있는 책부터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민규 기자 독서가 유익한 건 알지만, 아이들이 책을 영 읽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교과서도 글밥이 많아지고 호흡이 길어지죠. 해독 과정이 미숙하거나 이해력이 떨어지면 책 읽기가 버거워집니다. 점점 독서와 멀어지고, 결과적으로 이해력이 클 기회도 얻지 못하죠. 이해력, 문해력을 키우려면 결국 책을 꾸준히 읽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러려면 일단 재미있는 책을 읽어야 해요. 특히 초등 저학년 때는 읽기 어렵거나 따분하게 만드는 책이라면 과감하게 내려놓는 게 좋아요. 설령 그 책이 필독서나 권장도서라고 해도요. 아이의 관심사, 흥미를 끄는 책이 좋습니다. 그런 책을 아이가 먼저 발견하게 하거나 양육자가 찾아서 추천해 줄 수도 있겠죠.    학습 만화도 괜찮을까요? 만화를 읽는 데도 문해력이 필요해요. 수준 높은 학습만화도 많고요. 특히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루는 학습만화라면 읽는 게 나쁘지 않아요. 다만 아이들이 다른 책은 전혀 읽지 않고 학습만화만 본다면 그건 문제입니다. 읽기에도 균형이 필요해요. 아이가 좋아하는 주제의 학습만화를 읽게 하고, 같은 주제를 다룬 책 중 재미있는 걸 골라서 읽도록 해 주세요.   독해 문제집을 푸는 건 도움이 될까요? 이해력은 어떤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낼 때 제대로 발달합니다. 문제집에는 전체 글 중 일부만 발췌하거나 짧은 글만 실리죠. 문제를 맞혀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고요. 결국 문제 풀이를 위한 얕은 이해에 그치고 맙니다. 문제집을 풀어서는 폭넓은 이해력을 기르기 힘들어요.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게 훨씬 도움이 됩니다.   아이의 이해력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워요. 아이가 책을 읽고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이가 읽는 책을 양육자도 같이 읽는 겁니다. 책을 다 읽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이가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파악할 수 있어요. 아이의 사고력, 어휘력 수준도 알 수 있고요. 아이의 취향과 관심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꼭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돼요. 유아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초등학생 때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읽는 걸로 충분해요. 중요한 건 꾸준히 읽는 거죠.   아이 스스로 책 읽기를 시작하는 건 언제가 좋을까요? 같이 읽는 과정이 부드러워야 혼자 읽는 단계로도 잘 나아갈 수 있어요. 아이가 한글을 읽게 됐다고 혼자 읽으라고 하는 건 좋지 않아요. 이제 막 혼자 걷기 시작한 아이에게 달리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적어도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양육자가 읽어 주는 게 필요해요. 혼자 읽는다고 해도 질문도 하고, 관심도 표현하면서 적절히 개입해 주는 게 좋습니다.   최나야 교수는 “문해력이 성장 가도를 달리려면 스스로 책을 찾아 읽는 독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주어졌을 때 아이가 다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게 책을 읽은 경험이 많은 아이일수록 책을 집어 들 확률이 높다”고 최 교수는 말했다.   아이가 재미있어하는 책을 같이 읽으세요. 즐겁게 읽고 또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을 차곡차곡 쌓으세요. 그런 일상이 모여서 문해력이 자라는 큰 힘이 됩니다.   ■ 최나야 교수가 던지는 읽기 단계별 질문 「 ① 읽기 전 아이, 충분히 대화하고 있나요? 글을 이해하는 능력은 말소리를 듣고 처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일상 대화와 그림책 읽기로 적절하고 의미 있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충분히 들려 주세요. ② 읽고 시작한 아이, 한글 스스로 배울 기회를 주고 있나요? 한글을 일찍 떼는 데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한글 떼기보다 언어에 대한 감을 키우는 게 문해력 발달에 효과적입니다. ③ 읽고 이해하는 아이, 함께 책 읽고 있나요? 문해력의 핵심은 이해력입니다. 이해력은 꾸준한 책 읽기를 통해 길러집니다. 꾸준히 읽으려면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읽어야 해요.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   ■ hello! Parent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 ① “문해력, 읽고 쓰는 능력이 전부 아니다” 문해력 전문가 4인의 진단(3월 20일 발행) ② “냉장고에 붙인 단어카드, 소용없다”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 ③ “문해력 부진 주범은 사교육” 12년 논술 강사 출신 『공부머리독서법』 저자 최승필(3월 27일 발행) ④ “내가 매 수업 글쓰기 과제를 내는 이유”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3월 30일 발행) ⑤ “책 읽어주기와 소리 내 읽기부터 시작하라”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 저자  홍인재 전주 신동초 교장(4월 3일 발행) 」 관련기사 요즘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문해력 부진, 범인 밝혀졌다 ① 4자녀 ‘영어 영재’ 만든 비법 “모르는 단어 뜻 찾지마라” “문해력 키우고 싶은가? 그럼 종이접기 시켜라”

    2023.03.22 1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