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걸로 범죄자 수 알 수 있다…미국서 초3이 하는 테스트

    이걸로 범죄자 수 알 수 있다…미국서 초3이 하는 테스트 유료 전용

    문해력이 높다는 건 어휘력, 독해력, 사고력, 배경 지식 등 다양한 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의미다. 그중에서도 어휘력은 다른 요소에 앞서는, 기본 바탕이 되는 요소다. hello! Parents가 어휘력을 키워드로 3명의 전문가를 만난 이유다. 앞서 만난 이향근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교수와 강용철 경희여중 국어 교사는 일상에서 어휘력을 키우는 방법과 한자를 통해 어휘를 늘리는 방법을 소개했다. 세 번째 전문가는 어휘력을 키우는 방법으로 지식책을 꼽았다. ‘콩나물쌤’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초등 교사 출신 전병규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박정민 디자이너 초·중·고 12년간 배우는 단어가 몇 개인 줄 아세요? 4만 개입니다. 1년에 약 3400개, 하루에 10개는 익혀야 한단 얘기죠. 이걸 영어 단어처럼 외워서 익힌다? 결코 안 됩니다. 지식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올 6월 『초4 지식책 읽기를 시작해야 합니다』를 출간한 전병규 작가는 “왜 지식책을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지식책을 읽으면 단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지식책엔 이야기책(문학)에 나오지 않는 어려운 학문 어휘가 많이 나온다”며 “학문 어휘는 공부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 같은 존재”라고 강조했다.   20년간 초등 교사로 일한 그는 2021년 출간한 『문해력 수업』으로 유명하다. 『콩나물쌤의 문해력 꽉 잡는 한자어 수업』『우리 아이 문해력 독서법』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문해력의 중요성을 피력해 온 그가 최근 주목한 키워드가 바로 ‘지식책’이다. 정보와 지식을 다룬 지식책을 읽어야 더 높은 수준의 문해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식책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뭘까? 이야기책보다 읽기 어려운 지식책을 좀 더 쉽게 읽는 방법은 없을까? 지난 18일 전병규 작가를 직접 만나 물었다. 『문해력 수업』의 저자인 전병규 작가가 문해력 다음으로 꽂힌 키워드는 바로 ‘지식책’이다. 지식책 문해력이야말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문해력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식책은 이야기책에 비해 추상적인 지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문해력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전민규 기자  ━  📢교과서로 충분하다? 지식책 읽어야   이야기책은 좋아해도 지식책은 내켜 하지 않는 아이가 많다. 비단 아이들만 그런 건 아니다. 2022년 한국 출판 생산 통계에 따르면, 지난 1년간 발행된 책 중 가장 많은 건 단연 문학(21.6%)이다. 지식책이라고 볼 수 있는 철학(3.9%), 역사(3.5%), 순수과학(1.5%) 등은 10%가 채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식책이 이야기책보다 인기가 없는 건 어렵기 때문이다. 이야기책이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사건이나 갈등을 다룬다면, 지식책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지식을 담고 있다.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는 게 당연하다. 이야기책엔 시간 흐름을 고려한 서사 구조가 있지만 지식책은 그렇지 않은 것도 한몫한다.   어른도 읽기 까다로운 지식책을, 아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미국 LA에선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한 읽기 테스트 점수를 가지고 미래의 교도소 입소자 숫자를 예측합니다. 읽기 점수가 높으면  입소자 숫자가 줄죠. 반대라면, 늘고요. 왜 이런 예측 모델이 나왔을까요? 교도소 입소자를 들여다보니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던 겁니다. 문해력이 낮으면 학교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고 거기서 생긴 좌절감과 분노가 결국 범죄로 이어집니다.   문해력이 중요하다는 건데, 이야기책을 읽어도 문해력을 키울 수 있지 않나요? 이야기책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건 지식과 정보입니다. 추상적인 개념이죠.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해지고요. 학교만 그럴까요? 지식 정보 시대잖아요. 미국 미래학자인 버크민스터 풀러는 ‘지식 2배 증가 곡선’이라는 걸 만들어냈는데요. 지식이 2배로 늘어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겁니다. 1990년에는 약 25년이 걸렸는데, 지금은 1년 밖에 안 걸리죠. 앞으로는 12시간까지 짧아질 거라는 전망도 있어요. 지식책 문해력이 중요한 건 그래섭니다.   지식책 문해력이 학업 성취도까지 연결되나요? 수능 만점자들이 ‘교과서 중심으로 예습, 복습 열심히 했다’고 말하잖아요. 교과서,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지식을 체계적으로 집약해 놓은 책이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래서 교과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핵심 지식만 남겨놓고 주변부를 다 제거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거든요. 재미는 세세한 사실, 디테일에서 오잖아요. 교과서로 공부하는 게 재미가 없는 이유죠.   지식책을 읽으면 교과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서 공부를 잘하는 건가요? 교과서를 잘 이해한다는 건 지식을 습득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교과서가 지식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책이잖아요.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럼에도 자기가 가진 배경 지식을 활용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한 거죠. 지식책 문해력이란 바로 이겁니다.   지식책 문해력이 있으려면, 배경 지식이 있어야 하겠네요? 배경 지식이 있으면 유리합니다. 하지만 배경 지식이 많다고 지식책을 잘 이해하는 건 아니에요. 책에 서술된 지식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죠. 제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건 그걸 말하는 겁니다. 배경 지식과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는 방법론을 모두 갖춰야 지식책 이해력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정보가 폭증하는 시대엔 특히 후자가 중요하고요. 모든 지식을 아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때그때 새로운 정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지식책이 어휘 학습에도 도움이 된다고요?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어휘는 대부분 학문 어휘예요. 외워서 학습하는 덴 한계가 있죠. 자연스럽게 내용과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해요. 지식책을 읽으면서 그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을 들춰 봐선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하죠? 추론해 보는 습관이 필요해요. 한자어를 보며 의미를 추론할 수도 있고, 문맥을 보고 추론할 수도 있죠. 특히 학문 어휘는 한자어가 많기 때문에 한자만 잘 알아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요. 선사 시대를 보통 원시 시대라고 생각하잖아요.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정확하게 이해한 것도 아니죠. 선사의 한자는 각각 ‘먼저 선(先)’에 ‘기록 사(史)’입니다. 기록 이전 시대를 의미하죠.    한자를 의미 중심으로 공부해야 하는 거군요? 한자를 정확하게 쓸 줄 알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는 한자를 통해 의미를 유추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두 딸에게 이런 식으로 일상에서 한자를 가르쳤어요. 아이가 어떤 단어의 뜻을 물어보면, 어떤 한자인지 알려주고 어떤 뜻인지 유추하게 하면서요. 전병규 작가는 “학교에서 배우는 건 결국 지식과 정보”라면서 “지식책을 많이 읽은 아이는 공부도 잘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초등학생이 학원에 다니면서 지식을 넣는 공부를 하는 건 효과적이지 않다”며 “그 시간에 지식책을 읽는 게 훨씬 낫다”고 했다. 전민규 기자  ━  📢준비가 안 됐다? 이야기책부터 시작   전병규 작가는 “늦어도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지식책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과정상 4학년까지는 구체적인 개념과 지식을 배우지만, 5학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상적인 개념과 지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현재 5학년, 3학년인 그의 두 딸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어렵지 않은 책을 중심으로 지식책 읽기를 시작했다.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인데 지식책 독서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지식책인 교과서를 어려워하는 아이라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그동안 지식책 독서를 많이 하지 않은 초등학교 고학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기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것보다 지식책을 늦게 시작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독서를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좀 늦게 시작해도 만회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 이럴 땐 이야기책을 먼저 읽히세요.     이야기책마저 싫어하는 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이야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읽으라고 하지 말고 읽어주세요. 책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이들도, 제가 학교에서 매일 책을 재미있게 읽어주면 금세 달라졌습니다. 이야기책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세요. 그리고 지식책 비중을 조금씩 늘려가십시오.   이야기책을 좋아하는 아이도 지식책 독서까지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지식책을 읽을 수 있고, 읽어야 할 즈음이면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거든요. 학원에 가서 머릿속에 지식을 넣는 수업을 하죠. 고등 교육이 초등학생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초등학생은 지식을 넣는 게 아니라 학습 역량 자체를 키워야 하는 시기예요. 차로 치면 엔진 자체를 키우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경차 엔진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속도를 높이고 있는 형국이에요. 그러니 차가 널브러지는 겁니다.   학습 역량을 키우는 게 문해력을 키우는 건가요? 문해력은 곧 이해력이고, 사고력이에요. 그게 학업 성취도를 결정하고요. 이걸 이해하면 아이를 지식 습득 중심의 교육에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제 두 딸은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어요. 첫째만 영어학원에 한 달 다닌 적이 있죠. 대신 저는 매일 숙제를 내줬습니다. 그중엔 지식책을 읽고 중요한 문장 하나를 쓰는 게 포함돼 있죠. 읽을 책과 매일 읽을 분량은 정해줬습니다. 처음엔 한 문장을 쓰게 했고, 크면서 두 문장, 세 문장 이런 식으로 늘렸죠. 두 딸 모두 초등학교 1, 2학년 때는 또래보다 뒤처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3, 4학년이 되자 또래와 비슷해졌고요. 4학년이 되자 그때부터는 또래보다 잘하기 시작하더군요. 문해력을 갖췄기 때문에 학습 내용이 본격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하는 고학년부터는 두각을 나타낸 겁니다.   아이가 자신에게 맞는 지식책을 직접 고르는 건 쉽지 않아요. 책을 고를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첫 번째 기준은 아이의 관심입니다. 관심이 있어야 재미가 있고, 재미가 있어야 지속해서 읽죠. 지식책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휘입니다. 어휘 난도가 책의 난도를 결정하죠. 어휘를 기준으로 책을 선정하는 저만의 방법이 있어요.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해당 페이지에 모르는 단어가 몇 개나 되는지 세는 겁니다. 초등 3학년 이하라면 모르는 단어가 2~3개면 적절한 책입니다. 3~4개는 도전해볼 만한 수준이고요. 6개 이상은 너무 어려운 책입니다. 4학년 이상이라면, 3~6개 수준이 적절합니다. 7~10개 정도는 도전적인 책이고요. 전병규 작가는 “지식책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지식책부터 읽을 순 없다”고 했다. 이야기책을 충분히 읽은 아이만 지식책을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시기에 집착하지 말고 이야기책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전민규 기자  ━  📢여전히 어렵다? 그래픽을 활용해라   지식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어떤 책을 골라야 하는지 알았다. 이제 정말 읽을 차례다. 이 단계가 가장 난도가 높다. 아이가 어려운 지식책을 포기하지 않고 읽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전병규 작가는 “몇 가지 팁을 알면 더 쉽게 읽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팁이 너무 궁금하네요. 대체 뭔가요? 우선 목차를 꼼꼼히 보게 하세요. 목차는 지도 같은 겁니다. 출발하기 전에 지도를 보면서 ‘아, 대강 이런 경로로 가면 되겠구나’ 하잖아요.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목차를 훑어보면 내가 읽을 책이 어떤 지식을, 어떻게 나눠서 설명하는지 대강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을 때도 목차는 유용해요. 지식책은 지식이라는 나무가 울창한 숲입니다. 막상 그 안에 들어가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잃어버리기 십상이에요. 그럴 때 목차를 보면서 전체 내용 중 어떤 부분에 있는지 파악하면 이해하기 수월하죠.   기자가 기사를 쓸 때도 글의 개요를 목차처럼 정리하고 글을 써요. 그래서 목차를 보면 작가가 책을 쓸 때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 줄기를 파악할 수 있어요. 목차가 책의 맨 앞에 나오는 이유도 그래서죠. 하지만 정작 목차를 중요하게 보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요. 목차를 봐야 한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언제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알려줘야 해요.   그것 말고 또 다른 팁도 있나요? 저는 아이들에게 밑줄을 그으면서 읽으라고 해요. 중요한 문장에 밑줄을 긋잖아요. 중요한 문장은 핵심 문장, 즉 주제를 담고 있는 문장이죠. 책을 다 읽고 밑줄 그은 문장만 훑어봐도 읽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핵심 단어에 동그라미를 치면 좋습니다. 가능하다면 떠오른 생각이나 이해한 내용을 메모하면 더 좋고요.   한마디로 책을 지저분하게 읽으라는 거네요? 그렇게 하면 그만큼 꼭꼭 씹어서 이해할 수 있어요. 밑줄 긋고 동그라미 치고 메모하는 과정에서 생각하니까요. 생각 없이 그냥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 치고 메모할 순 없잖아요.   그렇게 하면 아무리 어려운 책도 잘 이해할 수 있나요? ‘그래픽 조직자’를 활용해 내용을 정리해 보면 더 좋습니다. 그래픽 조직자는 시각적인 기호를 사용해 어떤 개념이나 지식, 생각을 표현하는 건데요. 마인드맵이 대표적이죠. 지식책에는 시간 흐름이나 서사 구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죠. 그래픽 조직자를 활용하면 지식의 구조를 시각화할 수 있어요.     어떻게 활용하면 되나요? 내용에 맞게 쓰면 좋은데요.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어요. 정보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흘러가는 형태라면 흐름형, 정보가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뉘어 가는 형태라면 분화형, 여러 항목을 서로 비교하고 살펴보는 형태라면 항목형 그래픽 조직자가 적합합니다. 흐름에 하나의 방향성이 있다면 일방 흐름형, 순환하는 구조라면 순환 흐름형이 좋죠. 분화형은 하나의 개념이 하나의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면 일방 흐름형, 사방으로 확장된다면 사방 분화형이 적절하고요. 마인드맵이 사방 분화형입니다. 항목형은 공통점 여부에 따라 원 항목형과 표 항목형을 골라 쓰면 되고요. 박정민 디자이너   목차를 유념해서 보고 밑줄과 동그라미, 메모를 활용하고, 그래픽 조직자로 내용을 정리하면 이제 끝일까요? 그렇게 지식책을 다 읽었다면 대화하고 글쓰기까지 해보세요. 생각하는 건 능동적인 활동입니다. 그걸 혼자 할 수 있는 아이는 없어요. 생각하도록 유도하려면 질문하고 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자기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게 하면 더욱 좋고요. 글쓰기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제가 제 딸들에게 그랬듯 한 문장 쓰기부터 시작하세요. 그리고 한 문장씩 늘려가면 어느새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전병규 작가는 “지식 정보 시대일수록 지식책 문해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식책 문해력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지식책’이란 키워드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전민규 기자 췌장암 환자 10명 중 9명은 5년 안에 사망한다. 그만큼 치료가 어려운 암이다. 2012년 췌장암 진단율을 획기적으로 높인 진단 키트가 나왔다. 놀라운 건 이 키트를 발명한 게 미국의 평범한 고등학생이란 사실이다. 잭 안드라카는 의지하던 삼촌이 췌장암으로 죽자 구글 검색을 통해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꾸준히 자료를 읽다 진단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200여 개의 대학에 연락해 연구실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고, 그중 한 곳의 도움으로 7개월간의 연구 끝에 새로운 진단 키트를 내놓을 수 있었다. 전병규 작가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지식 문해력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지식 문해력만 있으면 모든 걸 할 수 있습니다. 잭 안드라카가 한 일은 그저 인터넷에 있는 수많은 관련 지식을 읽고 이해하고 질문하고 생각한 것이 전부죠. 문해력은 그저 공부를 잘하기 위한 역량이 아니에요. 지식 정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필수 역량입니다.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①교과서로 충분하다? 지식책 읽어야: 학교에서 배우는 건 지식·정보다. 하지만 교과서는 다양한 지식을 압축적으로 요약해, 이해하기 어렵다. 교과서를 기본으로 지식책까지 읽어야 하는 이유다. 특히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인만큼, 지식책 문해력은 중요하다. ②준비가 안 됐다? 이야기책부터 시작: 지식책은 어렵다. 책에 대한 흥미가 없으면 읽을 수 없다. 이야기책을 통해 책의 매력에 빠지는 게 먼저다. 학원에서 지식을 넣는 수업을 하기보다 지식책을 읽으며 문해력을 키우는 게 장기적 학업 성취도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③여전히 어렵다? 그래픽을 활용하라: 먼저 목차를 잘 읽어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치고 메모를 하면 좋다. 다 읽었다면, 그래픽 조직자를 활용해 내용을 정리해보자. 마지막으로 대화하고 글쓰기까지 하면 더 좋다. 」 관련기사 어휘력 키우려면 이곳 가라…‘국어 교과서’ 집필자의 비결 “편수냄비를 아시나요?” 일타강사, 한자 교육에 꽂힌 이유

    2023.10.25 15:08

  • “편수냄비를 아시나요?” 일타강사, 한자 교육에 꽂힌 이유

    “편수냄비를 아시나요?” 일타강사, 한자 교육에 꽂힌 이유 유료 전용

    문해력의 사전적 의미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하다. 어휘력, 독해력, 사고력, 배경지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가 결합해야 비로소 갖출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학자마다 정의하는 문해력의 구성 요소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어휘력을 첫손가락에 꼽는다. 단어가 가진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전체 글에 담긴 정보나 의미, 맥락 등을 파악할 수 있는 탓이다.     hello! Parents는 어휘력을 키울 방법을 찾기 위해 전문가 3명을 만났다. 지난 12일 이향근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일상에서 아이의 어휘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 데 이어 이번에는 강용철 경희여중 국어 교사가 한자를 통해 어휘력을 넓히고 학습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박정민 디자이너 국어는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 삼중 체계로 구성돼 있어요. 그중 한자어가 약 70%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죠. 어휘력을 키우려면 한자를 반드시 알아야 해요.   강용철 교사는 한자 학습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08년 기준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표제어는 약 51만 개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자어가 병기된 단어가 70%가량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 교사는 “초등에서 중등, 고등으로 올라갈수록 교과서에서 사용되는 어휘의 양도 많아지고 수준도 높아지기 때문에 시기에 맞는 한자 학습이 병행돼야 한다”며 적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중학교 국어 교사인 그가 지난해부터 『마법천자문』 감수를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2003년 출간된 『마법천자문』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 힘들 정도로 인기인 한자 학습만화로 2200만 부가 팔렸다. 하지만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시리즈가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단계 도약이 필요했다. 한자 낱자에서 단어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투입된 그는 어휘군 확장에 가장 주안점을 뒀다. 24년 차 현직 교사이자 EBS 중학 국어 ‘일타 강사’로서 누적 수강생 95만 명을 가르쳐온 강용철 교사가 생각하는 효과적인 한자 학습법은 무엇일까? 지난 6일 경희여중에서 그를 만나 물었다.      ━  📢한자, 외우지 말고 이야기해라   한자는 암기 과목일까. 강용철 교사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고 했다. 뜻과 음, 부수와 필순 등 외워야 할 내용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물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 특성상 글자를 보면 유추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각각의 글자를 조합해 만든 글자도 많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수학이나 과학처럼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며 “과거처럼 한자를 열 번씩, 스무 번씩 쓰면서 달달 외우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용철 경희여중 국어 교사는 “어휘는 개념 설명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 인(人)’과 ‘일 사(事)’를 따로 외우는 것보다 ‘인사’는 사람이 해야 할 기본적인 일이니 평소에도 인사를 잘하자고 얘기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덧붙였다. 김종호 기자 한자를 외우는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지금은 한문이 선택 과목이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필수 과목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교과서에 병기된 한자를 모두 수정 테이프로 지우고 학생들이 직접 써넣게 할 정도로 한자 공부를 강조하셨어요. 그때는 아는 게 힘이었으니 많이 외우는 게 중요했죠. 지금은 검색의 시대잖아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서 검색만 하면 바로 찾아볼 수 있어요. 정보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으니 이를 탐색하고 통합하는 능력을 키우는 게 더 중요해졌습니다.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실천 지능’이 필요해진 셈입니다.     한자로 실천 지능을 어떻게 키울 수 있나요? 한자를 알면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이를 유추하는 능력이 좋아집니다. 예를 들면 기술·가정 시간에 ‘편수 냄비’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이 단어를 처음 들은 많은 아이들이 편수를 브랜드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언어 감각이 좋은 아이들은 주어진 단서를 가지고 추측을 해봅니다. ‘손잡이가 있으니까 ‘손 수(手)’ 자를 쓴 건가? 그럼 ‘편’은 뭐지? ‘조각 편(片)’인가?’ 하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을 이어가면서 답을 찾아가는 거죠.     스스로 단어 뜻을 유추할 수 없는 아이들도 많을 것 같아요. 그럴 땐 부모나 교사가 같이 사전을 찾아보면 됩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도 전자칠판으로 인터넷 사전을 많이 활용하는데요. 편수 냄비의 ‘편’과 ‘수’를 클릭해 보면 각각의 한자와 뜻이 나옵니다. 그럼 아이들 사이에서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오죠. 공부에서 ‘아~’는 굉장히 중요해요. 궁금증이 해소되는 ‘유레카’의 순간이잖아요. 몰랐던 것이 채워지는 기쁨을 알게 되면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지니까요.   사전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보통 사전을 찾을 때 뜻만 보고 넘어가는데요. 예문을 반드시 살펴봐야 합니다. 실생활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고, 적절한 상황에 맞게 써 봐야 그 단어가 자기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개방형 사전인 우리말샘에 나오는 편수 냄비 예문을 한 번 볼까요? ‘이번에 출시된 제품은 편수 냄비, 양수 냄비, 전골, 찜기 등 총 10종으로 구성됐으며 가격은 11만~27만원이다.’ 손잡이가 양쪽에 달린 양수 냄비도 나오고 전골과 찜기도 나오네요. 그럼 집에 가서 우리 집에 있는 냄비는 편수 냄비인지, 양수 냄비인지 확인해 보면 그 단어를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겠죠.     한자에 대한 관심이 학습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보다 쉽게 익힐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요. 한자 낱자를 외우는 것보다 구성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충성 충(忠)’을 예로 들어볼게요.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을 합한 글자죠. 조선 시대에 백성들 마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임금이죠. 임금을 향한 마음이 충성심이라고 이야기해 주면 훨씬 기억하기 쉽죠. ‘효도 효(孝)’는 ‘아들(子)’이 ‘노인(老)’을 업고 있는 모양이고요. 충효 사상은 조선 시대 국교인 유교의 기본 철학이잖아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충신 정몽주의 ‘단심가’를 비롯해 그 시기 거의 모든 문학 작품이 충효 사상을 기반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야기로 접근하면 훨씬 많은 정보를 아우를 수 있어요. 한자 학습을 통해 문해력의 바탕이 되는 어휘력은 물론 배경지식까지 같이 넓힐 수 있죠.    ━  📢한자, 낱자에서 어휘군으로 넓혀라     한자는 글자 하나를 알면 여러 글자가 넝쿨처럼 딸려 온다. ‘일어날 발(發)’을 배우면 ‘손 수(手)’가 더해져 ‘다스릴 발(撥)’이 되고, ‘물 수(水)’와 함께 쓰면 ‘뿌릴 발(潑)’이 되는 식이다. 뒤에 붙는 한자에 따라 미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찾아내는 ‘발견(發見)’이 될 수도 있고, 전에 없던 물건을 만들어내는 ‘발명(發明)’이 될 수도 있다. 강용철 교사는 “한자는 낱낱의 글자가 뜻을 지닌 뜻글자이기 때문에 어휘군으로 확장하는 것이 용이하다”며 “한 글자를 알면 단어 20~30개로 뻗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어휘량을 늘리는 데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강용철 교사는 “한자는 좀 더 세밀한 표현을 다양하게 할 수 있고, 긴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불필요하게 어려운 한자를 쓰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여드름을 뜻하는 ‘심상성 좌창’ 같은 한자는 오히려 이해에 방해가 된다”고 덧붙였다. 김종호 기자 낱낱의 한자를 아는 것보다 어휘를 아는 게 중요한가요? 『마법천자문』 1권 제목이 ‘불어라! 바람 풍風’이에요. 책을 읽은 아이들 대부분이 ‘바람 풍’은 기억하죠. 하지만 ‘바람 풍’이 과학 시간에 나오는 ‘풍속(風速)’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생활 전반에 걸친 습관을 뜻하는 ‘풍속(風俗)’으로 연결하는 것은 더 어렵고요. 바람이 세상을 뜻한다는 것도 알아야 하니까요. 이렇게 관련이 있는 단어를 서로 연결해 주는 작업이 더해졌습니다.    『마법천자문』 감수를 맡으면서 주안점을 둔 게 바로 그 부분인가요? 1~53권까지는 서울대 중국어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역임한 김창환 교수님이 감수하셨는데요. 출판사(아울북) 측이 제게 감수를 제안하면서 그러시더군요. 54권부터 시작되는 3부에서는 한자 낱자가 아닌 단어 중심으로 이야기 구조를 바꾸면서 어휘를 보강하고 싶다고요. 중어중문학과나 한문학과 교수가 아니라 저를 찾아온 건 그래서였어요. 평소에 제가 생각하는 학습 방향과도 일치해 합류하게 됐죠. 『마법천자문』이 아이들의 한자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춰주는 데 크게 기여한 책이라, 저도 평소 눈여겨보고 있기도 했고요.    단어를 어떻게 연결하는 것이 효과적인가요? 초등학생 때는 ‘마인드맵(mind map)’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아요. 우리말로 ‘생각 나무’라는 단어도 많이 쓰는데요. 한 단어나 주제를 가운데 놓고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거죠. 가지가 많아질수록 더 풍성한 단어 나무가 되겠죠.   예를 들면요? 『마법천자문』 54권 제목인 ‘처음으로 찾아내다! 발견 發見’을 예로 들어볼게요. ‘일어날 발(發)’을 가운데 두고 생각나는 한자를 적는 거예요. ‘펼 전(展)’을 더하면 보다 좋은 상태로 되어 간다는 뜻이 되고, ‘번개 전(電)’을 더하면 전기를 일으킨다는 뜻이죠. 『마법천자문』 전투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폭발도 두 가지예요. 불이 일어나면서 터지는 건 ‘불 화(火)’가 들어간 ‘터질 폭(爆)’을 쓰고, 힘이나 감정이 폭발할 땐 ‘사나울 폭(暴)’을 쓰죠. ‘휘두를 휘(揮)’와 함께 쓰면 능력이나 재능을 마음껏 드러낸다는 뜻이 되고요. 『마법천자문』 54권에 등장하는 초등 필수 어휘 한자. 박정민 디자이너 ‘발휘하다’는 초등학생에게 너무 어려운 한자 아닌가요? 발견, 발전, 폭발, 발휘 모두 초등 필수 어휘예요. 초등 저학년에는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고학년이 되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죠. 한자 공부를 언제부터 해야 하냐고 많이 물어보는데, 저는 선행 학습보다 적기 학습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내년에 배울 내용을 올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내일 배울 교과서 내용을 오늘 읽어보는 거죠. 학년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를 모두 읽고 쓰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정작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아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심화 학습을 하고 싶은 아이들이 있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유의어, 반의어, 연상어를 함께 공부하면 어휘력을 훨씬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반의어를 알면 개념이 보다 명확해지니까요. 하지만 반의어가 없는 단어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신사(紳士)’ ‘숙녀(淑女)’ 모두 남자와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지만 실생활에서 반의어로 보긴 어렵죠. 신사는 나이가 많은 중후한 남성을 일컫는 경우가 많은 반면, 숙녀는 성년부터 중년 여성까지 보다 폭넓게 사용하니까요.   연상어는 어떤 개념인가요? 한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를 뜻해요. 보다 좋은 상태로 나아가고 있는 ‘발전’은 유의어가 많죠. 진전, 발달, 향상, 신장, 성장 모두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전기를 일으키는 ‘발전’은 유의어보다 전기, 발전소, 태양광, 태양에너지 같은 단어가 더 먼저 생각나잖아요. 그렇게 어휘망을 넓혀가는 거죠.      ━  📢한자, 핵심어로 학습 능력 키워라    과목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학습 자체가 불가능하다. 문제는 개념어 대부분이 한자어라는 사실. 한자가 국어뿐 아니라 영어, 사회, 수학, 과학 등 다른 과목 학습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이유다. 강용철 교사는 “최근 몇 년간 문해력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수업 핵심어와 학습도구어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며 “수업 시간에 등장하는 핵심 어휘를 먼저 설명하고 본수업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학습 효율을 높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용철 교사가 EBS ‘어휘가 문해력이다’ 수업에서 중학교 1학년 1학기 수학 시간에 등장하는 소인수분해 개념을 설명하는 모습. 사진 EBS 수업 핵심어는 무엇인가요?   중학교 1학년 수학 시간에 소인수분해를 처음 배운다고 하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소수, 약수, 자연수 같은 개념을 알아야겠죠. ‘바탕 소(所)’와 ‘셈 수(數)’가 만난 소수는 1과 그 자신만을 약수로 가지는 자연수예요. 약수의 ‘약(約)’ 자는 ‘맺다’는 뜻이 대표적이지만, 나눈다는 뜻도 있죠. 인수의 ‘인(因)’자는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지만, ‘쌓다’ ‘겹치다’라는 뜻도 있어요. 어떤 수를 곱셈으로 분해했을 때 나오는 수를 말하죠. 이렇게 소인수분해에 쓰인 단어를 하나씩 풀어주는 겁니다. 소인수분해가 하나의 자연수를 두 개 이상 소수의 곱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기 전이에요.   수학 시간이 마치 국어 시간 같네요. 국어, 수학 선생님이 함께 수업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게 이상적이죠. 하지만 학교에서 실제로 그렇게 수업을 하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EBS에서 시범적으로 온라인 강의를 만들었죠. 2021년 ‘당신의 문해력’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화제가 되면서 지난해 ‘OO가 문해력이다’ 강의 프로그램이 신설됐는데요. 제가 ‘어휘가 문해력이다’ 중학교 1학년 편을 맡아 국어, 한자, 영어, 사회, 수학, 과학 교과서 어휘 수업을 진행했어요. 전문적인 내용은 해당 교과 선생님에게 배워야겠지만, 학생들이 집을 짓기 전에 거기에 필요한 벽돌을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한 거죠.     실제 학습 능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나요? EBS에서 ‘당신의 문해력’ 후속작으로 최근 다큐멘터리 ‘책맹인류’ 시리즈를 방영했는데요. 인하대 사범대학부속중에서 실험을 하나 했어요. 사회 교과서가 너무 어렵다는 학생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혼자서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쓴 교과서를 만들어 수업을 진행했죠. 그랬더니 이 교과서로 수업한 학생들이 기존 교과서로 수업한 학생보다 핵심 개념 이해도가 1.6배 높게 나타났어요. 기존 교과서에 자유권에 대한 설명은 두 줄밖에 없는데, 새로운 교과서에선 10쪽 이상 할애했죠. 사실 중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초등학교 때까진 ‘철수와 영희가 싸웠어요’ 이렇게 배웠는데 중학교에 오니 갑자기 ‘인물과 인물의 외적 갈등이 폭발했다’고 하니까요.   해외에서도 어휘를 강조한 수업이 많아지는 추세인가요? 문해력 저하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예요.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모두가 책을 읽을 수 있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책맹’이 됐으니까요. 글자 자체를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률 자체가 높은 미국에서는 리터러시 특화 교과서를 많이 활용해요. 미국의 네이플스 스쿨이 바로 이 특화 교과서를 쓰는데, 이 학교 3학년의 문해력 수준이 캘리포니아주 전체 평균보다 2배가량 높더라고요. 학년별, 과목별 맞춤형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리터러시 코치 제도도 있고요. 한국에서도 이러한 교육 방식에 관심을 갖는 교사나 학교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일반 수업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어휘를 머리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드시 입으로 내뱉어 봐야 해요. 예를 들어 서로 공감하는 부분을 뜻하는 ‘공감대(共感帶)’라는 단어를 새로 배웠다면 각자 예문을 만들고 옆에 앉은 친구와 예문을 활용한 대화를 주고받는 거죠. 저도 예문을 만들어 수업을 마무리하기 전에 다시 한번 사용합니다. ‘슬슬 수업을 끝내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죠?’ 하면서 말이죠. ‘배울 학(學)’만 계속되면 학생들이 학학대겠죠. 직접 몸으로 ‘익힐 습(習)’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강용철 교사는 편식하지 않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판타지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그걸 못 읽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번에 판타지 9권을 읽었으면 비문학 1권, 그다음엔 판타지 8권에 다른 분야 2권 등 비율을 조정하면서 다양한 독서의 즐거움을 일깨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강용철 교사는 “일상의 모든 활동이 한자 학습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가 교과서보다 학습 만화나 유튜브 영상을 즐겨 본다 해도 이를 활용해 학습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만들어주면 된다”고 했다. 관심 분야에서 새롭게 알게 된 단어를 한자와 함께 익히고 해당 주제와 관련된 책을 읽게 하는 식으로 확장하면,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동시에 어휘력도 한 뼘 더 자란다는 얘기다.     문해력은 100m 달리기가 아니에요. 단시간에 벼락치기로 성과를 보기 힘들죠. 마라톤처럼 오랜 연습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한자 공부를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새 보다 멀리, 보다 빨리 뛰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중등 국어 교사가 말하는 한자로 어휘력 키우는 법  「 ①한자, 외우지 말고 이야기해라. 한자를 열 번씩 쓰면서 외우는 것보다 구성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글자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이야기로 접근하면 기억하기 쉽고, 배경지식을 넓힐 수 있어요.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유추하는 언어 감각도 생겨요. ②한자, 낱자에서 어휘군으로 넓혀라. 한자는 낱낱의 글자가 뜻을 지닌 뜻글자입니다. 새롭게 배운 글자를 중심에 놓고 단어 나무를 그려보세요. 가지를 뻗다 보면 금세 20~30개 단어로 확장해나갈 수 있습니다. 유의어, 반의어, 연상어를 함께 익히면 더 탄탄해집니다. ③한자, 핵심어로 학습 능력 키워라. 한자는 국어뿐 아니라 영어, 사회, 수학, 과학 등 다른 과목 학습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새로운 내용 학습에 앞서 핵심어를 알아두면 수업 이해가 한결 쉬워집니다. 새 단어를 접했다면 직접 예문을 만들어 사용해보세요.  」 관련기사 어휘력 키우려면 이곳 가라…‘국어 교과서’ 집필자의 비결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아버지가 통닭을 사 오셨다’ 이 문장에 문해력 힌트 있다

    2023.10.18 12:30

  • 어휘력 키우려면 이곳 가라…‘국어 교과서’ 집필자의 비결

    어휘력 키우려면 이곳 가라…‘국어 교과서’ 집필자의 비결 유료 전용

    어휘력은 문해력의 근간이자 학습 능력의 기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초등학생 시기(만 6~11세)부터 어휘력 격차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스스로 글을 읽고, 학습을 통해 추상적인 용어들을 배우는 시기인 만큼 어휘력 수준에 따른 학습 격차도 발생한다. 문해력을 좌우하는 어휘력,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hello! Parents는 어휘력을 키울 방법을 찾기 위해 전문가를 잇달아 만났다. 가장 먼저 일상과 학교에서 아이의 어휘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박정민 디자이너   내 생활과 동떨어진 단어는 머릿속에 남지 않아요. 낯선 단어도 자기와 연관되면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아이의 어휘력을 키워주고 싶다면 일상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세요.   “아이의 어휘력을 키우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향근 서울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접한 단어를 자신의 삶과 연결할 기회를 만들어 주란 얘기다. 그가 제시한 연결 고리란 대화와 경험이다. 그렇게 익힌 단어들은 머릿속에 단단히 뿌리 내려 다른 단어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이 교수는 초등 국어 교육 전문가로, 2007년부터 초등 국어 교과서를 네 차례 집필했다. 『아이의 어휘력』 『초등 국어교육의 이해』 등의 책도 썼다. 아이의 어휘력을 성장시키려면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 연구차 스위스 제네바대학에 머물고 있는 이 교수를 지난달 27일 화상으로 만났다.      ━  📢독서와 대화로 삶을 끌어들여라     어휘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라는 건 누구나 안다. 문제는 아이들이 점점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는 단어가 부족한 아이들은 글을 읽기가 더 어려워하고, 다시 어휘가 빈곤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단어장, 문제집을 통해 어휘를 학습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이 교수는 “이런 식의 어휘 학습은 한계가 분명하다”고 잘라 말했다.      이향근 교수는 "아이의 생활과 동떨어진 어휘 학습은 오래 가기 어렵다"며 "경험과 대화를 통해 낯선 단어를 아이의 생활과 연결시키라"고 말했다. 사진 이향근   요즘 나오는 단어장, 어휘 문제집은 예시 글과 설명이 친절하게 잘 나와 있어요. 빠르게 어휘력을 끌어올릴 수 있지 않나요? 만약 시험을 앞두고 단기간 일정량의 단어 뜻을 외워야 상황이라면 효과가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어휘를 학습하면 단어가 살아남질 못해요. 단어도 쌓여야 어휘력이 힘을 발휘하죠. 내가 궁금해서 그 뜻을 알고 싶은 단어는 머릿속에 잘 들어옵니다. 하지만 맥락 없이 주어진 단어는 당시엔 알 것 같다가도 금방 휘발되기 쉽거든요. 잊지 않으려면 수차례 반복해서 그 단어를 입력해야 하는데, 그렇게 어휘를 익히는 건 아이의 흥미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큽니다. 생활과 동떨어진 어휘를 쏟아붓는데, 그 뜻을 끝까지 갖고 갈 아이는 얼마나 될까요?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는 게 어휘력 성장 측면에서 파급력이나 지속력이 훨씬 큽니다.      독서가 최선의 방법이란 건 알지만 어떤 책을 읽는 게 좋을지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관심 있어 하고 흥미를 보이는 책이 어휘력을 키우기에 가장 좋은 책입니다. 좋아하는 소재, 장르의 그림책에서 줄글책으로, 이야기책에서 지식·정보책(논픽션)으로 확장하는 것이죠. 좋아하는 분야의 책은 좀 어려워 보여도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빠져들어 읽잖아요. 어린아이들이 공룡에 빠지면 발음하기도 힘든 공룡 이름을 척척 외우는 걸 보세요. 관련된 책을 섭렵하다 보면 공룡이 살았던 시대라든지 육식, 초식, 멸종, 화석 발굴 같은 단어들도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지구, 환경, 기후 같은 주제의 책으로 확장할 수도 있고요.    책의 난이도는 어떤 수준이 적당할까요? 책 속 단어가 너무 쉬우면 어휘를 늘리는 데 크게 되지 않을 것이고, 어려우면 지레 겁을 먹을 것 같아요.  아이가 자연스럽게 새로운 단어를 익힐 수 있으려면, 책 한 쪽에 모르는 단어가 2, 3개 정도인 정도가 적당해요. 90% 이상 단어를 아는 정도죠. 모르는 어휘가 한 쪽에 10개가 넘는다면 읽어도 맥락만으로 뜻을 파악하는 데 어려울 수 있어요. 읽기에 방해가 되니 독서에 흥미가 떨어지기도 하겠죠.    어휘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읽기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새롭게 알게 된 어휘나, 주제와 관련된 핵심 어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이때 아이가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을 섞어서 이야기해 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질문을 던져주는 게 좋아요. 예를 들어 작가 현덕의 『뽐내는 걸음으로』라는 그림책에는 ‘뽐내다’ ‘뿌듯하다’라는 어휘들이 나오는데요. ‘주인공 아이가 뭘 자랑하고 싶길래 이렇게 뽐내는 걸음으로 걷는 거지?’라고 묻고 ‘뽐내는 걸음을 우리도 한번 흉내 내 볼까?’라고 제안하면 좋아요. 직접 몸을 움직여보면 단어 뜻을 잘 체득할 수 있거든요. 또 ‘엄마는 우리 딸이 잘 먹을 때 정말 뿌듯해. 너는 언제 마음이 뿌듯해?’라고 질문할 수도 있어요. 양육자가 먼저 경험을 살려서 이야기를 꺼내주면 아이들도 답을 하기 수월합니다.      책을 읽다가 아이가 단어 뜻을 물어보면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까요? 흔히 바로 뜻을 알려주시는 경우가 많죠. 아이에게 사전을 찾아보라고 권하기도 하고요.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네가 생각하기에 무슨 뜻인 것 같아?’하고 물어보는 겁니다. 스스로 뜻을 유추해 보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요. 아이가 ‘잘 모르겠다’고 하면 앞뒤 문장이나 맥락, 그림 같은 단서를 제시하면서 힌트를 주세요. 아이가 틀린 답을 말하더라도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하고 다시 질문해주시고요. 나중에 답을 정확히 얘기해 주시더라도 같이 대화해야 어휘도 늘고 추론하는 힘도 커져요.     아이의 어휘력이 잘 발달하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책을 읽고 난 후 핵심 내용과 관련된 사실관계를 간단히 물어보세요. 대답하지 못하거나 틀리게 말한다면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신호일 수 있어요. 또 초등학교 고학년인데도 여전히 그림책이나 학습 만화만 읽으려 한다는 것도 위험 신호일 수 있어요. 어휘력을 키우는 독서를 하려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도전하는 독서, 벽을 깨는 독서를 해야 해요. 초등 5학년이라면 100쪽 이상의 짧은 소설책 정도는 읽어 내야 하죠. 그래야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긴 호흡의 어려운 글을 소화해낼 수 있어요.     ━  📢교과서 속 개념어를 확장하라   초등 저학년 시기를 지나면 아이가 매일 읽는 학교 교과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교과서 속 어휘는 초등 1·2학년 때는 4000~6000여 개지만, 초등 3·4학년에는 1만 자 안팎으로 늘어난다. 수학, 사회, 과학 등의 교과목에선 학습 내용과 관련된 각종 추상적인 개념어가 쏟아진다. 이 교수는 “초등 3학년부터는 개념어에 대한 이해로 어휘력을 폭발시켜야 하는 시기”라며 “교과서만큼 훌륭한 교재가 없다”고 말했다.    이향근 교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교과서 속 개념어 이해로 어휘력을 폭발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이향근 교과서 자체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용어, 학습에 필요한 개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경우엔 미리 교과서를 읽어보고 새로운 어휘의 뜻부터 파악하길 권합니다. 그리고 다시 교과서를 읽어보면 내용을 이해하기 한결 수월해집니다. 단어 뜻을 찾아볼 때는 사전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 국어사전을 찾는 법도 배우죠. 일반 국어사전은 어려운 단어로 쓰여 있어 뜻풀이를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많아요. 초등학생용, 어린이용 국어사전을 활용하는 게 좋아요. 그리고 나만의 어휘 공책을 만들어 써보길 추천합니다.     어휘 공책이라면 단어장 같은 건가요? 어떻게 쓰는 거죠? 먼저 새롭게 알게 된 단어를 기록하는 겁니다. 단순히 뜻풀이를 쓰는 걸 넘어서 그 단어를 넣은 문장을 써보는 게 좋아요. 또 특정 단원에 나오는 핵심 주제와 관련된 중요 어휘 5개 정도를 가지고 마인드맵(mind map)을 그려보는 활동도 추천해요. 마인드맵은 중심 주제, 단어에서 시작해서 나무가 가지를 뻗어 나가는 것처럼 생각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방식이에요. 어휘력이란 건, 개별 낱말뿐 아니라 낱말 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이거든요. 마인드맵을 통해 단어 간 관계가 대등한지, 상하 또는 인과 관계인지 파악하면서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어요. 핵심 키워드를 뽑아내는 연습도 할 수 있죠. 또 한 가지, 교과서 속 개념어를 더 효과적으로 깨우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아이가 다음 학기에 배울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어와 관련된 곳을 가보시길 추천해요. 사회 과목에 나오는 용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 문화적 현상에 대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려워합니다. 이럴 때 아이가 가까운 미래에 배우게 될 것과 관련된 곳에 먼저 가서 경험과 연결해 주는 거죠. 예를 들어서 4학년에 서울시에 대해 배운다고 하면 서울 시청을 한번 가보는 겁니다. 그곳에서 ‘여기가 서울시의 시장(市長)이 일하는 곳이야’ ‘지난번에 엄마·아빠가 투표한 것 기억나? 그때 선거를 통해 시장을 뽑는 거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련된 어휘를 확장해 나갈 수 있어요.     수업 시간에 그 단어를 들으면 더 생생하게 기억이 나겠군요.   어휘를 쓰는 일도 결국 기억 작용이에요. 시간·공간적 맥락, 일화 기억(과거에 발생했던 일화가 포함된 기억)이 단어와 함께 머릿속에  남아 장기 기억이 됩니다. 아이가 수업 시간에 해당 개념어를 다시 듣는다면 관련된 기억이 떠오르면서 내용이 더 친근하게 다가오고, 집중하기도 좋겠죠. 양육자에게도 이점이 있어요. 아이에게 좋다는 체험, 전시 데리고 다니면서 ‘과연 도움이 될까?’ ‘이 내용을 아이가 기억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으신 적, 있으실 거에요. 적어도 이렇게 사회 교과와 연계된 나들이와 경험을 하고 나면 그런 고민은 하지 않을 수 있어요.(웃음)    하지만 모든 장소를 다 방문하고, 모든 걸 다 경험을 할 순 없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아이 중심의 질문을 던지는 게 중요합니다. 개념어를 아이의 세계로 끌고 오는 것이죠. 초등 3학년 사회과 교과서에 등장하는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어를 예로 들어 볼게요. 아이에게 ‘문화유산이란 무엇일까?’ ‘문화유산에는 어떤 게 있을까?’ 같은 질문을 던지면 충분할까요? 설명을 듣고도 아이는 여전히 단어와 거리감을 느낄 가능성이 커요. 그러면 이렇게 다시 물어보는 거죠. ‘네가 남기고 싶은 문화유산은 뭐야?’라고요. 문화유산이란 단어의 정의를 아이가 자신의 문제로 정의하고 그 가치를 떠올려 보게 하는 거죠. 그러면 해당 용어를 사용하는 구체적 맥락을 파악하기도 쉽고, 아이 머릿속에도 잘 자리 잡을 수 있어요.      ━  📢동시와 말놀이로 언어 감각을 키워라   같은 단어도 맥락에 따라 뜻이 변한다. 다의성을 가진 단어를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아는 능력을 키우려면 언어에 대한 감(感)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미묘한 어감을 구별해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언어 능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자기 생각과 감정을 섬세하고 기발한 어휘로 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교수는 “동시와 친해지고 말놀이를 즐기라”고 조언했다.     이향근 교수는 "동시 속 시어는 평소 사용하는 단어의 맥락을 뒤집고 낯선 지점을 발견하게 한다"고 말했다. 사진 이향근 동시는 주로 짧은 데다 쓰이는 단어도 많지 않습니다. 어휘력 발달에 어떻게 도움이 되죠?   시에선 소리, 낱말 등이 리듬감 있게 반복되고 다양한 의성어, 의태어가 쓰입니다. 무엇보다 말하는 재미, 말맛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나아가 작품 속 인물의 마음을 떠올리면서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고, 새로운 차원으로 뜻과 이미지를 떠올려보는 상상력도 길러줍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시 중에 김금래 시인의 ‘꽃 피는 보푸라기’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양말에 핀 보푸라기를 꽃이 핀 것으로 재해석했죠. 평소 사용하는 단어에서 낯선 지점을 발견하도록 하는 게 시어의 효용이지요.    동시는 어떻게 읽는 게 좋을까요? 말맛을 살리려면 소리 내어 읽어 봐야 해요. 처음엔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어가며 읊어보세요. 시의 운율을 더 잘 느낄 수 있어요. 읽으면서 아이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생각해 보도록 하고, 그림으로 그려 보게 해도 좋아요. 동시를 자기만의 시각으로 바꿔 써보게 하는 것도 어휘력을 키우는 훌륭한 활동입니다. 최승호 시인의 ‘멍게’라는 시를 예로 들어볼게요. ‘멍게야 멍하게만 있으면 멍청해져 바보 멍청이가 된다고…’고 하는 시인데요.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이걸 ‘해삼’이란 제목을 달고 이렇게 바꿔 썼어요. ‘해삼아 해해해 하지마 자꾸 해해거리면 생각이 헷갈리잖아…’. 기발하지 않나요?   말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말장난, 말놀이 절대 우습게 볼 게 아니에요. 아이의 어휘력 발달에 큰 도움이 되거든요. 대표적인 말놀이가 끝말잇기나 스무고개, 수수께끼 같은 거죠. 이런 말놀이를 주고받으려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동시에 자기가 아는 낱말을 순발력 있게 떠올려야 해요. 아이와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나 대기해야 하는 자투리 시간에 이런 말놀이를 하면 좋아요. 소위 ‘아재 개그’라고 말하는 난센스 퀴즈도 추천해요.       난센스 퀴즈요? 어휘력이라는 건 단지 단어를 많이 아는 걸 넘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능력을 뜻해요. 난센스 퀴즈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돈은? 할머니’ ‘동생이 형을 잘 따르는 걸 세 글자로 하면? 형광펜’ 이런 식이잖아요. 영어, 한자 등도 활용해 말소리나 문자를 맞추거나 음과 뜻을 포함해 새롭게 단어를 해석하는 거죠. 참신하게 언어를 써볼 기회가 됩니다.     이향근 교수는 양육자가 아이의 어휘력 성장을 돕는다는 건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깊은 사유의 세계로 안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단어를 알려줄지 보다 함께 어떤 시간을 보낼지부터 고민하라”고 말했다. 아이가 경험하는 세상이 넓어지면 어휘력은 덩달아 성장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즐거운 추억을 만드세요. 자연스레 대화할 거리가 늘어납니다. 어휘가 늘어나는 건 덤이에요. 단어가 쌓여서 아이의 문장이 되고 삶을 만든다는 걸 잊지 마세요.     ■ 초등 국어 교육 전문가가 말하는 아이 어휘력 키우는 법 「 ①독서와 대화로 삶을 끌어 들여라. 아이가 관심 있어 하는 책으로 어휘력을 키울 수 있어요. 단어 뜻을 물어보면, 바로 답하지 말고 아이의 생각을 물어보세요.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단어와 연결시킬 때 단어가 머릿속에 잘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②교과서 속 개념어를 확장하라. 교과서 속 모르는 단어의 뜻부터 파악하도록 하세요. 핵심 단어로 어휘 지도를 그려보는 것도 좋습니다. 다음 학기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용어와 관련된 장소에 방문하면 개념어를 체득하는 데 유리합니다.  ③동시와 말놀이로 언어 감각을 키워라. 동시를 음미해 말맛을 느껴보도록 하세요. 섬세하고 참신한 시어를 접하며 공감 능력과 상상력도 키울 수 있어요. 끝말잇기 같은 말놀이와 난센스 퀴즈로 언어 감각을 키울 수 있어요.  」 관련기사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아버지가 통닭을 사 오셨다’ 이 문장에 문해력 힌트 있다 “문해력 키우고 싶은가? 그럼 종이접기 시켜라”

    2023.10.11 15:29

  • 읽어놓고 딴소리하는 아이…“6학년까진 소리내 읽어라” ⑤

    읽어놓고 딴소리하는 아이…“6학년까진 소리내 읽어라” ⑤ 유료 전용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년마다 벌이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의 읽기 능력은 2006년 이후 꾸준히 하락해 왔다. 가장 최근 발표된 2018년 평가 결과에서 눈여겨볼 건 하위권 학생의 비율이다. 2000년 전체 5.7%였던 게 2018년 15.1%로 급증한 것이다. 같은 기간 상위권 비율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었다는 얘기다. 코로나19로 인한 학습 격차를 감안하면, 하위권 비율은 더 크게 늘었을 가능성이 크다.    hello! Parents가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의 마지막 전문가로 홍인재 전주 신동초등학교 교장을 만난 이유다. 홍 교장은 33년간 학교 현장에서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쳐 왔다. 말하기부터 한글 깨치기, 독해에 이르는 문해력 전반에 걸쳐 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법을 연구해 왔다. 연구와 실전 노하우를 정리해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펴내기도 했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park.jeongmin@joongang.co.kr 문해력은 ‘글자’가 아니라 ‘소리’에서 시작합니다. 소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 글자도 못 배웁니다. 그런데 요즘엔 소리를 배워야 할 어린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글자를 익혀야 할 아이가 독해를 하고 있어요. 문해력 부진은 여기서 시작된 겁니다.   “문해력 부진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홍인재 교장은 이렇게 답했다. 문해력은 빨리 습득해도, 늦게 습득해도 안 된다는 얘기다. 그는 “문해력은 적기(適期) 교육”이라며 “대강 배우고 익히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앞서 배우는 것도 큰 문제”라고 말했다. 홍 교장은 “만 3세까지는 소리를 듣고 구분하는데,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말놀이·글놀이를 통해 다양한 표현을 익히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인재 전주 신동초등학교 교장은 “문해력의 시작은 소리에 대한 인식”이라며 “영유아기 땐 사람의 말소리를 많이 들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  📢 “소리 구분이 먼저다”   읽기는 소리와 문자를 연결하는 활동이다. 홍 교장이 “읽기에 앞서 소리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소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문자를 학습하면 읽기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소리를 제대로 인식하는 방법으로, 만 3세 전에 사람의 말을 많이 듣는 걸 추천했다.   읽으려면 문자를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문자, 그러니까 한글을 배우는 건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아요. 한글의 구성 원리 덕분이죠. 한글은 소리 나는 대로 만들어지잖아요. 영어와 다르게 예외가 없죠. ‘ㄴ’은 어디서나 ‘느’ 소리가 나고, ‘ㅏ’는 예외 없이 ‘아’ 소리가 나서 이 둘을 합친 글자 ‘나’는 언제나 ‘나(na)’ 소리가 납니다. ㄱ(기역), ㄷ(디귿), ㅅ(시옷)을 제외하면 규칙이 아주 단순하고 정확하죠. 그래서 말소리 분화만 정확하게 돼 있다면, 한글은 금세 배워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배워도 충분하죠.   말소리 분화라는 게 뭔가요? 소리를 구분해서 듣는 걸 말해요. ‘아빠’라는 단어는 ‘아’와 ‘빠’ 두 개의 소리로 나눠집니다. 또 ‘아’와 ‘쁘(ㅃ)’와 ‘아(ㅏ)’ 더 잘게 세 개로 구분됩니다. 신생아는 말소리를 이렇게 구분해서 듣지 못합니다. 새소리처럼 하나의 소리로 받아들이죠.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리가 분화됩니다. 처음엔 의미 없는 옹알이를 하다가 점차 정확한 단어를 발음하게 되는 건 그래서죠.   소리 분화와 읽기는 어떤 관련이 있나요? 글자도 소리를 구분해서 익히듯 단계별로 익혀요. 아이들은 처음엔 단어를 그림처럼 통으로 인식해요. ‘아빠’를 하나로요. 그러다가 ‘아’와 ‘빠’를 구분하고, 각각을 다시 한번 자음(ㅇ)과 모음(ㅏ)로 분리하는 식으로요. 글자를 이렇게 구분해 익힐 때 소리 분화가 어설프면 각 문자에 맞는 소리를 찾지 못해요. 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면 발음도 부정확해지고, 발음이 부정확하면 유창하게 읽기도 못하죠. 영유아 때 어른의 입 모양을 보고 따라 하면서 입과 혀를 움직이는 자체가 문해력을 키우는 훈련입니다.   동영상을 보여주면 안 되나요? 영상 속 인물들의 입 모양을 볼 수 있잖아요. 말은 의사소통 도구입니다. 주고받아야 의미가 생겨요. 일방적으로 떠드는 말만 들으면 말의 쓰임을 배울 수가 없어요. 제가 교실에서 만난 아이 중에 TV만 보고 자란 아이가 있었어요. 영유아기에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방치된 거죠. 이 아이는 글자는 깨우쳤는데 표현을 못 했어요. 사탕을 주고 어떤 맛인지 물어보면 “포도 맛”이라고는 하는데 “달콤하다”거나 “새콤하다”는 식의 표현을 전혀 못 했어요.   뭐가 문제였던 건가요? 사탕과 ‘달콤하다’는 표현을 연결해 들은 경험이 없던 거예요. 대화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영유아기엔 함께 다양한 자극을 경험하게 하고, 그때의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해 들려주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의성어·의태어를 써주면 좋아요. 표현이 풍성해지거든요. “달팽이가 기어간다”보다 “달팽이가 스르르 기어간다”, “계단을 내려간다”보다 “계단을 폴짝폴짝 내려간다” 식으로요. 꾸며주는 말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지 가르쳐주는 거죠. 이게 바로 어휘력으로 이어집니다.   아이가 제대로 들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질문을 던져주세요. “초록색 차가 빠르게 지나가네”라고 말했다면, 아이에게 “차가 어떻게 지나갔지?”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이때 가능하면 아이가 문장으로 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직접 문장을 만들어 말하면 그 상황이나 표현이 내 경험이랑 더해지면서 이미지로 기억에 남습니다. 나중에 읽기로 넘어가도 이 방법을 쓸 수 있어요. 간단한 문장(초록색 차가 빠르게 지나갔다)을 읽게 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차가 어떻게 지나갔지?”라고 묻고 문장으로 답하게 돕는 겁니다.   홍인재 교장에 따르면 두뇌는 소리를 내어 읽을 때 글자와 소리를 더 잘 연결시킨다. 그가 “초등학생 때는 소리내어 정확하게 읽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프리랜서 김성태]  ━  📢 “정확하게 읽지 않으면 읽어도 모른다”   잘 읽으려면 소리와 글자를 연결하는 데 능숙해야 한다. 여기엔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그 연결이 정확해야 한다는 거다. 한글은 남들보다 빨리 뗐는데, 정작 단어와 문장 읽기가 안 된다면 이 연결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홍인재 교장은 “한글(글자)과 소리를 정확하게 연결하지 못하면 글자(이미지)를 보고 소릿값이 안 떠오르고, 소릿값을 찾는 데 집중하느라 뜻을 떠올리는 건 요원해진다”고 말했다. 글자와 소리가 막힘없이 연결되는 것, 이게 바로 읽기 자동화다.    읽기 자동화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세요. 문자를 보고 소리뿐 아니라 이미지가 자동으로 떠오르고, 뜻까지 이해하는 걸 말해요. 제가 한 글자씩 말해볼 테니, 머릿속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보세요. 먼저 ‘호’, 그다음은 ‘주’. 아마 여기까지 들으면 특정한 이미지가 떠오를 겁니다. 여기에 한 글자를 더 보탤게요, ‘머’. 뭐가 떠오르나요?   호주머니요. 바로 이게 자동화입니다. 지금은 소리를 듣고 자동화가 일어난 건데요, 읽을 때도 이런 자동화 과정이 일어나요. 문자를 보는 것과 동시에 소리와 이미지, 뜻까지 한번에 떠오르는 거죠. 성인은 이 과정이 너무 익숙해서 인식하기 어렵지만, 아이들은 이 과정 자체가 막힘없이 일어나지 못해요. 능숙해질 때까지 연습이 필요하죠.   어떤 연습을 해야 하나요?  정확하게 읽어야 해요. 그러려면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한 소릿값(音價)으로, 맥락에 맞게 의미를 살려 읽는 겁니다. 소리를 내면 우리 뇌는 본 것과 들은 것을 더 정확하게 연결합니다. 반면에 눈으로만 보면 대강 흘려 읽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아는 단어로 치환해서 읽고 지나가죠. ‘입금(入金)’의 뜻을 모르는 초등학생이 ‘통장으로 입금합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 ‘입금’을 ‘임금(왕)’ 등으로 바꿔 읽는 식으로요. 읽기 편한 대로 대충 보고 넘기는 겁니다. 읽기에 미숙한 아이들은 글자를 쫓아 읽는 데 바빠 틀리게 읽은 줄도 모릅니다. 이러면 전체 맥락도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고, 읽고도 어떤 내용인지 모르죠. 그래서 저는 한글 해득 이후부터 초등 6학년까지는 소리 내어 읽기를 권장합니다.   무조건 소리 내어 읽으면 되나요?  읽기 수준에 따라 단계별로 도와줘야 하는데요. 아이들의 읽기 단계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1단계는 음절 단위로 읽기예요. ‘호주머니’를 ‘호’ ‘주’ ‘머’ ‘니’ 한 글자씩 읽습니다. 한글을 떼고 읽기를 시작하는 아이들이 주로 음절 단위 읽기를 합니다. 이 시기에는 낱글자의 소릿값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소리와 글자 연결이 매끄러워집니다. 음절 단위에 익숙해지면 2단계 어절 단위로 읽습니다. ‘어제/ 호주머니에/ 구슬을/ 넣었습니다’라는 한 문장을 낱말 단위로 끊어 읽어요. 문장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음절과 어절 단위로 읽는 시기에는 ‘빠르게’ 보다 ‘정확하게’ 읽고 이해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단어를 읽고 난 뒤에는 떠오른 이미지를 말로 꺼내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가요? 의미 단위 읽기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문장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면서 낯선 단어가 나와도 읽는 걸 멈추지 않습니다. 맥락에 맞게 추론해가며 문장의 의미를 살려 읽을 줄 알죠. 이걸 ‘유창하게’ 읽는다고 하는데요. 유창하게 읽어도 초등 6학년까지는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아직 낯선 단어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렴풋이 추론해서 읽고 넘어갔더라도 따로 시간을 내어 단어의 정확한 뜻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전을 찾아서 뜻을 파악하라는 의미인가요? 단순히 사전적 의미만 찾으면 안 됩니다. 동의어, 반대어 등 관련어를 포함해 맞춤법까지 정확하게 확인해야 해요. 이 과정을 건너뛰면 언어 감각이 저하됩니다. 예를 들어 ‘싫다’와 ‘어렵다’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두 단어의 의미가 전혀 다른데, 비슷하게 사용한 겁니다. 이러면 같은 문장을 읽고도 각자 자기 식대로 이해합니다. 낱말 뜻을 대충 알면 학습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하죠. 상대의 말을 오해하니까요.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사흘’ 논란이나 ‘심심한 사과’ 논란 모두 단어 뜻을 제대로 몰라서 일어났던 해프닝이죠.   33년간 학교 현장에서 문해력 교육을 해온 홍 교장은 경험과 노하우를 담아 선생님들과 함께 『말글 공부』 , 『손바닥 그림책』을 펴냈다.[프리랜서 김성태]  ━  📢 “깊이 있게 읽어야 문해력 큰다”   문해력의 마지막 퍼즐은 ‘깊이 있게 읽기’다. 깊이 읽어야 읽고 쓰는 능력을 일상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 교장은 “읽은 내용을 학습에 활용할 줄 모른다면 독자를 배려해 글 쓸 줄 모른다면 그것도 문해력 부진”이라며 “깊이 있게 읽어야 이것들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깊이 있게 읽는 건 무엇인가요? 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경 지식을 활용해 해석하는 걸 말합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글쓴이가 의도하는 것을 찾고, 글에 대한 내 생각을 덧붙이는 것까지 포함하죠.    초등학교 저학년이 하기엔 어려워 보이는데요? 깊이 있게 읽으려면 먼저 독해(讀解)가 돼야 합니다. 독해는 말 그대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거죠. 아이들은 한글을 떼고 읽기에 익숙해지는 과정 내내 독해를 해왔어요. 듣고 읽은 것을 경험과 연결해 이미지로 떠올리는 식으로요. 이미지로 이해하기에 충실했다면 탄탄한 기초를 만든 겁니다. 여기에 배경 지식이 더해지면 글을 이해하는 폭이 깊어집니다.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고, 중심 문장을 찾을 수 있는 것도 가능해지고요. 초등학교 4~6학년 정도면 깊이 있게 읽는 활동이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상당수 아이들이 깊이 있게 읽기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독해를 하려면 유창하게 읽기와 어휘력이 선행돼야 합니다. 유창하게 읽지 못하면 글자의 소리를 기억해 내느라 정작 내용에는 집중할 수 없거든요. 이는 곧 이미지를 떠올려 이해하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초등학생 때 소리 내어 정확하게 읽는 활동을 많이 해야 하는 건 그래서예요. 그러나 현재의 초등 교육과정은 ‘정확하고 유창하게 읽기’보다 그 다음 단계인 ‘읽고 이해하기’ 활동이 너무 많습니다. 기초를 탄탄히 다질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포기하는 겁니다. 이러면 독서도 쉽지 않습니다.    깊이 있게 읽기에 도움 되는 책이 따로 있을까요? 기승전결 있는,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진 책이 좋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선악 구조가 분명한 전래동화를 추천해요. 맥락이 있으면 상황을 이미지로 그릴 수 있거든요. 고학년으로 가면 스토리가 있되 비교·분석·추리 등 종합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책을 권합니다. 추리 소설이 대표적입니다. 추리 소설은 앞뒤 맥락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상황의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다음 장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방대해 단숨에 읽기 힘듭니다. 한 권을 놓고 여러 번 읽기를 반복하며 자신만의 논리를 펼쳐 가면 좋습니다. 여기 중요한 건 연령이나 학년이 아니라 아이의 문해력 수준에 맞게 책을 선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직 의미 단위 읽기가 유창하지 않은 아이에게 추리 소설을 읽히면 책에 대한 흥미만 떨어집니다. 홍인재 교장은 “깊이 있게 읽으려면 유창하게 읽기와 어휘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정확하게 읽기 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홍 교장은 “한국의 문해력 교육은 한 번 미끄러지면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미끄럼틀”이라고 비판했다. 읽고 쓰기에 문제가 생기면 이전 단계로 돌아가 배워야 하는데 그런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아이 한명 한명에게 맞춘 맞춤형 교육이 필요하다. 홍 교장은 “문해력 교육의 핵심은 애착”이라며 “말을 걸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함께 소리 내어 읽어 줄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이와 함께 다양한 소리를 듣고, 분위기를 느끼고, 생각을 말로 나눠 보세요. 함께하는 시간보다 밀도 있는 소통이 중요합니다. 누군가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줄 때 잃어버린 문해력도 다시 살아납니다   ■ 문해맹 교육 전문가 홍인재 교장이 말하는 문해력 부진 피하는 법  「 ① 읽기 전 소리 구분이 먼저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까진 사람의 말소리를 많이 들려주세요. 소리를 작은 단위로 구분할 수 있어야 글자와 연결해 읽습니다. 의성어·의태어를 적극 사용해 어휘력을 기르고, 읽고 들은 걸 질문으로 확인하면서 이해력을 높여주세요.  ② 정확하게 읽지 못하면 읽어도 모릅니다. 글자를 읽는 순간 소리와 이미지가 떠오르고 내용이 이해되는 읽기 자동화 연습이 필요합니다. 소리 내어 읽을 수 있게 독려해 주세요. 그래야 정확하게 읽습니다. 모르는 단어 뜻도 정확하게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③ 깊이 있게 읽어야 제대로 된 문해력을 갖춘 겁니다. 깊이 읽기는 배경 지식을 활용한 이해 활동입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의미 단위로 유창하게 읽는 게 선행되어야 합니다. 유창하게 읽기가 완성되었다면, 기승전결 분명한 이야기과 추리 소설을 읽게 하세요. 」   ■ hello! Parents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 ① “문해력, 읽고 쓰는 능력이 전부 아니다” 문해력 전문가 4인의 진단 ② “냉장고에 붙인 단어카드, 소용없다”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   ③ “문해력 부진 주범은 사교육” 12년 논술 강사 출신 『공부머리독서법』 저자 최승필 ④ “글 잘 쓰려면, 자료 조사할 시간에 ‘이것’ 하라”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⑤ “읽어도 모르겠다면, 세 가지를 확인하라” 홍인재 전주 신동초 교장  」 관련기사 요즘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문해력 부진, 범인 밝혀졌다 ①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문해력 키우려면 학원 끊어!” 12년 대치동 논술강사 일침 강의 30%도 안하고 “글 써라”…서울대 교수의 이상한 수업

    2023.04.02 14:30

  • 강의 30%도 안하고 “글 써라”…서울대 교수의 이상한 수업 ④

    강의 30%도 안하고 “글 써라”…서울대 교수의 이상한 수업 ④ 유료 전용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인 유네스코는 문해력을 ‘최소문해력’과 ‘기능적 문해력’으로 나누어 정의한다. 최소문해력은 글자를 읽고 글씨를 쓰는 기초 능력을 뜻하고, 기능적 문해력은 글자로 이뤄진 의미 덩어리, 즉 글을 읽고 이해하고, 쓰고 활용하는 능력을 뜻한다. 두 가지 문해력 모두 ‘읽기’만큼 ‘쓰기’를 강조하고 있다.   hello! Parents가 만난 4인의 전문가들은 문해력을 ‘커뮤니케이션 역량’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 비춰보아도 쓰기는 읽기만큼 중요하다. 읽기가 누군가가 쓴 글을 읽고 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쓰기는 누군가를 이해시킬 목적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해야 소통하고 협업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 문해력 논의는 아직 ‘읽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hello! Parents 문해력 집중 해부 4편에서는 충분히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쓰기’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를 만났다. 박 교수는 서울대 창의성 교육을 위한 교수 모임의 일원으로, 9년간 글쓰기 중심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park.jeongmin@joongang.co.kr   글쓰기는 종이 위에서 생각하는 행위다.   “글쓰기 수업도 아닌데 왜 매시간 학생들에게 글을 쓰게 하냐”는 질문에 박주용 교수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교육자인 윌리엄 진서의 말을 인용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글을 써오라고 하는 것은 너의 생각을 가져오라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박주용 교수의 수업에서 학생들은 매 수업 주어진 읽을거리를 읽고 글을 써 제출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친구의 글에 A·B·C 등의 학점을 부여해 평가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이 될지 제안도 해야 한다. 그럼 친구는 그 제안이 글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됐는지 다시 평가한다. 고강도 글쓰기 수업 같지만 심리학 전공 수업이다.   박주용 교수가 서울대 한 강의실에서 자신의 수업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9년 전부터 학생들에게 매 수업 글쓰기 과제를 제출하게 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배워야 할 개념이 많은 전공 수업을 굳이 이렇게 운영하는 이유가 뭔가요? 굳이 교수한테 그런 개념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려고 대학 온 거 아닌가요? 인터넷만 있으면 누구나 온갖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요. 과거엔 전문가만 접근할 수 있던 지식이나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해력이 최근 ‘경제 문해력’ ‘과학 문해력’ 등으로 세분화되는 것도 바로 이런 변화 때문이고요. 혼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걸 굳이 교수한테 배울 필요가 없죠.   그럼 학교에서는, 그리고 교사나 교수로부터는 무엇을 배워야 하나요? 읽고, 이해하고, 생각하고, 쓰는 방법요. 이게 곧 문해력이고, 스스로 공부하는 힘이죠. 제 수업은 바로 이걸 위해 설계됐어요.   교수가 제시하는 읽을거리를 읽는 건 이해가 갑니다. 어떤 개념이나 핵심 내용을 알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왜 꼭 글쓰기를 해야 하나요?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글을 써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내가 어디까지 이해했고, 어떤 부분을 모르는지도 글을 써야만 알 수 있죠. 읽기만 했을 땐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써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론』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독서는 지식이 많은 사람을,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학생들에게 어떤 개념이나 핵심 내용을 설명하는 글을 쓰게 하는 건가요? 글을 쓴다는 건 생각한다는 겁니다. 내용을 파악하는 글을 쓴다는 건 글쓴이의 생각을 이해하는 수준의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한 차원 더 높은 생각은 뭘까요? 글쓴이의 생각에 대한 나의 생각이죠. 그래서 저는 글의 핵심 내용이나 주장을 비판하거나 발전시키라는 쓰기 과제를 냅니다. 너의 생각을 가져오라는 겁니다.   비판하거나 발전시키는 글을 쓰라고 요구하면 자기 생각을 가져오나요? 어떤 내용이나 주장을 비판하려면 왜 그게 말이 안 되는지 설득해야 해요. 왜 비판하는지, 그 이유가 자기 생각이죠. 글쓴이의 생각을 발전시키려면 그걸 긍정하는 이유와 발전 방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자기 생각이고요.   읽기에서 끝나지 않고 글쓰기도 해야 하는 이유는 알겠어요. 그런데 저는 학교에서 글쓰기를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어요. 신문사에 들어와서야 글쓰기를 배웠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글쓰기를 왜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건가요? 지금까지는 굳이 나의 생각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패스트 팔로잉 전략으로 충분했거든요. 이미 만들어진 지식을 더 많이, 더 빨리 아는 게 더 중요했죠. 강의 중심 교육이 이뤄진 이유예요. 하지만 이제 달라졌어요. 퍼스트 무빙 전략이 필요해졌으니까요. 그러려면 생각을 해야 해요. 미국에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전 교육과정에서 글쓰기를 하게 합니다. 프랑스에선 엄청난 예산을 써서 일주일간 100% 논술형 대학입학 자격시험(바칼로레아)을 치르게 하고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  글 잘 쓰려면, 자료 조사할 시간에 ‘이것’ 해야   박주용 교수는 “글을 잘 쓰려면 자료 조사에 시간을 쓰기보다 생각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을 쓰는 건 종이 위에서 생각하는 행위”라고도 했다. 김현동 기자   쓰지 않는 읽기는 반쪽짜리 공부라는 걸 알았다 해도 막상 쓰려고 하면 써지지 않는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국어교육 역시 독해 중심으로 이뤄지는 게 현실이다. 하얀 컴퓨터 화면 위에 깜빡이는 커서를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박주용 교수가 글쓰기 중심의 수업을 진행하면서 만난 학생들도 같은 질문을 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줄 만한 교재를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걸 찾지 못했다. 작문 중심의 쓰기 방법론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내용이나 그에 대한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치는 방법을 담은 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직접 쓴 책이 『생각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장 중요한 건 태도입니다. 실제로 글쓰기 태도 검사에서 글쓰기 능력이 타고난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글쓰기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배우고 노력하면 좋아진다는 생각을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리고 꾸준히 써야 합니다. 앞서 인용한 윌리엄 진서는 ‘글쓰기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강제로 일정한 양을 정기적으로 쓰는 것’이라고까지 했어요. 운동선수가 훈련하듯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주로 쓰는 글은 논픽션, 주장하는 글이에요. 이걸 잘 쓰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그 사람이 자기주장을 어떻게 전개하는지 분석해 보는 게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논리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어요. 또 하나, 글쓴이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보는 겁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읽을거리를 주고, 핵심 내용을 파악해 그에 대해 비판하거나 발전시키라는 글쓰기 주제를 주는 이유죠.    글을 쓰려면 자료 조사가 필수적인데요, 얼마나 해야 할까요? 저는 학생들에게 글쓰기 과제를 낼 때 제가 제시한 읽을거리만 읽고 쓰라고 합니다. 다른 자료를 찾아보는 게 나빠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확보하라는 취지죠. 자료 조사를 많이 한다고, 많이 읽는다고, 많이 안다고 꼭 좋은 글을 쓰는 건 아니에요.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생각을 하는 겁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고 조언하는 사람이 많아요. 기자들도 좋은 글을 쓰려면 취재를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자료 조사를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낯설어요. 자료 조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죠. 제 미국 유학 시절 얘기가 도움이 될 듯하네요. 지도교수가 논문을 쓰다 ‘이런 연구 있지 않나?’ 하고 물으면 열 번에 아홉 번은 제가 답을 했어요. 그것도 몇 년에 누가 썼다고 정확하게요. 연구실의 구글이었죠. 그런데 논문을 쓸 때가 됐는데, 저만 못 쓰는 거예요. 대답 한 번 못하던 미국인 친구들은 주제를 잡고 들이 파더니 성과를 막 내는 데 말이죠. 뭐가 문제였을까요?   너무 많이 알아서 궁금한 게 없었던 걸까요? 제가 알던 지식은 ‘생기 없는 지식’이었던 겁니다. 활용하지도 않고, 검증하지 않고, 참신한 생각과 결합하지도 않은 그저 주입한 지식요. 『교육의 목적』을 쓴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노스 화이트헤드는 ‘박식함에 그치는 사람은 지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제가 자료 조사보다 생각하고 글쓰기를 강조하는 건 그래서예요. 생기 없는 지식에 얽매이지 말라는 겁니다.   한 번에 완성되는 글은 없습니다. 글을 다듬는 교수님만의 노하우가 있을까요? 제가 쓴 글의 내용을 누군가에게 말해 보거나 직접 보여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얻기 위해서죠.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 좋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어요.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또 하나는 누군가가 자신의 글에 대해 피드백을 요청하면 최대한 받아주는 거예요. 그래야 내 글에 대한 피드백도 요청할 수 있으니까요(웃음).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글을 피드백하면서 글 쓰는 방법도 배울 수 있거든요.    ━  강의 대신 토론을 하는 이유   박주용 교수는 “수업 전에 미리 공부하고, 수업 시간엔 토론하는 수업은 결국 문해력과 스스로 공부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현동 기자   박주용 교수의 수업에선 ‘공부’라 부를 만한 활동이 모두 수업 전에 일어난다. 읽을거리를 읽고, 글을 쓰고, 친구의 글을 평가·피드백하고, 그 피드백을 또 평가하는 전 과정이 수업 전 온라인 공간에서 진행된다. 그럼 수업 시간엔 도대체 뭘 하는 걸까? 박주용 교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토론하고, 강의는 전체 수업의 3분의 1을 넘지 않게 한다”고 말했다.   강의를 전체 수업의 3분의 1을 넘지 않게 한다고요? 개념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학창 시절 저 역시 토론 수업을 들어봤지만, 유익했다는 기억이 별로 없어요.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미리 공부하지 않고 하는 토론은 잡담과 다르지 않아요. 제 수업에서 학생들은 충분히 공부하고,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까지 정리해 오기 때문에 완전히 다릅니다.   제가 했던 토론은 진짜 토론이 아니었네요. 제대로 토론하면 어떤 점이 좋죠?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접할 수 있습니다. 애매하거나 복잡한 사안에 대한 이해와 관용 역시 높아집니다.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의견을 덧붙이면서 공감 능력도 향상되죠. 다양한 생각을 종합하고 통합하는 기술도 늘고요. 무엇보다 학습 효과도 높습니다.   토론하면 학습 효과가 높다고요? 실험 얘길 하나 들려드리죠. 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한 그룹은 동영상 강의를 듣고 혼자 공부하게 했어요. 또 다른 그룹은 동영상 강의를 듣고 토론하게 했죠. 마지막 그룹은 동영상 강의를 필사해 텍스트로 만든 후 그걸 가지고 혼자 공부하게 하고 토론했어요.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을 두고 세 그룹 모두 학습 내용에 관한 시험을 봤죠. 결과가 어땠을까요?   토론한 그룹이 더 좋은 성적을 받았나요? 토론을 한 2개 그룹의 성적이 혼자 공부한 그룹보다 좋았어요. 두 그룹 중에선 혼자 공부하고 토론한 그룹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았고요.   왜 토론하면 학습 효과가 더 좋은 거죠? 토론하면 상호작용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에요. 일반적으로 학습 내용과 관련된 상호작용이 많으면 성취도 역시 높아집니다. 다양한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죠. 토론을 한 2개 그룹의 토론 장면을 녹음해 분석했더니, 혼자 공부하고 토론한 그룹이 더 많이 상호작용했어요. 이 그룹이 가장 높은 성적을 받은 이유죠.   교수님 수업에선 토론 주제를 어떻게 선정하나요? 제가 글쓰기와 함께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과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질문이죠. 한 사람당 최소 3개의 질문을 제출하게 합니다. 그 질문 중에서 토론 주제를 꼽기도 하고, 학생들이 쓴 글에서 추출하기도 합니다. 적당한 게 없으면 제가 만들기도 하고요.   한국인은 유독 질문을 안 하는 걸로 유명한데요, 학생들이 질문을 많이 하나요?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폐막식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줬는데, 아무도 질문하지 않은 게 회자됐을 정도잖아요. 질문하지 않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권위적인 문화 때문이기도 하고, 강의 중심의 대형 수업에선 질문을 받을 여유가 없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가 수업하면서 느낀 건 바로 이거였어요. ‘몰라서 못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질문할 수 없습니다. 알아야 그제야 궁금한 게 생기는 법이에요.   박주용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글을 쓰면 창의력도 생긴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창의력은 가장 좋은 결과물에 바치는 일종의 찬사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선 그걸 만들 때까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계속 생각하세요.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글쓰기입니다.      ■ 9년 간 글쓰기 중심 교육 실천한 박주용 교수의 쓰기론 「 ① 읽기는 반쪽짜리 공부다. 글을 써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글을 쓸 때는 핵심 내용을 설명하는 걸 넘어 그것에 대한 나의 입장과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지식을 주입하는 걸 넘어 뭔가를 만들어내는 생각을 할 수 있다. ② 글을 잘 쓰려면 꾸준히 써야 한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그 사람이 자기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생각하는 것이다. 자료 조사보다 중요하다. ③ 읽고 생각해서 써왔다면 강의할 필요가 없다. 강의를 안 해서 생긴 시간엔 토론을 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 다양한 생각과 관점을 접하고, 이들 의견을 종합하는 기술을 갖게 된다. 」   ■ hello! Parents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 ① “문해력, 읽고 쓰는 능력이 전부 아니다” 문해력 전문가 4인의 진단 ② “냉장고에 붙인 단어카드, 소용없다”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  ③ “문해력 부진 주범은 사교육” 12년 논술 강사 출신 『공부머리독서법』 저자 최승필 ④ “글 잘 쓰려면, 자료 조사할 시간에 ‘이것’ 하라”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⑤ “책 읽어주기와 소리 내 읽기부터 시작하라”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 저자  홍인재 전주 신동초 교장(4월 3일 발행) 」    관련기사 요즘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문해력 부진, 범인 밝혀졌다 ①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문해력 키우려면 학원 끊어!” 12년 대치동 논술강사 일침

    2023.03.29 10:09

  • “문해력 키우려면 학원 끊어!” 12년 대치동 논술강사 일침 ③

    “문해력 키우려면 학원 끊어!” 12년 대치동 논술강사 일침 ③ 유료 전용

    초기 문해력의 골든타임이 만 8세(초2)까지라면 초등학교 6년은 이를 한 단계 발전시킬 기회다. 학령기 문해력의 핵심은 ‘독서’다. 하지만 학령기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다. 2021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은 연간 66.6권의 책을 읽었다. 2년 전보다 20.3권 감소한 수치다. 학생들이 꼽은 독서 방해 요인 1위는 ‘스마트폰, 텔레비전, 인터넷, 게임 등을 이용해서’였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문해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hello!Parents는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기획을 하면서 두 번째로 최승필 독서전문가를 만났다. 2018년 베스트셀러였던 『공부머리 독서법』의 저자인 그를 지난 8일 만나 ‘학령기 읽기’를 중심으로 문해력 높이는 법을 물었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park.jeongmin@joongang.co.kr 아이 문해력을 키우려면 사교육부터 그만둬야 해요. 학원 강의는 듣는 공부거든요. 독서논술 학원에 다녀도 문해력이 늘지 않는 건 그래섭니다. 그 시간에 책을 읽게 해야 문해력이 높아져요.   “초등학생 자녀를 둔 양육자가 아이의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뭘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최승필 저자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해 우리 국민이 쓴 사교육비는 26조원을 기록했다.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7년 이래 최고치다. 사실 이런 통계가 아니어도 사교육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건 누구나 안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데도 그는 주저 없이 사교육을 문해력 부진의 주범으로 꼽았다. 더구나 그는 2006년부터 강남 대치동에서 12년간 아이들을 가르친 논술강사 출신이다.    ━  📢‘듣는 공부’ 시키는 사교육 그만둬라   최 저자는 논술학원에서 일하던 초기 ‘요즘 애들 정말 똑똑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초등학생이 중학교 과정 수학 문제를 술술 풀고,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수하던 아이들 대부분이 중학교에 올라가 성적이 떨어졌다. 예외가 없었다. 주변 강사들은 “원래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럴까?’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유를 알게 됐다. 문제는 사교육이었다.   문해력 부진과 사교육이 무슨 관계인가요? 학교 공부가 뭔가요? 기본적으로 교과서라는 책을 읽고 이해하는 거예요. 책에 담긴 지식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게 수업이고요. 아이들은 선생님 설명을 ‘듣고’ 교과서를 ‘읽으며’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그럼 사교육은 뭘까요? 교과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해 주는 서비스입니다. 사교육을 받으면 읽고 이해할 필요가 없어요. 강사의 설명을 듣고, 문제를 풀고, 틀린 문제에 대한 설명을 다시 듣고, 다시 문제를 풀면 되니까요. ‘읽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듣고’ 이해하는 공부를 하는 데 익숙해지는 거죠.   듣고 이해하는 게 문제인가요? 이해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닐까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시간이 너무 많이 듭니다. 교과서를 읽으면 20~30분이면 끝날 내용도 강사의 설명을 들으면 1시간이 걸리죠.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습해야 할 지식의 양이 적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안 됩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용이 많아지고 어려워져요. 초등 고학년만 돼도 전 과목을 설명해 주기 버겁습니다. 실제로 듣는 공부법이 비효율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어요. MIT미디어랩에서 한 대학생에게 교감신경을 측정하는 기기를 부착한 후 활성화 여부를 관찰했어요. 교감신경이 가장 활성화되지 않은 때가 언제였을까요? TV 시청할 때랑 수업 들을 때였어요. 강의를 들을 때 사람의 뇌는 잠을 잘 때보다 더 멍한 상태에 빠진다는 겁니다.   또 다른 문제는 뭔가요? 사교육을 많이 받으면 책 읽을 시간이 줄어듭니다. 학원 안 가는 시간에는 놀아야 하니까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책을 좋아하던 아이도 고학년이 돼 ‘학원 뺑뺑이’를 돌다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없어집니다. 독서는 자연스레 학원‧숙제‧스마트폰에 밀려 뒷전이 되죠. 이런 아이는 중학생이 되면 대부분 성적이 떨어집니다.   책 안 읽고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는 애들도 있지 않나요? 일부 특이한 경우입니다. 호기심이 많고, 집요한 아이들이요. 이런 아이들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볼 때 이해되지 않는 걸 대충 넘어가지 않고 집요하게 탐구합니다. 항상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품고 살기 때문에 일상생활이나 학교 공부만으로 언어능력이 향상됩니다. 쉽게 말해 평소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죠.    지금 당장 사교육을 끊고 혼자 공부하게 해야 한다는 건가요? 어렸을 때부터 사교육 의존도가 높은 아이들은 혼자 공부하는 습관이 없습니다. 학원을 그만둔다고 바로 스스로 공부하지 않아요. 더구나 문해력이 낮기 때문에 혼자서 교과서나 참고서를 읽고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니 공부가 잘 될 리 없고, 다시 사교육의 문을 두드리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죠. 학원을 끊기에 앞서 문해력부터 키워야 해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학원에 의존해선 안 됩니다. 학원에서 강사의 설명을 들으면 그 자리에선 이해가 됩니다. 공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죠. 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아요. 『공부머리 독서법』을 쓴 최승필 저자가 지난 8일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운영 중인 서점 ‘공독서가’에서 책에 둘러싸인 채 웃고 있다. 그는 “사교육이 아이들의 문해력을 저하시키는 주범”이라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  📢권장도서 목록부터 갖다 버려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아이가 책 읽기를 좋아할 수 있을까? 그의 답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재밌게 읽으면 된다는 것이다. 얼핏 쉬워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말 속엔 아이가 ‘주도적’으로 ‘몰입독서’를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읽을 책을 고르는 것부터 아이에게 맡겨야 한다. 최 저자는 “아이에게 학년별 권장도서를 건네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권장도서를 주는 게 왜 잘못됐나요? 양육자가 아이가 읽을 책을 정해준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게 왜 문제인가요? 양육자가 양서(良書)를 권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직접 고르지 않은 책이니까요. 결과적으로 독서에 대한 아이의 흥미와 주도성을 떨어뜨려요. 읽고 싶지도 않은 책을 줘놓고 안 읽는다고 다그치면 누가 책을 읽고 싶을까요? 독서와 문해력에서 더 멀어지는 길이죠. 책을 보고 있어도 글자만 읽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해하지 않은 채로요. 독서의 핵심은 ‘재미’예요. 아이 스스로 ‘어? 재밌네’라고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독서를 놀이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거죠. 그러려면 모든 행위의 주체가 아이여야 합니다. 책을 고르는 것도 마찬가지죠. 책 고르기는 독서의 시작입니다. 이 책 저 책 고르면서 독서와 더 가까워지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취향을 파악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다 진짜 재밌어서 ‘몰입’해 읽는 책을 만나면 게임 끝이죠.   ‘몰입’해 읽을 수 있는 책은 어떻게 찾으면 될까요? 우선 권장도서 목록부터 갖다 버리세요. 그다음 아이와 손잡고 도서관에 갑니다. 양육자와 아이가 읽고 싶은 책을 같이 빌리고 함께 읽습니다. 양육자가 책을 읽는 게 아이에게 가장 좋은 독서 환경입니다. 만약 아이가 재미없다고 하면 끝까지 읽으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책을 사지 않고 빌려 읽어야 하는 이유죠.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아이가 푹 빠질 수 있는 ‘인생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책’을 못 찾고 시간만 낭비하면 어쩌죠? 양육자가 조급해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재밌는 책을 발견할 수 있어요. 낚시와 비슷합니다. 낚싯대를 던진 다음 물고기가 덥석 물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야 하잖아요. 참지 못하고 낚싯대를 일찍 건져 올리면 그 어떤 물고기도 낚을 수 없죠. 인생책도 마찬가지예요.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는 게 낚싯대를 던지는 겁니다. 한두 번은 허탕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양육자가 기다려주면 언젠가 ‘비단잉어’ 같은 인생책을 낚을 수 있죠. 그러려면 아이가 책에 흥미를 느낄 때까지는 독서를 최우선 순위로 둬야 해요.   그러다 성적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요? 문해력을 키우지 않고는 절대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좋은 성적을 받는다 해도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문해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독서고요. 믿고 가셔야 해요. 최승필 저자는 “아이가 책에 흥미를 갖게 하려면 권장도서 목록부터 갖다 버리라”고 조언했다. 우상조 기자  ━  📢딱 한 권만 ‘제대로’ 읽게 하라   독서를 통해 문해력을 키우려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어야 할까? 최 저자는 “딱 한 권만 읽어도 된다”고 말했다. 단서가 하나 있다.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거다. 책을 본 뒤 줄거리는 물론 구체적인 장면도 몇 개 기억한다면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 그 정도는 대체로 기억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다수 아이들이 독서와 관련해 안 좋은 습관을 하나 갖고 있어요. 바로 속독(速讀)입니다. 우등생의 읽기 방법으로 한때 유행했었죠. 책을 많이 읽는데도 언어능력이 낮은 아이들은 대부분 속독을 해요. 책을 빨리 읽는 건 문해력이나 사고력을 키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책을 빨리 읽었다’는 만족감만 얻을 뿐입니다. 실제로는 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고요. 같은 맥락으로 다독(多讀)하는 것도 권장하지 않아요. 책을 많이 읽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제대로 읽기 어렵거든요. 수준에 맞지 않게 어려운 책을 읽는 것도 문해력 키우는 데는 도움이 안 됩니다.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볼 가능성이 크니까요. 이건 독서가 아니라 도서 목록 수집이죠. 저는 학습만화나 전집도 추천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소리 내 읽는 속도로 정독(精讀)해야 합니다. 등장인물의 관계와 그 인물이 처한 상황, 주요 사건과 줄거리를 충분히 파악하면서 읽어야죠.   얼마나 읽어야 할까요? 책을 읽는 게 익숙하지 않다면 많이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일주일에 2~3시간, 2주에 한 권만 읽으면 됩니다. 학교 쉬는 시간이나 자기 전에 30분만 투자해도 되죠.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아이 수준보다 낮은 책을 주는 게 좋아요. 그래야 흥미를 느낄 테니까요. 최승필 저자는 “책을 통해 문해력을 키우려면 딱 한 권만 제대로 읽어도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아이가 책을 제대로 읽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요? 초등학교 1~3학년이라면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세요. 도서관에서 『외딴 집 외딴 다락방에서』나 『내 배가 하얀 이유』 같은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책을 빌리세요. 아이가 읽어 본 적 없고, 흥미를 느끼는 책으로요. 양육자가 먼저 책을 읽은 뒤 아이에게 건네주세요. 아이가 책을 읽고 나서 줄거리를 물어봤을 때 얼마나 상세하고 정확히 얘기하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줄거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거나 내용이 단순하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볼 수 없죠. 독서퀴즈를 내는 것도 방법입니다.   독서퀴즈는 어떻게 내면 되나요? 아이가 볼 책을 양육자가 먼저 읽은 뒤 질문을 10개 정도 정리해 물어보세요. 문제를 낼 때는 줄거리와 직접 연관이 있는 핵심적인 내용을 다뤄야 합니다. 『외딴 집 외딴 다락방에서』를 예로 들면 ‘에마가 사흘 동안 쓸 방은 원래 누구의 방이었나’ ‘동생이 에마에게 다락방에 대해 한 얘기는 뭔가’ ‘다락방 선반 위 작은 도자기 인형은 어떤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나’ 같은 질문이죠.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0.1초 만에 나와야 합니다. 만약 10개 질문 중에 3문제 이상 틀렸다면 문해력이 낮다고 봐야 합니다. 2~3문제만 맞혔다면 문해력이 심각한 상태고요.   문해력이 낮은 아이들은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양육자가 읽어주는 게 좋아요. 아이의 언어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서 일주일 동안 매일 초반 3분의 1을 읽어주는 거죠. 이런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아 독서하는 행위 자체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또 도입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뒷부분도 궁금해 하지 않고요. 책의 앞부분을 읽어주면 핵심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돼 호기심을 갖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자발적으로 읽을 수 있게 되죠. 일주일 동안 반복한 뒤에는 10개 정도 핵심 질문을 던져 아이가 제대로 읽었는지 점검하면 됩니다. 4~5권을 반복하다 보면 아이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책이 나옵니다. 그때 다음 단계로 올라가면 됩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혼자 힘으로 읽게 해야죠. 단계별 독서와 반복독서가 있는데요. 단계별 독서는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학년별로 읽어 나가는 겁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의 문해력을 가졌다면 초등학교 3학년 대상 책 10권을 읽고, 독서퀴즈를 봅니다. 이때 세 권 이상 만점이 나오면 초등학교 4학년 책으로 넘어가는 식이죠. 반복독서는 자기 연령에 맞는 책을 여러 번 반복해 읽는 겁니다. 문해력이 떨어지면 자기 연령대의 책을 버거워 합니다. 글의 논리와 분량·정보량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한두 번 읽어서는 수박 겉핥기밖에 안 됩니다. 반복독서는 이 악순환을 끊어주죠. 독서퀴즈를 다 맞을 때까지 몇 번이든 반복해 읽으면 다음부터는 수월해집니다.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최승필 저자의 ‘문해력 높이기’는 책으로 시작해서 책으로 끝난다. 그가 매력 없는 정답 같은 주장을 하는 건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구구단도 못 외운 채 반에서 꼴찌를 하던 ‘열등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플란더스의 개』를 읽고 독서의 매력에 푹 빠졌고, 1년간 300권의 책을 읽었다.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내신성적 9등급이었던 그가 수능에서 1등급을 받은 비결도 독서다.   독서는 저의 인생을 바꿔놨습니다. 책을 제대로만 읽으면 누구나 저처럼 ‘기적 아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아이와 함께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같이 책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최승필 저자는 “아이가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려면 독서퀴즈를 내보면 된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 최승필 저자가 말하는 아이 문해력 키우는 법 「 ①‘듣는 공부’ 시키는 사교육 그만두세요.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을 다닌 탓에 교과서를 ‘읽으며’ 학습하기보다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문해력이 길러지지 않고 학습량이 많아지는 중학교부터 성적이 하락합니다.  ②권장도서목록부터 갖다 버리세요. 문해력을 높이는 비결은 ‘좋아하는 책을 재밌게 읽는 것’입니다. 아이 주도적으로 ‘몰입독서’를 하게 도우려면 권장도서목록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가 혼자 힘으로 재밌는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세요. ③딱 한 권만 ‘제대로’ 읽게 하세요. 줄거리는 물론 구체적인 내용까지 기억할 수 있어야 책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양육자가 퀴즈를 내서 확인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책과 담 쌓은 초등 저학년이라면 양육자가 초반 3분의 1정도를 읽어주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   ■ hello! Parent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 ① “문해력, 읽고 쓰는 능력이 전부 아니다” 문해력 전문가 4인의 진단(3월 20일 발행) ② “냉장고에 붙인 단어카드, 소용없다”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3월 23일 발행) ③ “문해력 부진 주범은 사교육” 12년 논술 강사 출신 『공부머리독서법』 저자 최승필 ④ “내가 매 수업 글쓰기 과제를 내는 이유”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3월 30일 발행) ⑤ “책 읽어주기와 소리 내 읽기부터 시작하라”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 저자  홍인재 전주 신동초 교장(4월 3일 발행) 」 관련기사 요즘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문해력 부진, 범인 밝혀졌다 ①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독서나무와 체크리스트, 2가지면 끝” 성효쌤의 특급 독서전략

    2023.03.26 11:05

  •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8세까지가 문해력 골든타임…“냉장고서 단어카드 떼세요” ② 유료 전용

    문해력은 단숨에 키워지지 않는다. 빠르면 엄마 배 속부터 움트기 시작해 노년까지 전 생애에 걸쳐 발달한다. 평생 익히고 다져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결정적인 시기는 있다. 출생 후부터 만 여덟 살(초등학교 2학년)까지의 아동기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가 문해력 성장의 골든 타임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때 기초를 다져놓지 못하면 전 생애에 걸쳐 학습, 업무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기초 문해력이 튼튼하면 학업 성취부터 진로 선택까지 탄력을 받는다.   문해력 집중 해부 기획을 시작하며 hello!Parents가 아동 문해력 전문가인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를 가장 먼저 만난 이유다. 문해력 발달의 첫 단추는 어떻게 끼워야 하는 걸까? 문자를 읽고 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문해력의 뿌리를 단단하게 내려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지난 10일 만난 최 교수에게 ‘읽기’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문해력 발달 가이드를 물었다.   그래픽=박정민 디자이너 park.jeongmin@joongang.co.kr   문해력을 위해 한글 학습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아이에게 말을 충분히 들려주는 겁니다. 일상에서 쓰는 적절하고 의미 있는 말들요.   “아이의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최나야(아동가족학) 서울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글을 읽기 전 말의 소리와 의미를 처리하는 능력부터 잘 길러놓아야 한다는 얘기다. 문해력의 핵심이 되는 이해력은 그렇게 자란다.    최나야 교수는 아동 언어·인지 분야 전문가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로서 아이의 문해력 성장을 직접 도운 실전 경험도 있다. 그런 지식과 노하우를 담아 『문해력 유치원』『초등 문해력을 키우는 엄마의 비밀』 등의 책을 썼다.   최 교수는 “이해력은 문자를 배우기 훨씬 전부터 생기기 때문에 아이와 나누는 대화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한글은 일찍, 빨리 뗀다고 능사가 아니다.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아이 혼자 책을 읽도록 하는 것도 문해력 발달에는 바람직하지 않다. 최 교수는 아이의 문해력 성장을 위해 읽기 단계에 따라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보라고 말했다.   지난 10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최나야 교수는 “아이들이 한글을 읽기 전부터 일상 속에서 적절하고 의미있는 말소리를 충분히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  ① 읽기 전 아이: 충분히 대화하고 있나요?   최나야 교수는 “영·유아기야말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평생 가져가야 할 문해력의 바탕을 만드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문해력 발달에 필요한 건 듣고 말하는 경험, 즉 일상 대화다.   글자도 모르는 영·유아기가 문해력 발달에 왜 중요한가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말소리를 듣고 처리하는 데서 시작돼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문해력은 놀랍게도 엄마 배 속부터 시작되죠. 태아도 소리를 들으니까요. 익숙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짤막하고 반복적인 말을 아이들은 잘 기억합니다. 영·유아기에는 듣고 말하는 경험을 충분히 해야 해요. 어른과 상호작용하면서 구어(口語)로서의 언어가 입력돼야 해요. 대화가 질적으로 수준 높은 언어로 이뤄졌다면 더 좋죠. 음식도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야 건강에 좋은 것처럼요.   아이와 어떻게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아이가 잘 모르는 단어나 구문을 알게 해주면 됩니다. 일부러 유아어를 쓰거나, 쉬운 단어만 반복해 쓰는 건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중요한 건 아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먹는 오감과 일상을 언어와 결합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밥을 줄 때 ‘오늘은 밥이 고슬고슬하게 잘 됐다’고 하거나, ‘너는 진밥이 좋아, 된밥이 좋아?’라고 물어보는 거죠.   아이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아무 맥락 없이 생뚱맞게 어려운 단어나 표현을 쓰면 혼란스럽겠죠. 그런데 상황적 맥락이나 대화의 흐름 같은 단서가 있다면 충분히 뜻을 파악할 수 있어요. 어른이 부연해서 쉽게 뜻을 풀어서 말해줄 수도 있고요. 누구나 언어 습득 능력을 타고나요.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특정 상황에서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접수하고, 처리해서 활용할 줄도 알죠. 이렇게 경험, 맥락 속에서 알게 된 단어일수록 기억에도 오래 남아요.   아이와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눈다는 걸 어렵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림책을 읽어 주세요.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내용에 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거든요. 사건의 전후 관계나 이야기 흐름도 이해할 수 있고, 문자에도 익숙해져요. 다양한 단어와 표현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어휘력을 늘리는 데도 효과적입니다. 특히 아이가 다섯 살 무렵에 어휘력이 극적으로 발달하고 개인 차도 벌어지기 때문에 이때 그림책을 읽는 게 정말 좋습니다.   유아 때부터 어휘력 차이가 나기 시작하나요? 다섯 살 정도면 평균 6000개 단어를 이해하고, 2200개 정도의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요. 어휘력은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유아 때 어휘력 차이가 학령기에 더 크게 벌어진다는 겁니다. 이미 아는 단어가 많은 아이는 새로운 단어도 쉽게 학습하거든요. 폭넓은 어휘력을 토대로 독해 능력도 심화시킬 수 있고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그림책 읽기와 대화를 통해 의미 있는 단어를 알려주는 게 중요해요.    단어 카드나 낱말 사전 책을 보여주는 건 어휘력 발달에 도움이 될까요? 그렇게 하면 아이가 단어를 많이 아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이렇게 습득할 수 있는 단어엔 한계가 있어요. 낱말 카드 속 ‘서랍’이라는 글자는 어떤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게 아니죠. 또 실제 서랍에 ‘서랍’이란 글자를 붙여 놓는 것도 인위적이고 어색합니다. 집 안 사물마다 그 이름을 붙여 놓는 경우는 없잖아요. 실제로 상황 속에서 배우는 게 학습의 본질적인 방식인데, 그런 방법과 동떨어져 있어요. 은연중에 글자를 빨리 익히라는 압력으로 작용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랍에 ‘서랍’ 카드를 붙이는 건 맥락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 카드를 보면서 “아, 서랍이라는 말은 저런 모양의 글자를 가졌구나” 하고 이해할 수도 있고요.  만약 서랍마다 ‘양말’ ‘속옷’ 이런 글씨를 붙인다면 그건 이야기가 다릅니다. 일상이란 맥락이 있어요. 서랍마다 가족들의 이름을 적어두는 것도 마찬가지죠. 각각의 서랍에 든 물건의 종류, 소속을 알려주는 상황과 이유가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그냥 ‘서랍’이라고 붙여두는 건 아이에게 ‘서랍’이라는 글자를 알려주려는 목적 외엔 아무런 맥락이 없습니다. 이런 방법은 길게 갈 수도 없고, 큰 효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맥락이 있는 좋은 방법이 있나요?  동네를 산책하면서 자주 가는 가게의 간판을 함께 읽고 써보는 것, 장 보러 가서 마트 전단 속에서 좋아하는 식품 이름을 찾고 읽어 보는 것 같은 활동이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아이들은 일상의 맥락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배울 때 가장 재미있고, 능동적으로 배울 수 있어요.    ━  ② 읽기 시작한 아이: 한글 스스로 배울 기회를 주고 있나요?   문해력은 말 그대로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읽으려면 한글을 알아야 한다. 요즘 이르면 만 3세 전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늦어도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습득하고,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나야 교수는 “한글은 문해력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며 “일찍 한글을 깨쳐야 한다는 조급함과 불안함부터 버리라”고 했다.   최나야 교수는 “한글은 듣고 이해하는 기초 이해력이 있다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충분히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한글 언제 시작해서 언제까지 떼는 게 좋을까요? 기본적으로 글자라는 상징 기호가 영·유아가 습득하기 어렵다는 걸 아셔야 해요. 여러 나라에서 만 6세,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들어갈 때 문자를 가르치라고 국가 교육과정으로 정해놓은 건 그래서죠. 듣고 이해하는 기초 문해력이 있다면 입학해서 한글을 배워도 충분히 빨리 익히고 따라갈 수 있어요.   한글을 일찍 떼면 읽기도 수월해지고, 공부하는 데도 유리하지 않나요? 너무 어렸을 때 한글을 공부하면 득보다 실이 클 수 있어요. ‘엄마는 내가 이 글자를 읽기 원하는데, 어렵네’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러면 학습 자체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어요.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예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오면 너무 쉽게 배울 수 있어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면서 고난의 길을 갈 필요는 없잖아요. 문해력 논란이 일었던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한글을 못 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해를 못 하는 게 문제였잖아요. 불안해하지 마세요. 아이가 문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도 절대 늦지 않습니다.   한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는 건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나요? 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대상에 대한 설명을 외계어 같은 문자로 끼적이는 시도를 할 거예요. 이걸 ‘마킹’이라고 하는데요, 마킹이 나타나면 글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겁니다. 친구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하는 것도 신호일 수 있겠죠.   그렇다면 한글 어떻게 가르치는 게 좋을까요? 영·유아 때 모음과 자음을 쪼개서 가르치거나, 교재를 사용해 명시적으로 학습하는 건 발달에 맞지 않아요. 시키면 할 수야 있지만, 절대 좋은 방식은 아니죠. 아이들은 어떤 문자를 익힐 때 먼저 덩어리로 인식합니다. 한글이든, 영어든요. 그러고 나서 통계적 학습을 합니다. ‘저렇게 생긴 모양은 항상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 하고 깨닫는 거죠. 그래서 어떤 말소리에 해당하는 단어를 자꾸 눈에 보이도록 해주시는 게 좋아요. 다시 말하지만, 단어 카드를 보여주라는 게 아니에요. 맥락 안에 맞는 인쇄물이 좋죠. 같이 읽는 그림책, 아이에게 쓴 쪽지 같은 거요. 중요한 건 아이들이 스스로 그 원리를 파악할 기회를 주는 겁니다. 가르쳐 주면 그 기회를 빼앗는 겁니다. 그럼 스스로 배우는 학습자가 되기 어려워요.   한글을 읽을 수 있다면 문해력 발달을 위해 무엇을 하면 될까요? 읽기는 크게 해독과 이해라는 두 과정으로 나뉘어요. 해독은 문자를 인식하고 거기에 소릿값을 적용하는 과정이고, 이해는 그 뜻을 파악하는 단계죠. ‘서랍’이라는 글자를 보고 소리를 내 읽는 게 해독이고, 실제 서랍을 떠올리는 게 이해예요. 한글을 뗀다는 건 해독에 익숙해진다는 의미예요. 그런 측면에서 해독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 유창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배우는 지식의 양도 늘고 수준도 높아지거든요. 교과서만 봐도 글이 많아요. 글자를 보고 소릿값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해독이 자동화돼야 남은 에너지를 뜻을 이해하는 데 쓸 수 있어요. 결국 문해력 차이는 이해력에서 오기 때문에, 읽는 것보다 이해하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최나야 교수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소리 내어 읽는 연습을 통해 한글 소리값을 읽는 해독 과정을 자동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초등학교 2학년까지 해독을 자동화할 정도로 익숙하게 하려면 어떤 활동을 해야 하나요? 초등학교 1~2학년까지는 낭독을 꾸준히 하세요. 소리 내 읽는 거죠. 낭독은 유아에게 하게 하면 안 됩니다. 아이가 글을 읽느라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유아는 어른이 유창하게 느낌을 살려 읽는 걸 들으면서 그림책을 보는 게 훨씬 더 좋습니다.   한자도 배워야 할까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책 펴놓고 한자 형태와 음, 뜻을 외울 필요가 없다는 얘기예요. 대신 한자어에 대한 ‘감’은 있어야 해요. 우리 말의 50~60%가 한자어라 그런 감이 없으면 어휘를 습득하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거든요. 한자어에 대한 감각은 일상 대화를 통해 충분히 키워줄 수 있어요. 어떤 한자어에 대한 뜻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같은 글자가 들어가는 단어들의 군집을 만들어서 설명해 주는 거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죠? 물고기 ‘어(魚)’를 예로 들어 볼게요. 저녁 반찬으로 생선이 나오면 ‘어(魚)’로 끝나는 물고기 이름 대기 게임을 하는 겁니다. 그럼 나중에 아이가 ‘연어’ ‘병어’ 같은 단어를 처음 들어도 머릿속에 생선이란 의미가 떠오를 겁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비슷한 단어를 연결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언어에 대한 감각, 상위 언어 인식이 발달합니다. 한자도 그렇고, 우리말 단어도 배우려면 끝이 없잖아요. 언어에 대한 감이 생기면 하나의 단어를 들어도 열을 아는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  ③ 읽고 이해하는 아이: 함께 책을 읽고 있나요?   한글 읽기, 즉 해독이 능숙해지면 이해력을 본격적으로 키워야 한다. 책을 읽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문제는 클수록 점점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나야 교수는 “책을 꾸준히 읽게 하려면, 재미있는 책부터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민규 기자 독서가 유익한 건 알지만, 아이들이 책을 영 읽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교과서도 글밥이 많아지고 호흡이 길어지죠. 해독 과정이 미숙하거나 이해력이 떨어지면 책 읽기가 버거워집니다. 점점 독서와 멀어지고, 결과적으로 이해력이 클 기회도 얻지 못하죠. 이해력, 문해력을 키우려면 결국 책을 꾸준히 읽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러려면 일단 재미있는 책을 읽어야 해요. 특히 초등 저학년 때는 읽기 어렵거나 따분하게 만드는 책이라면 과감하게 내려놓는 게 좋아요. 설령 그 책이 필독서나 권장도서라고 해도요. 아이의 관심사, 흥미를 끄는 책이 좋습니다. 그런 책을 아이가 먼저 발견하게 하거나 양육자가 찾아서 추천해 줄 수도 있겠죠.    학습 만화도 괜찮을까요? 만화를 읽는 데도 문해력이 필요해요. 수준 높은 학습만화도 많고요. 특히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루는 학습만화라면 읽는 게 나쁘지 않아요. 다만 아이들이 다른 책은 전혀 읽지 않고 학습만화만 본다면 그건 문제입니다. 읽기에도 균형이 필요해요. 아이가 좋아하는 주제의 학습만화를 읽게 하고, 같은 주제를 다룬 책 중 재미있는 걸 골라서 읽도록 해 주세요.   독해 문제집을 푸는 건 도움이 될까요? 이해력은 어떤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낼 때 제대로 발달합니다. 문제집에는 전체 글 중 일부만 발췌하거나 짧은 글만 실리죠. 문제를 맞혀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고요. 결국 문제 풀이를 위한 얕은 이해에 그치고 맙니다. 문제집을 풀어서는 폭넓은 이해력을 기르기 힘들어요.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게 훨씬 도움이 됩니다.   아이의 이해력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워요. 아이가 책을 읽고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이가 읽는 책을 양육자도 같이 읽는 겁니다. 책을 다 읽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이가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파악할 수 있어요. 아이의 사고력, 어휘력 수준도 알 수 있고요. 아이의 취향과 관심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꼭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돼요. 유아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초등학생 때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읽는 걸로 충분해요. 중요한 건 꾸준히 읽는 거죠.   아이 스스로 책 읽기를 시작하는 건 언제가 좋을까요? 같이 읽는 과정이 부드러워야 혼자 읽는 단계로도 잘 나아갈 수 있어요. 아이가 한글을 읽게 됐다고 혼자 읽으라고 하는 건 좋지 않아요. 이제 막 혼자 걷기 시작한 아이에게 달리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적어도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양육자가 읽어 주는 게 필요해요. 혼자 읽는다고 해도 질문도 하고, 관심도 표현하면서 적절히 개입해 주는 게 좋습니다.   최나야 교수는 “문해력이 성장 가도를 달리려면 스스로 책을 찾아 읽는 독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주어졌을 때 아이가 다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게 책을 읽은 경험이 많은 아이일수록 책을 집어 들 확률이 높다”고 최 교수는 말했다.   아이가 재미있어하는 책을 같이 읽으세요. 즐겁게 읽고 또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을 차곡차곡 쌓으세요. 그런 일상이 모여서 문해력이 자라는 큰 힘이 됩니다.   ■ 최나야 교수가 던지는 읽기 단계별 질문 「 ① 읽기 전 아이, 충분히 대화하고 있나요? 글을 이해하는 능력은 말소리를 듣고 처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일상 대화와 그림책 읽기로 적절하고 의미 있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충분히 들려 주세요. ② 읽고 시작한 아이, 한글 스스로 배울 기회를 주고 있나요? 한글을 일찍 떼는 데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한글 떼기보다 언어에 대한 감을 키우는 게 문해력 발달에 효과적입니다. ③ 읽고 이해하는 아이, 함께 책 읽고 있나요? 문해력의 핵심은 이해력입니다. 이해력은 꾸준한 책 읽기를 통해 길러집니다. 꾸준히 읽으려면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읽어야 해요.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   ■ hello! Parent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 ① “문해력, 읽고 쓰는 능력이 전부 아니다” 문해력 전문가 4인의 진단(3월 20일 발행) ② “냉장고에 붙인 단어카드, 소용없다”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 ③ “문해력 부진 주범은 사교육” 12년 논술 강사 출신 『공부머리독서법』 저자 최승필(3월 27일 발행) ④ “내가 매 수업 글쓰기 과제를 내는 이유”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3월 30일 발행) ⑤ “책 읽어주기와 소리 내 읽기부터 시작하라”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 저자  홍인재 전주 신동초 교장(4월 3일 발행) 」 관련기사 요즘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문해력 부진, 범인 밝혀졌다 ① 4자녀 ‘영어 영재’ 만든 비법 “모르는 단어 뜻 찾지마라” “문해력 키우고 싶은가? 그럼 종이접기 시켜라”

    2023.03.22 15:14

  • 요즘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문해력 부진, 범인 밝혀졌다 ①

    요즘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문해력 부진, 범인 밝혀졌다 ① 유료 전용

    ‘사흘 논란’(2020년)에서 ‘무운 논란’(2021년)을 거쳐 ‘심심한 사과 논란’(2022년)까지, 문해력 논란을 촉발한 해프닝은 최근 2~3년간 반복됐다. 그리고 그때마다 관련 시장은 커졌다. 독서교육업체인 한우리열린교육의 2021년 매출은 426억5000만원으로, 전년 대비 30% 넘게 늘었다. 문해력 시장의 가능성을 알아본 디지털대성은 2020년 이 회사를 인수해 버렸다. 대치동에서 시작한 독서논술학원이 전국에 지점을 내는가 하면, 1년을 대기해도 들어가기 어려운 유명 학원까지 생겼다.   문해력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뜨거운 감자가 되었을까? hello! Parents는 지난 7일부터 15일까지 4명의 문해력 전문가를 직접 만났다. 문해력의 정의에서부터 주목받는 배경, 한글 떼기부터 창의력 교육까지 아우르는 문해력 열풍의 실체에 대해 직접 물었다. 문해력이 높을수록 고소득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큰 거 아셨나요? 한 사회의 문해력은 그 사회가 얼마나 잘사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범죄율도 문해력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기도 하고요.   최나야(아동가족학) 서울대 교수는 “문해력은 문자와 글을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하지만, 단순히 읽고 쓰는 능력으로만 볼 수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나야 교수뿐이 아니다. hello! Parents가 만난 4명의 문해력 전문가 모두 같은 얘기를 했다. 문해력을 정의하는 범위는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문해력이 여러 역량의 바탕일 뿐 아니라 다른 성취로도 확장될 여지가 큰 능력”이라는 데는 뜻을 같이했다. 문해력이 대체 뭐길래 한 사람의 소득, 한 사회의 범죄율, 나아가 얼마나 잘사는지까지 결정하는 걸까?    ━  ① 문해력은 무엇인가 : 읽고 쓰는 역량 그 이상   · 듣기 말하기를 아우르는 커뮤니케이션 역량이다 : 최나야 서울대 교수는 “읽기와 쓰기뿐 아니라 듣기와 말하기를 포함한다”며 “결국 상호작용과 관련된 기술이라는 점에서 우리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아우른다”고 말했다. 문해력 부진을 정면으로 다룬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의 저자 홍인재 전주신동초 교장 역시 “듣기와 말하기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면서 “음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듣기)이 문해력의 첫 단추”라고 강조했다. 홍인재 교장이 문해력 부진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소리 내 읽기’를 권하는 것도 그래서다. 읽으면서 그 소리를 자기 귀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사고력과 학습력으로 이어진다 : 12년 경력의 논술 강사 출신으로 『공부머리 독서법』을 쓴 최승필 저자는 “문해력은 곧 사고력이자 학습 능력”이라고 말했다. 언어를 이용해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어의 수준이 높고 복잡할수록 사고력도 깊어진다는 얘기다. “언어가 학문을 수행하는 핵심 도구라는 점에서 문해력은 학습 능력”이라고도 했다.   · 경제부터 과학까지, 특정 지식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이다 : ‘서울대 창의성 교육을 위한 교수 모임’의 일원인 박주용(심리학) 교수는 “읽고 쓰는 능력인 문해력이 세분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 문해력’ ‘과학 문해력’ ‘미디어 문해력’ ‘디지털 문해력’처럼 영역별 문해력이 등장한 것이다. 사회가 세분화되고 정보의 양이 늘면서 영역별로 필요한 문해력과 접근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  ② 왜 열광하나 : 더 중요해졌다   · 중요해져서 : 박주용(심리학) 서울대 교수는 “인터넷 발달로 접근 가능한 정보의 양이 급격하게 늘면서 문해력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과거엔 일반인은 과학이나 경제 관련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한글뿐 아니라 영어로 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더 수준 높은 문해력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 문해력, 과학 문해력 등으로 세분화된 것도 정보 접근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것이다. 박주용 교수는 “인터넷 덕에 문해력은 중요해졌지만, 인터넷 덕에 즐길 게 너무 많아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가 열렸다”고 일갈했다.    · 스토리텔링 수학과 입시의 변화 : 최승필 저자는 “2015년 전면 도입된 스토리텔링 수학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단순히 제시된 수식을 푸는 게 아니라, 긴 글을 읽고 문제를 이해한 뒤에야 풀 수 있는 수학 문제가 대거 등장한 것이다. ‘국어를 잘해야 수학을 잘한다’는 말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입시 변화도 영향을 끼쳤다.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른 논술형 수능, 대학별 고사 확대 가능성이 문해력 교육 시장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고 최 저자는 설명했다. 2025년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 고등학생도 대학생처럼 몇몇 필수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을 선택해 들을 수 있다. 학생들이 듣는 교과목이 다양해지면, 지금처럼 일괄적으로 상대평가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 고교학점제는 내신 절대평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특목고나 자사고의 인기가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대학 입장에선 고등학교 성적을 신뢰하기 어려워지면서, 대학별 자체 평가도 생길 수 있다. 바로 이런 흐름이 심화 교육에 대한 수요를 만들고, 이게 결국 문해력 교육 열기로 이어지고 있다. 최승필 저자의 말처럼 고교학점제에서 시작된 입시의 변화가 문해력 교육 시장 확대로 번지고 있는 셈이다.   · 문해력 저하에 주목한 언론 : 최나야 교수는 “최근 2~3년 사이 문해력에 대한 관심이 과도하게 늘어난 게 의아하다”고 말했다. 문해력은 인류가 문자를 쓰고 살기 시작하면서 존재해 온 개념이라고 할 만큼 오래된 것이고, 원래부터 중요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언론이 주목한 영향인 것 같다”고 했다. 최나야 교수의 주장에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했다. 홍인재 교장도 “교육 현장에서 문해력 부진 얘기가 나온 건 10년도 더 된 일”이라면서 “언론이 주목하면서 관심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최승필 저자 역시 “문해력이 최근 부진해졌다기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 의해 최근에야 현상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대로 문해력 논란을 촉발한 해프닝은 대체로 인터넷상에서 일어났다. 박주용 교수도 “문해력이 부상한 건 유행 같은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  ③ 진짜 부진한 건가 : 그렇다   · 전국 초등학생 15~20%는 문해력 부진 : 아동 문해력을 주로 연구하는 최나야 교수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한 반의 15~20%는 평균보다 문해력 수준이 낮다”고 말했다. 이들의 문해력은 얼마나 낮을까? 최 교수는 “실제 데이터가 평균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표준편차인데, 이들 그룹은 평균보다 표준편차 2배 수준으로 문해력 수준이 낮다”고 말했다. 하위 15~20%의 문해력 수준이 평균 그룹과 적잖은 차이가 나는 셈이다. 홍인재 교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체감하기로 학교 전체 학생의 20% 정도는 문해력 부진 상태인 것 같다”고 말했다.   · 문해력 부진, 10년 넘은 현상 : 교육 현장에서 문해력 부진이 이슈가 된 건 10년도 넘었다는 데 전문가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홍인재 교장은 “대중의 관심을 받은 건 2~3년이지만, 교사들 사이에서 한글 학습이 안 된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건 2010년”이라고 말했다. 교육부 차원에서 학습 클리닉과 교사 대상 한글 교육 연수 등을 시작한 것도 2013년부터다.  2006년부터 대치동 등에서 12년간 논술 강사를 한 최승필 저자 역시 “학원가에선 내가 초임 강사 때부터 아이들의 읽기 수준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책 싫어하는 아이도 독서에 재미를 붙이게 하는 ‘마법의 책’ (『화요일의 두꺼비』 『조금만, 조금만 더』 『멋진 여우씨』)이 있는데, 이게 먹히지 않던 게 2010년 초반”이라고 했다. 그는 “이 아이들이 크니 교과서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는 중학생이 되더라”고도 했다.   · 정확하게는 어휘력 부진 : 박주용(심리학) 서울대 교수는 “논란이 됐던 해프닝만 봐도 알 수 있듯, 문해력 부진의 핵심은 어휘력”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 역시 “대학생들의 어휘력 수준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특히 문어체에서 많이 쓰이지만 구어체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한자어에 취약하단다. 그는 “영어가 우리 말 깊숙이 침투하면서 영어 어휘력은 크게 늘었다”고 평가했다. 문해력만 해도 ‘리터러시’라는 단어로 널리 쓰인다.    ━  ④ 왜 저하됐나: 주범은 스마트폰   · 주범은 스마트폰 : 4명의 전문가 모두 스마트폰을 주범으로 꼽았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이 책 읽기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박주용 교수는 “심심해야 책을 읽는데, 스마트폰 때문에 심심할 틈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초·중·고교 학생들은 입시 공부에 치여 책 읽을 여유가 없는데, 그 와중에 스마트폰이 끼어들어 더 책을 읽지 않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최승필 저자 역시 “스마트폰이 보급돼도 인터넷망이 좋지 않으면 책을 읽는데, 우리나라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잘되어 있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최나야 교수도 “인터넷이 발달한 이 시대엔 디지털 읽기도 달성해야 할 중요한 과업”이라면서도 “지금은 너무 그쪽으로만 쏠려 있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빡빡하게 많은 양의 글을 읽는 경험, 중간중간 넘기면서 후루룩 읽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읽는 경험은 아날로그 미디어인 종이책을 통해 길러진다”면서 “이런 경험이 줄면서 인터넷상에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오해해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홍인재 교장은 “스마트폰으로 인해 상호작용이 준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아동 시절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가족 간 대화가 줄었다는 것이다. 그는 “식당에 가면 젊은 부부가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고 자기들끼리만 대화하는 장면을 자주 본다”면서 “상호작용이 줄면 문해력이 발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코로나19, 양극화 키웠다 :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인해 학교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면서 전반적인 학습 결손이 생긴 건 맞지만, 그 영향은 계층과 상황에 따라 달랐다고 설명했다. 최나야 교수는 “학교에서 일정 시간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데, 일정 기간 그 시간이 뭉텅이로 사라진 만큼 영향이 없을 수 없다”면서도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문해력이 저하된 건 아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온라인 학습으로 인한 학습 결손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라 해도 학교의 부재로 인해 생긴 시간을 다른 활동이나 콘텐트로 채울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면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오히려 학교의 부재 기간을 효율적으로 보냈다고 할 수 있는 아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주용 교수 역시 “코로나19로 인한 문해력 저하는 저소득 취약계층일수록 더 컸을 것”이라고 했다. 최승필 저자는 “온라인 학습과 실내활동 증가로 스마트 기기 노출이 전반적으로 늘었다”면서 “코로나19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스마트폰 노출이 늘어난 게 문제”라고 말했다.   · 교육 과정도 문제 : 홍인재 교장은 7차 교육과정 개정을 문제 삼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글 해득 과정이 초등학교 1, 2학년 과정에 충분히 있었던 게 이후 급격히 줄었다는 것이다. 홍 교장은 “1, 2학년 국어 교과가 독해와 추론에 집중되면서 격차를 더 벌렸다”며 “1학년 때는 의성어나 의태어뿐 아니라 어휘와 문장 표현, 그리고 정확하게 글씨 쓰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7차 교육 과정 이후 한글 해독이 사교육 시장에 완전히 맡겨지고 말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최나야 교수도 2021년 hello! Parents와의 인터뷰에서 “초등학교 입학 이후 명시적이고 체계적인 문자 교육이 시작되는데, 1학년 1학기 때 문자 해독을 완료한다”며 “진도가 빠른 편”이라고 말한 바 있다.   hello!Parents는 3주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4명의 문해력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문해력을 집중 조명하고자 한다. 2023년 우리 사회 문해력 현주소를 진단하고, 한글 학습부터 읽기, 쓰기, 창의력 교육으로 이어지는 문해력 향상 방법론을 다룰 예정이다.    ■ hello! Parent 문해력 집중 해부 시리즈  「 ① “문해력, 읽고 쓰는 능력이 전부 아니다” 문해력 전문가 4인의 진단(3월 20일 발행) ② “읽었는데 모르겠다는 아이들, ‘이것’ 없었다” 최나야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3월 23일 발행) ③ “문해력 부진 주범은 사교육” 12년 논술 강사 출신 『공부머리독서법』 저자 최승필(3월 27일 발행) ④ “내가 매 수업 글쓰기 과제를 내는 이유” 박주용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3월 30일 발행) ⑤ “책 읽어주기와 소리 내 읽기부터 시작하라”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 저자  홍인재 전주 신동초 교장(4월 3일 발행)  」 관련기사 ‘아버지가 통닭을 사 오셨다’ 이 문장에 문해력 힌트 있다 4자녀 ‘영어 영재’ 만든 비법 “모르는 단어 뜻 찾지마라” [오밥뉴스]"코로나 이후 한 반에 20% 읽기 어려워 해"… 내 아이의 문해력 수준은

    2023.03.19 14:59

  • 4자녀 ‘영어 영재’ 만든 비법 “모르는 단어 뜻 찾지마라”

    4자녀 ‘영어 영재’ 만든 비법 “모르는 단어 뜻 찾지마라” 유료 전용

    영어책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어요. 뜻을 찾아봐야 할까요? 아닙니다. 문맥으로 내용을 대강 파악할 수 있으면 넘어가세요. 그래야 이야기를 즐길 수 있어요.   “영어책, 어떻게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 고광윤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정확한 읽기가 아니라 즐거운 읽기가 유창한 영어 실력의 비결이란 얘기다. 고광윤 교수가 8일 대전 중구 슬로우 미러클 센터에서 영어책 읽기의 힘에 대해 말하며 웃고 있다. 그는 “영어책을 재미있게 읽는 즐독이 유창한 영어 실력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김성태 기자   고 교수는 영어책 읽기가 영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단서가 하나 있다. ‘느리게’ 읽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즐겁게, 많이, 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 교수의 표현대로 ‘즐·다·잘’(즐독, 다독, 잘독)을 제대로 하면 영어 실력은 저절로 따라온다. 그의 네 자녀가 별다른 사교육 없이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춘 비결이다. 비단 자녀뿐이 아니다. 그는 수많은 아이를 느리게 읽기를 통해 즐겁게, 많이, 잘 읽게 만들었다. 그 경험을 담아 『영어책 읽기의 힘』과 『영어그림책 느리게 100권 읽기의 힘』을 썼다. 매일 영어 그림책을 한 권씩, 총 100권을 함께 읽는 온라인 북클럽 ‘슬로우 미러클’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속도에 열광하는 이 시대에 느리게 읽는 건 정말 먹힐까? 한글도 아닌 영어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을까? 이달 초 고 교수를 만나 직접 물었다.    ━  📢읽기는 ‘귀’에서 시작된다   고광윤 교수는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한다”고 말했다. 읽기를 위한 1순위 과업은 파닉스 떼기가 아니다. 시작은 듣기부터 해야 한다. 그것도 넘치도록 충분히 들어야 한다. 귀로 넘치게 들은 영어는 눈과 입으로 새어 나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고광윤 교수는 “영어책 읽기는 파닉스가 아니라 듣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태 기자 영어책 읽으려면, 알파벳과 소릿값을 매칭하는 소위 파닉스부터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요? 흔히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읽기가 되려면 ‘father’라는 단어가 ‘파더’라는 소리와 함께 아빠라는 의미로 머릿속에 먼저 입력돼 있어야 해요. 알파벳 기호와 소릿값을 매칭할 수 있으면 ‘father’라는 단어를 ‘파더’ 하고 읽을 순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의미를 모르겠죠. 그럼 다시 아빠라는 뜻을 그 소리와 매칭시키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파닉스를 하기 전에 어떤 단어가 구어 형태로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충분히 넘치게 들어야 합니다.    얼마나 들으면 충분히 넘치게 듣는 건가요? 사람이 태어나서 말이 트이기까지 약 3000시간이 걸린다고 해요. 이민 간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외국어로 말문이 터지는데, 빠르면 1500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하고요. 충분히 언어가 입력되는 데 최소 1500시간 정도는 필요하다는 얘기죠. 하루에 2시간씩 들으면 2~3년 정도 걸려요. 하지만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얼마나 들어야 충분한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습니다. 적게 들으면 오래 걸리고, 많이 들으면 짧게 걸리겠죠. 절대적인 시간보다 중요한 건 부모의 기다림이에요.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조급해하지 말고, 아이가 오랜 시간이 걸려도 충분히 들을 수 있도록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해요.   듣기가 중요한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요. 정확히는 ‘보고 듣기’를 추천합니다. 오디오만 있는 것보다는 그림이나 영상이 함께 있는 영어 동영상을 활용하는 겁니다.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눈으로 보이는 장면, 상황을 보고 귀로 들려오는 영어가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거든요. 특히 영어를 처음 접하고 전혀 모른다면 더더욱 보고 들어야 해요.   어떤 영어 동영상을 보여주면 좋을까요? 영어 동영상이라고 해도 너무 자극적이고 현란하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어요. 느리고 소박하고 잔잔한 동영상이 좋습니다. 디즈니 극장용 영화보다는 TV용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좋아요. 아이 영어 수준에 맞는 프로그램을 고를 수도 있고, 한 편당 시간도 길지 않습니다. ‘Blue’s Clues’(블루스 클루스), ‘Dora the Explore’(도라 디 익스플로러), ‘Arthur’(아서) 등을 추천해요. 아이가 관심 있어 하는 주제나 분야라면 즐겨 보면서 푹 빠지게 될 거예요.   영어를 배우는 건 좋은데, 동영상을 너무 많이 보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영어 동영상을 볼 때는 두 가지를 꼭 지켜야 해요. 첫째는 절제를 가르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영어보다 중요한 건 생활의 균형을 지켜나가는 일이죠. 시청 시간을 제한하고, 학교 숙제처럼 꼭 해야 할 일을 한 후에 영어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또 한 가지는 영어책 읽기를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동영상을 충분히 보고 들어서 입에서 영어로 조금씩 나오는 상황에서 책을 안 읽는다면 가다가 마는 겁니다. 이렇게 영어를 접하면 동영상은 좋아하는데 책은 싫어하게 될 수도 있고요. 독서의 가치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반드시 꾸준히 책을 읽어주세요.    ━  📢책에 꿀을 발라라   고광윤 교수가 영어책 읽기에서 가장 강조하는 건 ‘즐독’이다. 일단 영어책에 푹 빠져서 재미있게 읽다 보면(즐독) 많이 읽게 되고(다독) 영어 실력과 이해력도 늘어 잘 읽게 된다(잘독). 일명 ‘즐독, 다독, 잘독’의 선순환 구조다. 하지만 책을 즐겨 읽게 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고광윤 교수는 “영어책 읽기가 영어 공부, 학습이라는 생각과 부담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태 기자 영어책을 즐겁게 읽으려면, 일단 영어를 잘해야 하지 않을까요? 돌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심지어 태아 때부터 한글책을 읽어주잖아요. 아이가 내용을 이해하라고 읽어주나요? 그냥 좋은 책이니까 읽어주잖아요. 내용을 몰라도 아이는 좋아하죠. 그림을 보면서 상상하고 이해하기도 하고요. 영어책도 똑같아요. 영어책이 아니라 그냥 책을 읽어준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책을 읽어준다기보다는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을 함께 보면서 즐기고 교감하고 대화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려면 영어 그림책 읽기가 영어 공부, 학습이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줘야 할까요?  영어 단어 알고, 구문 익히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책이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고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을 갖도록 하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느리게 가야 합니다. 아이의 속도에 맞게 천천히 가야 한다는 거죠. 빨리 가려다 보면 양과 속도에 욕심을 내게 돼요. 조바심도 납니다. 그러면 즐길 수 없습니다. 영어책 읽기가 스스로 즐기는 것이 아닌 학습이 되면 어느 순간 멈춥니다. 영어 난도가 높아지는 순간, 아이들이 영어책을 읽지 않게 되죠. 그런데 느리게 가면서 즐기면 어느 순간 읽는 속도가 붙어요. 결국엔 빨리 더 많이 읽을 수 있죠. 눈덩이 효과입니다.   느리게 읽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세요. 일단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주세요. 아이가 관심 있어 하는 주제의 그림책을 골라 옵니다. 처음에는 그림만 보고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쉬운 책이 좋습니다. 아이가 책 페이지를 직접 넘기게 하거나, 쉬운 표현은 함께 읽어보면서 적극적으로 읽기에 참여하도록 하세요. 한 권을 읽더라도 아이가 그 책의 내용을 탐험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해요. 책을 읽고 난 후 아이와 부모가 서로 느낀 점을 말하면서 수다도 떨어보고요. 아이가 아무리 엉뚱하고 황당한 이야기를 해도 칭찬하고 격려해 주세요. 책에 나오는 중요한 표현이나 단어는 발음, 의미가 낯설지 않게 그림이랑 매칭하면서 살펴보는 거로 충분합니다.   모르는 단어나 표현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책에 나오는 모든 단어와 표현을 알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르는 단어, 표현이 나올 때마다 일일이 번역하고 해석해 주면 안 됩니다. 매번 우리말 해석으로 뜻을 알려 하면 영어식으로 사고하고 표현하기 어려워져요.   아이가 영어 단어 뜻을 물어보면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요? 아이가 ‘I’m sorry’의 뜻을 궁금해한다고 해볼게요. ‘미안해’란 말이라고 직접 뜻을 말해주기보단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지 설명해 주세요. ‘미안해’라고 알려주면 그 뜻에만 갇혀요. 실제로 ‘I’m sorry’는 상대방의 말을 잘 못 들었을 때 ‘다시 한번 말해 달라’는 뜻으로도 쓰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상대에게 어떤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쓰는 말이야’ 정도로 쓰임을 풀어주는 게 좋습니다. 정확한 단어, 표현을 몰라도 전체 흐름과 분위기, 맥락을 파악할 수 있으면 됩니다. 스토리도 충분히 즐길 수 있죠.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책 읽기를 즐겁게 만들 수 있을까요? 책에 꿀을 바르세요. 말 그대로 책 읽는 게 달콤하게 느껴지게 하는 거죠. 그러려면 영어책 읽기와 좋은 기억을 최대한 많이 연결해야 합니다. 아이가 기분이 좋고 편안한 시간에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세요. 맛있는 간식을 곁들여도 좋겠죠.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상상과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세요. 책 읽는 시간을 가장 사랑하는 엄마, 아빠로부터 사랑과 관심, 칭찬을 받는 시간으로 만들어주는 겁니다. 전 ‘안뽀사’를 많이 하라고 해요. 책을 읽으면서 아이에게 ‘안고, 뽀뽀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겁니다. 고광윤 교수는 “책을 즐기게 만들려면 책 읽기를 즐거운 경험과 결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태 기자   요즘엔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정말 많은데, 그런데도 영어책을 꼭 읽어야 할까요? 본질은 책 읽기입니다. 영어로 쓰여 있을 뿐이죠. 책 속에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통찰이 담겨 있잖아요. 챗(chat)GPT 같은 인공지능이 많은 걸 쉽게 대신해 주는 시대지만, 그럴수록 인간이 해야 하는 역할은 더 명확해요. 창의적으로 어떤 일을 기획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건 사람의 몫이죠. 이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더 깊이 통찰하고 사고해야 해요. 이런 힘은 책 읽기를 통해 나옵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보면 우리말보단 영어로 쓰인 책이 훨씬 많습니다. 모든 책이 번역되는 것도 아니고, 번역된다고 한들 본래 완벽한 의미를 그대로 옮기기도 어려워요. 그런 면에서 영어책은 책 읽기의 노다지예요. 영어책을 읽으면 영어는 추가로 따라오는 거고요. 이걸 놓친다는 건, 엄청난 배움의 경험과 기회를 놓치는 거죠. 그리고 책 읽기에서 인공지능이 대신해줄 수 없는 중요한 일이 또 있습니다.   어떤 일인가요? 실천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배우고 깨달은 바를 나누고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실천은 어떤 인공지능도 대신해줄 수 없어요. 저는 제가 가진 영어책 읽기의 지식과 경험을 지식과 희망 나눔이라는 행동으로 실천하고 싶어요. 영어 그림책 읽기 모임을 만든 것도 그래서죠.    ━  📢인생이란 책을 빛내자   고 교수가 말한 영어책 읽기 모임은 ‘슬로우 미러클(Slow Miracle)’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영어책을 느리게 읽으면서 지식과 희망을 나누고 기적을 만든다는 의미다. 2020년 7월부터 고 교수가 직접 모임을 이끌고 있다. 그가 인터넷 카페를 통해 매일 읽을 영어 그림책을 글로 써서 추천하면, 참가자들이 각자 책을 읽고 난 느낌과 생각을 올리거나 마음에 와 닿았던 문장(홈런 문장)을 필사해 올린다. 매일 한 권씩, 100권을 함께 읽는 게 목표다. 지난 2년여간 이런 영어책 읽기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1만 명이 넘는다.    슬로우 미러클엔 참가비가 있는데, 참가비는 전액 기부된다. 그동안 슬로우 미러클 이름으로 장애인 복지관 11곳에 운송 차량을 기부했고 미혼모, 한부모가정, 이주여성 시설 등에 책과 필요한 물품을 전달했다. 온라인 책 읽기 모임 운영을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들도 있다. 지난해 12월엔 고 교수가 사는 대전에 작은 영어 도서관이자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공간(슬미센터)도 마련했다. 이곳에선 누구나 무료로 영어 그림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고 교수가 하는 영어책 읽기 강좌도 들을 수 있다.   고 교수는 “돈과 관련된 잡음에서 벗어나야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고 느리게 책 읽기 활동을 오래 이어갈 수 있다”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영어책을 느리게 100권 읽는 슬로우 미러클을 범국민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고광윤 고수는 영어그림책 느리게 읽기 모임인 슬로우 미러클을 3년째 이끌고 있다. 김성태 기자   느리게 100권 읽기에 1만 명 넘게 참여했어요. 주로 어떤 분들이 참여하나요? 대부분은 처음에 아이에게 영어책을 읽어주려고, 엄마·아빠표 영어를 해보려는 마음으로 시작한 30대, 40대가 많습니다. 그런데 매일 책을 꾸준히 읽다 보니 엄마·아빠가 영어책 읽는 재미에 빠진다고 말해요. 저는 아이 말고 엄마·아빠 먼저 책 읽기의 재미와 가치를 느껴 보라고 말하죠. 책 읽기에 대한 열정은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전염병 같은 겁니다. 아이를 전염시키려면 부모가 먼저 그 병을 앓아야 해요. 엄마·아빠가 먼저 책에 빠지면 아이는 그걸 알아보고 자연스레 책을 읽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특별히 영어책 읽는 재미를 함께하고 싶은 분들이 있어요. 바로 50~70대 ‘젊은 언니·오빠들’이에요.   50~70대요? 은퇴를 앞두거나, 이미 한 분들이죠. 이분들 중엔 삶의 기쁨을 찾기 힘들어하는 분들이 적지 않아요. 방황하기도 하고요. 전 이분들의 인생 후반부가 더 빛났으면 좋겠어요. 영어책 읽기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책 읽기에 대한 애정과 열망이 있는 분들도 있을 거고, 학창 시절이나 젊은 시절 못 했던 영어 공부를 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거예요. 이런 분이라면 영어책을 읽으면서 재미와 감동도 얻고 자기 삶을 돌아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습니다. 『미스터 레스모어의 환상적인 책 여행』(The Fantastic Flying Books of Mr. Morris Lessmore) 표지   고광윤 교수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미스터 레스모어의 환상적인 책 여행』(The Fantastic Flying Books of Mr. Morris Lessmore)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책과 이야기를 사랑하는 주인공(모리스 레스모어)이 책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며 세상을 밝힌다는 내용이다. 고 교수는 이 책의 주제를 설명하면서 “우리의 인생은 각자가 직접 써 내려 가는 한 권의 책”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매일 인생이란 책의 한두 페이지를 쓰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의 책을 쓰고 싶으신가요? 인생 책을 쓰는 데 영어책 읽기가 도움을 줄 겁니다. 아이와 부모에겐 많은 재미와 성공의 기회를, 장년과 노년층은 인생을 멋지게 정리할 기회를 줄 테니까요.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①영어책 읽기를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충분히 넘치게 듣기다. 알파벳과 소릿값을 매칭하는 파닉스 학습에 매달리지 말아라. 단어의 소리와 의미가 머릿속에 자리 잡아야 파닉스 학습도 효과가 있다. 충분히 넘치게 듣는 방법으로, 영어 동영상 보기와 영어 그림책 읽기를 추천한다. 포인트는 이 둘을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는 거다. ②영어책을 읽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에 꿀을 바르는 것이다. 아이가 가장 편안해 하는 시간에,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어야 한다. 좋아하는 간식을 곁들이는 것도 좋다. 영어책을 통해 학습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아이가 책 읽기를 좋아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오래 읽을 수 있다. ③아이 영어책 읽어주려고 시작했다가, 책 읽기에 빠진 엄마·아빠가 많다. 엄마·아빠가 책 읽기에 빠지면 아이는 저절로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된다. 그럼 책 읽으라고 잔소리할 필요가 없다. 」 관련기사 영어 유치원 다니는데도…영어 안 느는 아이의 공통점 무조건 많이 읽어주면 좋다? 책 좋아하는 아이 키우는 법 “책 많이 읽으면 수학 잘한다? 천만에요” 독서·글쓰기 오해 셋

    2023.03.12 15:53

  • “문해력 키우고 싶은가? 그럼 종이접기 시켜라”

    “문해력 키우고 싶은가? 그럼 종이접기 시켜라” 유료 전용

    방관은 한자로, 곁 방(傍)에 볼 관(觀)을 써요. 아이가 혼자 할 수 있게 지켜보는 거죠. 필요하면 전략적으로 개입하고요. 아이 혼자 내버려 두는 방치와는 다릅니다.   출간 한 달 반 만에 1만 부 넘게 팔린 『자발적 방관 육아』 저자이자 12년차 초등교사 최은아(36)씨. 그에게 “방관 육아가 대체 뭐냐”고 묻자 돌아온 답이다. 그저 놔두는 게 아니라 지켜보다 전략적으로 개입하는 육아라는 것이다. 포인트는 지켜보는 기다림에 있다. 초등학교 교사이자『자발적 방관육아』저자 최은아씨는 “방관육아는 아이가 혼자할 수 있게 돕고, 필요할 때 전략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며 “방치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김성룡 기자 그는 현재 프랑스에서 8세‧5세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남편의 해외 발령 때문에 시작된 해외살이로 아이들은 특별한 사교육 없이 스스로 공부하고 있다. 여덟 살 첫째는 일곱 살 때 자발적으로 시작한 영어로 현지 학교의 수업을 큰 어려움 없이 따라가고 있다. 다섯 살인 둘째는 샤워도, 화장실 뒤처리도 혼자 한다. 양육자의 방관이 아이의 자립적인 생활습관을 만들고, 결국 자기주도학습으로 이어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어떻게 하면 자립적으로 생활하고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아이를 기를 수 있을까? 지난 15일 최씨를 만나 직접 물었다.    ━  📢방관은 방치가 아니다   평범한 교사였던 최씨가 유명해진 건 한 방송에 그의 집이 소개되면서부터다. 2017년 남편의 회사가 경북 김천으로 이전하면서 거주지를 옮기게 된 그는 집 한가운데 중정이 있는 전원주택을 지었다. 중정에서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이런 집을 지은 데는 최씨의 방관 육아 철학도 한몫했다.   전원주택과 방관 육아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집에서 신나게 놀아야 학교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파트에서 아이가 뛰어놀려면 놀이터나 키즈카페를 가야 하죠. 안전 등의 문제로 양육자가 함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일하면서 아이들을 매일같이 놀이터나 키즈카페에 데리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집 한가운데에 마당을 만들었어요.   ‘방관 육아’를 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초등학교에 있다 보니 생활습관이나 학습 태도가 좋은 아이들이 눈에 띄었어요. 학부모 상담 때 그런 아이의 부모님들께 비결을 물었죠. 공통된 특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 ‘별거 안 했는데, 아이가 혼자 잘 컸다’고 하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열이면 열 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양육자가 별거 안 하는 것’이 노하우란 생각이 들었어요. 양육자의 자발적 방관이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를 키운다는 결론에 이른 거죠.   방관과 개입, 방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아이와 적당한 거리를 두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게 방관이에요. 거리로 표현한다면 1m 정도 떨어져 있는 거죠. 아이가 뭘 하는지 지켜보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는 나서지 않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 손을 내밀고요. 개입은 독서‧숙제 같은 아이의 생활이나 학습을 양육자가 A부터 Z까지 계획하고 주도하는 걸 말해요. 방치는 뚝 떨어져서 아이가 뭘 하는지도 알지도 못하고, 도와주지도 않는 상태고요.   아이와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학습 욕구가 있습니다. 한창 말을 배우는 아이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을 보세요. 이 욕구를 어떻게 발현시키느냐가 중요해요. 양육자가 방관하면 아이는 혼자 이것저것 탐색하면서 배우는 것에 흥미를 갖게 돼요.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깨닫죠. 하지만 양육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아이들의 학습 동기는 ‘부모’가 되어 버립니다. ‘엄마가 시켜서’ 문제집을 풀고 ‘아빠가 시켜서’ 책을 읽는 식이죠. 이런 애들은 학교에 와서도 교사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봐요. 초등 저학년 때는 성적이 잘 나올 수 있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반대로 방치하면 아이가 뭘 원하는지, 뭐가 필요한지 알 수 없어서 문제고요.   방관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욕심을 내려놓는 게 가장 중요해요. 사실 결혼 전부터 아이를 그렇게 키우고 싶다고 마음먹었지만, 흔들릴 때가 많았어요. 우리 애만 뒤처질까 불안했고, 주변에서 ‘아이의 기회를 뺏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들었죠. 하지만 결심을 굳힌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어요.   그게 뭔가요? 첫째가 네 살 때, 육아에 지친 나머지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심하게 대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이의 겁먹은 표정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요.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이의 아토피가 심해지더라고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어요. 그저 아이가 건강하기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그러자 방관 육아를 실천할 힘이 생기더군요. 12년차 초등교사인 최은아씨는 “모범생 아이들의 공통점이 양육자의 자발적 방관육아였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  📢프랑스 유치원생은 스스로 뒤처리한다   프랑스에서는 유치원을 다니려면 아이 혼자 대소변 뒤처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유치원 때까지 교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한국과 다른 점이다. 프랑스 육아의 핵심이 자율과 통제이기 때문이다. 신발 신기, 옷 입기 등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교사가 절대 돕지 않는다. 아이와 적당히 거리를 두는 최씨의 양육법과 통하는 부분이다. 그는 “아이들이 아주 짧은 기간에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던 건 방관 육아 덕분”이라며 “혼자 생활할 수 있어야 자기주도학습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자립적인 생활 습관과 학습이 어떤 관계가 있나요? 생활과 학습은 동떨어진 게 아니에요. 걸어야 뛸 수 있는 것처럼 자립적인 생활 습관이 잡혀 있어야 학습도 스스로 할 수 있어요.   자립적인 생활습관을 어떻게 길러줄 수 있을까요?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양육자가 해주지 마세요. 저희 집 첫째는 5개월 때부터 이유식을 혼자 먹었어요. 유아 식사용 의자에 앉혀놓고, 쌀미음과 숟가락을 줬죠. 흘리는 게 반이었고, 손에 잡히는 걸 다 집어던져 숟가락을 5개나 썼어요.   그냥 먹여주는 게 더 편했겠네요. 초반에는 아주 힘들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이유식부터 실패하면 아이의 주도성을 키워줄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화장실에서도 먹여보고, 의자 주변에 전부 횟집 비닐을 깔기도 했죠. 한 달 정도는 먹이는 것보다 치우는 게 더 일이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흘리는 것보다 입으로 들어가는 양이 늘었어요. 돌쯤 됐을 때는 식당에서도 혼자 의자에 앉아 식사할 수 있게 됐죠.   이유식 습관에 특별히 신경 쓴 이유가 있나요? 혼자 하는 습관을 길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제가 밥을 좀 편하게 먹고 싶었어요. 초반에는 양육자가 이유식을 먹여주면 얌전히 잘 받아먹지만 돌쯤 되면 음식을 던지고 식판을 뒤집는다고 들었어요. 결국 먹이고 치우느라 이중으로 에너지를 써야 하는 셈이죠. 저는 치우는 것만 하자고 마음먹은 겁니다. 아이가 음식을 흘리든 먹든 신경 안 쓰니 저도 밥 먹을 여유가 생겼어요. 아이 먹는 동안 마음 편히 식사하고 나서 아이가 흘린 음식을 치웠죠.   아이가 음식 흘리는 걸 두고 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초반에 부모님이 보시고는 ‘왜 애를 개밥 먹이듯 하느냐’고 언짢아하셨어요. 음식이 담긴 그릇에 손을 넣어서 조물조물하고, 그 손을 얼굴이나 몸에 갖다 대니 엉망진창이었죠. 하지만 아이가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해해주셨어요. 외식하러 가서 옆 테이블은 아이 밥 먹이느라 부모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는데, 저희는 부모와 아이 모두 편하게 밥을 먹었거든요.   아이 스스로 하게 한 일이 또 있을까요? 위험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을 제외하고 전부 아이 혼자 하게 했어요. 2~3세부터 야채 필러를 이용해 과일을 깎아 먹었을 정도예요. 식사 시간이 되면 자신이 쓸 수저‧젓가락을 가져왔고요. 놀다가 다치면 약 바르고 밴드 붙이는 것도 스스로 했죠. 그렇게 습관을 들이다 보니 둘 다 다섯 살 때부터 스스로 샤워를 하기 시작했어요. 첫째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숙제나 준비물을 알아서 챙겨갔습니다.   숙제를 안 해가거나, 준비물을 빠뜨릴까 봐 걱정되진 않았나요? 아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요. 학교에서 내준 과제를 까먹고 안 했다면 선생님께 혼나야겠죠. 준비물을 잊고 안 가져갔어도 마찬가지고요. 이 과정을 통해 아이는 ‘앞으로 더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할 거예요. 자기 주도성이 더 강화되는 거죠. 양육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해주면 아이는 성장할 수 없어요. 프랑스에 와보니 이런 생각에 더욱 확신이 들었어요.   프랑스에서는 아이를 자립적으로 키운다고 들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간식으로 오렌지가 나왔어요. 한국이었다면 오렌지가 한입에 먹기 좋게 잘려서 나왔겠죠.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껍질을 까지 않은 오렌지와 칼‧컵‧포크를 제공했어요. 아이들은 칼로 오렌지 껍질을 까 컵에 담은 다음 포크로 찔러서 즙을 내 먹어야 했죠. 교사는 아이가 요청하기 전까지는 도움을 주지 않고요. 한국과 달리 유치원생도 대소변 뒤처리를 혼자 해야 합니다.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며 두 딸을 키우는 최씨는 “아이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야 자기주도학습도 가능하다”며 “자율과 통제를 중요시하는 프랑스 교육이 방관육아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 한 공원에서 두 딸과 산책하는 모습. 김성룡 기자  ━  📢“문해력 키우려면 종이접기 시켜라”   최씨는 아이들에게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았다. 수학은 물론 한글도 아이들이 관심 보이기 전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사교육은 피아노‧미술학원 몇 달 다닌 게 전부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조기교육의 문제점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하려면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중요한데,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은 익숙한 것을 안다고 착각했다. 그런 그가 국어‧수학‧영어 대신 열심히 시킨 게 있다. 바로 줄넘기와 종이접기다.   줄넘기‧종이접기를 시키셨다고요? 줄넘기는 자기 조절력, 종이접기는 문해력을 키울 수 있어요.   무슨 의미인지 선뜻 이해가 안 됩니다. 공부 잘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바로 학교 수업을 잘 듣는 거예요. 그러려면 수업시간에 앉아서 교사 설명에 집중해야겠죠. 이때 필요한 게 자신의 몸을 통제하는 ‘자기 조절력’이에요. 수업시간에 재밌는 얘기가 생각나도 친구와 떠들지 않고, 줄을 서기 싫어도 참고 가만히 있는 거죠. 이런 자기 조절력이 단체생활에서 가장 중요해요. 사실 1학년 입학 첫날 줄을 세워보면 어떤 애가 공부를 잘할지 눈에 보여요. 실제로 반에서 줄넘기를 가장 오래 하는 애가 수업 태도가 좋고요.   언제부터 줄넘기를 시켰나요? 다섯 살 때부터요. 줄넘기 규칙은 간단합니다. 줄을 넘어야 하고, 넘지 못하면 다시 시작해야 하죠. 스스로 줄을 돌리며 뛰어넘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체득할 수 있어요. 또 어떻게 하면 줄을 잘 넘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실패와 성공을 경험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기 조절력이 생기죠. 축구‧농구‧태권도 같은 운동도 좋지만, 줄넘기가 가장 간단해서 추천합니다.   종이접기는 문해력과 무슨 관계인가요?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잖아요. 학습의 기본 중의 기본이죠. 최근 들어 ‘문해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표현만 달라졌을 뿐 결국 ‘국어 잘해야 공부 잘한다’는 의미입니다. 종이접기는 ‘반으로 접었다 펴라’ ‘가위로 선을 따로 오려라’ ‘양쪽 날개를 편 뒤 3.5㎝ 지점에 표시하라’ 같은 글을 보고 입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잖아요.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완성품을 만들 수 없어요. 종이접기가 문해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종이접기를 가르쳤나요? 돌이 됐을 때 함께 서점에 가서 종이접기책이랑 색종이를 사줬어요. 아이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하면 살짝 도와주고요. 결과물을 제대로 만들면 박수를 치면서 ‘잘했다’고 칭찬했죠. 좀 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하면 ‘종이접기 급수 자격증’을 추천해요. 3급부터 1급까지 아이 혼자 종이접기를 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거든요. 책 속 과제를 모두 접어 작품을 제출하면 종이접기협회에서 심사해 자격증과 메달을 줍니다. 문해력과 성취감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죠.   이쯤에서 안 물어볼 수가 없는데요. 정말 한글도 먼저 안 가르쳤나요? 책육아가 한창 유행이었지만 제대로 된 전집을 사준 적도 없어요. 애들한테 책 한 번 제대로 읽어주지 않았고요. 한글을 배울 수 있는 학습 벽보도 안 샀죠. 하지만 다섯 살 정도 되니까 자기 이름이나 친구들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천천히 알려줬어요. 예컨대 친구 이름 ‘지수’를 궁금해하면 쓰는 방법을 알려줬어요. 길 가다 ‘수학학원’ 간판을 보고 ‘지수의 수’라고 이해하는 식이었죠. 한글학습에 신경 안 쓴 건 조카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기도 해요. 돌 때 완성된 문장 형태로 말할 정도로 언어능력이 뛰어났는데, 세 살 때 학습지를 시작하면서 완전히 흥미를 잃었거든요. 최씨는 “국어‧수학보다 줄넘기‧종이접기 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며 “줄넘기는 자기 조절력, 종이접기는 문해력을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성룡 기자 최씨는 “아이와 적당한 거리를 두는 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양육자가 아이에 대해 A부터 Z까지 신경 쓰다 보면 기대하는 게 많아지고 실망도 커진다. 자연스레 잔소리도 많아진다. 하지만 방관하면 양육자는 정신적‧육체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아이와 관계는 저절로 좋아진다.   학교에서 유독 보건실을 자주 가는 아이들이 있어요. 애정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겁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게 두고, 그 시간에 더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럼 공부는 알아서 합니다.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①방관은 방치가 아닙니다. 방치가 아이를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방관은 아이를 지켜보다 필요하면 전략적으로 개입하는 거죠.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양육자의 자발적 방관이었습니다. ②자기주도학습의 출발은 자립적인 생활 습관입니다. 이유식 먹는 것부터 과일 깎기, 식탁 차리기 등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많이 만들어주세요. 프랑스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이 오렌지껍질을 까먹고, 유치원생이 혼자 대소변 처리를 합니다. ③문해력 키우려면 종이접기 시키세요.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걸 읽고 종이를 접으면서 문해력이 향상됩니다. 신체 조절능력을 키워주는 줄넘기도 추천합니다. 」 관련기사 거실 TV 빼면 공부 잘할까? 공간 전문가가 콕 집은 단점 우리 아이 성적 올리려면…회복탄력성 전문가의 조언 ‘아버지가 통닭을 사 오셨다’ 이 문장에 문해력 힌트 있다

    2023.02.26 13:55

  • ‘아버지가 통닭을 사 오셨다’ 이 문장에 문해력 힌트 있다

    ‘아버지가 통닭을 사 오셨다’ 이 문장에 문해력 힌트 있다 유료 전용

    문해력 높으면 공부 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 잘한다고 문해력이 높은 건 아닙니다. 문해력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거든요. 의미를 확장할 줄 알아야 해요. 내 삶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정보 과잉 시대, 문해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병영(48)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문해력은 간단하게 정의하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다.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행위뿐만 아니라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타인과 소통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조병영 교수는 “주어진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읽지 말고, 배경 지식을 활용해 자신만의 의미로 이해하고, 지식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그게 바로 ‘진짜 읽기’이자 문해력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국어교육전문가 조병영(48) 한양대 교수는 “문해력을 단순히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능력이 아니라, 글을 읽고 의미를 확장해 내 삶과 연결시키는 능력을 말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조병영 교수는 15년간 리터러시(literacy·문해력)를 연구하고, 가르친 국어교육학자다. 그가 주목하는 분야는 문해력 가운데서도 ‘읽기’다. 고등학교 교사 출신인 그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읽기 역량이 무너지는 걸 목격했다. 아이들은 오로지 시험과 성적을 위해 문자를 읽고, 외우고, 잊어버리길 반복하는 ‘가짜 읽기’를 하고 있었다. 계속 글자 읽기에만 머무른다면, 서로의 말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해 소통이 힘들어질 것 같았다. 최근 그 불통(不通)의 신호가 곳곳에서 보인다. 온라인상에서 ‘심심한 사과’가 불러일으킨 소란이 대표적이다. 그가 올해 들어 연달아 『읽는 인간』과 『읽었다는 착각』을 펴낸 것도 그래서다. 실생활에서 ‘진짜 읽기’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하루라도 빨리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지난 2일 만난 조병영 교수는 “가짜 읽기만 가르친다면 우리는 인공지능(AI)보다 못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서로 다른 정보를 연결해 의미를 만들고, 새로운 지식으로 만들어내 일상에 적용할 줄 아는 읽기 역량을 키워야 한다”며 디지털 환경에서의 읽기 전략 세 가지를 소개했다.     ━  📢 “진짜 읽기는 대화로 시작한다”   조병영 교수가 말하는 ‘진짜 읽기’는 4차 산업시대와 맞닿아 있다. 미래 사회의 화두인 ‘융합’이 곧 연결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가 유독 ‘연결 짓는 능력’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는 “이제는 읽은 글들을 연결하고 통합해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라며 “정보와 지식을 결합해 새로운 걸 창조하는 시대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읽기가 서툰 아이들에게는 쉽지 않다.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 조병영 교수는 “생각하는 과정을 대화로 알려주면 된다”며 “자녀에게 양육자의 생각을 관찰할 기회를 주라”고 했다.   생각을 관찰할 기회를 주라고요? 먼저 이 문장을 읽어보죠. “아버지가 통닭을 사 오셨다.” 무엇이 떠오르나요?   축구? 퇴근길?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떠오르네요.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의 경험과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이해하니까요. 이게 우리가 글을 이해하는 방식, 즉 생각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글을 읽을 때 배경 지식을 활용해 의미를 이해합니다. ‘가방’이라는 글자를 보고, 학교 갈 때 메는 책가방, 엄마가 드는 손가방 등을 떠올리는 식이죠. 그런데 아직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읽는 동시에 생각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떠오른 생각을 인지하는 것도 서툴고요. 그래서 양육자의 생각 과정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양육자의 생각을 어떻게 보여주나요?   ‘생각 말하기(Think Aloud)’를 하면 됩니다. 생각의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통닭을 사 오셨다”를 읽을 때 “축구 중계하는 날인가?” “퇴근길에 샀겠지?” 등 떠오른 생각을 말로 내뱉는 식입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는 “축구 볼 때 먹었던 통닭과 이 글의 통닭이 같은 거구나”라고 깨닫습니다. 배경 지식을 활용해 글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 겁니다. 그러다 보면 아이도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시기가 오는데요. 이때 비로소 연결 짓기가 시작됩니다.  조병영 교수에 따르면 읽기의 시작은 생각과 생각을 연결 짓는 경험, 대화에서 시작한다. 김상선 기자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대화를 통해서요. 생각과 생각이 연결되거든요. 대화 순서가 이렇습니다. 아이가 생각을 말로 꺼내면, 양육자가 반응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양육자의 반응에 또다시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생각이 연결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때 한 가지 팁이 있어요. 대화거리를 과거 경험에서 끌고 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백설 공주를 읽다가 “어제 읽은 신데렐라는 언니들이 있었는데”라든가 “OO이처럼 친구들이 7명이나 있네”처럼요. 읽고 있는 글에서 벗어나 전에 읽었던 이야기, 직접 체험했던 사례를 빗대어 보는 겁니다. 이렇게 대화를 하면 내 경험을 새 정보와 연결 지어 이해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된 생각을 주입할까 봐 조심스러워져요.   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너무 말을 가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봐요. 양육자 스스로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합니다. 단, 아이의 말을 먼저 인정하는 건 중요합니다. “그 생각 좋은 생각이다” 이 말을 반드시 해주세요. 그다음에 “이런 생각도 있어”라며 대화를 이어가세요. 그래야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이 공존한다는 걸 알고, 그 생각을 비교도 하고, 추론도 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들이 있어요. 대화는커녕 언쟁이 되곤 하는데요.   그래서 대화가 정교해져야 합니다. 참고 자료를 활용하는 습관을 기르면 좋은데요. 내 주장의 근거를 찾는 거예요. 어떤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짚어주면 좋습니다. 생각의 근거를 의식적으로 확인하는 겁니다. 근거를 찾는 습관은 가짜뉴스를 선별하는 방법이자, 내 생각만 맞다고 주장하지 않는 습관을 기르는 방법입니다.    ━  📢 “읽기 전후 생각의 변화를 찾아라”   ‘진짜 읽기’는 억지로 가르칠 수 없다. 생각의 과정은 누군가의 강요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조병영 교수가 디지털 읽기 전략 두 번째로 ‘능동적 태도’를 꼽는 이유다. 특히 정보가 넘치는 디지털 시대에는 정보를 탐색, 판단, 선택해서 읽으려는 의지가 더욱 필요하다. “교과서처럼 주어진 정보만 읽는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다. 조병영 교수는 “읽기에 대한 좋은 경험이 쌓이면 나도 잘 읽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며 책과 친숙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책 읽어주기’를 꼽았다.    책 읽어주기가 중요하다는 말은 익히 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신생아에게도 책을 읽어줍니다. 책을 손에 쥐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것에 친숙해지도록요. 이렇게 어릴 때부터 책을 읽어주면 아기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말과 글자를 배웁니다. 영유아 앞에서 책을 읽어주면 시선이 책이 아니라 양육자의 입을 향해요. 글자를 따라가며 입을 움직이는 게 신기하거든요. 그걸 따라 하며 말과 글자를 익히는 거예요. 또 읽는 소리를 들으며 맥락을 이해합니다. 단어의 의미에 따라 강세, 억양 등에 차이가 생기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 “아빠가 통닭을 사 오셨다”를 읽을 때 통.닭.을 힘주어 읽는 식이죠. 직관적으로 이 단어가 중요하다는 걸 압니다. 책 읽어주기가 중요한 건 아이에게 의미 있고 다양한 자극을 주기 때문이에요. 그 자극이 쌓여 ‘나도 혼자 읽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라는 거고요.    하지만 어떻게 읽어줘야 할지가 늘 고민이에요.   실감 나게 읽어야 한다는 부담은 내려놓으세요. 그저 양육자가 먼저 몰입해서 읽으면 됩니다. 그래야 진짜 감흥이 나오는 법이거든요. 내용에 집중하면 나도 모르게 추임새도 넣고, 웃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반응이 나오는데요. 이 모든 게 언어 자극입니다. 하지만 매일 책을 읽어준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땐 오디오북을 틀어줘도 좋습니다. 단, 이때는 양육자도 함께 책을 봐주세요. 양육자와 함께 읽으며, 감정을 나누는 게 중요하니까요.   조병영 교수가 읽기의 능동성을 깨우기 위해 제안한 건 두 가지다. 책 읽어주기와 읽기 전후 정보, 생각의 변화를 포스트잇에 써보는 것이다. 김상선 기자   글자를 익혔다면, 혼자 읽도록 해야 할까요? 저는 가능한 한 오래도록 읽어주라고 말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라도요. 책 읽어주기를 멈추는 시기는 아이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저 역시 중학교 2학년 아들이 요구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주곤 하는데요. 책을 읽어주진 않지만, 아이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지 여전히 관심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아이가 스스로 읽고 싶어 하거나 눈으로만 읽기를 원할 땐 책 읽어주기를 잠시 멈추세요. 그땐 그냥 놔둬야 합니다. 혼자 책 읽는 경험을 쌓는 시간이거든요. 그렇다고 관심을 완전히 끄라는 건 아닙니다. 아이가 다시 책 읽어 달라면 그때 또 읽어주세요. 책 읽어주기는 단칼에 끊는 게 아니라 서서히 멀어져야 합니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책 읽는 시간이 부족하다고들 해요. 교과서 읽기도 바쁘거든요.   교과서라도 제대로 읽으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 과정에서는 교과서조차 제대로 읽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시험에 집중되어 있어서요. 그러니 수동적으로 읽고, 문제의 보기 다섯 개만 이해하고 끝납니다. 국어 점수에 비례해 문해력이 높다고 볼 수 없는 이유예요.     문해력과 교과 학습을 동시에 높일 방법은 없을까요?   교과서를 넘나들며 지식을 연결해야 합니다. 교과서와 연계된 글을 아이 스스로 찾아 읽어야 하는데, 읽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힘들죠. 그래서 저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법을 추천합니다. 읽기 전과 후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포스트잇에 적어 명시하는 거예요. 읽기 전 제목·목차·이름 등을 보고 떠오른 생각과 감정을 적어보고, 다 읽은 뒤 똑같은 방식으로 써보는 겁니다. 몰랐던 것과 잘못 알고 있던 것, 새롭게 알게 된 것, 그로 인한 내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죠. 내가 알고 모르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게 메타인지입니다. 메타인지 능력이 높으면 읽기의 능동성도 살아납니다. 궁금하거든요. 스스로 정보를 찾아보고, 알아보려고 노력합니다. 이게 바로 능동적 읽기입니다.        ━  📢 “보이지 않는 걸 발견하라”   조병영 교수에 따르면, 디지털 환경에서는 읽기가 더 어렵다. 검증되지 않은 공간에서 정보를 접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디지털 매체에 떠도는 글을 읽을 땐 “더욱 의식적으로,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조병영 교수가 말하는 비판이란 비난이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을 말한다. 조병영 교수는 “비판적 읽기는 ‘내가 아는 게 반드시 정답은 아니다’라는 것, 그리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완벽한 글은 없다는 생각을 갖고, 글에 드러나지 않은 목소리, 상황 등을 찾아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판적 읽기는 어른도 어렵습니다.  의식을 갖고 읽으려면 시간과 훈련이 필요한 법이죠. 두 가지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첫 번째는 글에 없는 목소리를 찾아보는 겁니다. 『NO, David!』라는 책을 예로 들어볼게요. 손만 대면 엎지르고, 깨트리는 데이비드의 모습과 “No, David”라는 글자만 나오는 책입니다. 마지막은 “No, David! Love, Daivd”로 훈훈하게 끝나는 그림책인데요. 이 책을 비판적으로 읽는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지금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누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까?”라고요. 두 번째 질문에 “데이비드”라는 답이 나온다면 드러나지 않은 걸 볼 줄 안다는 겁니다. 여기서 한 번 더 질문할 수 있어요. “그럼, 지금 데이비드의 기분은 어떨까?” 조병영 교수는 “비판적 읽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생각하는데서 출발한다”며 “글에서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를 찾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네요.   보이지 않는 인물과 그의 목소리, 생각, 감정을 생각해 보는 것, 이게 비판적 읽기의 기초입니다. 이건 ‘공감’과도 연결되는데요. 공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읽는 능력이거든요. 최근 아이들의 공감력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많이 들립니다. 저는 글의 근거와 이면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요약된 정보만 읽으려는 습관에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파편적인 정보만 읽으니, 맥락 속에서 다각도로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나아가 내 경험을 엮어서 새로운 지식, 내 앎으로 만들지도 못하게 돼죠. 저는 이걸 “읽었다는 착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글을 읽을 때 의식적으로 세 가지 질문을 던지길 당부합니다.     세 가지 질문이 무엇인가요?   ‘글쓴이는 이 글을 왜 썼을까?’ ‘이 글은 특정 사건과 인물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 ‘이 글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은 누구일까?’입니다. 이 질문을 의식하며 글을 읽으면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확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읽으려고 합니다.      비판적으로 읽는 또 다른 방법은 무엇인가요? 한 가지 주제를 다른 관점에서 쓴 글을 여러 편 읽는 겁니다. 상반된 입장의 글을 비교하면 각자 같은 사건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어떤 근거를 내세우는지 등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거든요. 사건을 맥락에서 이해하는 눈도 길러지고요. 미국에서 리터러시를 주제로 연구한 결과, 두 개의 상충하는 글을 읽을 때 훨씬 몰입도가 높아지는 거로 나왔어요. 더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더 정교하게 읽었다는 얘기입니다.     조병영 교수는 “편향된 읽기를 경계하라”고 강조했다. 한쪽의 입장에서 쓴 글들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해의 폭이 제한되고, 정보를 연결하는 고리도 약해진다. 연결이 핵심인 디지털 시대에 도태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다. 조병영 교수는 “사람은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비슷한 내용으로 마음이 기울게 마련이다. 익숙하다 보니 이해하는 데 큰 노력이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양육자가 먼저 다양한 논조의 글을 읽고, 아이에게 추천하세요.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는 거죠. 그 경험이 쌓이면 아이는 능동적이고, 비판적으로 읽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겁니다. 읽고 싶다는 마음에서 진짜 읽는 인간이 탄생합니다.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진짜 읽기는 대화로 시작한다” 4차산업혁명 키워드는 ‘연결’입니다. 읽을 때 배경 지식을 활용하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생각과 생각을 잇는 대화로 진짜 읽기를 시작하세요. 경험을 연결해보고, 생각의 근거를 찾아 봅니다. ·“읽기 전후 생각의 변화를 찾아라” 진짜 읽기는 읽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읽기에 대한 ‘좋은 경험’과 모르는 걸 인지하는 ‘메타인지’로 읽기에 대한 ‘능동성’을 깨워주세요. 책 읽어주기와 포스트잇을 활용한 읽기 전후 정보 비교가 도움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걸 발견하라” 검증되지 않은 디지털 환경에서는 비판적으로 읽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주어진 글이 유일한 답이 아니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걸 의식하며 읽어야 합니다. 책에 없는 목소리를 찾고, 다양한 논조의 글을 함께 읽어보세요.  」 관련기사 “독서나무와 체크리스트, 2가지면 끝” 성효쌤의 특급 독서전략 “책 많이 읽으면 수학 잘한다? 천만에요” 독서·글쓰기 오해 셋 [오밥뉴스]"코로나 이후 한 반에 20% 읽기 어려워 해"… 내 아이의 문해력 수준은

    2022.12.11 14:56

  • 영어 유치원 다니는데도…영어 안 느는 아이의 공통점

    영어 유치원 다니는데도…영어 안 느는 아이의 공통점 유료 전용

    혹시, 학습을 강요하느라 말하려는 의지를 꺾고 있지는 않나요? 언어는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는 도구입니다. ‘대화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야 말이 트여요. 영어도 마찬가지예요.   영어유치원을 다녀도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조지은 영국 옥스퍼드대 언어학과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언어는 책상 앞에 앉아서 배울 게 아니라 말하고 싶은 상황에 놓이는 게 먼저라는 얘기다.   조지은 교수는 아이들과 함께 작업한 백희나 작가의 『달샤베트』 영문판으로 지난 6월 ‘보스턴 글로브 혼북’ 명예상을 탔다. 왼쪽부터 큰 딸 사라, 조지은 교수, 둘째 딸 제시. 사진 조지은 교수   조지은 교수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한국학과 언어학을 가르친다. 서울대에서 아동가족학과 언어학을 전공한 그는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말을 배울까?’에 대한 호기심에 영국으로 건너가 언어학 박사까지 섭렵했다. 유독 관심 있는 분야는 이중 언어 관련 주제들이다. 큰딸 사라와 둘째 딸 제시가 살아 있는 연구 대상자다.   아이들은 영국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한국말로 입을 뗐고, 영어를 잘 못하는 채로 영국의 유치원에 갔다. 그런데도 한두 달 만에 능숙하게 영어를 해냈다. 언어 습득은 이론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란 얘기였다. 언어학자가 봐도 경이로웠다고 한다. 그 과정이 너무 신기해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이중 언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몇 해 전 펴낸『언어의 아이들』,『영어의 아이들』에도 그 내용을 담았다.   지난 15일 화상으로 만난 조지은 교수는 “조기 유학, 영어 유치원, 엄마표 영어, 어떤 방법으로 배우든 언어 실력은 말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판가름난다”며 소통 욕구를 일으키는 세 가지 열쇠를 제시했다.    ━  📢 열쇠1. 뿌리 언어가 있나요?   조지은 교수에 따르면, 영어 습득은 시기가 아니라 상황이 좌우한다. 언제 처음 접했느냐보다 중요한 건 언어 학습을 위한 기초가 잘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언어 학습을 위한 기초는 바로 ‘뿌리 언어’다. 조지은 교수는 “뿌리 언어가 튼튼해야 언어에 대한 흥미가 생긴다”며 “제2언어를 배우기 전 뿌리 언어부터 정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뿌리 언어란 무엇인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우는 말, 모국어를 말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죠. 자기 정체성을 결정하기 때문에 생각의 언어라고도 부르는데요. 뿌리 언어가 튼튼하면 제2, 제3언어도 쉽게 습득할 수 있어요. 뿌리 언어를 기준으로 각국 언어의 차이와 특징을 이해하기 때문이죠. 말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니, 언어 습득을 주저하지 않고요.   말을 떼기 전 여러 언어를 동시에 접하면 안 되는 걸까요? 이제 막 한국어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많은 언어를 들려주면 언어 혼동을 겪습니다. 이러면 뿌리 언어가 흔들립니다. 뿌리 언어가 약하다는 건 자기를 표현할 적절한 언어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자신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표현할 수 없으니 정체성이 흔들리고, 자신감도 없죠. 교우 관계도 힘들어집니다. 실제로 신생아 때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라 다중 언어 구사자인 분을 아는데, “나를 표현할 언어는 없다”고 하시더군요. 말하는 게 어려우니, 사회생활도 쉽지 않았다고 해요. 뿌리 언어 없이 다중 언어에 노출된 단적인 사례죠.   뿌리 언어가 정착하는 시기가 따로 있나요? 인간의 언어발달 단계에 따르면 평균 만 3세 전후입니다. 흔히 2~3세를 언어폭발기라고 하죠. 이때 아이들은 들리는 말을 수집해 머릿속에 저장하고, 말하기를 시도합니다. 중요한 건 이 시기에 뿌리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배울 수 없다는 겁니다. 다른 언어를 배우는 데도 한계가 있고요.   뿌리 언어를 제대로 습득했는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나요? 말문이 트인다고 하죠. 사용하는 어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납니다. 하루 종일 종알종알 떠들죠. 이렇게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면, 뿌리 언어가 잘 자리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또 말하기를 즐거워하는 이때가 새로운 언어를 접하기 좋을 때이기도 합니다. 뿌리 언어를 뼈대로 가지치기가 일어나거든요. 다만 말을 안 한다고 뿌리 언어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니 걱정하진 마세요. 다 듣고 있습니다. 말을 내뱉는 시기가 다를 뿐이니 말이 늦다고 조급할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의 언어 습득을 도와줄 필요는 없나요? 인간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납니다. 다만 이 능력을 발현하려면 자극이 필요한데, 그건 사람과의 ‘대화’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육자와의 상호 작용이 중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화해야 하나요? 가장 쉬운 건 아이 말에 맞장구치는 겁니다. 양육자가 긍정적 반응을 보이면 아이는 “내가 하는 말을 누군가는 듣고 있구나” “말로 표현하면 생각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구나”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양육자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겁니다. 이 경험이 “말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켜요. 양육자와의 대화가 즐겁다면 또 말이 하고 싶어지고,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표현력을 익혀갑니다. 소통 욕구를 일으키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건 그래서입니다.    ━  📢 열쇠2. 언어의 창의성이 살아 있나요?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아이와 쉼 없이 대화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에서 영어로 대화한다는 건 더욱 어렵다. 양육자들이 영어 유치원이나 조기 유학을 고민하는 건 그래서다. 장시간 영어에 노출되면 자연스럽게 배울 거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조지은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억지로 노출하는 건 의미 없다”며 “언어 습득에서 노출의 양보단 질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무슨 말일까요? 영어를 재밌게 접해야 한다는 겁니다. 신나고, 즐거운 언어로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거든요. 언어란 습득과 학습의 조합입니다. 습득이 특별한 노력 없이 얻는 단계라면, 학습은 규칙을 인지하고, 반복·적용해서 익히는 활동이죠. 습득이 없으면, 학습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습득은 재밌어야 합니다. 특히 언어 습득의 골든타임으로 여겨지는 3~9세에는 영어에 대한 긍정 경험을 심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언어의 창의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습니다.   언어의 창의성요? 예를 들어보죠. “도착하자마자 항상 커피를 마신다”는 의미를 표현해 볼까요? “도착하면 언제나 커피를 마신다” “도착해서 커피부터 마신다”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어요. 언어라는 게 이렇습니다. 어떤 의미를 새로운 문장으로 끊임없이 만들 수 있죠. 아이의 말은 더욱 그렇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표현을 할 때가 있잖아요. “봄에는 새싹이 뿅뿅 튀어 나오니, 스프링(Spring, 봄과 용수철이란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인가 봐요”처럼요. 아이가 이렇게 창의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건 자신이 들은 수많은 말을 조합해 자신만의 말로 창조해 내기 때문입니다. 3~9세는 이런 언어의 창의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양과 속도에 집착해 습득이 아닌 학습을 강요합니다. 하루 종일 영어 방송을 듣게 하고, 어려운 단어를 외우게 하죠. 이러면 영어는 어렵고, 지루한 것이 됩니다.   조지은 교수와 둘째 딸 제시가 ‘보스턴 글로브 혼북’ 명예상 수상 소감을 전하고 있다. 사진 조지은 교수   언어의 창의성을 펼치려면, 어떤 활동을 해야 하나요?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마음이 편안할 때 솟아납니다. 뇌는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을 때 새로운 언어를 맞을 준비를 하거든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접하면 어느샌가 그 언어로 말하게 됩니다. 언어학에서는 이런 활동을 과제중심학습법(TBLL)이라고 부릅니다. 공부인 줄 모른 채 활동하다가 습득하는 거죠, 아이들은 자유롭게 놀 때, 가장 편하고 즐겁습니다.   영어로 놀게 하라는 말인가요? 신기하고, 관심 있는 활동을 할 때 영어를 노출하라는 겁니다. 야구 좋아하면 공을 주고받으면서, 그림을 좋아하면 그리면서 영어를 접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ball 던진다” “꽃은 Yellow로 칠했네”처럼 영어를 섞어서 읊어주세요. 영어 그림책 보기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연령이 아닌 아이의 관심사로 책을 골라야 합니다. 아이에게 보고 싶은 책을 직접 고르라고 하세요. 수준 높은 책을 골라도 괜찮습니다. 텍스트를 모두 읽어줄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보단 책 표지나 주제에 관심을 보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실 영어책 읽어주는 게 부담스러워요. 잘못된 발음을 가르칠까 봐서요. 영어를 할 때 양육자는 선생님이 아니라 대화 상대가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아이는 양육자의 말을 100% 따라 하지 않아요. 그래서 영어 그림책도 단어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완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그림, 주인공, 장면을 보고 상호작용하는 게 핵심입니다. 텍스트를 읽는 것 외에 대화는 한국어로 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주변의 양육자들을 보면, 영어책 읽기를 정말 많이 하긴 합니다. 영어 공부시킨다는 욕심으로 영어 그림책만 봐선 안 됩니다. 한국어 그림책과 영어 그림책을 골고루 봐야 해요. 양쪽에서 익힌 어휘를 연결해야 어휘력과 표현력이 높아지거든요. 그림책 한 권에 영어와 한국어가 함께 표기된 책을 읽거나, 같은 책을 영어와 한국어로 모두 읽을 필요도 없어요. 영어 그림책을 읽는 한 가지 팁은 양육자가 미리 훑어보는 겁니다. 영어로 읽어줄 부분과 한국어로 설명할 부분을 나누는 등 미리 읽기 전략을 세우면 이야깃거리가 더 풍성해지니까요.    ━  📢 열쇠3. “틀렸다”는 말에 주눅 들지 않을 배짱이 있나요?   영어 실력에 차이를 만드는 세 번째 열쇠는 ‘자신감’이다. 조지은 교수는 “유독 한국에서 영어에 정답을 강요한다”며 문법과 파닉스(Phonics)를 영어 말문을 닫는 걸림돌로 지목했다. 아이의 말을 고정된 틀에 끼워 맞추고, 평가하지 말라는 거다. 조지은 교수는 “틀려도 의미만 통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배짱이 있어야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요즘 영어 교육에선 문자를 보고 소리를 매칭하는 파닉스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파닉스 학습의 목표는 글자의 기본 소리와 소리 변형 원리를 가르치는 겁니다. 파닉스가 영어 습득에 도움이 되긴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절대적인 법칙은 아닙니다. 국가와 지역에 따라 발음은 천차만별이에요. 같은 글자를 보고 전혀 다른 소리를 내기도 하고요. 미국과 영국도 파닉스 교육의 중요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어요.   그럼 발음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요? 한글 공부가 먼저입니다. 한글은 말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말소리의 기본을 이해할 수 있어요. 한글 읽기에 익숙하면 파닉스 학습도 수월합니다. 파닉스 학습은 소리가 나는 기본 원리을 이해한 뒤 감각을 길러야 해요. 알파벳 소리와 한글 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소리와 소리가 만나 어떤 규칙으로 변화하는지 찾아보는 겁니다. 파닉스 책 한 권과 인터넷만으로도 기초를 다질 수 있어요. 먼저 파닉스 책에 나온 단어를 구글 등에서 찾아 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리고 아이들의 발음을 녹음해 비교해 봅니다. 또 앞뒤 철자에 따라 소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규칙을 찾아보면 좋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영어 파닉스엔 예외가 많은데요. 모든 걸 한 번에 다 익히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완벽하게 발음하겠다는 생각은 버리셔야 해요. 특히 아이들에게 “발음이 이상해”라든가, “틀렸어”라는 등의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도 잘못된 발음은 교정해야 하지 않나요? 영어엔 정답이 없습니다. 발음은 지역마다 다르고, 문장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무궁무진합니다. 콩글리시도 틀린 게 아닙니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써도 되고요. 이건 자연스러운 ‘창조물’이지, 결코 교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보통 “틀렸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아이들은 “나는 영어를 못하는구나”하고 생각해요. 자신감을 잃고 영어를 두려워 하죠. 언어적 창의성도 꺾이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칭찬하고 격려하세요. 그래야 자신감이 생기거든요. 교정이 필요할 때도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만, 이런 표현도 있네”라고 긍정적으로 호응해 주세요. 또 하나 중요한 건 아이가 능동적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겁니다. 아이가 호기심을 갖고 자발적으로 접근해야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 말하는 법이니까요.   조지은 교수의 두 딸 사라와 제시가 말을 배울 시기 그림책을 읽고 독후 활동을 하는 모습. 그림 그리기와 인형극 등을 통해 말로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진 조지은 교수   문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덴 많은 사람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문법을 알면 더 쉽게 언어를 배우는 건 사실이지 않나요? 문법은 언어의 규칙, 즉 패턴입니다. 패턴은 쓰면서 익숙해지는 거예요. 문법을 먼저 배우는 건 거꾸로 하는 겁니다. 특히 말이란 국가, 지역, 개인마다 스타일이 다릅니다. “long time no see(오랫만이야)”라는 말은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인데도, 인사말로 자리 잡았죠. 구어(口語)를 모든 문법에 완벽하게 끼워 맞추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문법 대신 뭘 공부해야 할까요? 초등학교 고학년이라면, 맥락에 맞게 낱말의 짝궁을 익혀 보세요. 연어(連語·collocation)라고 하는데요. 예를 들면, ‘전화를 받는다’고 한국어로 표현하는데, 영어로는 ‘answer the phone’이라고 표현하죠. 전화에 ‘대답하다’는 동사를 쓰는 거예요. ‘phone’의 짝궁으로 ‘answer’를 익히라는 말입니다.   조지은 교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영어와 한국어를 가르쳤을까? 그는 “늘 참여할 기회를 줬다”고 했다. ‘코끼리’라는 낱말 카드를 보여준 뒤 뒷면의 글자를 보여주어 기억하게 하기보다, 코끼리를 그리거나 흉내 내게 하는 식이다. 책을 읽고 난 후엔 ‘표현 노트’를 만들어 느낌을 그림으로 그렸다. 최근에는 백희나 작가의 『달샤베트』를 아이들과 함께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 책은 지난 6월 ‘보스턴 글로브 혼북’ 명예상을 탔다. 이게 영국에서 한국어를 뿌리 언어로,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만든 조지은 교수의 노하우다.   옆집 아이와 비교하지 마세요. 우리 아이가 오늘 한 새롭고 참신한 말에 감탄하고, 박수 쳐주세요. 그래야 “말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깁니다.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①뿌리 언어가 있나요? 모국어는 내 생각·감정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뿌리 언어가 잘 정착해야 자기 정체성이 명확해지고, 말하기 자신감도 생깁니다. 3세 전후까진 대화를 통해 “말로 표현하면 반응이 온다”는 신뢰 관계를 쌓아주세요. 영어는 말이 트인 후 접해도 늦지 않습니다.  ②언어의 창의성이 살아 있나요? 아이들은 언어를 끊임없이 창조합니다. ‘양’과 ‘암기’에 집착한 영어 학습이 창의성을 말살하죠. 5~7세 창조성을 길러야 할 시기에는 ‘호기심’에서 출발해 영어에 대한 ‘긍정 경험’을 쌓아주세요. 놀면서 영어를 섞어쓰면 좋습니다.  ③틀릴 배짱이 있나요? 영어 잘하는 열쇠는 자신감입니다. 영어는 정답이 없습니다. 언어의 구조와 발음 규칙을 강조하는 문법과 파닉스를 맹신하지 마세요.“문법에 어긋나”, “발음이 틀렸어”는 영어 두려움증을 유발합니다. 소통 욕구를 일으키는 건 양육자의 칭찬과 격려입니다.   」 관련기사 [오밥뉴스]"코로나 이후 한 반에 20% 읽기 어려워 해"… 내 아이의 문해력 수준은 영어만 보면 울던 초등 2학년…4년 뒤 수능영어 만점 비결 그저 ‘뒷말’ 따라했을 뿐인데…아이에게 생긴 놀라운 변화

    2022.11.18 16:57

  • "책 한권 통째로 외울 수 있다"…기록전문가, 비밀의 메모장

    "책 한권 통째로 외울 수 있다"…기록전문가, 비밀의 메모장 유료 전용

    뭔가 열심히 적어 놓고 뿌듯해 하시나요? 그런 메모는 기억에 남질 않아요. 메모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되새기는 메모를 또 해야 합니다. 종국엔 메모를 안 보고 말할 수 있어야 진짜 메모를 한 거죠.     “어떻게 하면 기억에 남는 메모를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김 교수는 “메모의 본질은 요약”이라며 “궁극적인 목적은 기억을 넘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한다. “메모할 때 너무 많이 쓰고, 무턱대고 적고, 한번 쓰고 안 본다”고 그는 지적했다.    김익한 명지대 교수는 지난달 서울 마포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메모는 자신이 이해한 핵심을 키워드로 적어야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김 교수는 국내 국가기록관리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는 기록학자다. 1990년대 말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초안을 만들었고, 대통령기록관과 국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땐 진도로 내려가 민간 차원에서 사고를 기록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20년 넘게 정부 공식 문서와 대형 사건 기록을 담당했던 그는 최근 개인의 삶을 기록하는 메모법을 설파하고 있다.   김 교수는 “기록학은 방대한 공공 문서를 체계적으로 수집·보존·관리해 정부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나가고자 만들어졌다”며 “메모를 통해 개인도 학습과 일, 일상에서 성장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다”고 말했다.      ━  메모에 정답은 없다   김 교수에 따르면, 메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책, 수업, 대화, 경험 등 외부 정보를 이해하고 자기화해 적는 메모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내부에 있는 지식과 경험을 추출해 쓰는 메모가 있다. “이 두 메모가 시너지를 내며 빛을 발하는 과정이 공부”라고 김 교수는 말했다. 메모가 지식의 연결과 확장을 가능하게 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메모 습관이 자리잡으면 집중력, 이해력, 암기력이 향상돼 공부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했다.     학창시절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필기도 잘 했던 것 같아요. 공부 잘 하는 필기법이 있나요?   교실에 두 학생이 있다고 해볼께요. 수업 시간에 선생님 하시는 말씀 놓칠 세라 공책에 코를 박고 열심히 필기하는 학생,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다가 몇 마디 적는 학생 이렇게요. 둘 중 누가 더 공부를 잘할까요? 메모 능력만 본다면 후자가 공부를 잘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필기를 많이 안 하는데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다고요? 수업 내용의 핵심을 짚어내서 자기 것으로 소화 했느냐를 메모로 따져보는 거죠.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쓴 아이는 받아 적느라 맥락을 놓치고 스스로 이해하는 시간이 부족했을 거에요. 그에 반해 키워드 위주로 적은 아이는 맥락을 따라가며 듣다가 자신에게 와 닿은 단어나 문구를 적은 거죠. 이 아이가 수업 내용을 더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나중에 응용 문제가 나오거나, 논술 시험을 봐도 잘 대응할 수 있습니다.     적게 적었는데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요?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요약해 놓으면, 너무 많은 걸 놓칠까 불안해합니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나면 어쩌나 하고요. 그런데 많이 적으면 오히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내가 인상 깊었던, 중요하다고 생각한 순간에 키워드만 적어야 전체 맥락이 같이 연상되거든요. 핵심만 간단히 적겠다고 생각하면 절로 맥락을 파악하려는 욕구도 커집니다.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거죠.     얼마만큼 적으면 적게 적는 걸까요? 30쪽 정도 분량의 책을 기준으로 보면, A4용지 반장 이하로 적는 걸 권합니다. 인간의 뇌가 기억할 수 있는 최대 용량이 A4용지 2장 정도라고 해요.   김익한 교수는 "핵심만 키워드로 적어야 맥락을 파악하려는 욕구가 커지고 기억에도 잘 남는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요약 능력이 관건이겠네요.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 키워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요약에 정답은 없어요. 학생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종종 제가 메모한 걸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럼 제가 말해요. “내 것이 정답이라는 보장이 없다”고요. 그 사람의 요약은 그것대로 정답이고, 내 요약은 내 것대로 정답입니다. 메모를 하는 사람이 당시 ‘아하!’ 하고 깨달은 것, 의미 있다고 느낀 부분을 단어나 문구로 적으면 됩니다. 그게 그 사람이 이해한 것이고, 자기화한 결과물입니다.     대화엔 화자의 의도, 시험에는 출제자의 의도가 분명 있을텐데요. 정보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모 습관과 경험이 쌓이다 보면 화자의 의도에 근접하게 됩니다. 일정한 양이 쌓이게 되면 어느 순간 질적인 비약이 이뤄진다는 거죠. 양질 전환의 법칙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수업 시작하기 전에 교과서 수업 목표나 책 목차라도 훑어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핵심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아요.그보다 제가 생각하는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요. 아예 메모할 기회를 빼앗고 생각을 틀어막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메모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얘긴가요? 학원이나 학교에서 아예 핵심 내용을 정리 요약한 프린트물을 나눠줍니다. 실제 누군가가 노트 필기 해놓은 것처럼 정리된 참고서도 많고요. 이걸 보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무작정 보고 외우는 것 밖에 더 하겠습니까? 암기도 자기식 이해가 선행이 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생략되면 겉돌 수 밖에 없죠. ‘이거 시험에 그대로 나오니 지금부터 받아적어라’ 하는 선생님들도 계시죠. 그래선 안 됩니다. 선생님의 얘기를 10명의 학생이 듣고 있으면, 각기 다른 메모 10개가 나와야 해요. 각자 이해한 정도가 다 다를 테니까요.     요즘엔 인공지능(AI)이 회의나 대화 내용을 몇 문장으로 요약해주기도 하는데요.   AI가 정확하고 빠른 요약에선 압도적이죠. 예를 들면 판결문 요약 같은 건 AI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창의적일 필요가 없거든요. 아니, 어떤 면에선 창의적이지 않아야 하죠. 하지만 AI가 한 요약을 보고 양형과 관련된 법리적인 판단은 인간이 내리지 않습니까? 개인의 취향과 해석이 가미된 요약이나 나에게 의미있는 요약은 결코 AI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  메모장, 하나로는 부족하다   김 교수는 “메모는 한번 쓰고 끝내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순간의 기억을 키워드로 붙잡아 두었다면, 이를 다시 가다듬어 자신만의 서사로 재정리하는 2차 메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메모장도 두 종류를 쓰라고 조언했다. 먼저 항상 들고 다니면서 이것 저것 적을 수 있는 만능노트를 쓴다. 이후 잡다한 메모를 다시 적는 만능 카드를 추가로 쓰라는 것이다. 만능 카드로는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의 링이 달린 단어카드장을 추천했다. “두 종류의 메모장을 활용하면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는 것도 가능하다”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김익한 명지대 교수는 "두 종류의 메모장을 활용해 책 한 권을 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메모로 책 내용을 통째로 암기할 수 있다고요? 책의 한 챕터를 읽고 있다면, 만능 노트에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키워드 위주로 적습니다. 한 챕터를 다 읽고 나면 그 키워드들끼리 연결하고 자신만의 논리 구조를 만들어서 만능 카드에 적습니다. 2차 메모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챕터별로 카드가 한장씩 만들어지겠죠. 다섯 장의 챕터가 있다면 다섯장의 카드가 있을 텐데, 이걸 다시 쭉 보고 머릿속으로 책 내용을 상기하는 거죠. 학생들에게는 과목별로 이런 카드를 만드는 걸 추천해요.   단어 카드를 써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일단 한 손에 들어오는 카드를 쓰다 보면 적게 쓸 수 밖에 없어요. 공간 제약 때문에라도 축약을 하게 되는 거죠. 카드를 한장씩 완성해서 차곡차곡 쌓일 때 마다 지적 성취감도 느낄 수 있어요. 자신이 원하는 순서로 카드를 바꿔 끼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책에서는 1장부터 5장까지 순서대로 나와있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5장을 처음으로 앞세울 수 있어요. 그리고 시간이 날 때 다시 되새기는 작업을 하기에도 편리하고요.     되새김이요? 메모한 내용을 반복적, 의식적으로 각인시키는 거죠. 이때 그림, 이미지로 기억하는 방법이 효과적입니다. 자기만의 약속을 만들어서 표식이나 색깔을 입혀보세요. 단어 카드를 복기하면서 형광펜이나 색연필로 다시 중요 부분을 칠하고 표시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동그라미나 핑크색은 더 중요한 키워드에, 노란색은 부연 설명할 때 쓰는 식으로요. 이렇게 하면 특정 단어를 떠올리면 카드 한 장이 머릿속에 이미지 한 장으로 떠올라요. 그 단어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그 옆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납니다.       김익한 명지대 교수는 평소 만년필과 색연필을 사용해 메모를 한다. 김 교수는 "종이 위에 사각사각 쓰고, 부들부들 색칠하는 느낌이 좋아 메모하는 맛이 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그렇게 메모하고 되새기면 시간이 많이 들지 않나요?  책 내용이나 문장을 베끼기 때문에 힘들고오래 걸리는 겁니다. 키워드 위주로 적으면 시간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아요. 몸에 익으면 A4용지 삼분의 일에서 반장 정도 적는 수준에서 메모할 수 있죠. 그 단계에 이르면 하루에 10~15분 정도만 투자하면 됩니다.     요즘엔 메모 앱도 다양하고, 디지털 메모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손 글씨 메모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디지털 메모는 휴대성이 좋아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휘리릭 적어두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어요. 하지만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손 글씨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생각하면서 내 안의 지식을 끌어내는 메모일수록 손으로 쓰길 권합니다. 손가락 움직이는 것보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써내려가는 손 글씨가 뇌와 더 가깝거든요.      ━  메모를 말하다   김 교수가 메모 공부법에서 생각하기만큼 강조하는 게 있다. 말하기, 글쓰기 활동이다. 그는 15년간 대학원에서 ‘기록학 연구와 발표’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이 매주 논문 3편을 외워 한 편당 5분 내로 요약 발표하고, 그 내용을 대여섯장의 프레젠테이션용 문서로 정리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처음 한달간은 매우 힘들어 하지만, 두 달째부터 익숙해진다. 그리고 마참내 강의 후반부에는 요약 정리한 프레젠테이션용 문서를 보지 않고도 논문 내용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공부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말하고 쓰는 과정이 필수라고 확신하는 이유다. 김 교수는 양육자들에게 “자녀와 함께 발표하는 시간을 가져라”고 권했다.     집에서 발표를 하라고요? 20년 전 제가 제 아이들에게 실제로 했던 방법입니다. 그 당시 저는 소위 학군지로 불리는 서울 강남 지역에 살았는데, 초등학교 5학년이던 첫째가 일기장에 ‘학원에 불이 났으면 좋겠다’고 썼더라고요. 일주일에 영어 단어를 500개씩 외우게 하던 학원이었어요. 고민한 끝에 경기도 여주로 이사를 갔어요. 단독주택을 짓고 살았는데, 1층에 작은 방을 하나 만들었어요. 가족 강의실을 만든 거죠.     가족 강의실이요? 큰 화이트보드 칠판도 놓고, 의자와 책상도 넣어서 진짜 강의실처럼 꾸몄어요. 일요일 주말 연속극 끝나는 시간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서 발표를 했어요. 먼저 엄마나 아빠가 강의를 해야 해요. 주제는 교과 과목이 되도 좋고, 새로 배운 요리법이나 일상 습관, 인생에 관한 이야기 등 뭐든 좋아요. 아이에게 강의를 듣고 메모를 해보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나선 메모 내용을 발표해보라고 했어요. 아이가 듣고 이해한 걸 적어 보고 말해보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되면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쯤부터 시도해봐도 좋아요.   김익한 교수는 "자녀가 배우고 이해한 걸 메모하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김상선 기자   아이에게 강의를 한다고 하면 거부하지 않을까요? 양육자도 어색하고요.   공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족만의 문화를 만든다고 생각해보세요. 부모가 공부라고 여기는 순간 아이가 먼저 귀신같이 알아차려요. 양육자가 먼저 강의, 발표 시간을 의식적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즐겨야합니다. 3일 전부터 무슨 강의를 하겠다고 안내하기도 하고요. 주의해야할 점은 아이가 무엇을 메모하고, 무엇을 발표하든 존중하고 칭찬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절대로 평가하려 들지 마세요. 아이의 생각을, 아이의 세계를 인정해줘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해석하고 배운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거든요. 발표가 끝나면 서로 “너는 그렇게 이해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겁니다.     강의나 발표를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막막할 것 같아요.   그럴 때 저는 무엇이든 세 가지로 말해보라고 추천해요. ‘333의 법칙’인데, 한 항목에 대해 세 가지로 가지치기를 해 나가는 겁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정리해보라고 하면, 한 두 개는 너무 적고 네 다섯 개는 좀 많은 느낌이잖아요. 셋은 안정적이기도 하고, 기억도 잘 납니다. 생각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도 있어요. 보통 한 두 가지는 떠오르게 마련이거든요. 나머지 한 가지를 채우기 위해서 깊은 곳에 있는 생각까지 끌어올려야만 하죠.     그렇게 발표를 하면 어떤 효과가 있나요? 유대인들은 경전을 말하면서 공부한다고 해요. 경전을 공부하는 도서관(예시바)은 엄청 시끄러워요. 자기가 읽고 해석한 것에 대해서 옆 사람하고 계속 토론하면서 공부하는 겁니다. 이런 습관과 문화가 자리잡고 있으니 똑똑하고 창조적인 민족이 될 수 있었죠. 발표하기의 또 다른 효과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된다는 겁니다. 소위 메타인지가 가능해지는 거죠.     발표를 하면 메타인지가 가능해진다고요? 메모와 말하기는 자신의 능력이 바깥으로, 객관적으로 표출되는 것이거든요. 메모를 하지 못하고, 또 말하지 못하면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동시에 모르는 걸 알려고 하는 욕구도 생겨납니다. 공부하려는 동기가 끊임없이 생겨나는 겁니다.     김 교수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원칙이 있다. “메모의 중심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해석과 이해가 없는 메모는 의미가 없다”며 “메모를 하는 주체가 분명히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가 주장하는 메모 공부법의 목적을 이해하면 그 원칙이 이해가 간다.      공부는 지식을 넘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해요. 그래야 비로소 자기다운 삶을 선택해서 살 수 있으니까요. 메모를 하는 이유도 자기다운 삶을 잘 선택하기 위해섭니다.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짧게 적으세요. 많이 쓰면 오히려 기억에 안 남아요. 나에게 인상 깊고 중요한 걸 키워드로 적으세요. 내가 이해한 핵심이 더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메모 두 번 하세요. 이것 저것 만능 노트에 적고, 이걸 재정리해 만능카드(단어카드장)에 다시 메모하세요. 자주 되새기면 책 한 권도 외울 수 있어요.  ·메모한 걸 말해보세요. 메모 안 보고도 말할 수 있어야 진짜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요. 내가 뭘 모르는지도 깨달을 수 있어요. 」 관련기사 '광클교수'에 물었다…100세 시대 '혼공'으로 성장하기, 조건 셋 "자녀들 선행학습은 시대착오" 서울대 교수가 권한 공부법이송원 기자 lee.songwon@joongang.co.kr

    2022.10.03 06:00

  • “우리는 왜 서른, 마흔에 가방 하나 메고 산티아고 가게 됐을까?"

    “우리는 왜 서른, 마흔에 가방 하나 메고 산티아고 가게 됐을까?" 유료 전용

    혹시 뭔가를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지 말고, 아이의 생각을 꺼내려고 해보세요. 그렇게 하면 그림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지난 1일 만난 이현아 교사는 “어떻게 하면 아이가 그림책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이 이렇게 답했다. 2015년부터 그림책을 가지고 수업을 해온 베테랑 교사다. 그림책 수업 노하우를 담아 책(『그림책 한 권의 힘』)을 쓰기도 했고, 2017년부터는 교사를 대상으로 그림책 수업 연수도 진행 중이다.   이현아 교사는 “가르치는 건 이미 기존 수업 시간을 통해 충분히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학교에서 부족한 건 지식을 넣는 게 아니라 생각을 꺼내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그런데 막상 아이에게 생각을 말해보라고 하면 잘 안 한다”면서 “그럴 때 그림책을 활용하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그림책 수업 베테랑인 이현아 교사는 "아이의 생각을 꺼내는 데 그림책을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면 아이가 자연스레 그림책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장진영 기자  ━  생각 꺼내기, 포스트잇 한장이면 된다   ‘집어넣지 말고 생각을 꺼내야 한다’는 말, 너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에게 생각을 물어보면,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림책) 어땠냐”는 질문에, 열에 아홉은 “좋았다”고 답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고 “뭐가 좋았냐”고 한 번 더 물어보자. 그래도 상황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 좋았다”는 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매개로 생각을 꺼내는 게 쉽지 않아요. 어땠느냐고 물어보면 아이들은 대부분 ‘좋았다’고 단답형으로 말하지 않나요? 정말 그렇죠. 그래서 질문이 중요해요. 구체적으로 묻는 겁니다. 제가 그림책을 읽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방법이 있어요. 먼저 가장 인상적인 장면, 좋았던 장면을 고르게 합니다.   그런 뒤엔요? 그리고 4가지를 물어요. 경험, 오감, 생각 그리고 질문에 관한 질문이죠. 경험은 인상적인 장면을 보고 떠오른 경험이 있는지 묻는 겁니다. 오감은 그 장면에서 떠오르는 색깔이나 촉감, 냄새에 관해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거고요. 생각은 그 장면에서 어떤 생각이나 기분이 들었는지를, 질문은 그 장면에서 친구들과 나누고 싶은 질문을 한 가지만 떠올려서 말해달라고 하는 거죠.   그 4가지 질문을 모두 다 하나요? 상황에 따라서요. 고학년을 가르칠 땐 다 하지만, 저학년은 그중에서 한두 개만 합니다.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지고요.   질문하고 답을 듣고 끝인가요? 질문을 던지고 아이에게 포스트잇을 주세요. 거기에 질문에 대한 답을 쓰게 하고, 답을 쓴 포스트잇을 아이가 인상적이라고 말한 그 장면에 붙이는 거죠. 여러 명이 이 장면 저 장면에 붙이거든요.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서, 그 답을 쓴 친구가 이야기합니다. 저마다 마음을 움직인 장면이 다 다르고, 같은 장면을 보고도 떠오르는 경험이나 생각이 다 다릅니다. 아이들이 이 활동을 좋아하는 이유죠.   책에 따라 활동지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그런 부담이 줄겠어요. 교사 연수 때 만난 선생님이나 강연에서 만난 양육자분들도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어떤 그림책을 읽어도 아이와 활동할 수 있다고요. 그림책을 미리 정할 필요도 없죠. 책장 앞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림책을 고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책을 가지고 경험과 오감, 생각, 그리고 질문에 관해 묻고 포스트잇 활동을 해보세요. 저는 이런 그림책 독후 활동법을 ‘통(通) 그림책 감상법’이라고 불러요. 나랑 통했던 그림책, 통했던 장면을 가지고 생각을 확장하는 거죠.  이현아 교사는 그림책을 가지고 아이들과 수업한 이야기를 모아 책을 썼다. 책에는 그의 그림책 수업 노하우도 담겼다. 장진영 기자  ━  다 큰 어른, 왜 산티아고까지 갈까   자신만의 그림책 활동법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그림책 수업에 열정을 가진 그도 사실 ‘교사가 내게 맞는 걸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5년 차 교사였던 2014년, 아이들과 매일 같이 있는데, 아이들과 있는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이들이 영혼을 집에 두고 오는 것 같았다. 울림 없는 교실에서, 그 역시 ‘교사로 평생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학교 도서관에서 제시 클라우스마이어 작가가 쓰고 이수지 작가가 그린 『이 작은 책을 펼쳐 봐』을 봤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언 듯 한참을 서 있었다.   『이 작은 책을 펼쳐 봐』가 어떤 책이었길래요? 이 책 안엔 작은 책 여러 권이 있어요. 책을 펼치면 좀 더 작은 책이, 그 책을 펼치면 더 작은 책이 나와요. 그런데 가장 작은 책을 거인이 펼쳐야 해요. 손이 너무 커서 펼칠 수도, 넘길 수가 없죠. 거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책을 결국 못 봤을까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친구들이 대신 펼쳐줬거든요.   그 책이 왜 통했을까요? 교사인 제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어요. 거인이 작은 책을 펼칠 수 없듯이요. 아이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는 거죠. 교실에서도요. 그걸 깨닫고 나니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겠더라고요. 이 책이 너무 좋아서 교실 책장에 꽂아두고 아이들과 읽었어요. 그런데 책보다 아이들의 이야기가 더 좋았죠. 그렇게 말을 하라고 해도 말을 안 하던 아이들이 말을 하는 거예요.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말을 하라고 하면 잘 안 하나요?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친구들이 자길 너무 진지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도 싫고, 선생님이 쓸데없는 얘기나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싫고요. 아이들이 좀 크면 알아요. 어떻게 대답해야 빨리 끝나는지를요. 그래서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아요.   그림책을 가지고 하면 다른가요? 누구나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다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 말할 계기가 없을 뿐이에요. 그림책을 읽는 행위가 그걸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공부하는 긴장감 없이 편안하게 책을 읽고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니까요.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왜 중요한가요? 아이는 학교에서 12년을 보내요. 그 12년간 들숨만 쉰다고 생각해보세요. 넣기만 하지, 꺼내는 걸 하지 않는다고요. 들숨과 날숨을 함께 해야 숨을 쉴 수 있어요. 건강하게 잘 자라려면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해요. 들숨만 쉬다가 사회에 나온 어른들이 어떻게 사나요? 다 커서 산티아고에 가죠. 나이 서른, 마흔에 '나'를 찾겠다고요.    자기 이야기를 하게 하는 여러 매개체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그림책인가요? 그림책은 유연한 매체인 것 같아요. 그림도 있고, 이야기도 있고, 그 둘이 함께 만들어내는 호흡도 있고요. 그래서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요. 그리고 할 수 있는 활동도 많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고요. 연극이나 음악 감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죠. 이야기 치료라고, 치료의 매개체로 사용하기도 하고요.  이현아 교사는 "책을 좋아하려면 좋아하는 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홈런북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홈런북을 찾게 하고, 읽게 하는 게 그가 아이들과 책을 읽는 노하우다. 장진영 기자  ━  홈런북을 찾아라    그림책에 관한 양육자들의 궁금증은 대체로 이 두 가지로 모아진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림책 수업 베테랑 교사는 아이들과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까?   책이 정말 많아요.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 책 고르는 선생님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좀 알려주세요. 홈런북, 그러니까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책을 찾아보세요. 저는 2시간 정도의 시간을 확보해서 아이들과 학교 도서관에 가요. 1시간은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보면서 자기만의 홈런북을 찾아요. 원래 좋아하던 책을 가져오는 친구도 있고, 그날 그 자리에서 맘에 드는 책을 골라오는 아이도 있어요. 나머지 1시간은 둘러앉아서 자기가 찾은 홈런북을 소개하는 겁니다. 앞서 알려드렸던 바로 그 방법, 포스트잇 활용법을 써서요.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책을 읽게 하고, 활동도 그걸 가지고 하는 거군요? 해보시면 책을 정해주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아이와 함께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직접 책을 고르게 해보세요.   아이가 직접 좋아하는 책, 홈런북을 고르다 보면 책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아이가 책을 많이 읽길 바라시잖아요. 그러려면 좋아해야 해요. 아이가 책을 좋아하려면, 자기 취향에 맞는 책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읽나요? 선생님이 읽어주시나요? 교실에서 수업할 때는 책이 한 권, 많아도 두 세권 밖에 없으니까요. 보통 제가 책을 아이들을 향해 펼쳐서 보여주면서 소리 내 읽습니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그냥 읽습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두 번째는 나만의 한 장면을 찾아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읽어요. 그리고 나서는 책을 돌려요. 아이들이 직접 책장을 넘겨보면서 읽게 하는 거죠. 그리고 나면 포스트잇을 꺼내게 하고, 그 장면이 왜 좋았는지, 경험과 오감, 생각, 질문을 주제로 쓰게 해요.   선생님 교실에 있는 책은 포스트잇 때문에 금세 뚱뚱해지겠네요. (웃음) 빵을 구우면 반죽이 부풀잖아요.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으면, 빵 굽듯 책이 부풀어요. 저는 그 느낌이 참 좋더라고요.   아이들과 책을 읽을 때 특별히 유념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많이 읽으라고 하지 않아요. 저는 가능하면 천천히 여러 번 읽으라고 해요. 책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찾으라고 하고, 그 장면에 멈춰서 생각하도록 하는 것도 천천히 읽는 방법의 하나에요.   포스트잇 쓰기를 하다 보면, 아이들의 글쓰기 실력도 늘 것 같아요. 막상 생각을 글로 써보면, 생각처럼 잘 안 됩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포스트잇 활동을 꾸준히 하다 보면 확실히 학기 초보다 쓰는 실력이 좋아져요. 생각하는 힘도 그만큼 커졌다는 뜻일 겁니다.    이현아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아이들 속에 있는 ‘문장’과 ‘이야기’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기 시작한 이유다. 그는 아이들의 그림책을 혼자 보는 게 아까워 온라인 그림책 도서관 ‘통로’를 만들기도 했다.   “작품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가 완성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림책을 가지고 아이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건 궁극적으로 원작을 더 풍성하게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에요. 양육자나 교사뿐 아니라 그림책을 둘러싼 많은 어른이 어린이를 좀 더 존중했으면 좋겠어요.”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① 그림책을 읽고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그림책을 가지고 아이의 생각과 이야기를 끄집어내세요. 그래야 아이가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② “책 어땠니?”, “뭐가 좋았니”라고 묻지 마세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고르게 하고, 그 장면에서 떠오른 아이의 경험과 생각(느낌), 오감을 물어보세요. 그리고 어떤 질문을 하고 싶은지 묻는 것도 좋습니다.   ③ 책을 골라주지 마세요. 아이에게 시간을 주고 책을 둘러보게 하고, 그중 마음에 드는 책을 직접 고르게 하세요. 그래야 더 적극적으로 읽고, 활동합니다. 」 관련기사 “독서나무와 체크리스트, 2가지면 끝” 성효쌤의 특급 독서전략 [오밥뉴스]"코로나 이후 한 반에 20% 읽기 어려워 해"… 내 아이의 문해력 수준은정선언 기자 jung.sunean@joongang.co.kr

    2022.08.08 06:00

  • "하늘 왜 파란 거야?" 묻는 아이…스탠퍼드대 교수 의외의 대답

    "하늘 왜 파란 거야?" 묻는 아이…스탠퍼드대 교수 의외의 대답 유료 전용

    아이의 질문을 기록하세요. 그리고 관찰해보세요. 질문을 보면 아이의 숨겨진 역량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폴 김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교육대학원 부학장은 “어떻게 해야 질문 잘하는 아이로 키울 수 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아이에게 좋은 질문을 끌어내려면 우선 아이의 관심사부터 파악해야한다는 얘기다. 그는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다”며 “생각을 주입하지 말고,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유도하라”고 강조했다.   지난 5월 31일 줌으로 만난 폴 김 스텐퍼드대 교육대학원 부학장은 ″질문 잘 하는 아이를 키우려면 아이의 질문을 잘 관찰하라″고 조언했다. [사진=한빛비즈] 폴 김 부학장은 질문을 가르치는 교수로 유명하다. 학창시절 하위 1% 그룹 학생이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컴퓨터공학과 교육공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학생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게 도와주는 교수가 됐다. 공부 못한다고 주눅 든 아이를 보면 동병상련을 느껴서란다. 숨겨진 역량을 발견해 줄 코치가 옆에 있다면 누구든 자신처럼 성장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금도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며 배우고 있다. 배움의 과정에서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을 모아 『다시, 배우다』도 썼다. 그는 “누구나 변화를 꿈꾸며, 변화는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가 질문 안에 아이의 역량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아이의 질문과 역량,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거꾸로 질문을 드려볼게요. 아이들은 언제 질문할까요?     궁금할 때겠죠?  질문이 생긴다는 건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관심이 생기면 궁금하고, 알고 싶고, 자꾸 생각나죠. 질문은 아이의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질문이 아이의 역량을 개발할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가 오늘 하루 무슨 질문을 했나 들여다보라고 하는 건 그래서죠.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우선 아이의 질문을 기록하세요. ‘질문 일기’를 써보는 겁니다. 아이가 오늘 하루 어떤 질문 했는지, 몇 개의 질문을 했는지요. 질문을 보면 아이의 관심과 생각의 패턴을 찾을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의 관심사를 연결해 보세요. 예를 들어 아이가 주로 동물에 연관된 질문을 한다. 그런데 질문의 어휘력이 남다르다. 그럼 그 두 가지를 연결해서 ‘동물 언어학’이라는 키워드를 만드는 겁니다. 그럼 아이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겠죠. “동물들은 평소에 무슨 말을 할까?” 장기적으로 보면 동물의 언어학, 동물 신호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까지 개척할 수 있고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수많은 질문 속에서 숨어 있는 생각을 끌어내야 하거든요. 그걸 부모가 도와줘야 합니다.   질문이 없는 아이들도 있어요. 입을 꾹 다물고 있죠. 이런 아이들은 호기심이 없는 걸까요?    질문 없는 아이는 없습니다. 묻고 싶지만, 못할 뿐이에요. 환경이 생각할 힘을 억압하고 질문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제가 살아있는 증거잖아요(웃음). 학창시절 저는 궁금한 게 많았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질문을 못 했어요. 물어보면 맞았거든요. 질문하기가 두려워서 늘 입을 다물고 앉아만 있었죠. 그런데 집에 오면 돌변해요. 부모님이 독립적으로 키우셨거든요. 스스로 생각하고, 찾아보고, 결정하게 하셨어요. 자율적으로 생각하면서 성장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질문할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드셨으면 해요. 거창한 게 아니에요. 아이가 학교에서 오면 “오늘 뭐 했어?”라고 묻기보다 “오늘은 무슨 질문 했어?”라고 물어본다거나 아이 스스로 하루 계획표를 짜게 하는 거예요. 스스로 해 본 경험을 통해 주체적으로 생각할 힘을 길러주라는 겁니다.    폴 김 부학장은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없는 오지에 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해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배우며 성장하는 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한빛비즈]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런데 부모 입장에서는 여행이나 캠핑 같은 체험 학습을 시키라는 말로 들려요. 부담되는 게 사실입니다.    경험이라는 게 반드시 특별한 장소에서 몸으로 체험해보라는 게 아닙니다. 질문을 떠올릴 경험을 늘리라는 얘기입니다. 종이 한 장으로도 가능해요. ‘종이는 어떻게 만들지?’ ‘어떻게 하얀색이 됐을까?’ ‘물에 젖지 않는 종이는 어떻게 만들까?’ 등 아이와 앉아서 수십 가지의 과학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일방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는 것, 이게 경험이에요.    부모가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아이는 공짜로 크지 않습니다. 질문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으면, 아이한테 관심을 갖고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돈 주고 맡긴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학원에서 아이가 어디에 관심을 보였는지, 어떤 질문을 했는지 모르죠. 기억하세요, 부모가 귀찮아할 수록 좋은 질문은 나올 수 없습니다.      ━  질문에도 급이 있다   폴 김 교수는 지구촌을 돌아다니며 ‘국경 없는 교육’을 실천하는 교육자로 유명하다. 케냐, 르완다, 탄자니아 등 개발도상국 400만 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스마일(SMILE) 프로젝트’는 2016년 유엔 미래교육혁신기술로 선정되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능력을 키워주자는 게 그의 목표다. 폴 김 교수는 “학생의 질문을 통해 배움의 수준과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라며 “수준 높은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마일(SMILE)’은 어떤 프로젝트인가요? ‘Stanford Mobile Inquiry-based Learning Environment’의 약자예요.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 프로그램인데요. 아이들이 직접 질문을 만들고, 공유하고, 풀어보고, 질문을 서로 평가하고, 수정하는 과정으로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산수 문제를 만들라’고 과제를 줍니다. 그러면 각자 질문을 만들어 기기에 입력해요. 학생이 30명이면 질문 30개가 생기죠. 아이들은 서로의 질문에 답을 찾은 뒤 질문을 평가합니다. 이 친구 질문은 5점, 저 친구 질문은 3점 이런 식으로요.    스마일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탄자이나 학생들. 아이들이 폴 김 부학장이 개발한 '스마일 플러그'라는 기기를 이용해 질문을 공유, 평가하고 있다. [폴 김 교수 제공] 질문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나요?   얼마나 새로운 생각을 떠오르게 하였느냐에 달렸어요. 좋은 질문을 구별하려면 우선 미국의 교육 심리학자 벤자민 블룸의 사고 체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블룸은 우리의 사고 과정을 기억→이해→응용→분석→평가→창조 단계로 나눴어요. 이에 근거해 질문의 수준도 나뉩니다. 암기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은 가장 낮은 수준이에요. 흔히 단답형이라고 부르죠. 그다음 2단계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 3단계는 새로운 지식이나 환경을 적용해 생각하게 하는 질문, 4단계는 또 다른 범주의 개념과 비교 분석해 차이점을 찾게 하는 질문, 5단계는 주어진 정보를 기준으로 어떤 현상을 평가하게 하는 질문으로 구분하죠.   그럼 마지막 최상위 질문은 어떤 질문인가요?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는 질문이에요. 예를 들어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구인가?’가 1단계 하위 질문이라면 ‘새 대통령의 임기 5년 뒤 한국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는 최상위 질문입니다. SMILE 프로젝트가 추구한 건 스스로 문제점을 찾아 질문을 끌어내고 그 질문에 대한 해결책과 방안을 생각하게 하는 거였어요. 실제 에티오피아에서 이 수업을 6개월 동안 해봤더니 아이들의 질문이 점점 향상돼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해는?’이라는 단답형 질문을 하던 아이가 6개월 뒤 ‘에티오피아 여성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만들어요. 주어진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던 아이가, 정보를 이해·응용·분석·평가해서 창조하는 단계에 다다른 거예요.      수준 높은 질문을 하기까지 어떤 연습을 한 건가요?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질문을 까다롭게 만드는 거예요. 예를 들어 SMILE 프로젝트에서는 주로 객관식 선택형 질문을 만들라고 했는데요. 선택지를 만들 때 단답형의 확실한 답이 아니라 복수의 답을 만들게 했어요. 답인 것 같으면서 답이 아니고, 답이 아니지만, 답 같은 것들을 선택지로 넣으라 했죠. 질문과 답을 자꾸 유추하다 보면 주어진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되거든요. 비교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과정을 거치는 거예요. 무엇보다 그 안에서 개념과 개념을 연결하는 능력도 자라고요. 코스타리카에서 모바일 교육 중인 폴 김 스텐퍼드대 교육대학원 부학장. [사진=한빛비즈]   연결성이요? 조합을 통해 새로운 걸 창조하는 거예요. 질문하는 훈련이 되어 있으면 유연한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에 연결성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면 어떻게 될까’이런 식으로요. 더 나아가 새로운 직업도 만들어 낼 수 있는데요. 역량 하나를 'n'이라고 해볼게요. 배움을 통해 두 가지 n을 섭렵했다고 해서 2n이 되는 게 아니에요. n 제곱이 돼요. 역량끼리 연결되면서 시너지를 내는 거예요. 결국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은 4차산업시대의 핵심이 될 거예요. 미래에는 현재의 직업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계속 생겨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때 질문하고, 조합할 줄 알면 미래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핵심 역량을 갖추게 되는 거죠.    ━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해라     창의적 질문을 할 줄 알면 연결할 줄 알고, 연결할 줄 알아야 창조와 혁신할 수 있다는 것이 폴 김 교수의 주장이다. 하지만 모든 건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다. 수준 높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질문하는 습관부터 형성해야 한다. 폴 김 교수는 “어려워할 것 없다”고 했다. 그저 “부모부터 질문에 익숙해지라”고 했다.     질문은커녕 어떻게 답해줘야 할지 막막한 게 사실이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정답을 말해야한다는 부담부터 내려놓으세요. 아이가 “하늘은 왜 파란색이야?”라고 물으면 대답하지 마세요. 아이에게 되물으세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라고요.   그다음은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주고받는 겁니다. 아이의 질문에 계속 질문으로 답해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코칭’입니다. 아이의 질문에 과학적 지식으로 답해주는 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티칭’이에요. 정보를 주입하는 거죠. 질문을 던지는 건 생각을 유도하는 거예요. 잘 가르치는 교사는 질문도,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같이 생각해 볼까?”가 전부예요. 학생이 묻고, 학생이 답하고, 학생이 서로 평가하게 ‘브레인스토밍 파트너’가 되어 주면 됩니다. 폴 김 교수가 탄자니아에서 '스마일 프로젝트' 수업을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16년 유엔 미래교육혁신기술로 선정됐다. [사진=한빛비즈]   하지만 막상 아이가 질문을 던지면 막막해요. 빨리 답을 줘야 할 것 같아요. 질문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질문 잘 안 했잖아요. 그저 대학 하나만 바라보며 외우기 급급했죠. 그 틀을 깨야 해요. 질문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한 세 가지 게임을 제안할게요. ‘업앤다운(Up&Down)’, ‘왜냐하면(Because)’, ‘만약에(IF)’ 게임이에요. 업앤다운 게임부터 설명하죠.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아이가 먼저 올라가거나 늘어나는 상황을 이야기 하면, 부모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내려가거나 줄어드는 상황을 제시하는 거예요. ‘성적이 올랐다 → 공부하라는 소리가 줄어든다 → 내(아이) 기분은 좋아진다 → 엄마의 걱정은 줄어든다’, 이런 식으로요. 다음은 ‘왜냐하면(Because)’ 게임이에요. 앞사람이 한 말에 대한 근거를 뒷사람이 말하는 거예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어 → 왜냐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위협적으로 느껴서야 → 왜냐하면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의 유럽 내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이야 → 왜냐하면 입지가 줄어들면~’, 이런 식으로요.    ‘만약에(IF)’ 게임은 뭔가요?  말 그대로 상상이에요. ‘만약에 학교에 못 간다면 어떨까? → 친구들이 보고 싶을 거야 → 만약에 친구들을 영영 못 만난다면 어떨까? → 외로울 거야 → 만약에 외롭지 않으려고 매일 채팅만 하면 어떨까?’. 이렇게 질문하기 시작하면 주제를 분석할 시간이 많아져요. 분석적 사고는 창의적인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수준 높은 질문도 수월해지고요. 이런 게임을 통해서 아이들이 생각을 이어가고, 끊임없이 묻게 하는 액셀러레이터가 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 건 부모도 아이와 함께 똑같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라는 겁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질문, 성찰 질문을요. 관련기사 방이 돼지우리니? 이 말 나올 상황에 부모가 대신 해야할 말   성찰 질문이요? 부모 스스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 항상 체크하셔야 해요. 아이를 키우는데 완벽한 조건과 환경은 없습니다. 돈과 명예도 관련이 없고요. 그렇다면 아이의 성장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부장적이지는 않은지, 아이 스케줄을 쥐락펴락하는 헬리콥터 맘은 아닌지, 아이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판단할 기회를 줬는지 등등 자신에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내가 어떤 성향의 부모인지 그걸 관찰하지 않고서는 아이를 코치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는 아이든, 어른이든 ‘내가 올바른 위치에 있느냐(Am I at the right place)’를 되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지금보다 한발 더 나아가 배우고 성장하겠다는 목표와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폴 김 교수는 “아이가 질문이 많다면 복 받은 거고, 황당한 질문을 한다면 아이한테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질문은 귀하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부모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약에 앞으로 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시간이 딱 3년뿐이라면, 무엇을 가르칠 건가요? 내 아이만의 엄청난 역량 3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경험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게 할 건가요?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 아이의 질문 일기를 써보세요. 오늘 하루 아이가 무슨 질문을, 몇 개 했는지 기록하는 겁니다. 질문을 보면 아이의 관심과 생각의 패턴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속에 숨어 있는 아이의 역량을 관찰해 키워주세요.  · 수준 높은 질문을 유도해 주세요. 학습 후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보게 하세요. 정보를 확인하는 수준의 하위 질문보다 혁신적이고, 창의적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위 질문이면 좋습니다. 생각을 유추하게 하는 질문을 만들다보면 아이의 사고도 유연해집니다.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해주세요. 부모도 질문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아이의 질문에 답하지 말고, 똑같이 질문으로 받아치세요. 질문 습관을 들이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질문 게임을 추천합니다.   」 관련기사 사실도 아닌 신화, 왜 읽혀야 하나…네 아이 키운 서울대 교수 답 "학교 관두기 전 체크해야 할 3가지는?"…자퇴생 출신 홈스쿨링 전문가의 조언 “메타인지 키우고 싶다면, 채점 해주지 마라” 리사 손 버나드대 교수이민정기자lee.minjung2@joongang.co.kr

    2022.06.07 06:00

  • “책 많이 읽으면 수학 잘한다? 천만에요” 독서·글쓰기 오해 셋

    “책 많이 읽으면 수학 잘한다? 천만에요” 독서·글쓰기 오해 셋 유료 전용

    책 많이 읽으면 공부 잘할까요? 글쎄요. 그런 아이도 있죠. 하지만 책이라면 학을 떼게 되는 아이도 있어요. 그럼 공부에서 손을 놓아 버리죠.   지난 11일 만난 박민근독서치료연구소 박민근 소장은 "읽는 양에 집착하는 독서 교육은 절대 안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음식도 소화할 수 있는 만큼 먹어야 하듯 책도 그렇다"며 "책을 소화할 수 있으려면 좋아하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그는 이걸 '독서애호감'이라고 불렀다.     박민근 소장은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독서 치료를 공부한,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심리상담가다. 그가 주로 상담하는 이들은 학습 과정에서 상처를 얻어 마음을 닫아버린 학생들이다. 공부를 잘해도 '공부상처'가 있다. 점수 중심의 과열 경쟁으로 90점 맞은 아이도 100점 받은 아이를 보며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그는 “잘못된 독서 교육도 공부 상처를 만든다”며 “독서에 대한 오해가 잘못된 독서 교육을 부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양육자들이 가진 독서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뭘까?    박민근 소장은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좋아하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아무리 읽어도 좋아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제대로 읽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상선 기자  ━  오해 ① 많이 읽으면 공부 잘한다   박민근 소장이 꼽은 가장 보편적이고 흔한 오해는 ‘많이 읽으면 공부 잘한다’는 믿음이다. 2018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공부머리 독서법』의 주장이기도 하다. 이 책은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렇지 않지만, 중학교 이후엔 독서와 학습 간의 상관관계가 뚜렷해진다”며 “공부를 잘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민근 소장은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라며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책을 좋아하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책을 많이 읽으면 공부를 잘하는 것 아닌가요? 지식이라는 게 문자로 정리되고 축적되니까요. 책을 ‘진짜로’ 읽는다면 그렇죠. 그런데 억지로 읽게 하는데, 아이들이 진짜로 읽을까요? 말을 우물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요. 물도 떠줄 수 있고요. 하지만 물을 마시는 건 대신해줄 수 없죠. 책도 마찬가지예요. 책을 아무리 쌓아놓고 읽혀도, 아이가 읽는 시늉만 한다면 소용없어요. 특히, 입학도 안 한 아이에게 하루 30분 이상 책을 읽게 하는 건 아동학대입니다. 효과도 없고요. 어릴수록 신체 활동을 하고, 친구를 만나서 노는 게 책보다 뇌에 더 많은 자극을 주거든요.   책 읽기에 앞서 책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건가요? 그래야 스스로 읽으니까요. 읽는다는 건 굉장히 적극적인 행위에요. 문자, 텍스트는 암호잖아요. 1단계는 문자를 읽고 소리와 매칭하는 디코딩입니다. 말 그대로 읽는 거죠. 2단계는 읽은 내용이 무슨 뜻인지 의미를 이해하는 겁니다. 어릴수록 디코딩에 에너지를 많이 쏟기 때문에 ‘읽기’라는 행위가 어렵습니다. 많이 읽으면 디코딩에 쓰는 에너지가 줄면서 해석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되죠.   디코딩, 그러니까 문자를 읽는 걸 수월하게 하고 해석에 에너지를 더 많이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훈련이 필요합니다. 영법을 배운다고 바로 수영을 잘하는 게 아니듯 한글, 문자를 배운다고 읽기를 바로 잘하는 건 아니거든요. 읽기 훈련을 견디려면 책 읽는 게 즐거워야죠.   말씀하신 대로, 읽는 것에 숙달되려면 훈련이 필요하잖아요. 많이 읽게 하는 건 훈련의 과정 아닐까요? 『책 읽는 뇌』, 『다시 책으로』를 쓴 인지 신경학자 매리언 울프에 따르면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능력은 깊이 읽기 능력입니다. 깊이 읽는 행위를 통해서 비판적 사고, 반성과 공감, 이해 등이 가능하죠. 그런데 우리는 훑어 읽기를 합니다. 대충 빠르게 읽는 거죠. 천천히 생각하면서 읽지 않고요. 디지털 매체가 우리 뇌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매리언 울프는 주장하는데요, 저는 읽는 양에 집착하는 교육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제대로 읽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매리언 울프가 말하는 깊이 읽기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읽어도 소용없어요. 부모들이 원하는 대로 공부 잘하는 아이로 만들 수 없죠.   그럼 깊이 읽기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요? 우리 뇌에 읽기를 관장하는 영역은 없어요. 8~9개의 영역이 발달하면서 연결되어 만들어진 능력이 읽기 능력이죠. 뇌의 이 영역들을 발달하게 하는 방법은 바로 자발적인 독서입니다. 자발적으로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을 좋아하면 됩니다. 책 읽기보다 좋아하는 게 먼저인 이유에요.   아이가 깊이 읽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비판적 사고와 반성, 공감과 이해 등이 깊이 읽기의 결과물입니다. 아이가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다양한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면 제대로 읽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박민근 소장이 독서에 관해 가장 바로 잡고 싶은 오해는 '많이 읽으면 공부 잘한다'는 믿음이다. 그는 "공부 잘한다는 걸 성적으로 좁게 해석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  오해 ② 읽다 보면 좋아하게 된다   두 번째 오해는 “읽다 보면 좋아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박민근 소장은 “읽다 보면 좋아하게 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걸 찾아야 읽게 된다”고 말했다. 아이가 자신의 독서 취향을 발견할 수 있도록 양육자가 도와줘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책을 읽게 하는 것보다 좋아하게 하는 게 먼저라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하면 아이가 책을 좋아하게 될까요? 상담을 해보면, ‘많이 읽으면 좋아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아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발견하도록 도와줘야 해요. 좋아하면 많이 읽게 되는 거지, 많이 읽는다고 좋아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좋아하는 책을 발견하게 해준다고요? 누구에게나 취향이 있잖아요. 옷도 그렇고, 음식도 그렇고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향적인 아이와 외향적인 아이가 좋아하는 책이 다릅니다. 감성적인 아이와 지성적인 아이의 책 취향이 다르고요. 아이의 성격을 파악하는 게 먼저입니다. 감성적인 아이는 관계에 몰입하고, 그래서 놀이도 인형놀이 같은 걸 하죠. 이런 아이는 이야기책을 거쳐 『제인 에어』 같은 명작 소설로 갈 겁니다. 지성적인 아이들은 좀 다르죠. 사물에 관련된 백과사전식 책을 좋아할 거예요. 체계화 지능이 높은 친구들이 그렇죠.   아이에게 맞을 법한 책을 권하면서 좋아하는 책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게 하다 보면 ‘홈런북’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홈런북’은 『하루 15분 책 읽어주기의 힘』을 쓴 짐 트렐리즈가 제시한 개념이에요. 일종의 애착책입니다. 이런 책은 아이가 반복해서 읽을 거예요. 10번이고 20번이고 계속요. 홈런북이 변곡점입니다. 이제 아이는 자발적인 독서가가 될 수 있는 상태가 된 거죠. 아이가 홈런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해요. 책을 무작정 많이 읽으라고 할 게 아니라요.   소장님이 쓰신 『시냅스 독서법』을 보면 책 읽기에서 시작해 공부법으로 이어집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공부를 다 잘하는 건 아니라고 하셨는데 말이죠. 책을 많이 읽는다고 모든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에요. “책을 많이 읽으면 수학을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믿지 마세요. 거짓말이니까요. 수학을 잘하려면 수학 공부해야 해요.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 공부해야 하고요. 게다가 공부 잘한다는 의미를 대입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거로 좁게 해석한다면, 독서와 공부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말하기 더 어렵습니다. 스무 살까지의 학습 성과에는 부모의 경제력, 출신 학교, 아이의 성격 등 너무 많은 요소가 영향을 미치거든요. 하지만 마흔 이후의 학습 성과를 놓고 보면 독서가 확실히 영향을 미칩니다. 독서가 결국은 공부하는 태도와 방법을 익히게 한다는 점에서,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만든다는 얘깁니다.   책을 제대로, 많이 읽으면 공부하는 태도와 방법을 익히게 된다고요?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특정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물론 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부차적인 효과입니다. 독서가 학습에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바로 몰입 경험입니다. 독서를 통해 몰입을 훈련하는 것이죠. 여기에 더해 독서가 학습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기제는 바로 동기부여입니다.   책을 읽는 행위가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를 해준다는 건가요? 독서치료가 심리상담에서 중요하게 활용되는 이유는 책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책 속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하고요. 물론 그러려면 좋은 책을 읽어야겠죠. 학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통해 공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얘기에요.   책을 읽으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독서 교육 때문에 상담 오는 분들께 권하는 게 있어요.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명작을 읽게 하라는 겁니다. 『제인 에어』 나  『빨간 머리 앤』, 『데미안』 같은 고전이요. 이런 책들의 주인공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노력하고 공부합니다. 처참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공부를 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죠. ‘공부는 중요하다’고 말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자기 시스템(self-system)이 작동합니다. 어떤 걸 할지 말지 결정하는 시스템이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으로 인지하면, 그때부터는 하라고 말 안 해도 합니다. 아주 강한 동기부여가 이뤄진 셈이죠. 많은 분이 아이가 공부를 잘하려면 메타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데요, 메타인지는 자기 시스템이 작동한 다음에 필요합니다. 메타인지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 시스템이죠.   박민근 소장은 "양육자들이 독서와 관련해 꼭 해야 할 일은 홈런북을 찾아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이가 반복해서 읽는 애착책을 찾는 게 수준 높은 독서가가 되는 데 변곡점이라는 것이다. 김상선 기자  ━  오해 ③ 글쓰기는 테크닉이다   박민근 소장이 최근 양육자 사이에서 독서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글쓰기에 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했다. 그가 『시냅스 독서법』에 이어 『시냅스 초등 글쓰기』를 저술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민근 소장은 “글쓰기에 관한 오해 중 가장 보편적인 건 ‘글쓰기는 테크닉’이라는 믿음”이라고 말했다.   글쓰기는 주제,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할지 결정하고, 그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논리적은 구조를 짜는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어느 정도 테크닉이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중급자 이상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글을 쓸 때는 그 말이 맞아요. 글을 어떻게 구성할지, 주제는 어느 위치에 놓아야 할지, 논거는 어떻게 제시하는 게 좋은지 같은 기술적인 게 필요하죠. 하지만 글을 처음 쓰는 아이들에게는 그것부터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그럼 아이들에겐 무엇부터 가르쳐야 하나요? 상담하러 오는 분들께 자주 하는 질문이 있는데요, 그 질문을 드려볼게요. 아이들이 왜 글을 써야 할까요?   ‘4차산업 혁명’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읽기만큼이나 쓰기가 중요하다는 흐름이 생긴 것 같아요. 5개 선택지 중에 하나의 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열린 문제를 보고 답을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하는 듯해요. 문해력의 시대가 아니라 문장력의 시대라고 하죠. 앞으로는 읽기보다 쓰기가 중요할 겁니다. 심리학 분야 석학으로 불리는 로버트 스턴버그는 미래를 지배하는 성공 지능으로 창의성과 실용지능을 꼽았어요. 창조적이며 실생활에 접목할 수 있는 지능이 필요하다는 거죠. 창의성은 수렴적 사고와 확산적 사고 두 가지가 모두 발달해야 꽃을 피울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 아이들이 부족한 게 바로 확산적 사고입니다.   수렴적 사고와 확산적 사고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세요. 글쓰기와의 상관관계도 궁금합니다. 수렴적 사고는 주어진 자료를 분석하고 추리해서 정답을 찾는 겁니다. 확산적 사고는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사고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고요. 우리나라 교육은 전자에 강한 인재를 만듭니다. 반면 후자엔 취약고요.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수렴적 글쓰기와 확산적 글쓰기가 있는데요, 수렴적 글쓰기에는 기술이 필요해요. 저는 이건 고등학교 가서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15세까지는 확산적 글쓰기를 충분히 해야 해요.   확산적 글쓰기는 어떤 건가요? 아이가 아끼는 장난감이나 인형에 이름을 지어주는 이름 짓기, 그림책 만들기, 편지 쓰기, 문집 만들기, 끝말잇기 같은 게 다 확산적 글쓰기입니다. 형식이나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아이가 그림 그리듯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하죠.   확산적 글쓰기로 추천하는 활동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제가 글쓰기 1단계에서 가장 많이 추천하는 활동이 감사 일기와 감사 편지에요. 감사 일기는 매일 감사한 것 3가지를 쓰는 겁니다. 감사 편지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는 것이고요.   감사 일기와 감사 편지가 확산적 사고에 어떻게 도움이 되나요? 창의성의 밑바탕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입니다. 이게 높은 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창의적이죠. 낙관성을 키우는 글쓰기부터 시작하는 건 그래서예요. 자기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성공 노하우를 담은 책 『타이탄의 도구들』을 보면, 그들 역시 감사 일기를 썼어요. 자기 긍정, 낙관성이 성공에 있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죠. 글쓰기의 첫 단계는 바로 이걸 키우는 겁니다. 테크닉을 배우는 게 아니고요.   박민근 소장은 글쓰기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독서만큼 글쓰기에 대한 오해가 많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바로 잡고 싶은 오해는 '글쓰기는 테크닉'이라는 믿음이었다. 김상선 기자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박민근 소장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발췌했다며 문장 하나를 보여줬다.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요. 언젠가 그것은 완전히 당신 것이 될 겁니다. 당신이 꿈꾼 대로요. 당신이 변함없이 충실하면요.’   “좋은 책을 만난다는 건 이런 겁니다. 운명은 네 편이라고, 그러니까 충실하라고 말해주는 인생의 멘토를 만나는 것 같은요. 멘토가 우리 옆집에 살 확률은 낮잖아요. 하지만 우리집 책장에 늘 있을 순 있죠. 아이가 홈런북을 넘어 인생책을 만나도록 도와주세요!”   ■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 많이 읽는다고 공부 잘하게 된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대충 훑어 읽는 게 아니라 몰입해서 깊이 읽어야죠. 그러려면 스스로 읽어야 합니다. 책을 좋아해야 스스로 읽을 수 있고요. · 읽다 보면 좋아하게 된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좋아하는 걸 찾아야 읽습니다. 책 읽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양육자가 해야 하는 일은 '홈런북'을 찾아주는 일이죠. 아이의 성향에 맞는 책을 추천하면서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세요.   · 글쓰기는 테크닉이다? 중급자라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글을 막 쓰기 시작하는 아이에겐 해당하지 않는 얘기죠. 형식이나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아이가 그림 그리듯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게 해주세요. 」 관련기사 사실도 아닌 신화, 왜 읽혀야 하나…네 아이 키운 서울대 교수 답 “독서나무와 체크리스트, 2가지면 끝” 성효쌤의 특급 독서전략 [오밥뉴스]"코로나 이후 한 반에 20% 읽기 어려워 해"… 내 아이의 문해력 수준은정선언 기자 jung.sunean@joongang.co.kr

    2022.05.17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