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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남의 부인 가슴 훔쳐본다고 욕먹기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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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부부가 급하게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부인이 심한 가슴 통증을 호소해서다. 당시 응급실에 있던 오경헌(남·당시 24세) 간호사는 긴급하게 방사선사를 호출하고, 부인을 엑스레이 촬영실로 옮겼다. 문제는 그곳에서 발생했다. 흉부 엑스레이 촬영 과정 중, 가슴을 가리는 포가 들려서 부인의 가슴이 노출된 것이다. 현장에 있던 남편은 펄쩍 뛰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당신 뭔데 남의 부인 가슴을 들추고 그래?” 남편은 큰 소리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간호사 초년생인 그는 당황했다. 하지만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간 없이, 바로 다음 검사로 넘어가야했다. 다음은 심전도 검사. 심전도 측정용 전극을 붙이려면 가슴 노출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오 간호사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의 속도 모르는 환자 남편의 항의는 더욱 거세져만 갔다.

이는 20년 전 얘기다. 현재 남자간호사회 창립준비위원장인 오경헌(44세) 간호사는 “남자간호사를 의료진이 아닌 ‘남자’로 인식해서 생긴, 웃지 못 할 에피소드”라며 그 날을 떠올렸다. 그 시절, 남자간호사는 금남(禁男)의 영역에 들어 선, 이방인과 같은 존재와도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남자간호사 5천명 시대가 열렸다. 간호사라는 직종에서 금남의 벽이 무너진 지 오래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현재 남자간호사 수는 총 5183명. 전체 간호사 29만 5633명 중 1.8%를 차지한다. 특히 최근 5년 사이 남자간호사가 급증했다. 이 기간에 면허를 취득한 남자간호사는 전체(남자간호사)의 68%인 3500여 명에 달한다. 이렇게 금남의 벽을 허문 그들, 남자간호사를 만나봤다

남자간호사 앞에 ‘최초’, ‘유일’이라는 단어가 붙던 그 시절
서울대병원 소아수술실에는 남자 수간호사가 있다. 바로 김장언(54세) 수간호사다. 그는 서울대병원 ‘최초의 남자간호사’이기도 하다. 1994년부터 유일한 남자 수간호사로서 자리를 지켜왔는데, 지난 5월 후배(남자) 간호사가 진급하면서 남자 수간호사는 두 명으로 늘었다.

▲ 간호사 경력 29년차인 김장언 수간호사는 서울대병원 '최초의 남자간호사'다.

“앞이 훤히 보이는 뻔한 삶은 싫었어요.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삶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이러한 생각으로 1979년 간호학과를 지원했다. 앞서 1977년 서울대 간호학과에 최초로 남학생이 입학해 큰 화제가 됐었다(그는 2학년 때 그만뒀다). 하지만 가족들의 반대는 매우 거셌다. 특히 형은 왜 하필 간호학과냐며 극구 말렸다. 당시 형은 서울대 최고 인기학과였던 토목공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삶, 낯선 길을 향한 그의 도전정신과 호기심을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그는 “간호사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다. 그냥 평이한 삶을 살기 싫었을 뿐”이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그리고 그는 29년 째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다.

현재 서울대병원의 2200여명의 간호사 중 30명이 남자다. 1984년 ‘최초의 남자간호사’가 등장한 이래, 29년 만에 이만큼 늘었다. 김장언 수간호사는 “나 때는 남자간호사와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최초’였다. 미운오리새끼 한 마리가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후배들은 이끌어주는 남자간호사 선배들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라며 후배들에 대한 부러움을 전했다.

남자간호사회 창립준비위원장인 오경헌 간호사는 대학 입학 후, 한동안 강의실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88학번으로 간호학과에 입학 했을 당시, 120명의 동기들 가운데 남학생은 그가 유일했다. 가뜩이나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어서, 여자들만 가득한 강의실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선배가 억지로 손을 붙들고 강의실에 데려다 준 후에야,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의정부 성모병원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그곳에서도 ‘유일한 존재’로 통했다. 최초의 남자간호사였던 것. 그는 “병동 안에 옷 갈아입을 공간이 없어, 다른 직종의 남자들과 탈의실을 함께 사용했다. 병원 간호사회 회칙에도 경조사비 지급대상이 남자는 해당사항이 없는 ‘시부모’, ‘친정부모’로 돼있었다. 철저히 여성중심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 당시에는 환자들도 남자간호사에 대해 익숙지 않았다. 오 간호사는 “특히 젊은 여성환자들은 남자간호사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며 “남자의사는 산부인과 진료도 가능했던 반면, 남자간호사는 힘을 필요로 하는 정신과·응급실·중환자실·수술실 같은 곳의 업무에만 국한됐다”고 말했다.

남자간호사, 더 이상 ‘희귀 존재’ 아니야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남자간호사는 더 이상 ‘최초’,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희귀한 존재가 아니다. 현재 강남세브란스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 등 몇몇 종합병원에는 30명이 넘는 남자간호사가 근무하고 있다. 특히 강남세브란스는 지난 2009년 국내 처음으로 남자간호사를 정신과·수술실 등이 아닌, 일반병동에도 배치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응급진료센터 김명신 파트장은 “여자에 비해 남자간호사는 초반에 업무 속도가 더딘 편이지만, 익숙해지면 남녀 간의 업무 차이는 거의 없다”며 “남자간호사는 직업의식이 투철하고 업무에 임하는 태도가 진지하다”고 말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근무하는 이병헌(33세·경력 7년차) 간호사는 “남자간호사의 희소성이 많이 떨어졌다. 희소성만 보고 간호사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며 “그래도 여자에 비하면 소수이다 보니, 남자간호사의 모든 행동에 시선이 집중된다. 잘하면 다행이지만, 못하면 그만큼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앞의 선배들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가족의 추천으로 간호학과를 선택한 것. 그는 “간호사인 누나가 남자간호사의 비전과 역할에 대해 말해줘서 관심을 갖게 됐다.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간호학과를 선택하게 된 큰 이유”라고 말했다. 그 역시 ‘간호사=여성 직업’이라는 편견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전문적·독립적인 직종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의료진보다 환자들과 대면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의사들이 지나치는 부분을 보완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 환자의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폭력·난동에 쉽게 노출되는 응급실에서 남자간호사는 무엇보다 든든한 존재다. 이병헌 간호사는 응급실에서의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한번은 술 취한 환자가 유리에 의해 팔뚝 동맥이 끊어진 상태로 응급실에 온 적이 있다. 그는 자신부터 치료해달라며 응급실 문을 걷어차고 행패를 부렸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팔뚝을 일부러 응급실 곳곳에 들이대 응급실 전체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안전요원이 진압하는 사이, 이 간호사는 바로 환자에게 주사를 놓고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소란을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에서다. 여자간호사가 상대하다가 봉변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병동 생활 6개월째에 접어드는 새내기 간호사 박종현 씨는 "이 직업을 선택한 것에 대해 한치의 후회도 없다"고 말했다.

같은 병원 척추병동에 있는 박종현(26세) 간호사는 올해 2월에 졸업해 이제 간호사 생활 6개월째인 신참내기다. 아직까지 간호사가 된 게 마냥 좋다. 그는 “생각보다 일의 강도가 세고, 늘 섬세하게 신경 써야 한다. 삼교대에 적응하기도 힘들다”며 “그래도 여전히 간호사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직업도 안정적이고 또래보다 수익도 괜찮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간호업무를 ‘사랑한다’고 표현했다.

박 간호사는 50, 60대 어머니뻘 되는 환자나 보호자들에게 예쁨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는 “아들처럼 생각하고 여자간호사한테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대하시는 분들이 많다”며 “이럴 땐 남자여서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척추병동이다 보니, 남자간호사의 힘이 필요할 때가 많다. 허리수술로 보조기를 착용한 환자가 침대에서 일어날 때다. 이럴 때 환자들은 박 간호사를 찾는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순간도 있다. 소변줄을 빼야 하는 환자들이 남자간호사는 부담스럽다며 거절할 때다. 응급실에 있는 이병헌 간호사도 마찬가지다. 이 간호사는 “환자가 담당간호사를 거절하면, 다른 업무를 하고 있는 간호사에게 부탁을 해야 해서, 그만큼 검사과정, 결과가 모두 지체 된다”며 “우리에게 환자는 남녀가 아닌, 오직 환자일 뿐이다. 환자도 남자간호사를 남자가 아닌, 의료진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자간호사, 여성중심의 집단에서 적응하기가 가장 힘들어”
다수의 여성이 중심인 집단에서 소수의 남자가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이병헌 간호사는 “여자들의 마음을 좀처럼 헤아리기 힘들다”며 “어쩔 땐 굉장히 친하게 느껴지다가도, 뒤돌아보면 안 친한 것처럼 생각된다. 속마음이 헷갈릴 때가 많다”고 말했다. 동료를 대할 때가 가장 조심스럽다는 것.

삼성서울병원 비뇨기과 안희원(남·32세·경력 8년) 간호사는 여성 중심의 집단에 적응하기 위해 이 같은 방법을 선택했다. ‘나는 남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버린 것이다. 그는 “나 자신을 버린 순간부터 여자들의 문화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지금은 특별히 어려운 게 없다”며 “후배들에게도 늘 너 자신을 버리고 시작하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황정현(남·27세·경력 1년) 간호사는 동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 속 모르는 친구들은 ‘부럽다’는 소리를 자주 한다. 여자들 틈에서 혼자 일하는 게 좋겠다는 시샘 섞인 소리다. 그는 “가끔 퇴근 후 편하게 맥주 한 잔 하고 집에 가고 싶은데, 여자 동기와는 동성친구처럼 그러기가 쉽지 않다. 일대일로 만나면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아무래도 남자가 상대적으로 주목받기 때문에, 일을 제대로 못하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기 쉽다”며 “그런 텃세를 못 이겨, 간호사를 그만두는 남자들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대개 남자간호사들은 비슷한 또래·동성의 인턴·레지던트와 돈독한 관계를 쌓아간다. 황정현 간호사는 “친해진 인턴 가운데 일부는 나중에 우리 과에 주치의가 돼서 오기도 한다”며 “서로 존중해주며 좋은 의사-간호사 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그 속에서 황 간호사는 남자간호사의 역할을 찾았다. 바로 의사-간호사와의 관계에서 ‘중간 대변자’의 역할이다. 그는 “만약 남자 의사와 여자 간호사 사이에서 갈등이 생긴다면, 남자 간호사는 양쪽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므로 제대로 된 중계자의 역할이 가능하다”며 “가끔 간호사를 함부로 대하는 의사들이 있는데, 그럴 땐 남자간호사가 나서 보호막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 중심의 병원 시스템도 남자간호사가 겪는 불편 중의 하나다. 익명을 요구한 한 남자간호사는 “남자 탈의실조차 없어서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병원도 있다”며 “생리휴가·육아휴직·출산휴가 등 여성들을 위한 복지는 철저하지만, 정작 남성은 예비군 훈련 일정이 나오면 눈치 보며 다른 사람과 근무 시간을 바꾸기 일쑤”라고 말했다. 남자간호사들은 증가하고 있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병원 시스템이나 체계는 아직 미흡한 실정이라는 것이다.

▲ 삼성서울병원 안희원 간호사는 "자신이 남자라는 생각을 버리면 여성중심의 집단에 적응하기 쉽다"고 말했다.


국내1호 남자간호사 면허 받은 날, ‘대한남자간호사회’ 창립

이처럼 병원 내에서 남자간호사의 역할은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남자간호사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단체는 없었다. 병원 안팎에서 남자간호사들끼리 사적으로 모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내년, 남자간호사의 권익을 위한 ‘대한남자간호사회(가칭)’가 창립될 예정이다. 창립준비위원장인 오경헌 간호사는 “소방공무원, 응급구조사, 건강보험공단, 교도소 내 보호감찰, 노인·장애인 영역 등 남자간호사가 진출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다양하다”며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알리고 이끌어줄만 한 창구가 없었다”고 남자간호사회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현재 매달 남자간호사회 창립 준비를 위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1호 남자간호사인 조상문씨가 면허받은 날(5월)을 남자간호사회 창립일로 정했다.

서울대병원 김장언 수간호사는 “현재 남자간호사는 5000명이 넘은 상태고, 간호학과 재학생은 8000여 명이다. 이렇게 늘어나는 남자간호사들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다. 남자간호사회는 그 구심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간호협회는 향후 남자간호사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 예측한다. 간호사라는 직업이 지니는 전문성과 안정성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간호사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신기한 존재가 되거나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삼성서울병원 안희원 간호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남자간호사가 이슈가 되고 있지만, 더 이상 간호사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녀 할 것 없이, 우리는 그저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같은 간호사일 뿐이다.”

오경아 기자 okafm@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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