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서 사랑스런 그녀 '르네 젤웨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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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 우리가 르네 젤위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그녀는 노처녀(69년생, 32세)에 아직 싱글이다. 우리와 처지가 비숫하거나 적어도 질투심을 유발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매력이 넘친다. 둘째, 키 167cm 정도에 옷은 미국식으로 2 정도의 사이즈를 입는다고 하니 별로 거부감도 주지 않는 체구다. 셋째, 그녀에게는 할리우드의 여자 스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세련됨이나 섹시함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아가씨처럼 꾸밈없는 태도와 소박한 옷 차림새가 그렇다. 황금빛 머리카락은 태양이 키스한 것처럼 반짝거리고 유난히 고른 치아는 웃을 때마다 하얗게 빛난다. 여자들의 경쟁심리를 자극하거나 남자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서도 여자와 남자에게 다같이 인기있는 ‘사랑스러운’ 타입이다. 넷째, 무엇보다 ‘배우’로서 연기를 잘 해낸다. <오만과 편견>을 약간 엉뚱하게 각색한 듯한 헬렌 필딩의 소설을 텍스트로 만든 영화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가 그 증거다.


음에는 미국인 배우, 그것도 텍사스 출신이 ‘브리짓 존스’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 언론들의 시니컬한 반응이 꼬리를 물었다(물론 동명의 이 소설은 영국 소설이다). 특히 영국의 자부심인 중산층을 대변한다고 알려진 타블로이드판 신문들은 영국식 악센트가 할리우드 자본주의와 타협한 또 한 편의 그렇고 그런 로맨틱 코미디가 등장할 거라며 한결같이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즐거워할 것이고, 그 사이로 언뜻 언뜻 비치는 날카로운 위트와 빼어난 리얼리티에 2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것이다. 사실 케이트 윈슬렛이나 헬레나 본햄 카터, 엘리자베스 헐리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만큼 르네 젤위거는 외형적으로나 내적으로 완벽하게 ‘브리짓’이 되어주었다. 영화 제목을 <르네 젤위거의 다이어리>로 바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 브리짓이 되기 위해 ‘뚱보’가 되다 ☞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는 보드카를 병째 마시고 편집증처럼 줄담배를 피워대는 노처녀 ‘브리짓’이 다이어트와 애인 만들기를 목표로 매일매일 칼로리와 흡연량, 남자 이야기를 적어두는 일기장을 관객이 함께 읽어나가는 영화다. 하지만 30대 독신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섹스 앤 더 시티>나 <앨리 맥빌>이 남자를 찾는 것 자체에 목표를 두었다면, <브리짓…>는 결혼과 섹스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선택을 강요당하는 30대 여성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브리짓이 벌이는 엉뚱하고 돌발적인 사태에 배꼽을 잡고 웃을 테지만, 그 웃음들 속에는 어김없이 뼈가 숨어 있다.


르네 젤위거는 우선 브리짓이 되기 위해 체중을 10파운드 이상 늘려야 했다. 다행히 촬영이 주로 밤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식욕이 왕성해지는 밤시간을 이용해 피자, 땅콩버터, 초콜릿 같은 것을 원없이(?) 먹어치웠다.
대본 속에서 브리짓의 체중이 계속 변했기 때문에, 좀 날씬해진 브리짓이 대본에 등장하면 그녀도 덩달아 살을 빼야했다. 15파운드까지 늘렸다가 다시 10파운드를 감량하기도 했다. 하지만 살을 찌우는 과정이 연기에는 도움이 됐다. 자신의 몸이나 옷이 불편하다고 느끼기 시작하자 브리짓이 왜 그토록 다이어트에 집착하고 불안해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배우가, 그것도 여자 배우가 뚱뚱한 몸매로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 ‘용기’를 보여준 건 촬영 첫날, 모두가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댈 영화의 압권 소방서 장면에서였다. 잡지사를 그만두고 TV 리포터로 일하게 된 브리짓이 소방용 장대에서 미끄러져 정확히 카메라 렌즈 위로 엉덩방아를 찧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위해 르네 젤위거는 20번이나 그것도 정확히 카메라 렌즈 위에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는데, 물론 스턴트맨의 엉덩이는 시용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몸 가릴 것을 찾으면서 ‘남자들은 모두 나가주세요!’라고 소리를 쳤을 텐데 그때는 ‘보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가 되어버렸어요.

남자 스태프들이 득실거리는 방을 반쯤 벗은 채로 왔다갔다 하는 건 정말 불편했고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어요. 저로서는 아주 큰 도전이었죠. 그 장면을 없앨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제가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몸에 대해 집착하는 브리짓의 성향을 솔직하게 표현하려면 생략해선 안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에 찍었던 영화들과는 달리 우스꽝스럽게 살찌운 몸매를 드러내는 건 정말 무모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과연 그녀가 이런 부분을 ‘용기’라고 생각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솔직하고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서 제작진을 만나기 전부터 바바라 버클리라는 개인 교사를 두고 영국식 방언 연습도 했다.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의 주인공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대충 흉내내기가 아니라 무엇이든 제대로 해야만 했다. 그녀의 영어는 영국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런던을 둘러싼 여러 주의 중상류층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노팅힐의 바들을 가득 메운 여자들이 쓰는 악센트’라는 공인을 얻었을 정도다. 요즈음은 ‘잠시만 기다리세요(Hang on)’ ‘훌륭해!(Brilliant)’ ‘멋져!(Lovely)’ 등 영국식 표현이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곤 한다.

캐스팅이 확정되고 나자 감독은 그녀에게 영국 피카도르 출판사에서 익명으로 일할 것을 제안했다. ‘브리짓’의 직업이 출판사의 홍보담당이었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14주 동안 배우가 아니라 출판사 직원으로 취직을 했고, 태어나 처음으로 대학 졸업장이라는 것도 이용해 보았다(그녀는 실제로 텍사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악센트는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브리짓과 르네는 점점 하나가 되어갔다. 언젠가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던 여자가 다가와서는 “<제리 맥과이어>에 나온 여자와 참 닮았네요”라며 신기하게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14주 동안의 위장 취업(?)이 끝나갈 무렵에는 다른 부서로부터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도 들어왔다. 르네 젤위거가 출판사에서 주로 한 일은 영화 관련 보도자료들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일이었는데(물론 그 중에는 그녀가 브리짓 역으로 캐스팅된 것을 문제삼고 비난하는 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영화처럼 일상도 사랑스러운 여자 ☞
브리짓과 르네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아마 결혼에 대한 강박관념이 아닐까. 브리짓은 친구들이 점잔을 빼면서 결혼식을 올리고 파티를 여는 동안 초조와 강박관념에 휩싸여 자신이 아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대는 인물이다. 하지만 르네 젤위거는 적어도 남자를 무릎 꿇게 하기 위하여 생의 전부를 거는 여자 같지는 않다.
“전 그런 여자는 아니에요. 가만히 앉아서 꿈꾸듯이 ‘아, 내가 결혼할 땐…’이라고 중얼거리는 여자들 말이에요. 게다가 전 아직 젊어요. 결혼이 당장의 목표는 아니죠. 아마 아흔아홉 살쯤 되면 그때서야 나의 그이를 찾게 되지 않을까요?”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럽게 대답은 하지만 그녀에게도 가슴 아픈 사랑의 상처가 있었다. 막 배우 일을 시작했을 무렵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가 자살을 한 것이다. 그의 남자친구 심스 엘리슨은 베이스를 연주하는 뮤지션이었다. 르네가 텍사스 출신의 동료 배우인 매튜 매커너히의 추천으로 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텍사스를 떠나야 했을 때, 심슨은 자신이 멤버로 활동 중인 헤비 메탈 밴드가 와해되고 여자친구마저 곁에 없게 되자 이를 비관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것이다.

어쨌거나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브리짓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르네 젤위거의 ‘브리짓’을 말이다. 단지 연기만을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자연스러움, 수줍음, 성실함까지도 다 포함해서…. 그녀는 밤샘 촬영이 있는 날 촬영장의 모든 스태프들을 위해 피자로 한턱을 내고, 화장기 없이 자신의 옷을 입고도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을 줄 알고, 오만한 체하거나 무례하게 굴지도 않는다.

그녀는 무엇이 좋아서 연기를 하는 걸까.
“하루하루 매일매일이 좋아요. 어떻게 나날들이 지나가는지, 그 하루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알고 싶어요.” 일상을 사랑할 줄 아는 서른둘의 르네 젤위거.

만약 <르네 젤위거의 일기>란 영화가 있다면 어떤 내용이 될까. “아마 너무 평범해서 지루할 거예요. 그런 영화는 있을 수도 없죠. 내 일기장은 아주 단단한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미안하지만 나만을 위한 기록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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