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1억 앞에 수절은 사치일까

중앙일보

입력

자녀 넷을 둔 결혼 10년차 부부인 영희(이미숙) 와 철수(전광렬) 에게 위기가 닥친다.

남편이 억울하게 직장을 잃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보증을 섰던 친구마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집을 날릴 판이다. 어떻게든 집이 넘어가는 것만은 막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영희에게 하룻밤 함께 지내면 1억원을 주겠다는 당혹스런 제의가 들어온다.

전윤수 감독의 데뷔작 '베사메무초' 는 느닷없이 닥친 시련 앞에서 방황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은밀한 유혹' (1993년) 의 한국판인 셈. 하지만 또랑또랑한 눈을 가진 네 아이를 위해 집을 지켜내야 한다고 믿는 우리네들의 절박함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상상 가능한 데서 출발한다. 심각한 위기를 맞기 전까지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이 그려질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영화 역시 이런 예감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침이면 좁은 화장실에 온 식구가 몰려들어 법석을 떨고, 저녁이면 거실에서 춤판을 벌이는 가족은 정겹고 따스하다. '우리는 식구야 식구' 라는 외침이 들리는 듯.

이미숙과 전광렬의 연기가 다소 도식적이지만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고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감칠맛 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흐뭇하게 느껴진다. 특히 이미숙은 슈퍼마켓에서 떨이로 나온 낙지 한 봉지를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날리며 달려드는 억척스런 아내 역을 질펀하게 소화해낸다.

그러나 하룻밤의 거래라는 도발적인 상황이 개입하면서 영화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은밀한 유혹' 에서도 보았듯, 비현실적인 설정을 실감 있게 풀어가기란 쉽지 않다. 영희가 거래를 앞두고 갈등하는 대목은 그렇다 치더라도 철수까지 또다른 여자와 비슷한 경우에 말려드는 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을 준다.

젊은이들을 위한 영화 일색인 가운데 오랜만에 30~40대를 겨냥한 영화란 점에선 반갑지만 얼마나 공감대를 끌어낼 지는 미지수다.

베사메무초는 '키스 미 머치' (Kiss me much) 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31일 개봉.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