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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굴레와 금줄을 훌쩍 넘어 솟구쳐 오르기

중앙일보

입력

김승희 교수(서강대 국문과·시인)는 ‘내 인생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다.

이런 그를 두고 어떤 이는 불의 여인, 언어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초현실주의 무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그만큼 그의 시에 편안하지 않은 시어들, 도전적인 이미지, 극단적 어조가 많이 등장한다는 말의 반증이다.

편안치 않은 이 시들은 가만히 보면 여성에 대한 굴레, 가부장적 사회가 강요하는 무덤에서 벗어나려는 시인의 욕망과 맞닿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교수가 올 여름 펴낸 새 책 『남자들은 모른다』(마음산책)의 페미니즘적 색채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니다.

돌발적인 제목에 담겨진 광기와 죽음의 이미지
펄쩍펄쩍 뛰어다닐 듯 돌발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은 국내외 여성 시인들의 시편 가운데, 페미니즘적 시각을 가장 극명하고 절절하게 드러낸 것만을 골라 시평과 함께 엮은 시선집이자 시평론집이다. 책장을 펼치면 최승자, 최영미, 김선우 등 한국 여성시인들과 에드리안 리치, 실비아 플라스 등 외국 여성시인들의 공포, 분노, 절규, 죽음, 광기 혹은 비아냥거림의 시어들이 섬뜩하게 배어 나온다.

“현실은 도무지 그렇지 않은데 세상은 자꾸 착한 시만을 권해요. 우리가 사는 이 곳은 얼마나 어지럽고 고통스러운가요. 그런 경험,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온갖 굴레, 분열의 고통들, 특히 여성이라는 생래적 이유로 덮여 씌워진 체험들을 묶어보고 싶었지요. 특히 여성시에는 이런 경험들이 적나라하게 담긴 경우가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뽑은 여성 시인들의 시를 다수의 입장에 편입되거나 수용되지 않는 소수문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스스로 ‘여성시에는 왜 이렇게 광기와 타나토스(죽음)가 많은 것일까?’라고 반문하며 그가 골라놓은 시는, 예컨대 이런 식이다.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37쪽, 실비아 플라스, 「아빠))

‘아버지의 딸’, ‘한 남자의 아내’, ‘아들을 낳은 여자’ 등 사회의 굴레에 대한 저항이 이 책의 전부를 채우는 것은 아니다. 최영미의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Personal Computer)) 같은 구절에서 김교수는 ‘인간이 곧 기계/유기체의 혼합물인 사이보그가 되는’(73쪽) 사이보그 선언문을 읽어내기도 하고, ‘어떤 여자들은 집과 결혼한다’로 시작하는 앤 섹스턴의 시 「가정주부」에서 ‘여성을 단순히 소유할 수 있는 재산’(54쪽)으로 보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지적하기도 한다. ‘여성적 글쓰기는 모든 고정된 의미에 의문을 던지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김교수의 단언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집착, 그건 아마도 내가 밟아온 인생편력에서 기인하는 걸 겁니다. 나는 여성시인이 단지 ‘꽃’으로만 치부되던 시절인 1973년에 등단했고, 그 후 문단과 평단의 편견에 맞서면서 글을 써왔습니다. 여자라는 편견은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10여 년 동안 시간 강사로 이리 저리 떠돌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겪는 온갖 불공정함, 불평등에 대해 곱씹을 수밖에 없었어요. 세상은 21세기지만, 여자들의 세상은 아직 19세기였던 겁니다.”

굴레에 저항하는 존재가 시인이다
소수문학, 비주류문학, 비애와 억울함, 광기가 묻어나는 문학, 그러나 결국 남자와 여자의 구분 없이 다 함께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문학. 이것이 그가 꿈꾸는 여성문학의 미래다. 김승희 교수는 이런 신념을 위해 대학에서 ‘여성과 문학’ 등의 강의를 계속하고 있으며, 요즘은 황진이 등 한국의 옛 기생들이 쓴 한시에서 페미니즘적 단서를 찾는 연구에 여념이 없다.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맞닥뜨리는 각종 이슈, 각종 차별을 외면하지 않고 능력껏 표현할 수 있는 자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시를 쓰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요. 운동가는 행동으로, 시인은 시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는 존재가 시인 아니던가요?”(이현희/리브로)


■ 남자들은 모른다

■ 현대시 텍스트 읽기
■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 너를 만나고 싶다
■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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