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에 취하다, 저 붉은 와이너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11월의 포도밭은 평화, 그 자체였다. 수확을 마친 포도나무가 오르락내리락 언덕마다 끝없이 줄지어 서 있었고, 늦가을 햇살은 포도잎을 황금빛으로 곱게 물들였다. 그 여유 있는 풍경을 좇아 이탈리아 피에몬테·토스카나·움브리아 지역에 있는 와이너리 일곱 곳을 찾아갔다. 가야·프레스코발디·카스텔라레·룽가로티 등 ‘와인 명가’로 꼽히는 기업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이들 와이너리에는 저마다의 ‘테루아’가 분명했다. (테루아(terroir)는 ‘땅’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지만 단순한 땅이란 의미 외에 와인의 품질에 영향을 주는 천(天)·지(地)·인(人)의 요소를 모두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와이너리에 들어서자 한창 발효·숙성 중인 와인의 그윽한 향이 먼저 반겼다.

늦가을 황금빛 포도잎의 바다 위에 와인 빛깔 와이너리 건물이 마치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 있는 신흥 와인 명가 카스텔라레의 와이너리 ‘로카 디 프라시넬로’. 퐁피두 센터를 건축한 렌조 피아노의 작품이다.

카스텔라레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건물로 더 유명

토스카나주 남부 그로세토에 자리 잡은 카스텔라레의 ‘로카 디 프라시넬로’ 와이너리는 이탈리아의 여느 와이너리와 사뭇 달랐다. 와인 빛깔 직사각형 건물에 전면 통유리창이 설치돼 있고, 건물 꼭대기에는 가늘고 높은 탑이 세워져 있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현대식 와이너리다.

 사실 ‘로카 디 프라시넬로’ 와이너리는 생산하는 와인보다 건물 자체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 렌조 피아노(75)여서다.

 ‘로카 디 프라시넬로’는 76년 세워진 이탈리아 와인 기업 ‘카스텔라레’가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와인 명가 ‘라피트 로칠드’와 합작해 만든 와이너리다. 이곳의 설계를 렌조 피아노가 맡게 된 것은 카스텔라레의 사주 파울로 파네라이(66)와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이다. 이탈리아 유명 언론 기업 ‘클라스 에디토리’의 대표이기도 한 파네라이가 젊은 시절 제노아의 지역 신문 기자로 활동할 당시 렌조 피아노를 취재하며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당시 무명 건축가였던 렌조 피아노가 프랑스 퐁피두 센터, 일본 간사이공항 등을 설계하며 명성을 얻는 동안 파네라이 역시 신문·잡지·방송을 아우르는 대형 언론사의 사주로 성장했다.

 이곳의 와이너리 투어는 렌조 피아노에 얽힌 이야기에 집중됐다. 와이너리 투어를 안내한 양조기술자 마시모 카사그란데(46)는 “렌조 피아노가 그동안 해온 작업에 비해 와이너리 설계는 너무 규모가 작은 일이어서 처음엔 내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와이너리 부지에 와본 뒤 이곳의 풍광에 반해 흔쾌히 설계를 맡았다”고 설명했다.

 와이너리 곳곳엔 렌조 피아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빛났다. 지하의 와인 저장고를 마치 경기장·공연장처럼 만들어 오크통을 ‘관중석’ 계단에 눕혀둔 것도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오크통을 절대 쌓지 않는 것이 이곳 와이너리의 원칙이라고 했다. “와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 때문”이란다.

 와인 저장고의 가운데 부분인 ‘무대’ 위 천장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다. 평소에는 커튼으로 덮어둬 빛이 저장고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지만,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엔 커튼을 연다.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방식도 독특했다. 건물 꼭대기 탑에 설치한 거울 세 개의 각도를 조절해 햇빛을 저장고 천장 창문으로 쏘아준다는 것이다. 이는 “와인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빛”이라는 ‘로카 디 프라시넬로’ 와이너리의 철학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와이너리 1층은 방문객들을 위한 시음 장소 겸 와인숍이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와인상자와 의자가 공간에 활력을 더하고 있었다. 마시모 카사그란데는 “렌조 피아노가 고른 색”이라며 “그는 시종일관 신선한 분위기를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안젤로 가야·프레스코발디·카스텔라레·룽가로티·신동와인 제공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