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6면

이원규
시인

문득 많이 그립고 그립지만, 막상 기억의 저편에서 아슴푸레하거나 아련할 때면 살며시 눈을 감아야 한다. 그래야 그 추억의 속살들이 마치 두 손으로 만져질 듯 또렷해진다. 가령 고향이나 그 원형인 어머니, 그리고 옛 애인과 죽마고우 등이 그러하다.

 이 늦가을의 바람처럼 잠시 내 고향 문경 근처를 서성거렸다. 고향에서 산 날들보다 타향살이의 날들이 더 많아지면서 더욱 심해진 수구초심 같은 향수병 때문일 것이다. 하내리, 구랑리, 서성국민학교, 백화산, 가은중학교 등 그 이름만으로도 한없이 출렁거린다.

 열흘 전에는 가은중 동기생 20명이 지리산을 찾아와 만복대 산행을 하며 하룻밤 회포를 풀고, 지난 주말에는 문경시민문화회관에서 ‘돌아온 탕자’가 되어 참으로 쑥스러운 문학강연을 했다. 30년 세월을 건너온 동무들의 얼굴 속에는 여전히 그 어린 시절의 풋풋한 얼굴들이 화석처럼 박혀 있었다. 참으로 먼 길을 달려왔지만 사실은 그리 멀리 온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혜경이 형일이 등 몇몇 친구들은 먼저 이승을 떠나고, 살아남은 친구들은 어느새 자기보다 더 큰 자식들을 키우는 어미아비가 되었다. 내가 처음 연애편지를 보냈던, 그러나 인편으로 보낸 그 편지는 30년이 넘도록 전달되지 않고 끝내 사라져버린, 그 당사자인 여학생도 청주의 장한 어머니가 되어 지리산 만복대를 함께 올랐다. 모두들 문경 촌놈촌년이 되어 “한잔 해봐여, 안 마시고 뭐해여?” 한바탕 시끄러웠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의 초청강연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김시종 시인 같은 대선배 앞에서, 그리고 문인협회의 선후배 시인들과 고향을 지키는 죽마고우들 앞에서 무정처의 내가 무얼 얘기할 수 있겠는가. 시인으로서의 어설픈 과장법이 통할 리도 없고, 어쭙잖은 쾌도난마의 그 어떤 말이나 정치적 수사도 구사하기 어려웠다. 내내 식은땀을 흘리며 ‘어쩌다 나는 시인이 되었을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이 떠오르고, 하내리의 우리 집 바로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맹인 김씨가 떠올랐다.

 내가 처음 본 교과서 밖의 시는 조욱현 선생의 작품이었다. 교실 뒤편 압정 꽂힌 원고지에 칸칸이 단아한 글씨로 채워진 ‘파계사’라는 시였다. ‘과하마 과하마 찰거머리 뒤따르지 않는 마음인 양’이란 구절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당시의 나는 겨우 연애편지를 대필하거나 ‘오랜만에 오신 삼촌 간첩인가 살펴보자’는 식의 반공표어로 참으로 비극적인 상(?)을 받는 것이 전부였다.

 조욱현 선생은 ‘세계의 문학’ 1호 등단자였다. 하지만 25년 만인 2002년에야 첫 시집 『늑대야 늑대야』를 펴냈다. ‘문학적 결벽증’ 때문인지, 제자들을 가르치느라 모든 것을 소진해서인지 나로서는 그 깊은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그러고는 또 10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퇴임한 뒤 야생화와 그림에 푹 빠져 있다. 다만 내 고향에 아예 뿌리를 내린 선생님께 또다시 배우고 반성해야 할 일은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익은 생각들이 발효되기도 전에 발표된다는 자괴감을 지울 수 없다. 선생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이렇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내게 또 한 분의 영원한 문학적 스승이 있다면 하내리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맹인 김씨 아저씨다. 그는 언제나 안 보이는 눈으로 하내리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겨울 밤이면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듣고는 그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마을 길을 쓸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자전거와 경운기 엔진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다 알아보고는 먼저 인사를 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가 짐짓 나를 밝히지 않고 “담배 한 보루 주세요?” 했더니, 그 안 보이는 눈을 깜빡거리며 “원규? 이실네 막내아들 원규 아이라?” 되묻는 것이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린 시절의 내 목소리까지 기억해내는, 시각의 결핍이 오히려 승화된 ‘하내리의 신’을 만난 것이다. 나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맛을 보거나 향기를 맡거나 키스를 하거나 따스한 손을 잡을 때는 일단 눈을 감아야 한다. 시각 중심의 사고가 오히려 착시를 일으키거나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갈수록 눈뜬 장님이요, 당달봉사가 되는 것이다. 때로는 눈을 감아야 훨씬 더 잘 보인다.

이원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