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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북핵 정부중재 중요하다

중앙일보

입력

북한의 핵 시설 동결 해제 이후의 한반도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가시화하고 있다.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북한의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발빠른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북핵 문제는 국제사회가 핵 무기의 확산을 금지하고 안전한 핵 에너지의 사용을 확보하는 질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납되기 어려운 국제적 차원의 일탈행동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뿐 아니라 핵을 이용하는 어떠한 나라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준수하고 그 이행여부를 감시하기 위해서 유엔의 산하기관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북한의 핵 문제가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여도 그 해결을 국제원자력기구나 유엔 안보리에 일임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북한의 핵 문제로 인해 안보.정치.경제상의 불안이나 불이익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당사자는 다름 아닌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들뜨고 소란스러운 연말연시와는 달리 우리 국민은 매우 착잡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다. 이제 국민들은 북핵 문제가 "어떻게든 잘 풀리겠지"하는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부터 그 심각성을 서서히 인식해가고 있다.

*** 적극.주도적으로 나선 까닭

미군 무한궤도차량에 의해 희생된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시위도 이제 그 성격을 반전과 평화를 위한 운동으로 변모시켜 가고 있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의 위임을 받은 한국 정부가 북한의 핵 문제로 불거진 국민의 안전과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주도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특히 작금의 국제현실과 북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북핵 문제의 해결을 단순히 국제사회에 미룰 수 없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핵 문제를 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에 맡기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이러한 국제기구나 질서를 주도하는 나라는 미국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오랜 기간 한.미우호와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나라를 건설하고 발전시켜 왔으며 북핵 문제에 있어서도 한.미공조가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국제사회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세계전략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으며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만약 이번에 북핵 문제가 평화적 해결의 가닥을 잡아 원만한 해결방안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일방주의는 항상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켜 북한과의 극한 대립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최근 실행단계로 접어드는 미사일방어계획(MD)이다.

이는 미국이 상대방의 핵 보복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선제 공격할 수 있는 것으로서 북한으로 하여금 영원히 '핵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핵 문제로 인한 한반도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분명한 철학과 유연한 외교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중요한 시기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둘째, 북핵 문제를 유엔 안보리를 통한 압박과 봉쇄로 처리하겠다는 것은 현재의 북한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이는 결국 북한을 경제적으로 고사시켜 북한체제의 붕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인데, 북한의 붕괴가 우리와 동북아 전체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북한 주민의 대량 탈출을 포함해 거의 빈사상태에 있는 북한경제를 떠맡을 여력은 아직 우리에게 없다.

*** 압박.봉쇄보다 협상해야

또한 북한 체제의 붕괴과정에서 북한의 지도부가 어떠한 모험을 할 것인지도 점치기 어렵다. 최근 미국 언론이 보도한 맞춤형 봉쇄정책(tailored containment)이 우리 정부와 중국 등에 의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미국과 국제사회를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중재해야 한다.

힘과 압박이 아닌 상호 존중과 협상만이 북한으로 하여금 대량 살상무기를 포기하고 주민이 먹고 쓸 수 있는 물건을 만드는 정상적인 나라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중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중앙일보 이동복 교수의 시론에 대한 반론입니다).
김성수 연세대 교수 공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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