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나, 저들의 피아노에서 나는 ‘다른 소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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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호 27면

1986년, 61년 만에 고국 소련에서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온 호로비츠(오른쪽에서 둘째)는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메달을 받았다. 미국 시민 최고의 영예로, 대통령 부인 낸시가 목에 걸어주고 있다. 왼쪽은 부인 완다 호로비츠. [위키피디아]

“자, 들어봐. 브람스의 이 대목에서 글렌 굴드는 이렇게 두드렸거든. 쾅쾅쾅!” 친구는 피아노를 치기 바쁘게 오디오로 뛰어간다. “자, 들어봐. 반 클라이번은 같은 데를 이렇게 과장하잖아. 쿵쿵쿵!”

[詩人의 음악 읽기] 루빈스타인과 호로비츠

피아니스트 친구 김진호가 내게 해주는 개인 레슨이다. 핑거링 하나하나가 그를 통해서 의미가 되고 이야깃거리로 비화되고 그 연주자 인생의 파란곡절로 이어진다. 음악잡지에서나 모습을 대하는 해외 유명 연주자들과 그는 함께 식사를 했거나 여행을 했거나 비평가들의 찬사와는 달리 경멸을 보내기도 한다. 지금 그는 랑랑에 대해서는 혐오감에 가까운 분노를, 키신에 대해서는 판단 유보를 하고 있다. 현역 최고의 수퍼스타들이 그의 평가를 통해 아주 작아지는 기분을 느낀다. 나는 그의 식견을 존경한다.

피아니스트 친구의 가르침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었던가.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라는 두 대가의 위대성에 대한 확인이었다. 친구는 두 인물에게 미쳐 있었다. 그의 표현을 옮기자면 ‘영감이 있는 연주’라는 것.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해마다 쏟아져 나오지만 지금껏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독자성을 지닌, 하늘의 별 가운데서도 항성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익살스러운 표정의 루빈스타인. 지난 세기 미국인은 최고의 ‘예술가’ 루빈스타인과 최고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를 모두 보는 복을 누렸다.

음악 애호가의 일생은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인물이 왜 뛰어난지를 깨닫고 느끼는 과정과 다름없다. 감상자 입장에서 아무리 독특하고 주관적인 견해를 펼쳐보았자 다수의 보편적 경험과 판단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숨어있는 명장의 세계가 있기야 하겠지만 이미 확인된 대가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파악하기에도 생은 너무 짧다. 루빈스타인과 호로비츠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지만 조희창 씨가 쓴 전설 속의 거장이라는 저서에 잘 정리된 설명이 있다.
루빈스타인은 정확한 테크닉보다는 감성적 태도를 더 중시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콘서트를 사랑했고 사람들을 좋아했고 자신의 인기를 즐길 줄 알았다. 그만큼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의 레코딩은 다분히 즐기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좋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 가령 마주르카 같은 곡은 동일 곡에서 일정한 템포의 유지라는 규칙을 아예 무시한다. 폴란드 민속음악이 그런 무정형성에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빈스타인의 마주르카 연주 음반을 들어보면 과하다 싶게 빨라졌다 느려졌다 한다.

호로비츠는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초절정 기교를 현시한다. 엄청나게 크고 긴 손가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정확하면서도 놀라운 속도감은 무섭다는 느낌까지 안겨준다. 그런 연주력에 어떤 신적인 광휘를 풍기며 청중을 압도하는 것이 호로비츠의 음악 세계다. 연주 여행을 다닐 때 그 커다란 전용 그랜드피아노를 점보 비행기에 싣고 다녔으며 반드시 전속 요리사를 딸려주어야만 움직였다. 연주회는 일요일 오후 4 시에만 연다는 단서를 붙였다. 이 성질 까다로운 피아니스트는 생애 중 22년간을 은퇴 상태로 보냈다. 수틀리면 세상에 나오지 않는 식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기행에 가까운 취향과 온갖 요구를 다 맞춰주고 받들었다. 요즘 같은 고전음악 사양기에는 턱도 없는 일이다.

우연히도 85세로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두 대가를 비교하려면 DVD에 남겨진 영상을 보는 것이 좋다. 루빈스타인 연주회의 청중은 수런수런 소음이나 기침 소리를 내며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호로비츠의 공연 영상에서 청중은 벌을 서고 있다. 다들 연주자의 포스에 압도된 것인지 함부로 숨도 쉬지 못하며 얼어붙어 있다. 예술가를 향해 사랑하는 감정과 숭배하는 태도가 대비되어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제는 전설 속의 옛 인물이 되어버린 두 사람. 지금 이 세상에 그런 존재감을 안겨주는 예술가는 없다. 그 빈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이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이들이다. 예술에서 경제로 혹은 기술과 산업으로. 그러고 보니 문학도 미술도 또 다른 예술 장르도 마찬가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인간에게는 영혼과 감성이라는 거대한 대륙이 있고 그 대륙의 거인들이 대중에게 특별한 존중을 받았던 것은 다분히 20세기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20세기는 떠나가 버렸다.

지금 예술과 문학에 탐닉하는 이들은 남겨진 사람이다. 흘러간 20세기에 남겨져서 낡은 페이지의 얼룩을 매만지는 일은 쓸쓸하다. 그런데 그 쓸쓸함이 중독적이다. 뭔가 진짜를 아는 듯한, 깊이의 세계에 도달한 듯한, 생의 비의를 체득하고 경험하는 듯한 도취의 열정. 쓸쓸한 열정이라는 이 아이러니를 호로비츠, 루빈스타인이 툭툭 던진다. 피아니스트 친구가 내 귀에 속삭인다.
“잘 들어봐. 저들의 피아노에서는 다른 소리가 나와. 저건 다른 소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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