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성공하려면] 4. 고령사회 대비 경제체질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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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역대 정부에서 단기 성과나 인기에 집착해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경제를 그르친 사례는 많다. 특히 새 정권 초기에 그런 경우가 많았다.

1993년 3월, YS 정부는 출범 한달 만에 신경제 1백일 계획에 시동을 걸었다. 경기 부양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구조조정에 나서야 할 시기였다. 여러 전문가가 구조조정이 먼저라고 지적했지만 청와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YS는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른 시일 안에 경기를 살리려는 욕구가 강했다. 그래서 재정확대.금리인하 등 돈을 푸는 내용의 경기부양책인 신경제 1백일 계획을 내놓았다.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부작용을 우려해 반대했지만 청와대 주도로 밀어붙였다."(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당시 KDI 거시경제팀장)

그 결과 다음 해인 94년부터 경기가 과열되면서 수입이 늘고 경상수지 적자가 커졌다. YS 정부에서 경제수석을 지낸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YS 정부 초기 경제체질을 강화하는 긴 승부가 필요했는데, 경기부양을 택함으로써 훗날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이 됐다"고 말한다.

YS 정부 초기에 시간을 정해놓고 조급하게 밀어붙였다가 실패한 사례로는 공기업 민영화가 꼽힌다. 93년 10월, YS는 공기업 경영쇄신 방안을 마련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예의 '깜짝 발표'였다.

KDI의 분석(한국 경제개혁 사례연구, 5백43~5백44쪽)은 이렇다.

"신경제 1백일 계획에도 들어있지 않던 공기업 문제가 갑자기 나왔다. 그 때부터 민영화 대상 공기업을 선정하고, 매각 일정과 방식을 확정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불과 1개월이었다. 개혁의 구색을 갖춰야 한다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급조된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사정이 이러니 잘 될 리 없었다. 그로부터 3년을 끌고도 96년 11월 재정경제원은 담배인삼공사 등 대규모 공기업의 민영화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DJ 정부에서도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DJ 정부 초기의 이른바 빅딜(대기업 간 사업교환)이 그런 경우다. 당시 한 핵심 경제부처 장관은 이렇게 비판한다.

"시장의 생리를 잘 모르는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기업 구조조정의 가시적 성과를 올리려고 빅딜을 강행했다. 경제부처 장관들은 빅딜을 내심 반대했다. 결국 98년 내내 빅딜에 매달리는 바람에 외환위기 이후 절호의 구조조정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은행을 통한 구조조정이라는 원칙은 탈색됐다."

빅딜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었던 전윤철 경제부총리도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빅딜 정책이 좋은 시책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는 역대 대통령들 모두 단기 성과에 더욱 매달렸다. 당장 지난해에도 그랬다. 지방 선거를 3개월, 대통령 선거를 9개월 앞두고 있었던 지난해 3월. 가계대출이 급속히 늘고,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면서 경기회복 속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 장승우 기획예산처 장관이 대한상공회의소 간담회에서 "재정을 조기에 집행하지 않겠다"는 의미있는 발언을 했다. 그때까지 정부는 돈을 풀어 내수를 부추기는 경기부양책을 쓰고 있었다.

그런 만큼 張장관의 이날 발언은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시장에서는 경기회복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자 정부가 속도 조절에 나선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후 정부 안에서는 '속도조절론' 논의가 쏙 들어가고 말았다. 익명을 요구한 재경부 관계자의 회고.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경기가 가라앉으면 안된다는 '묵계'가 있었다. 또 수출과 투자가 살아나지 않아 경기회복에 대해 1백% 확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결국 내수를 계속 부추길 수밖에 없었다. 기획예산처에는 '입 조심'을 시켰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인 89년의 '12.12 증시부양 조치' 역시 대통령 중간평가를 앞둔 시점에 무리수를 둔 경우다. 증권투자자나 금융기관은 물론 대책을 만든 옛 재무부 관리들에게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盧대통령은 취임 후 민주화 등 정치에 관심을 쏟았고, 상대적으로 경제에는 소홀했다. 집권 후 줄곧 주가가 올랐기 때문에 89년 4월을 고비로 주가가 떨어지자 하루에도 서너 번씩 주가를 챙겼다. 여당에서도 성화였고,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익명을 요구한 재경부 모 과장)

이처럼 지난 15년 간 역대 정권은 매번 단기 성과에 집착하며, 정작 나라 경제의 장래를 끌고 갈 확실한 성장의 동인(動因)을 찾고 북돋워 주는 데는 실패했다.

노무현 당선자에게는 지난해 미리 손을 쓰지 못한 가계.부동산 거품이 당장 짐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 봄의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는 "지난해에도 대통령 선거까지 경기부양책을 계속 끌고가다 실기했다"며 "경제는 임기 5년 안에 결실을 보려 하지 말고 앞으로 10~15년을 내다보고 성장 동인을 찾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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