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가 불러올 디플레이션… 통화정책 달라져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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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호 22면

일본 경제를 분석하다 보면 경제학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몇 가지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인 게 디플레이션(Deflation)이다. 일본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7년 연속 물가가 하락했다. 이후 약간 오르더니 2009년부터 지금까지 다시 물가가 내리고 있다. 혹시 일본이 금본위제 국가라면 이해할 수도 있겠다. 금본위제는 금의 보유량에 따라 화폐가치가 결정되는 특성상 금이 모자라면 디플레이션이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은 엄연히 중앙은행이 엔화라는 지폐를 끊임없이 찍어내는 국가다. 금본위제도 아닌 지폐를 발행하는 국가에서 이처럼 장기간 지속적 디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답은 고령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의 고령화율은 이미 2007년 20%를 넘어 초고령사회로 들어섰다. 늙어가는 사회는 인플레이션 확률은 낮아지고 디플레이션 확률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는 생산가능인구가 줄면서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기 때문이다.

증시 고수에게 듣는다

젊은 층 신음하는 일본 경제
일단 젊은 층은 인플레이션이 좋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모아 놓은 자산은 별로 없고 주택 마련 등을 위해 부채가 많다. 주된 소득은 자산소득보다 일해서 버는 근로소득이다. 디플레이션이 오면 임금이 하락해 소득이 줄어든다. 그런데 부채는 줄지 않기 때문에 결국 더 많이 일을 해야 부채를 갚을 수 있다. 디플레이션이 오면 일자리도 줄어든다. 반면에 인플레이션이 오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므로 사람들은 돈을 보유하기보다 자본에 투자하려 한다. 자본이 늘어나면 노동의 한계생산성이 증가해 임금이 높아진다.

반면 고령층은 디플레이션을 원한다. 디플레이션 환경에서는 돈의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현금이 왕(Cash is king)’이라는 말을 한다. 나이 든 사람들은 자산은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일해서 버는 돈은 적다. 따라서 디플레이션이 와서 임금이 하락하거나 실업이 증가해도 타격이 별로 없다. 오히려 보유 현금이나 연금 등 자산의 가치가 오른다. 금리가 하락하기는 하지만 물가가 그보다 더 하락하기 때문에 문제없다. 실업률이 좀 높아지더라도 어차피 일해서 버는 돈의 비중이 작으니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일본은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에 빠진 극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디플레이션에서는 물가가 상대국에 비해 더 하락하기 때문에 환율이 장기적으로 강세가 된다. 수년간 계속된 엔화 강세 현상에는 디플레이션이 큰 몫을 했다. 엔화 강세가 계속되면 일본의 고령층 자산가들은 대외적으로 구매력이 높아진다. 이에 비해 기업은 가격 경쟁력이 약해져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긴다. 그러면 국내 고용이 줄고 수요가 위축되면서 해외로 나가는 기업이 더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회의 각종 자원이 고령층으로 집중되는 자원배분의 왜곡이 일어난다.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이러한 수렁에 빠지는 걸 어떤 정부가 달가워하랴. 정치권에서 디플레를 막고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는 묘책을 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엔 난관이 있으니 바로 고령층 유권자다. 고령층이 두터워지면서 표심을 의식해 경제 정책을 이들에게 불리하게 펼칠 수가 없다. 일본은 젊은 층에겐 고달픈 나라지만 고령층에겐 천국이다. 자원배분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금을 통해서 이러한 자원배분의 왜곡을 막으려 해도 고령층이 유권자의 큰 비중을 차지해 증세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이른바 ‘실버 보팅 파워(Silver voting power)’다.

예를 들어보자. 원래 연금은 물가에 연동되어 지급된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이 오면 그만큼 증가하고 디플레이션이 오면 그만큼 줄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고령층 유권자가 많아지면서 정치인들이 이들 표를 의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디플레이션이 계속되는데도 연금수령액은 떨어지지 않았다. 물가하락분만큼의 금액은 국가 재정으로 부담했다.

일본선 “고령층 투표권 제한하자”
이웃 일본 이야기를 이토록 오래 끈 것은 우리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우리나라도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가계부채는 1000조원에 육박하는데 집값이 떨어지면서 ‘부채 디플레이션’이 현실화하고 있다. 유권자의 수를 봐도 고령층이 예전보다 크게 늘어났다. 한국판 실버 보팅 파워를 발휘할 55세 이상 유권자의 비중은 이미 전체 유권자의 30%에 달했고 2030년에는 절반이 될 전망이다. 더욱이 우리나라 베이비 붐 세대(1955~63년생)는 노후 대비책이 일본에 비해 턱없이 미흡하다. 정부 당국이 디플레를 막기 위해 고령층에 부담을 주는 정책을 쉽사리 펼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인플레이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중앙은행은 원래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막는 게 주요 역할이다. 하지만 앞으로 중앙은행은 이런 것보다 어떻게 하면 물가가 하락하지 않고 적정한 인플레이션을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지 모른다. 미국은 2000년대 초부터 이미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통화정책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연구해 왔다.

둘째, 지금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못 고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앞으로 20년도 안 돼 유권자의 절반이 55세 이상이 된다. 그러면 세제·연금·의료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에선 “고령층의 투표권을 제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올 정도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말까지 나올까.

70~80년대가 인플레이션을 막는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디플레이션을 막는 시대가 될 것이다. 고령화에 따른 자원배분의 왜곡을 시정하려면 억지로라도 인플레이션을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한국은행이 인플레와 디플레를 경기순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 이외에 인구 변화의 측면에서도 바라봤으면 좋겠다. 그래야 좀 더 현명한 통화정책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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