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새벽에 엄마 책읽는 모습 기억남는다’하더군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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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 김용 총재의 어머니 전옥숙 여사가 14일 성균관대 정문 하마비(下馬碑)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자녀 교육에 앞서 엄마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는 작업,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악수를 청하는 손이 가녀렸다. 눈꽃 같은 단발머리에 앵클 부츠를 신은 그의 얼굴, 몸가짐이 팔순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젊었다. 아시아계 최초의 아이비리그 총장(다트머스대)에 이어 올 4월 세계은행 수장이 된 김용(53) 총재의 어머니 전옥숙(79) 여사다. 아들과 함께 세계지식포럼 참석차 방한한 그를 14일 성균관대 양현재에서 만났다. 그는 “자식의 부모 자랑은 가치있지만, 부모의 자식 자랑은 우둔한 짓”이라며 김 총재에 관한 질문은 사양했다. 대신 “어머니 역할에 대한 얘기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는 처음이다.

김용

 그는 철학박사다. 미국 UCLA 교수로 재직했고, 하버드대 번팅연구소에서 미국 마이클 칼톤, 중국의 뚜웨이밍, 일본의 야마시타 교수 등과 함께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 ‘양선생왕복서(사단칠정론)’ 등을 공동 연구했다. 세계 성리학계의 석학으로 꼽힌다. 김용 총재는 “의학을 전공한 부친(김낙희·1987년 별세)은 매우 실용적이었고, 모친은 거대 담론을 즐겼다. 상반된 두 가치가 나를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전 박사는 3남매를 뒀다. 김 총재의 형 훈씨는 위장병 전문의, 여동생 지혜씨는 사회교육학자다. 전 박사는 50년대 인종 갈등이 심했던 미국 남부에서 공부하면서 인권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지혜씨는 “엄마는 열정적인(voracious) 독서가였다. 우리들에게도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나 부커 워싱턴의 『노예제도로부터 몸을 일으켜』란 책을 읽혔다. 가족들은 항상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철학과 정치 그리고 예술에 대해 토론했다”고 다트머스대 기고문에 썼다. 경기여고를 수석졸업한 전 박사는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아이오와대에서 중국의 성리학자 주희(1130~1200)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퇴계학을 연구했는데.

 “퇴계 이황의 문제의식은 ‘인간 본성의 정직성’이다. 사회 불의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적극적으로 인의(仁義)에 참가하는 게 중요하단 것이다. 21세기 유학 사상의 가장 근본 가치인 인도주의 사상이 한국에서부터 부활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학문에 진짜 인생이 연계돼 있는 그런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건 기적이다.”

 - 어떤 어머니가 되려 노력했나.

 “아이와 엄마는 함께 큰다. 아이들이 나를 더 현명하고 사려깊은 사람으로 만든다. 엄마들은 모든 것을 잘할 필요도, 세상에서 가장 현명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아이들이 당신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아이의 반응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이를 낳을 때마다 우린 기적을 경험한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이미 완성된 존재다.”

 - 그래도 자녀들을 훌륭히 키운 비법이 있을텐데.

 “교육엔 공식이 없다. 나는 유형화를 싫어한다. 누군가 짐(김용 총재의 미국 이름은 Jim Yong Kim이다)이 아이티 같은 위험한 나라에서 일하면 부모로 걱정이 안 되냐 묻더라. 의사가 환자의 목숨을 구하러 가는데 자기가 살아남는 방법은 당연히 알지 않겠나.”

 - 자녀들에게 남을 위해 살라고 하셨다는데.

 “아니다. 아이들의 물음에 답하기도 바빠서 아이들에게 뭔가 주입할 시간조차 없었다. 먼저 ‘이 문제를 놓고 얘기해보자’고 하진 않았다. 그저 어떤 이슈를 물어오면 함께 토론했다. 자주 인용하는 비유가 있다. 부모는 뼈가 돼야 한다. 아이들이 그걸 갈아서 이를 만들 수 있는 뼈 말이다. 우리는 또 벽이 돼야 한다. 아이들이 뭔가를 만들어 세울 수 있는 벽. 아이들은 나를 통해 자란다.”

 - 자녀 셋 키우며 공부를 어떻게 했나.

 “신학대 시절 주임교수가 동양철학을 추천했다. 해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지금도 새로운 공부를 할 땐 설렌다. 제 정신을 유지하는데 학문만한 게 없었다. 집안일만 하다가 무료하고 힘들 때 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공부를 했다. 아이들을 기를 때 엄마들은 ‘스스로의 정신을 가다듬는 작업’(sanity)을 해야 한다. 필수다. 음악을 듣든, 피아노를 치든, 정원을 가꾸든 자신만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비행기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안전 메뉴얼과도 같다. 엄마가 먼저 산소 마스크를 쓰고, 아이에게 씌워주라고 하지 않는가.”

 -‘직장맘’들은 시간부족을 호소한다.

 “저녁 10시가 되면 아이들을 재우고 그때부터 공부했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 주는 흥분을 잊을 수 없다. 가끔 아이들이 새벽에 깨서 엄마가 책을 읽는 모습을 봤는지, 커서도 그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라. 엄마라면 늘 잠이 부족하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는 유형화가 싫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나보고 ‘수퍼맘’이라며 교육법 책을 내라고 한다. ‘아이를 키우려면 이렇게 하라’는 건 내가 할 일은 아니다. 이 시대의 진짜 수퍼맘은 아프리카 같이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건강하고 사람답게 아이들을 키워내는 어머니들이다.”

 전 박사는 대신 ‘어머니 주식회사(Mothers Incorporated)’ 구상을 들려줬다. “작가 권정생 의 시집 『어머님 사시는 그 나라에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권 선생의 어머니, 남편을 잃고 아들 퇴계를 생후 7개월 때부터 홀로 키운 어머니 춘천 박씨 등 전 세계 어머니가 가꾼 훌륭한 삶의 현장을 책으로 엮어보려 한다.”

 - 많은 한국인들이 김용 총재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재임 성공, 가수 싸이의 흥행 등 국제무대에서 한인이 거두는 성공에 고무돼 있다.

 “좋은 일이지만 한쪽을 지나치게 조명하면, 위축되고 희생되는 사람들이 가려진다. 이런 그늘에도 신경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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