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 공약, 서민의 고통 알고 하는 얘기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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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진보 정치학계의 원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 나이로 칠순을 맞는 그가 직접 노동현장을 찾아 취재해 쓴 책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을 펴내며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알렸다. [중앙포토]

여기저기서 정당정치의 위기가 거론되고 있다. 여야 후보와 무소속 후보가 전례 없이 경합하는 올해 대선을 누구보다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다.

 진보 정치학계의 원로로 꼽히는 최장집(69) 고려대 명예교수다. 정당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그다. 현 정국에 대한 그의 시선은 긍정과 부정이 복합적으로 교차한다. 그 일단을 16일 출간된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폴리테이아)에서 엿볼 수 있다.

 신간은 올해 한국 나이로 칠순을 맞는 최 교수가 직접 발품을 팔아 한국사회 곳곳의 노동 현장을 취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언론 연재물과 강연문 등을 함께 엮었다.

 최 교수가 방문한 노동현장은 새벽 인력시장부터 대기업 공장과 봉제공장·자활센터·재래시장까지 이어진다. 그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그들의 결핍과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이 정신적으로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정당정치의 구체적 내용을 노동문제로 채우고 싶어한다. 중하층 서민들이 일터에서 겪는 애환이야말로 우리 정치의 ‘실제 문제(real issue)’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안철수에 대한 비판과 긍정=대선 정국을 바라보는 그의 복합적 시각은 우선 ‘안철수 현상’에서 확인된다. 안 후보의 대선 출마 여부조차 오리무중이던 지난 6월 최 교수는 “무책임하고 비정상적 태도”라며 안 후보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책에서 ‘안철수 현상’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안철수 현상은 그 정치적 결과가 어떠하든 젊은 세대들의 자기 발전과 정치적 각성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최 교수는 “내가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정당 있는 후보를 선호하고 정당 없는 후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정당이 제 역할을 잘하지 못한 역사가 누적되며 오늘의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정당 후보가 됐든, 무소속 후보가 됐든 노동 문제를 포함해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할 능력을 갖추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기성 정당의 직무유기를 안철수 현상이 등장한 배경으로 지목한다. 특히 진보를 표방하면서 사회경제적 과제에 무관심한 정당을 비판의 도마에 올렸다.

 ◆진보 세력에 대한 기대와 우려=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출범을 지지했던 최 교수지만 그들의 집권 후 결과에 대해선 비판적이다. “다른 정부도 아닌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가 정규직에 맞먹을 정도로 확대되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얼마나 취약해졌는가는 잘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이번 대선에서 주요 후보 세 명 모두 경제민주화를 내세우고 있는 점에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 이유는 “정당들 간의 어떤 신념이나 가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상처받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사회집단들의 규모가 커지고 이들의 표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된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수동 혁명의 악순환’이라고 표현했다. 사회의 저항감에 위기감을 느낀 통치 세력들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수동적으로 나서는 개혁을 그렇게 불렀다.

 최 교수는 “민주화 이후 4반세기를 지나고 있는데도 우리 정치가 아직도 수동 혁명의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는 현실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며 “진보를 말하는 정당들이 뭔가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과거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 정부의 접근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깊이 반성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우리 유권자들은 야당이 정치 슬로건으로 내세운 개혁 사안들을 실천할 능력과 진지함이 있는지를 중시하기 시작했다”며 “야당과 진보 세력은 사회경제적 사안들을 유능하게 집행할 대안적 정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찾아볼 것”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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