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생, 축구장서 뭐하나 했더니…현장포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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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국인 유학생이 챌린저스리그 경기가 열리는 관중석에서 휴대전화에 핸즈프리를 연결해 경기 상황을 불법 베팅 조직에 중계하고 있다. [송지훈 기자]

지난해 대한민국 스포츠를 뒤흔든 승부조작의 악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승부조작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불법 베팅이 최근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달 1일 아마추어축구 챌린저스리그 21라운드를 치른 전국 8곳의 경기장 중 3곳에서 불법 베팅 사이트가 고용한 중국인 중계요원이 적발됐다. 대한축구협회가 지난해 본격 단속에 나선 이후 한 라운드에 3건이 적발된 건 처음이다. 붙잡힌 중계요원들은 모두 경기장 인근 대학에 다니는 20대 중국인 유학생이었다. 서울대에 재학 중인 E씨(29)도 있었다. E씨는 “중국인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이 ‘운동 경기를 보며 재미있게 돈을 버는 아르바이트가 있는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건당 5만원 안팎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일은 간단했다. 관중석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따금씩 경기 흐름과 현장 분위기를 전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경기 시작 시간이 되면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번호는 ‘0’으로 찍혔다. 큰 소리를 낼 필요도 없었다. 전화기에 핸즈프리를 연결해 소곤거리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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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중계원으로부터 압수한 노트에는 서울대에서 부천종합운동장 가는 법 등 챌린저스리그 일정과 교통편 등이 적혀 있다. [송지훈 기자]

 이들이 전달하는 정보는 중국 불법 베팅 사이트가 시행하는 ‘라이브 베팅’의 참고자료로 활용된다. 중국의 불법 베팅 사이트는 승·무·패를 맞히는 방식 이외에 ‘다음 골은 어느 팀이 넣을까’ 등 실시간으로 참여할 수 있는 종목들을 운영한다. 사이트 가입자들은 중계요원이 현장에서 전하는 음성 정보를 듣고 경기 흐름을 파악한 뒤 베팅에 참여한다.

 불법 베팅 조직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중계요원의 역할은 작지만 이들이 스포츠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존재로 돌변하기도 한다. 2008년 챌린저스리그 승부조작 사건이 그랬다. 중국의 불법 베팅 사이트가 중계요원을 브로커로 활용해 챌린저스리그 소속 선수들과 접촉하며 스코어 등 경기 결과를 조작했다. 이 사건으로 선수 1명과 구단 사무국 직원 1명, 브로커 2명이 법정 구속됐다. 챌린저스리그를 통해 처음 등장한 승부조작의 그림자는 3년 뒤 K-리그는 물론 프로야구와 농구, 배구에까지 스며들었다.

 문제는 중계요원을 현장에서 적발하더라도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데 있다. 지난해 국민체육진흥법에 ‘경기와 관련한 정보를 부당하게 제공하는 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규정이 신설됐지만 세부 적용 방침은 마련되지 않았다. 경찰과의 공조가 이뤄지지 않다 보니 축구협회 직원이 중계요원을 적발하더라도 주의를 준 뒤 놓아줄 수밖에 없다. 축구협회의 한 직원은 “의심 가는 인물을 적발하더라도 당사자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발뺌하면 손쓸 방법이 없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이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 사람을 잡았느냐’며 면박을 주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단속에 적발된 중계요원이 ‘외국인 인권침해’ 운운하며 적반하장식으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불법 베팅은 승부조작의 시발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며 “수사기관과 공조해 감청 등으로 증거를 확보하고, 적발된 자들은 강제 추방 등으로 일벌백계해야만 승부조작의 싹을 자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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