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벡 현물차관 88억 착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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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2001년 7월 외교통상부와 한국수출입은행에 우즈베키스탄 국제무역장관 명의의 공문이 날아왔다.

이를 받아든 두 기관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담당자들은 기가 막혔다.

'2000년 6월 한국과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체결한 3천4백만달러(약 3백84억원)의 현물 차관 약정에 따라 우즈베키스탄에 공급된 교육용 과학기자재 중 지금까지 2백95만달러(약 32억원) 어치에서 하자가 발견됐다'는 항의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두 기관의 진정으로 시작된 검찰 수사를 통해 차관 제공 사업을 주관한 한국과학기기공업협동조합의 이사장 홍순직(洪淳稷.60)씨가 친인척들과 함께 납품가를 조작하는 등의 수법으로 88억원을 챙긴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재경부는 "중소기업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이 조합을 사업 주체로 선정했었다.

洪씨는 조합 이사회를 통해 자신이 운영하는 과학기자재 판매업체 오리엔트 AV사를 3백84억원어치 물량 전체를 조달하는 주관사로 배정했다. 18년간 이사장직을 맡아 사실상 조합을 독점해왔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고 검찰은 말했다.

洪씨는 이어 44개 회원사들로부터 2백31억원어치의 기자재를 납품받아 우즈베키스탄 측에 전달했다. 그리고 EDCF를 감독하는 수출입은행에는 남품액을 2백88억원이라고 신고해 돈을 타냈다. 57억원의 부당 차익을 챙긴 것이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현지에서의 운송비.교육 자문료 등도 실제보다 부풀려 수십억원을 더 빼돌렸다.

서울지검 외사부(부장검사 安昌浩)는 洪씨 등이 이렇게 해서 착복한 돈이 88억원이라고 2일 밝혔다.

검찰은 이날 洪씨에 대해 조합에 88억원 상당의 손해를 입힌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배임)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섰다. 또 그의 이종사촌인 HRD㈜ 대표이사 이근학(李根學.52)씨, 洪씨의 조카 사위로 수출액을 조작해 조세를 포탈한 혐의로 오리엔트 AV 이사 김영기(42)씨 등 세명을 구속기소했다. 이들에게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준 납품업체 대표 유모(43)씨 등 5명은 불구속 기소됐다.

검찰 조사 결과 洪씨 등이 보낸 기자재 중 저질 또는 중고품으로 드러난 물품은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항의한 32억원의 네배 가까운 1백22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洪씨 명의의 10여개 계좌에 분산 보관돼 있던 88억원 중 일부가 정.관계 인사에게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또 1990년대 후반 인도네시아 등 다른 개도국에 제공된 기자재에서도 이번 사건과 비슷한 비리가 있었는지를 확인 중이다.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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