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켄 특집] (3) 최고로 올라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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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디신시스는 댄 포드와 트레이드되어 에인절스로 떠났고, 립켄은 3루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감독 얼 위버는 이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립켄을 유격수로 기용할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립켄은 1982시즌 개막전에서 로열스를 상대로 홈런과 2루타를 뽑아냈으나, 그 후 곧바로 극심한 부진을 보였다. 그는 5월 초에는, 마이너리그로 돌아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 큰 힘이 된 것이, 한때 오리올스에 몸담았으며 이 해부터 에인절스 유니폼을 입게 된 거포 레지 잭슨의 조언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네가 겪고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안다. 나도 그것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기 때문이지. 흔들리지 말고 자기 방식을 지키기 바란다. 그렇게만 한다면 모든 것은 제대로 풀리게 된다."

또한 립켄은 오리올스의 간판 슬러거 에디 머리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그를 통해 크게 힘을 얻었다. 후에 립켄이 대기록을 수립하였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빅리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머리가 팀에 있었고, 나는 그에게서 경기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가 나의 팀메이트였다는 사실은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그 후 립켄은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또한 그는 7월부터 유격수를 맡게 된 뒤, 수비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과시하였다. 결국 그는 이 해에 홈런과 타점, 득점 부문에서 모두 메이저리그 전체 신인들 중 수위를 차지하였다. 그가 아메리칸리그 신인왕에 오른 것은 불문가지였다. 또한 이 해 5월 30일 이후, 오리올스의 모든 경기에서 팬들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장차 수립될 대기록의 시작이었다.

이 해에 오리올스는 립켄과 에디 머리, 짐 파머 등을 앞세워 시즌 막판까지 포스트시즌 진출을 노렸으나, 결국 브루어스에 밀려 지구 2위에 만족해야 했다. 37세의 노장 파머는 15승을 올리며 분투하였으나, 팀 운명이 걸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브루어스의 타선을 막지 못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1983시즌을 앞두고, 립켄은 새로 지휘봉을 잡은 조 알토벨리에게 자신의 포지션을 유격수로 고정시켜 줄 것을 요구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립켄은 이 1983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그는 이 해에 121득점과 211안타를 기록하여 이 두 부문에서 리그 1위에 올랐으며, .318의 타율과 27홈런, 102타점을 올렸다. 또한 어시스트와 더블플레이 부문에서도 그는 아메리칸 리그의 다른 모든 유격수들을 앞섰다. 결국 그는 이 해에 팀 동료 머리를 누르고 리그 MVP가 되어, 연속된 2년 동안 신인왕과 MVP를 차례로 차지한 첫 선수가 되었다.

또한 오리올스는 전년도에 놓쳤던 동부지구 패권을 차지하였으며,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격파하여 4년만에 리그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월드 시리즈에서도 오리올스는 마이크 슈미트와 스티브 칼튼, 조 모건과 피트 로즈 등을 앞세운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5경기만에 제압하였다. 이로써 립켄은 월드 시리즈 우승과 MVP등극이라는 두 가지 영광을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1984년에도 립켄의 기량은 여전하였다. 그는 .304의 타율과 27홈런을 기록하였으며, 아메리칸리그 유격수 최다 어시스트 기록(583개)을 세웠다. 그러나 이 시즌에 팀 타력은 전반적으로 침체를 보였고, 결국 오리올스는 지구 5위에 그쳤다.

립켄은 1985년 4월에 발목 부상을 당했으나, 계속 출장을 강행하였다. 결국 그는 팀이 치른 161경기에 모두 출장하였고, 뉴욕 양키스의 리키 헨더슨에 이어 리그 득점 부문 2위를 차지하여 자신이 불필요하게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님을 입증하였다. 또한 그는 더블플레이와 풋아웃 부문에서 각각 3년 연속, 2년 연속으로 리그 수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오리올스는 이 시즌에 계속 부진을 보였다. 결국 알토벨리는 물러나야 했고, 위버가 다시 감독 자리에 올랐다. 시즌이 끝났을 때 오리올스의 위치는 지구 7개 팀 중 4위였다.

1986년은 오리올스에게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가 되었다. 오리올스는 73승 89패을 기록하며 지구 최하위의 불명예를 차지하였다. 립켄은 25홈런을 날렸고 또다시 리그 유격수 중 최다 어시스트를 기록하였지만, 혼자 팀을 지탱할 수는 없었다.

위버 감독은 1968년부터 1982년까지 15시즌에 걸쳐 오리올스를 이끄는 1978년을 제외한 어느 해에도 지구 3위(리그가 양대 지구로 나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었으나, 그가 1985년에 사령탑에 복귀했을 때는 오리올스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야구의 특성상, 형편없는 팀은 어느 감독이 맡아도 형편없는 팀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위버는 이 시즌을 마친 뒤 감독으로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그리고 후임은, 바로 '주니어'의 아버지 칼 립켄 시니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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