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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누가 이 막힌 가슴 뚫어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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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대중가요에 빈번히 등장하는 이 절규를 ‘공감의 정치’로 해갈한 사람은 570년 전 세종이었다. 세종은 알아차렸다. 백성들은 말을 해도 생각이 끊기고, 생각을 해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백성은 말하는 벙어리였다. 벙어리의 가슴엔 울(鬱)이 쌓이고, 울을 퍼내지 않으면 화(火)가 된다. 백성을 울화 속에 처박아 두는 것은 성학(聖學)의 도(道)가 아니었다. 이들이 쉽게 쓰는 문자, 훈민정음이 그렇게 창제됐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는 서로 통하지 아니할 새 어린 백성이 말하고자 해도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자 하니라.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날로 쓰메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자료 더미에서 문득 이 구절과 마주칠 때면 언제나 불꽃처럼 전율이 인다. 그것을 어찌 알았을까. 백성들의 마음에 고이는 생각에 성(聲)과 운(韻)을 부여해야 울화가 음악이 되고, 음악이 천도와 호응해서 정치가 된다는 것을. 대제학 정인지는 한글 창제 원리인 성운학의 이치를 “개 짖는 소리, 천둥번개가 우지끈 뚝딱하고 모기나 등에가 귀를 스쳐도 모두 다 옮겨 적을 만하니 하물며 사람 말은 말하여 무엇하리오”라고 아뢰었다. 이 스물여덟 자가 변화무쌍하게 조합되면서 백성들의 생각이 출구를 찾았고 멍울진 한(恨)이 문자에 실려 성리학적 덕치(德治)의 씨줄과 날줄로 스며들었다. 세종은 백성들의 막힌 가슴을 한글로 뚫어준 것이다.

 세종은 문자가 생각을 실어 나른다는 걸 어찌 간파했을까? 군마로 다스리던 시절에 세종은 어찌 한글 창제를 통치의 최고 목표로 삼았을까? 신숙주는 그 정치적 의미를 이렇게 대필했다. “소리를 살피어 음(音)을 알고, 음을 살피어 악(樂)을 알고, 악을 살피어 정사를 알게 되니, 훗날 보는 사람은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고. 이것이 훈민정음의 정치학이었다. 막힌 가슴을 한글로 뚫어주고, 한글에 실린 소리를 살펴 정사를 가리면 태평성대가 열린다. 이를 알면 ‘훗날 사람은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인데, 570년이 지난 오늘은 어떠한가? 저토록 바쁘게 뛰어다니는 대선 주자들은 백성의 가슴에 울화가 쌓이고 있음을 알고는 있는가, 막힌 가슴 뚫어줄 비방(秘方)이 있는가?

 삼남지방을 누비는 대선 주자들이 외치는 소리는 높고 거룩해도 아직 한결같이 가슴에 스며들지 않아 하는 말이다. 라디오방송 인터뷰에서 필자는 대선 주자들의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김갑수의 ‘출발 새아침’). 아직 통치관이 영근 것 같지 않은 안철수 후보보다 안철수를 앞세워 정치판을 갈아엎고 싶은 지지자들을 높게 평가한다고. 선량한 이웃 아저씨 같은 문재인 후보는 뭔가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도 헤어질 때 전화번호를 묻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박근혜 후보가 아버지와의 작별을 완결하려면 전경, 구사대와 맞붙어 싸운 성 밖의 사람들과 더 섞여야 한다고 말이다. 주관적 판단이겠으나 ‘차선을 고르는 선거’라는 유권자들의 자조는 주자들이 ‘세종의 예지’ 한 조각을 주지 못한 까닭이다.

 ‘어쩌다가 후보’는 기성 정당을 파괴하는 벙커버스터가 되겠노라 외치지만 아직 얼떨떨하고, ‘아바타 후보’는 빠르게 변신하고는 있지만 아직 유사품 혐의를 떨치지 못했다. 그런대로 포스를 풍기는 ‘공주 후보’는 말마따나 ‘몸뻬바지 입고 머리 풀고’ 장바닥에 풀썩 주저앉지 못한다. ‘서민들이 교감했음!’이라고 흔쾌히 반응하지 않는 이유다. 오천 년 이래 최고의 풍요를 누리는 이 시대, 서민들의 성운(聲韻)은 그러나 신음에 가깝다.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청년백수, 퇴직을 앞둔 베이비부머, 저소득층, 절대빈곤층과 고령층, 그리고 나날이 부도를 걱정하는 중소기업, 골목상권과 재래시장. 어디 그것뿐이랴, 하우스 푸어, 빈농과 영세어민의 비명소리가 매일 울화로 쌓이고 있다. 목을 죄는 생활고가 더 급한 이들에게 ‘혁신경제’(안철수), ‘사람이 먼저’(문재인), ‘대통합’(박근혜) 같은 큰 화두는 먼 곳의 잔치 소리로 들린다. 그러니 대책 없이 소탈한 싸이의 무료공연에 밤늦도록 흔들고 소리칠밖에.

 막힌 가슴 뚫지 못한다면 한국의 막힌 통로는 뚫을 수 있을까? 글로벌 위기가 한두 번은 닥칠 것이 분명한 향후 5년간 서민들을 보호할 가장 절실한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필자는 ‘위기관리 능력’을 꼽고 싶다. 일본이 독도에 전함을 파견하고, 중국이 이어도 부근에 동해함대를 배치한다면? 북한이 백령도에 포격을 가한다면? 그리스발(發) 재정위기가 유럽 경제를 망가뜨리고 빠른 속도로 동진한다면? 성장통을 심하게 겪을 중국이 갑자기 불황에 빠진다면? 세 후보가 국내정치 능력은 비슷하다 쳐도 이건 차원이 다른 얘기다. 유능한 참모를 등용하면 된다고? 인재등용을 포함해 최종 판단은 대통령이 한다. 우린 지금 막힌 가슴 때문에 한국의 명줄을 죄고 있는 글로벌 위기, 세계경제와 국제정치를 빠뜨리고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