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으로 눈돌리는 일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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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호 29면

“이 나라 사람들은 쉽게 부풀어 오른다. 그릇이 작아 쉽게 차오르기 때문이다. 식견이 얕고 가슴이 좁아 조그마한 일이라도 해내면 바로 천하가 자기 것인 양 우쭐댄다. 서양인은 싸운 뒤 악수를 하지만 이들은 3대에 걸쳐 복수하겠다며 이를 간다.”

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냄비근성’ 한국인 이야기가 아니다. 실은 루쉰(魯迅)의 아큐정전(阿Q正傳)이래 가장 통렬한 중국 비평서라는 보양(柏楊)의 추악한 중국인에 나오는 말이다. 역사가 유구하고 국토가 광대한 나라에 사는 중국인이 정작 넓은 마음이나 포용력과는 거리가 멀다는 자기비판이다.
이웃나라와 섬을 두고 다투는 중국이 걸핏하면 경제제재 카드를 들고 나오는 걸 보면 보양의 관찰이 맞지 않나 싶다. 올 들어 중국은 필리핀산 바나나, 일본산 공산품의 통관을 지연시켰다.

2010년에는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금지한 적도 있다. 중국에서 반일 시위 때 일본 기업의 제품·매장이나 현지 공장, 게다가 평범한 일본인이 공격받은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전하는 “중국은 1000명의 적을 죽이기 위해 아군 800명이 희생한다는 각오로 임할 것”과 같은 섬뜩한 글에서는 보양이 말하는 복수심을 보는 듯하다. 물론 국민성이나 민족성이 고정불변은 아니다. ‘게으르고 시간흐름에 무관심한 일본인’ ‘둔하고 굼뜬 독일인’ ‘지저분한 한국인’이란 말에 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던 시절도 있었다.

이번에 크게 당한 일본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2년 전 희토류 카드 앞에 백기를 든 뒤 무얼 했나 돌아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희토류 소식을 끈질기게 다루는 일본 언론에서는 끈기와 독기가 느껴졌다. 일본은 비축량을 늘리고 재활용하며 희토류가 필요 없는 전자부품을 개발했다. 희토류 광맥을 찾아 몽골·베트남·미국, 심지어 태평양 바닷속까지 뒤졌다.

섬 분쟁이 시작된 5월 이후 중·일 양국 증시는 내리막을 걷고 있다. 상호 투자도 가파르게 줄었다.
올 들어 8월까지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의 대중(對中) 투자가 줄어든 걸 메워준 게 두 자릿수로 늘어난 일본 기업의 투자였다. 중국 경기가 나빠지고 있는 시기에 그런 일본의 투자를 기대할 수 없다면 ‘차이나 리스크(중국발 위험)’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해양국가’ 일본이 손잡을 나라는 ‘해양국가연합’인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ASEAN)이나, 의회민주주의 나라인 인도라는 ‘대안론’이 일본에서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인구나 자원이 많아 시장 잠재력이 크고, 중국이나 한국과 다투는 역사·영토 문제가 없다는 점이 매력 포인트다. 16세기에 이미 중국 중심 질서에서 사실상 벗어난 섬나라 일본다운 발상이다.

한국은 교역에서 일본보다 대중 의존도가 높다. 그 자체로 차이나 리스크가 크다. 이어도를 탐내는 중국이 한국에 경제보복을 가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정경분리의 지혜가 절실한 때이지만 현실은 정경일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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